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5화
이한의 항변에 밀레이 교수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그 항의를 받아들였다.
“좋습니다. 한 번 해보도록 하세요.”
“......”
교수의 허락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한은 찜찜했다.
밀레이 교수가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이한의 일거수일투족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꼿꼿하고 엄격한 교수인 만큼 긴장이 안 될 수가 없었다.
‘다른 학생들은 연습할 때 이렇게 압박 주신 적 없지 않나?’
불공평한 대우에 불평하며 이한은 마법이 각인된 종이를 펼쳤다.
경지에 오른 대마법사들은 이러한 보조도구 없이도 손쉽게 소환수들을 즉석에서 만들곤 했지만, 대부분의 마법사들에게 사전준비는 생각보다 중요한 과정이었다.
시약, 스크롤, 아티팩트 등등.
<종이 새 소환>도 사전준비가 필요한 마법에 속했다.
마법진이 새겨진 스크롤이 없다면 마법사가 소환수의 구조를 하나하나 다 채워 넣어야 하는 만큼 어떻게 보면 이 마법진을 새겨 넣는 게 마법에서 가장 중요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슥슥슥-
깃펜이 유려하게 종이 위를 질주했다. <종이 새 소환>은 제국에서 매우 유명한 마법이었고 그 마법진도 제법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그걸 재현하는 건 마법사의 능력이었다.
마법진을 따라 그리는 것만으로 마법을 쓸 수 있었다면 수많은 마법사 지망생들이 왜 눈물을 흘리며 벽에 부딪치겠는가.
<종이 새 소환>의 마법진은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에인로가드의 학생들도 몇 번씩 실수하는 게 보통이었다.
‘...버두스 교수에게 고통 받은 게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된다고?’
그리고 이한은 놀랐다.
자신이 봐도 마법진이 너무 깔끔하게 잘 됐던 것이다.
1학기 때 그려보고 방학 동안 그리지 않아서 눈치 채지 못했는데...
언제 실력이 이렇게?
그걸 본 밀레이 교수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천천히 입을 떼었다.
“음성을 추가해봅시다.”
이한은 아까보다 더 신경을 기울여서 글자를 짜넣기 시작했다.
이미 완성된 마법진을 변형시키는 건 단순히 선과 글자를 추가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았다.
마법진의 원리를 이해하고 그에 따른 변화를 예상할 수 있어야 했다.
억지로 변경했다가는 종이 새가 목소리를 내뱉는 대신 마법사 본인을 찔러버릴 수도 있었다.
‘이쪽에 새겨넣고... 잉크를 좀 더 넣어야겠군. 회로가 제대로 돌고 있나? 여기서 합선이 일어날 테니 이건 떼어놓고...’
심혈을 기울여서 집중하다보니 이한은 자신이 완성한 것도 눈치 채지 못했다. 밀레이 교수가 먼저 말했다.
“완성했군요.”
“아. 예. 그렇지만 이게 제대로 작동하는지는 확인을 해봐야...”
“굳이. 난이도를 올리는 게 좋겠군요.”
밀레이 교수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돌아섰다.
그 동작과 동시에 이한이 만든 간이 스크롤이 종이 새로 피어올랐다.
피어오른 종이 새는 흰 호랑이 탑 학생들에게 달려가 큰 소리로 외쳤다.
-강의에 집중해!!!
“으아악!”
“집, 집중하고 있었어!! 뭐냐! 뭐냐고!”
갑작스러운 기습을 당한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깜짝 놀라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완벽한 개량이었다.
옆에 있던 푸른 용의 탑 친구들이 이한을 보며 말했다.
“난이도를 올리는 게 좋겠다.”
“난이도를 올리는 게 맞아 보여. 워다나즈.”
“...너희들은 저녁 없다.”
“!??!”
* * *
모르툼 교수는 아직도 좀 멋쩍었는지 이한이 오자 살짝 민망하다는 듯이 낯빛을 붉혔다.
“콜록. 골렘은 잘 조종했느냐?”
“예. 교수님. 오골도스 선배님은 괜찮으십니까?”
“괜찮은데... 보통은 네가 아니라 오골도스가 널 걱정해야겠지.”
선배가 되어서 후배한테 걱정이나 받고 있었지만, 모르툼 교수는 오골도스를 탓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적은 제자가 더 적어질 수도 있어서는 아니었다.
오골도스의 사정을 이해해서였다.
솔직히 다른 학생이 있었어도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을 테니까!
“오늘 강의는 암흑 원소죠? 뭘 준비할까요?”
2주 늦게 온 학생이 다른 학생들보다 더 강의 내용을 잘 파악하고 미리 준비까지 하려는 이상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모르툼 교수는 놀라지 않았다.
뭘 이제와서 새삼 이런 걸 가지고 놀라겠는가. 모르툼 교수는 평온한 마음으로 대답했다.
“다른 학생들은 암흑 원소를 계속 할 건데... 콜록. 넌 뼈 원소 마법을 할 거다.”
“??”
이한은 당황했다.
“어. 제가 진도를 빼먹은 게 있어서입니까?”
“아니. 넌 암흑 원소를 이미 쓸 줄 알잖느냐.”
“그런데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은데...”
모르툼 교수는 이한의 대답을 묵살했다.
대답해주기도 귀찮은 헛소리였다.
“콜록. 그보다 오골도스한테 들었는데... 너무 믿기 힘든 소리라서 직접 확인해보려고 기다렸다.”
“아. 구울의 왕 말입니까?”
이한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놀랍게도 그 궁전의 주인이 맞았습니다. 하는 짓과 달리 정말로...”
“...쿨럭, 쿨럭! 누가 그걸 궁금해했냐?”
모르툼 교수가 어이없다는 듯이 대꾸했다.
구울의 왕이 그 언데드 궁전의 주인이라는 건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누가 주인이겠는가?
“그럼 뭐가 믿기 힘드신 겁니까?”
“네가 언데드를 열 마리 넘게 소환해놓고 조종하기 힘들다고 뻘뻘대다가 한 마리 남기니까 그제야 조종 가능하다고 놀랐다고 하던데...”
“......”
이한은 오랜만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게 연습할 때 습관적으로...”
“콜록. 그게 습관일 수가 있나?”
아무리 연습 목적이라 하더라도 열 마리 넘게 소환한 순간부터 마법사는 자신의 마력이 고갈되기 직전의 아슬아슬한 위기감을 느껴야 했다.
숨만 쉬어도 언데드를 줄이고 싶어서 허덕일 텐데 얼마나 편안했으면 ‘줄이면 쉬워진다’는 단순한 진리를 잊고 있었단 말인가?
“어쨌든 한 마리로 줄이면 좀 더 쉬워진다는 걸 배웠습니다.”
“그건... 배워서 아는 게 아니라... 사람 새끼라면 당연히 아는... 콜록. 됐다. 어쨌든 본론으로 돌아오자.”
모르툼 교수는 제국 제일 바보도 아는 진리를 놓친 제자를 상냥하게 감싸줬다.
“교장 선생님도 동의했듯이 <고대 기초 사령술> 책을 네게 준 것은 고대 사령술의 진전을 이을 능력이 네게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 그렇군요.”
이한은 ‘절 괴롭히려고가 아니었습니까?’라고 말하려다가 말았다.
다른 친구들이 언데드 계에서 계약을 맺은 언데드들을 불러낼 때 이한은 해골 교장과 모르툼 교수에게 옛날 방식으로 언데드들을 소환해내라고 강요받고 있었다.
고대 사령술의 방식이란 곧 마법사 자신만의 능력으로 언데드를 짜올리는 것.
당연히 몇 배는 더 어려웠다. 옛날 방식이 옛날 방식인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콜록. 네가 어느 정도 조종에 익숙해졌고, 이런저런 강화도 시도할 줄 아니...”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은...”
한 마리로 합쳐야 원활한 조종이 가능한데다가 그 소환수의 강화도 다른 뼈들을 합쳐서 증폭시키는 정도의 단순한 방법만 가능했다.
뛰어난 흑마법사와는 아직 거리가 멀었다.
물론 모르툼 교수는 아까처럼 다시 무시했다.
“...이제 조금 더 진도를 나갈 때가 됐다. 콜록.”
원래 이번 학년의 목표는 언데드 소환수 하나 정도를 조종하는 거였지만, 이미 성공한 이상 가만히 있을 이유가 없었다.
모르툼 교수는 이한에게 원래 목표가 어디까지였는지 설명하는 대신 다음 목표를 가지고 왔다.
뼈 원소 마법에 능한 흑마법사를 다른 적들이 두려워하는 이유는, 뼈 원소 마법 특유의 끈질김 때문이었다.
다른 소환 마법과 달리 파괴 이후 빠른 복구가 가능하고 부서지더라도 그 부서진 잔해 자체가 다시 마법사의 수단이 되는 무한동력.
이런 기술에 능한 마법사에게 잘못 걸리면 마치 늪에 빠진 것처럼 끌려들어갔다.
“역으로 말하자면 뼈 원소 마법사들은 소환 이후에도 가만히 있지 않고 계속해서 마법을 시전해야 한다는 뜻이 되겠지.”
“이해했습니다.”
“콜록. 지금 쓸 수 있는 뼈 원소 마법들이?”
이한이 쓸 수 있는 뼈 원소 마법들은 조각 발사, 갑옷이나 방패 혹은 구속구 소환 정도였다.
다른 학파의 마법들을 모조리 챙겨듣는 1학년 학생이 쓸 수 있는 1~2 서클 뼈 원소 마법으로는 충분히 훌륭했지만 고대 사령술로 스켈레톤 전사를 불러올 수 있는 마법사에게는 약간 화려함이 부족했다.
“뼈 폭발 마법을 배우긴 해야겠군.”
뼈 안에 든 가스를 마력으로 점화시켜서 폭파시키는 뼈 폭발 마법은 가장 쉬운 방식으로 화력을 충족시킬 수 있는 만큼 전문적으로 다루려는 흑마법사들에게 있어서 필수적인 과정이었다.
“어? 그건 최소 3서클부터 시작 아닙니까?”
“그렇지?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한은 모르툼 교수가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되물어오자 질문을 포기했다.
저런 광기 어린 얼굴에 물어봤자 쓸모 있는 대답이 돌아오진 않으리라.
“콜록. 물론 쉽진 않을 거다. 네가 뼈 폭발 마법을 배울 때 가장 신경써야 하는 게 뭔지 알겠느냐?”
“흠. 마력의 연결 아닙니까?”
마법사와 물체가 멀리 떨어질수록, 그 물체에 직접적으로 마력을 작용시키는 건 까다로워졌다.
뼈 원소를 소환해서 다루는 마법사는 뼈를 멀리 쏘아보내면서 동시에 그 뼈에 마법을 시전할 수 있도록 통제해야 했다.
그러려면 마력의 연결을 더더욱 신경써야...
“틀렸다.”
“그렇습니까?”
“네가 신경 써야 할 건 폭발의 위력 조절이다. 콜록. 폭발이 너까지 다치게 하지는 못하도록.”
“......”
너무나도 현실적인 조언에 이한은 말문이 막혔다.
아니...
“여기 방어 마법진을 쳐놨으니, 이 안에서 연습하도록 해라. 마법진이 깨질 것 같으면 바로 부르고. 콜록. 귀찮으니까 공방은 절대 부수지 말아다오.”
“예...”
* * *
가이난도와 라파드엘, 이미르그는 도대체 안쪽에서 뭘 하고 있길래 아까부터 굉음이 꽝꽝 터져나오는지 의아해했다.
“이한이 고문받고 있는 건 아니겠지...?”
“야. 이 멍청한 황자야. 교수님이 대체 워다나즈를 왜 고문하냐?”
“멍청한 건 너지 이 자식아. 그럼 교장 선생님은 우릴 왜 습격하는데?”
“......”
“콜록. 다들 집중해라.”
교수의 말에 모두 화들짝 놀라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안에서 들리는 굉음은 계속해서 그들을 신경 쓰이게 만들었다.
“참. 교수님.”
라파드엘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모르툼 교수는 말해보라는 듯이 시선을 돌렸다.
“이번에 소환 마법사들이 방문한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저희가 해야 할 게 있습니까?”
소환 마법사들의 축제에 흑마법사들이 왜 신경을 쓰나 의아할 수도 있었지만, 둘의 영역은 생각보다 겹치는 편이었다.
흑마법의 영역 중 하나가 언데드 소환 아니던가.
당연히 축제에 참가하는 이들 중에는 흑마법사들도 있었다.
모르툼 교수 성격이라면 다른 소환 마법사들 앞에서 흑마법사들이 밀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으리라.
“콜록. 괜찮다. 신경 쓸 거 없다.”
“아. 그렇습니까?”
“그래. 그냥 마음껏 편히 즐겨라.”
라파드엘은 살짝 놀랐다.
교수가 축제 관련해서 상세한 지시를 내려줄 줄 알았던 것이다.
옆에서 가이난도가 핀잔을 줬다.
“넌 교수님을 뭘로 보고 그런 소리를 하냐? 지금 진도 나가야 할 마법이 얼마나 많은데 축제까지 신경 쓰시겠어?”
이미르그도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교수님의 자존심이 강하다 하더라도 굳이 소환 마법 축제까지 제자들을 보내서 증명하려고 하지는 않을...
“콜록. 거기서 증명은 워다나즈가 맡아서 할 테니까. 너희들은 놀고 있어도 된다.”
“......”
“......”
왠지 안쪽에서 들리는 굉음이 멈춘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