404화
아무리 봐도 화가 난 것 같았지만, 번개걸음 교수는 우레걸음 교수와 달랐다.
제국의 끝에서 끝까지 여행을 다니며 산전수전을 겪은 모험가의 연륜은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화난 사람한테 ‘정말 화난 거 아니지?’라고 물으면 가라앉으려던 화도 뻗치기 마련.
번개걸음 교수는 노련하게 화제를 돌렸다.
“아마 올 거다.”
“소환 마법사들입니까?”
“잠깐...”
번개걸음 교수는 손가락을 접으며 계산했다.
그 모습에 이한은 경악했다.
저걸 센다는 것 자체가 최소한 두 팀 이상 방문한다는 소리 아닌가!
‘쓰레기 같은 놈들!’
선행을 위해 찾아오는 사제들과 달리 마법사들의 방문은 의도가 너무나도 불순했다.
학생들의 실력을 확인하고 마법을 절차탁마하기 위해 찾아오는 것 아니겠는가.
지옥의 악마도 이 정도로 무정하진 않을 것이다.
“학생들의 마법을 보려고 방문하는 겁니까?”
“그렇겠지?”
“어떻게 사람들이 그럴 수가 있습니까?”
“...으응?”
번개걸음 교수는 이한의 분노에 살짝 당황했다.
이건 왜 화내는 거지?
“어쨌든 다음 주는 소환 마법사들일 거다. 그리고 너무 걱정하지 마라. 파라그라눔 길드처럼 미친... 아니, 실력 뛰어난 자들은 아니니까. 너희들보다 실력 떨어지는 마법사들도 제법 올 걸?”
다음 주에 있을 소환 마법사들의 축제, <볼츠만의 부름>은 고대의 위대한 소환 마법사 볼츠만을 기리는 축제이자 친목 모임이었다.
마법사들만이 모이는 축제는 제국의 일반적인 축제들과는 조금 달랐다.
평소에 서로 만날 일 없는 마법사들이 자신의 마법을 보여주고 평가받으며 절차탁마하는 자리.
하지만 진지하게 하려면 자존심을 걸 수도 있었지만, 가볍게 즐기려면 얼마든지 가볍게 즐길 수 있었다.
덕분에 실력이 떨어지는 마법사들도 생각보다 많이 참가했다.
에인로가드의 1학년 학생들이 학교 안에서는 무쇠대가리 취급을 받지 나름 제국의 최고재능들을 모아놓고 제국 최고 적통의 마법 의발(衣鉢)을 물려받는 곳.
당장 밖에서 독학하거나 성질 괴팍한 마법사 밑에서 혹사당하는 마법사들 중에는 1학년 학생들보다 실력이 부족한 경우도 많고 많았다.
이런 마법사들도 축제에 참가할 테니 파라그라눔 길드 같은 사태는 나오지 않을...
“밖에서 들어오면서 아무것도 안 갖고 올 거 아닙니까. 사제님들은 언제나 먹을 걸 갖다 주셨는데.”
“...일이나 마저 해라.”
“예.”
이한은 골렘을 조종하면서 작업 속도를 올렸다.
툴툴대면서도 점점 더 조종에 능숙해지는 그 모습은 번개걸음 교수도 감탄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뭐라고 중얼대는 거지?’
이한이 골렘 위에서 중얼대자 번개걸음 교수는 궁금해졌다.
아까 교수들이 조언하고 간 부분에서 깨달음을 얻고 추가적인 주문을 외우고 있는 것일까?
“소환 마법사들. 오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
“......”
골렘 조종에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다른 말을 하면서 능숙하게 조종하는 모습에, 번개걸음 교수는 경악했다.
* * *
고된 노동을 끝내고 탑으로 돌아오자 휴게실에는 미묘한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긴장된 침묵과는 달랐다. 어딘가 모르게 반성하는 분위기였다.
이한은 의아해하며 티질링 사제에게 물었다.
“무슨 일 있었나?”
“다들 반성하고 있습니다.”
“!”
보기 드물게 고성이 터져 나오며 서로 싸웠던 사제들.
그러나 역시 사제들은 다른 탑 학생들과 달랐다.
계속해서 열띤 토론을 진행한 끝에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배려하며 존중해주기로 한 것이다.
그 설명을 들은 이한은 감동했다.
‘사제들은 해골 교장의 독도 통하지 않는군!’
사실 이번 사제들이 싸웠던 건 해골 교장과 아무 상관이 없었지만 이한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면 이제 앞으로 나는 마음 편하게 교단에 대해 물어보면 되는 건가?”
“네?”
티질링 사제는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이한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닌가? 그... 반성했으니까 이제 신앙은 개인의 자유로...?”
“아닙니다. 이번에 불만이 생겼던 건 행운에 맡긴 방식으로 순서를 정해서라고 모두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방식을 바꿨습니다.”
“...어떤?”
“승자가 워다나즈 님에게 신앙을 권할 권리를 가지기로 했습니다.”
“......”
이한은 고개를 돌려 사제들을 쳐다보았다.
자세히 보니 그저 침묵하는 줄 알았던 사제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전략을 짜고 있었다.
-하필 <기하학과 산술>이 승부 종목이 될 줄이야.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시센자 교단의 사제님이 있잖습니까.
-평소에 다른 교단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는데, 시센자 교단의 능력에 감탄했습니다.
-하하, 쑥스러울 뿐입니다...
“???”
-저쪽에 시센자 교단이 있다고 하더라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맞습니다! 각자 정보를 공유해서 저들을 어떻게 이길지 이야기해봅시다.
-우리 교단은...
“......”
많은 사람이 참가하는 경쟁전에서 혼자만의 힘으로 승리하는 건 가능성이 낮았다.
영리한 이들은 보상이 좀 줄어들더라도 서로 모여서 협력하기 마련.
사제들은 뜻이 맞거나 교단의 성향이 맞는 이들끼리 모여서 적극적으로 전략을 짜고 있었다.
누가 봐도 해골 교장이나 좋아할 법한 광경이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네?”
이한의 말에 티질링 사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티질링 사제는 지금 모습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평소 자기 할 일에만 집중하던 사제들이 다른 사제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신앙에 대한 토론을 하고 있지 않은가.
사제들 본인들도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대화 주제에 즐거워하며 서로를 알아가고 있었다.
“난 들어가서 쉬어야겠군... 고맙다. 티질링 사제. 내일 보자고.”
이한이 시무룩해진 얼굴로 위로 올라가자 다른 사제들이 대화하던 걸 멈추고 물었다.
“워다나즈 님의 얼굴이 어두웠던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요?”
“아까 푸른 용의 탑 분들에게 들었는데 흰 호랑이 탑 분들이 일하는데 자꾸 귀찮게 굴었다고...”
“그런 안타까운 일이. 다음에 제가 흰 호랑이 탑 분들에게 가서 부탁을 드려보겠습니다.”
“저도 같이 가야겠습니다. 그런데 누구한테 들으셨습니까?”
“가이난도 님께서 말해주셨습니다.”
“기억해놓아야겠군요.”
다음 날, 분노한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가이난도를 발견하자마자 종이를 뭉쳐 만든 공을 집어던졌다.
* * *
“어느 마법이든 그렇지만, 소환 마법에 있어서 정교함은 특별한 미덕입니다. 뛰어난 소환 마법사들은 어떤 상황이든 통제할 수 있어야 하지요. 위대한 소환 마법사 볼츠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연으로 성공시킨 가장 난해한 소환 마법보다 계산으로 성공시킨 가장 쉬운 소환 마법이 더 가치 있다’. 그런 만큼...”
1학기 때 다뤘던 <종이 새> 소환 마법을 어떻게 더 발전시켜야 할지 이야기하던 밀레이 교수는 산만한 분위기에 눈썹을 치켜세웠다.
“다들 할 말이라도 있습니까? 라파드엘 학생. 말해보시죠.”
흑마법을 싫어하는 흑마법 전공생, 라파드엘은 대표로 불려지자 당황했다.
이한은 라파드엘과 눈이 마주치자 작게 조언했다.
-솔직하게 말씀드려.
밀레이 교수 성격상 잘못했다고 인정하면 해골 교장처럼 괴롭히지 않고 깔끔하게 넘어갈 터.
“소, 소환 마법사들이 정말로 오는지 떠들고 있었습니다.”
“......”
이한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걸 본 라파드엘이 당황해서 되물었다.
“이, 이렇게 하라고 한 게 아니었냐?”
“솔직하게 사과를 드리라고 했지 멍청한 놈아...”
“앉아도 좋습니다. 라파드엘 학생. <볼츠만의 부름> 축제 때문에 다들 신경이 쓰이는 모양입니다. 밖의 소환 마법사들이 학교에 방문하는데 다들 기대가 되는 게 당연하겠죠.”
‘기대가 되나?’
이한은 의아해했다.
적어도 이한과 이한의 친구들은 ‘아 또 외부에서 어떤 미친놈들이 와서 우리를 괴롭히려는 걸까?’하는 반응이었는데...
검은 거북이 탑 학생 중 한 명이 용기 있게 손을 들고 물었다.
“혹시 먹을 걸 들고 오십니까?”
“아닙니다. 그런 축제가 아닙니다.”
단호한 대답에 분위기가 술렁거렸다.
‘그럼 왜 오는 거야?’ ‘학교가 장난인가?’ ‘지금 위대한 에인로가드에 방문하면서 예의가 없는 거 아닌가?’ 같은 수군거림이 곳곳에서 들려왔다.
밀레이 교수는 가벼운 동작으로 학생들의 수군거림을 막고 말했다.
“모두의 기대를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지만, <볼츠만의 부름> 축제는 먹고 마시며 즐기는 축제가 아닙니다. 소환 마법사들이 서로의 마법을 보고 볼츠만을 기리는 축제입니다. 당연히 나는 학생들에게 많은 걸 기대하지 않습니다.”
“다행이다.”
“그렇지?”
“......”
이한은 친구들이 아직도 순진한 모습을 보이자 속으로 한탄했다.
교수가 ‘나는 기대 안 한다’라고 했을 때 그게 진심일 가능성은 없었다.
아무리 선량한 가르시아 교수여도 제자들이 실적을 내지 못하면 아쉬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건 교수라면 어쩔 수 없는 굴레였다.
“하지만 외부에서 온 마법사들 앞에서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는 건 학생들 스스로의 자존심을 상하게 만들 겁니다.”
“맞습니다!”
“알고 있다니 다행입니다. 소환 마법에 집중합시다. <종이 새 소환>은 얼핏 보면 간단해보여서, 많은 소환 마법사들이 한 번 배우면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곤 합니다. 하지만 제국의 뛰어난 소환 마법사들은 이 마법에 있는 잠재력을 결코 얕보지 않습니다.”
밀레이 교수는 허공에서 종이 새를 불러왔다.
종이 새는 강의실을 한 바퀴 돌았다. 밀레이 교수는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을 보며 말했다.
“골렘 수리는 강의가 끝나고 고민하도록.”
“...!”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얼굴을 붉히며 책을 덮었다.
골렘을 어떻게 하면 더 멋지게 만들지 궁리하다가 들킨 것이다.
‘원견(遠見) 마법이군.’
이한은 밀레이 교수가 종이 새의 시야로 강의실을 둘러봤다는 걸 깨달았다.
겉으로 보면 수수했지만 소환수의 시야와 자신의 시야를 연결해서 저런 식으로 탐색하는 건 매우 고등한 기술이었다.
소환, 시야 연결, 소환수를 비행시키면서 동시에 본체 의식 집중까지.
“꼭 이렇게까지 가지 않아도...”
-골렘의 무게중심을 고려해!
종이 새가 입을 열고 지저귀자 학생들은 깜짝 놀랐다.
원견 마법보다는 난이도가 낮지만, 저런 식으로 종이 새에 음성을 기록해서 전달하는 것도 매우 유용한 마법이었다.
‘저건 배우고 싶다.’
이한은 확실히 필요성을 느꼈다.
다른 탑 학생들에게 연락을 보낼 수단이 필요하긴 했던 것이다.
검은 거북이 탑 암시장 관리자들에게 현재 들어온 물가를 확인하거나 푸른 용의 탑 친구들이 몇 끼 굶었는지 확인하거나...
“...이런 방식도 있습니다.”
교수의 말이 끝나자 종이 새는 강의실 벽에 돌진해서 충돌했다.
그러자 종이 새는 번쩍이는 빛과 함께 사라지고 벽에는 마법 각인이 남았다.
종이 새를 매체로 사용해 벽에 마법을 새긴 것이다.
“뛰어난 마법사는 화려하고 난이도 높은 마법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쉬운 마법이라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효과는 천차만별. 다들 명심하도록 하세요. 자, 그러면... 종이 새를 각자 개량해봅시다. 이번 학기 동안에 여러분들이 어떻게 종이 새를 개량할지 한 번 보겠습니다.”
간단한 마법일수록 그 마법을 개조하는 마법사의 개성이 드러나기 마련.
밀레이 교수는 이번 학기에 학생들이 종이 새를 개량하는 경험을 통해 많은 깨달음을 얻길 바랐다.
‘목소리를 담으려면...’
이한은 일단 음성을 담아보기 위해 책을 뒤지기 시작했다.
밀레이 교수는 이한을 보고 단안경을 올리며 물었다.
“이한 학생은 뭘 할 겁니까?”
“목소리를 담아보려고 합니다만.”
“흠...”
“?”
밀레이 교수가 엄격한 표정으로 이한을 쳐다보자, 이한은 의아해졌다.
무슨 실수라도 했나?
“난이도를 올리는 게 좋겠습니다.”
“...교수님. 저 아직 이거 해보지도 않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