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1화
“그래도 힘이 많이 필요한 일은 골렘을 시키지 않습니까?”
자신의 말실수를 깨달은 이한은 화제를 부드럽게 전환시키기 위해 말을 돌렸다.
그러나 흑마법사들은 사교성 없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냉정하게 반응했다.
“아뇨... 굳이 골렘을...?”
“마력이 아깝지 않습니까? 에인로가드의 마법사분들은 골렘을 써서 하나?”
“그냥 돈 주고 일꾼들을 고용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하여간 흑마법사 놈들은 배려심이 없다.’
이한은 속으로 흑마법사들을 욕했다.
눈앞의 학생이 속으로 투덜대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흑마법사들은 질문을 이어나갔다.
“어쨌든 저희들은 골렘으로 잡일을 하지 않는데, 에인로가드에서 골렘으로 잡일을 하는 걸 보고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맞습니다. 골렘으로 잡일을 할 줄이야. 터무니없게 들리지만, 잘 생각해보면 이것만큼 효과적인 수련도 없지 않습니까.”
“그냥 이것밖에 방법이 없어서 한 겁니다만...”
이한은 정해진 시간 내에 일을 다 끝내고 식량을 구하려면 골렘밖에 답이 없었다고 설명을 시도했다.
그러나 흑마법사들은 다시 한 번 감탄했다.
“골렘 수련에는 그 방법밖에 없었다는 겁니까!”
“...아니. 잡일을 하고 식량 받아가는 데에는 그것밖에 방법이 없었다는 소립니다.”
흑마법사들은 이한의 추가 설명은 그냥 농담이라고 무시하고 자기들끼리 알아서 감탄했다.
“아차. 너무 놀란 탓에 저희 설명을... 저희는 이번 축제에 참가하기 위해 온 흑마법사들입니다. 흑마법사라고 해서 너무 놀라진 마십시오. 흑마법사들도 제법 소환 마법에 능숙한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괜히 이한이 ‘으악 흑마법사다!’하고 도망칠까봐, 흑마법사들은 서둘러 자신들이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부터 설명했다.
그러나 별 의미 없었다. 애초에 눈앞의 학생부터가 뛰어난 흑마법사였던 것이다.
“특히 저희는 골렘 연구를 전문적으로 하는데... 워다나즈 학생이 골렘 조종에 대해 어떻게 하는지 조금 들어보고 싶습니다. 흑마법사에 대한 소문들은 대부분 악의적인 헛소문이니까 너무 믿지 말아주시고...”
말 한 마디 할 때마다 ‘흑마법사는 사실 괜찮다’라고 해명하는 흑마법사들을 보니 살짝 짠했다.
‘간단하게 말해서 끝내야겠군.’
“이한도 흑마법 배우고 있어서 그런 거 자꾸 말 안 해도 되는데.”
듣고 있던 가이난도가 끼어들었다.
자꾸 흑마법사들이 이한을 무시하는 것 같아서 발끈한 것이다.
그러나 흑마법사들은 깜짝 놀라 되물었다.
“흑마법을 배우고 있으시다고요?”
“어? 네.”
“그, 그러면 흑마법사란 겁니까?”
“어... 어떻게 보면?”
“저 골렘도 설마 흑마법으로?!”
“그거까진 모르겠는데... 이한. 이한?”
이한을 부르던 가이난도는 움찔했다.
이한이 영구동토의 만년설보다 더 차가운 눈동자로 가이난도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 내가 뭔 실수했어?”
이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저녁 굶는 걸로 해결될까?”
이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럼 다음 날 아침까지??”
“됐고 넌 나중에 보자.”
두 끼 굶는 걸로 어떻게든 해결해보려던 가이난도는 울상을 지었다.
‘하여간 흑마법사들 때문이야!’
왜 소환 축제에 와가지고 이런 평지풍파를 만든단 말인가!
* * *
“무생물 소환은 이쪽으로!”
“생물 소환은 이쪽으로 와주십시오.”
“제출하신 서류와 비교 좀 해보겠습니다. 시약 주머니 열어주세요.”
밀레이 교수의 고학년 제자들, 에인로가드의 소환 마법 전공 학생들은 <볼츠만의 부름> 축제에 온 마법사들을 관리하기 위해 애썼다.
<볼츠만의 부름> 축제는 제국의 다른 커다란 축제들과 달리 마법사들만 모이는 작은 축제였지만, 어떻게 보면 그래서 더 위험한 면이 있었다.
일반인들이 있어도 사고를 치는 게 마법사란 족속인데 일반인들이 없으면 얼마나 사고를 치겠는가.
“여... 여기.”
“네겔렙 씨앗 세 통, 화평연초 한 통, 불의 정령이 갇힌 오각주 하나, 굴라칼만의 촉수... 잠깐. 굴라칼만의 촉수는 서류에 없었잖습니까. 뭡니까?”
“...이건 좀 봐주십시오. 더 강한 걸 소환하려면 필수적이란 말입니다. 굴라칼만의 촉수가 얼마나 강한 존재를 불러올지 생각해보면...”
“미치셨습니까?? 지금 저희 몰래 거대 바다괴물을 소환하려고 하신 겁니까??”
“아, 아니. 뭔 말을 그렇게 하십니까. 완전히 통제 가능한 건데.”
“시약 주머니 내려놓고 지팡이 바닥에 던져! 움직이는 순간 어디 한 군데는 부러질 줄 알아라.”
“왜... 왜 이러십니까! 에인로가드의 마법사라면 이 정도는 당연히 이해해 줄 줄 알았는데!”
“닥치고 엎드리지 못해?!”
“크윽! 왜 내 마법을...!”
에인로가드나 다른 마법사들을 속이고 위험한 시도를 하려던 자들이 발각되어서 끌려갔다.
그걸 본 소환 마법사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저런 사람들은 매년 나오는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축제에서 마법을 증명하려는 욕심은 이해가 가지만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마법은 그저 재해나 마찬가지일 뿐인데.”
“앗. 밀레이 님. 안녕하십니까.”
소환 마법사들은 밀레이 교수의 등장에 너 나 할 것 없이 존경이 담긴 인사를 표했다.
여기 모인 소환 마법사들 중에 전공이 겹치지 않는 사람들은 수두룩했다.
어떤 사람은 무생물 중에서도 자아를 가진 무구를 전문으로.
어떤 사람은 무생물 중에서도 거대한 골렘을 전문으로.
또 어떤 사람은 생물 중에서도 정령 계열 쪽 생물을 전문으로...
모두 각자 제각각의 전공을 갖고 있었지만, 그런 소환 마법사들 모두에게 존경을 받을 정도로 밀레이 교수의 실력은 뛰어났다.
마법사들 사이에서 스승의 위치를 새삼 다시 확인한 에인로가드 고학년들은 흐뭇한 눈빛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뛰어난 교수, 매년 들어오는 많은 신입생, 다양하고 흥미로운 커리큘럼, 학파의 밝은 미래.
소환 마법 학파는 에인로가드 내에서 흠 잡을 곳 하나 없는 정석적이고 모범적인 학파였다.
“1학년들 괜찮은 거 맞지?”
“듣기로는 괜찮은 것 같던데.”
“잘 해줘야 한다고. 스승님 아닌 척하셔도 은근히 실망하실 텐데.”
정리 도중 잠깐 쉬는 시간이 되자 고학년 학생들은 소곤거렸다.
1학년 학생들과 달리 몇 년 동안 밀레이 교수 밑에서 배운 선배들은 감정 표현이 적은 스승의 속마음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밀레이 교수가 엄격한 탓에 제자들의 성적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의외로 제자들에게 자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외부에서 온 마법사들 앞에서 1학년 학생들이 기대에 못 미치는 모습을 보이면 밀레이 교수가 속으로 얼마나 아쉬워하겠는가.
스승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고학년 학생들은 1학년들이 제발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길 빌었다.
“종이 쥐 아니면 종이 새겠지?”
“살짝 봤는데 종이 새더라.”
“아... 종이 새 어려울 텐데?”
“지금이라도 도와줘야 하나?”
“관둬. 괜히 역효과 난다. 들키면 징벌방이야.”
종이에 각종 비전을 써서 전해주려던 고학년 학생 하나를 다른 모두가 말렸다.
마법은 평소 꾸준히 연구하고 수련하는 노력에서 꽃이 피는 것이지, 그냥 남의 조언을 듣는다고 꽃이 피지는 않았다.
“그래도 괜찮은 1학년 있다던데? 워다나즈 가문이라고 하더라고.”
“워다나즈 가문! ...이어도 1학년은 정신없지 않나? 배가 등에 붙어서 마법이고 뭐고 공부할 정신도 없을 텐데.”
학생들은 자신들의 1학년 때를 떠올렸다.
솔직히 1학년 때는 공부보다 먹을 걸 더 많이 찾아다닌 것 같았다.
길가에 굴러다니는 잡초와 들풀들의 종류를 모두 외우고, 학교 근처에 나타나는 몬스터들의 생김새와 상대법을 모두 외우고, 마법 중에서 식량 확보에 도움 되는 마법들부터 필사적으로 익히고...
...우리 정말 마법 공부는 언제 했지?
“아. 워다나즈라면 그 1학년?”
“아는 사람이야?”
“...디레트하고 코홀티가 하는 말 듣긴 했는데, 뭔가 좀 이상해서. 코홀티는 몰라도 디레트가 헛소리 할 사람이 아니긴 하거든? 그런데...”
“뭔 소리를 들었길래? 사람이 아니라 변신한 드래곤이래?”
“일단 여러 학파 강의를 다 듣고 있다고 하더라.”
“저런.”
“왜 그런 미친 짓을?”
“가끔 스스로를 파괴하고 싶어하는 놈들이 있잖아.”
선배들은 놀라기보다는 딱하다는 듯이 반응했다.
마법사들은 여러 학파 강의를 못 듣는 게 아니라 안 듣는 거였다.
다 들었다가는 죽을 테니까!
“그래서 지금 살아있대?”
“학파 강의 다 수석 찍고 2학기 때도 같이 듣고 있다던데.”
“......”
“......”
공포 서린 침묵.
“...혹시 가르시아 교수님 친척이냐?”
“워다나즈잖아. 미친놈아. 어떻게 가르시아 교수님 친척이야.”
“말이... 말이 안 되잖아.”
선배들은 술렁였다.
여기 에인로가드가 제국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들을 모으는 곳이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1학년에 웬 괴물이 들어왔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소문이 아니라 진짜 괴물이네.”
“그래도 어떻게 보면 다행인데? 저런 녀석이 1학년에 있으면 스승님이 실망하진 않으실 거 아냐.”
“맞아. 소환 마법 실력은 믿을만한 녀석 맞지?”
디레트와 코홀티에게서 말을 전해들은 고학년 학생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건 그런데...”
“왜? 뭐야, 아직 안 한 말 있어?”
“걔가 그러니까 1학기 때 서리거인의 왕이 소환됐을 때...”
서리거인의 왕 사건부터 시작해서 방학 때 있었던 일들까지.
제법 축소되고 요약된 사건이지만 선배들의 인상은 일그러졌다.
“...너 코홀티한테 속은 거야.”
“그 자식 허풍이 좀 심하잖아.”
“그, 그런가??”
말을 전한 학생도 애초에 긴가민가했기에 점점 목소리가 약해졌다.
역시 너무 허황된 느낌이었...
“잠깐. 저기 왜 흑마법사들이 모여있지?”
“혹시 모르니까 확인해보고 올게.”
“그래. 괜히 이상한 언데드 소환하겠다고 고집 부려도 절대 허락해주지 마. 강한 놈이라도 소환되면 일 귀찮아지... 어엇??”
“어??”
말을 하던 소환 마법 학생들은 당황해서 머뭇거렸다.
흑마법사들 사이에 1학년 학생이 있었던 것이다.
...너 왜 거기에 있냐!?
* * *
“햐... 정말 신기합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한이 골렘을 조종하는 걸 본 흑마법사들은 감동의 시선을 보냈다.
저렇게 세세한 조종이 가능하다니.
“아무리 마력을 많이 소모한다고 하더라도 그냥 생으로 마력을 소모하시지는 않을 텐데, 어떤 방법으로 마력을 절약하시는 겁니까?”
“...그냥 생으로 마력 소모하면서 쓰는 건데요.”
“보니까 이 골렘의 코어는 꽤 손상이 되어 있는 상태인데 어떻게 움직이고 계시는 겁니까?”
“...코어가 손상되어 있었습니까!?”
“......”
흑마법사들은 이 학생한테 감탄해야할지 어이없어해야할지 몰라서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골렘을 조종하는 모습은 경지에 오른 능숙한 흑마법사 같은데, 갖고 있는 지식은 배운지 몇 년 안 된 신참 흑마법사 같았다.
“다들 뭐하고 있나?”
웅성거리는 사이 다른 곳에 있던 마법사들이 다가왔다.
그 모습에 흑마법사들은 인상을 찡그렸다. 소환 마법사 중에서도 골렘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이들이었던 것이다.
같은 학파 내에서도 같은 연구주제를 가지면 경쟁이 붙는데, 다른 학파라면 더더욱 그 경쟁이 치열했다.
“저리 가라. 남의 골렘 염탐하지 말고.”
“하. 내가 흑마법으로 불러낸 골렘 같은 걸 염탐해서 뭐하겠나? 순수한 소환 마법만으로 충분한데.”
“충분하기는 무슨. 그렇게 충분해서 저번에 불러낸 골렘이 마법 한 방에 다리가 날아갔나?”
“그... 그건 기동성 때문에 장갑을 덜어내고 재료를 바꿔서 일어난 일시적인 현상이지! 신성 마법 한 번이면 자빠져서 구르는 네 골렘이나... 어어?? 저, 저건 뭐냐?”
골렘 소환 마법사들은 이한이 골렘을 조종해서 잡일을 하는 걸 보고 경악했다.
대체 저 흑마법사들이 무슨 짓을 했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