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4화
사도(邪道)가 왜 정도(正道)를 이길 수 없는지 새삼 느끼며 이한은 시선을 돌렸다.
강의실 안에 들어온 학생들은 바로 춤을 연습하지 않고 다들 구석 의자에 앉아 잔을 들기 시작했다.
“?!”
이한은 경악했다.
뭐지?
‘교수님한테 반항하는 건가?’
그러나 크린발 교수는 건방지게 반항하는 학생들을 징벌방에 보내는 대신, 아주 조심스럽고 친절한 손놀림으로 직접 내린 커피와 차를 따라주었다.
“요... 요네르. 대체 이게 무슨?”
“아. 교수님께서는 ‘춤은 억지로 춰봤자 좋지 않다’라고 생각하셔.”
요네르는 의자를 끌고 와서 앉으며 말했다.
크린발 교수는 추고 싶지 않은 학생한테 억지로 춤을 강권하는 걸 싫어했다.
춤이란 무릇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것.
진정 춤을 추고 싶을 때 추지 않는다면 그건 춤이 아니었다.
“...????”
이한은 여기가 에인로가드인지 아니면 바깥 마을 주점인지 헷갈렸다.
‘아니 에인로가드에서 저런 소리를?’
“춤 추기 싫은 학생은 강의 시간 동안 뭐하는데?”
“어? 앉아서... 구경?”
“......”
이한은 학생들을 둘러보았다.
놀랍게도 요네르의 말대로, 학생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익숙한 모습으로 떠들고 있었다.
뿌득!
“방금 이 갈았어?”
“잘못 들은 거겠지. 어쨌든 요네르. 남들은 놀아도 나는 지금 1학기를 놓쳤거든.”
이한은 밀린 진도를 빠르게 따라잡으려고 했다.
다른 강의라면 진도가 밀렸어도 솔직히 어떻게 따라잡을 자신이 있었지만 춤과 사교는 이야기가 달랐다.
계속 관심을 안 뒀던 만큼 이한이 알고 있는 춤과 예법, 사교술은 그리 많지 않았다.
춤은 저번 방학 때 속성으로 배운 게 전부였고, 예법이나 사교술은 워다나즈 가문에서 배운 정도가 전부였으니...
“시험 때 춤 몇 가지를 평가하시지? 지금 유행하는 춤이 대충...”
“교수님께서 그렇게 철저하게 하나하나 따지지는 않으시는데.”
이한이 뭔가 오해하는 것 같아서 요네르는 말리려고 했다.
크린발 교수는 정말로 저렇게 빡빡하게 평가하지 않았던 것이다.
맨날 하는 소리가 ‘춤이란 무엇인가’ ‘얼마나 많은 춤을 출 수 있는지가 춤꾼을 정하는 게 아니라 얼마나 즐거운 춤을 출 수 있는지가 춤꾼을 정한다’ ‘만 가지 춤을 출 줄 아는 춤꾼보다 한 가지 춤을 만 번 추는 춤꾼이 아름답다’였는데...
“일단은 알겠어.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은 알려줄...”
“교수님!! 교수님!!”
둘이 대화하는 사이 저기 앞에서 크린발 교수와 마법사 카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가이난도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무슨 일로 그렇게 부르는 겁니까, 가이난도 학생? 무슨 즐거운 일이라도 생각났나요?”
“이한은 제가 가르쳐주겠습니다!!”
“좋은 의욕입니다!”
크린발 교수는 일단 학생이 무언가 의욕적으로 하는 말이라 무의식적으로 칭찬했다가 멈칫했다.
“잠깐. 이한 학생은 꽤 대단한 춤꾼이라고 들었는데 가르치시려구요?”
“?”
듣고 있던 이한은 멈칫했다.
어디서 그런 오해가?
‘뭐지? 흰 호랑이 탑 놈들이 나 엿먹으라고 헛소문을 냈나?’
“그래도 강의를 못 들어서 놓친 춤들이 있지 않겠습니까! 제가 가르쳐주겠습니다!”
“아니... 나 그냥 요네르한테 배우면 안 되나?”
이한은 불렀지만 가이난도는 무시했다.
아무리 봐도 객관적으로 가이난도 본인이 요네르보다 훨씬 더 뛰어난 춤꾼이었던 것이다.
“...좋습니다! 꼭 배우는 게 없더라도 우정은 훌륭한 거죠. 한 번 가르쳐주도록 하세요!”
가이난도가 신이 나서 쪼르르 달려오자 이한은 갑자기 불안해졌다.
크린발 교수의 말에서 희미한 진실의 파편이 느껴졌던 것이다.
‘이 자식 춤 실력이 별로 좋아보이진 않는데...’
의심쩍은 눈빛으로 가이난도를 쳐다보던 이한은 일단 참아주기로 했다.
적어도 이한보다는 강의를 많이 들었고 나름 저렇게 나서는 걸 보니 가르칠 자신이 있어서 아니겠는가.
뭐든지 배울 점은 있으리라.
* * *
가이난도가 이한의 발을 열세번째로 밟자 이한은 가이난도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배우기는 무슨!
퍽!
“야. 저리 가서 과제나 해.”
“힝.”
옆에서 보고 있던 다른 탑 학생들은 감탄했다.
“열 번을 넘기다니. 젠장. 다섯 번 밟으면 폭발할 줄 알았는데.”
“워다나즈가 같은 탑한테는 은근히 약하다니까. 자자. 내놔. 열 번 넘겼잖아. 내기는 내 승리다.”
“하! 저런 식으로 워다나즈한테 복수하는 방법이 있었군.”
“다음에 같이 춤 신청 할 사람 있냐? 나도 좀 밟아보자.”
“......”
이한이 고개를 돌리자 떠들던 학생들은 시선을 깔았다.
크린발 교수는 진심으로 미안해하며 말을 걸었다.
“정말 미안합니다, 이한 학생! 가이난도 학생이 스텝은 서툴러도 재능이 있어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그, 그렇군요.”
이한 안에서 크린발 교수의 평가가 조금 내려갔다.
“그래도 이한 학생이 소문처럼 뛰어난 춤꾼이란 걸 보게 되어서 기쁘네요!”
“제가 말입니까?”
“네!”
“출 줄 아는 춤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만...”
“춤의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한 학생! 중요한 건 여기에요.”
크린발 교수는 가슴을 탕탕 두드리더니 발뒤꿈치로 바닥을 울렸다.
“마력량 말입니까?”
“당연히 마음을 말하는 거죠! 그리고 이한 학생은 춤을 향한 진지한 마음을 이미 갖고 있습니다!”
이한은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물론 크린발 교수가 학생들의 잠재력을 믿어주는 선량한 교수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대체 이한이 뭘 했다고 저렇게 고평가를?
“교수님께서는 왜 그렇게 생각을...?”
“알아드네 님한테 들었죠!”
“!”
이한은 그제야 크린발 교수의 가문이 그린벨 가문이라는 걸 떠올렸다.
방학을 보낸 그랑덴 시의 전통 있는 가문.
같은 가문이라면 방학 때 있었던 일들을 일부 전해 들어도 이상할 것 없었다.
‘잠깐. 뭔가 이상한데.’
떠올렸지만 의문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양심적으로 이한은 방학 때 한 일들을 모두 부정하지는 않았다.
구울의 왕을 토벌하고 기사들을 구해주고 바실리스크를 퇴치하고 했던 일들은 전부 있었던 일이 맞았다.
그런데 이한이 춤으로 뭔가 한 적이 있었나?
‘그런 건 없었는데?’
“교수님. 아무리 생각해봐도 저는 방학 때 춤을 춘 적이 거의 없었는데요.”
“이한 학생, 춤은 중요하지 않아요. 춤은 어디까지나 진심을 전하는 방법이죠!”
“아니 그러니까 춤을 춘 적이 없...”
“하지만 그랑덴의 사교계에 발을 담고 있는 분들은 이한 학생을 다시 초대하고 싶어하고 있어요! 이런 초대를 거절할 생각인가요? 그들을 실망시킬 생각이에요?”
이한은 무심코 ‘예’라고 대답하려다가 간신히 정신줄을 붙잡고 교수가 한 말을 생각해보려고 애썼다.
‘무슨...?’
크린발 교수는 이한을 위해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아산의 형과 누이인 달카드 가문의 두 쌍둥이, 만났던 황족들, 아프하 교단, 메이킨 가문의 요아넨, 신세를 졌던 기사들 등등.
이 사람들이 한 명씩만 붙잡고 했던 일들을 이야기해도 소문은 금세 퍼져나가게 되어있었다.
“소문이 많이 난 건 알겠습니다만... 그게 춤하고 딱히 상관은...”
“이한 학생. 진짜 춤꾼은 춤을 추지 않아도 사람을 사로잡아요!”
“그게 무슨 궤ㅂ...”
“그런 점에서 이한 학생은 지금 아주 잘하고 있는 거죠! 춤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먼저 생각하는 겁니다. 그게 진짜 사교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사교계에 초대 많이 받으면 뛰어난 춤꾼이라고 주장하는 교수의 논리에 이한은 정신이 혼미해졌다.
“...알겠습니다.”
이한은 일단 한 발 물러서서 따로 춤을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크린발 교수는 이한을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이한 학생. 내가 이한 학생을 위해서 과제를 내주겠어요! 이한 학생을 부르는 모임에 나가서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오세요! 제 귀에 이한 학생의 명성과 칭송이 들리도록 말이에요!”
‘세상에, 볼라디 교수가 그리워지고 있군.’
이한은 교수의 터무니없는 과제에 경악했다.
“그냥 강의실에서 춤 동작 외우고 연습하면 안 됩니까?”
“춤은 그런 게 아닙니다! 그리고 이한 학생의 춤은 지금으로도 충분해요. 중요한 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겁니다!”
“맞아. 워다나즈. 춤은 기술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거야.”
“기술은 충분해! 넌 직접 증명을 해야 해, 워다나즈!”
옆에서 크린발 교수의 춤 이론에 감화된 친구들이 눈치 없이 끼어들었다.
그리고 이한의 눈빛을 마주하고 움찔했다.
“아... 아니. 증명하기 싫으면 어쩔 수 없고...”
“맞, 맞아. 사실 지금도 마음을 충분히 움직이고 있는 것 같긴 해.”
* * *
“후... 방드르. 잘 지냈나?”
“물론이지. 넌 안색이 좋아 보이지 않는데.”
“그거야 다들 그렇지. 언제나 암시장을 관리하느라 고생이 많군. 돼지고기 한 덩이, 호밀빵 두 묶음만 주겠나?”
주말.
검은 거북이 탑 암시장에 사제들 식사 준비를 위해 찾아온 이한은 한숨을 쉬며 술병을 내밀었다.
나름 단련이 되어 있던 다른 강의들과 달리 새로운 강의를 만난 충격이 아직도 얼얼하게 남아 있었던 것이다.
옆에서 잉크병과 종이로 물물거래를 하고 있던 흰 호랑이 탑 학생이 깜짝 놀라서 따졌다.
“잠깐, 워다나즈 놈 고기는 왜 저렇게 많아!? 우리도 똑같은 술병으로 교환했잖아!!”
“그야 너희하고 교환할 때의 나는 방드르 놈이었고 워다나즈하고 교환할 때의 나는 암시장을 관리하느라 고생이 많은 방드르였으니까. 알겠냐?”
“뭐 이런 쪼잔한 놈이...!?”
둘이 다투거나 말거나 거래를 끝낸 이한은 종이로 포장을 마친 다음 돌아갈 준비를 했다.
“워다나즈.”
“!”
드워프, 아니, 드워프처럼 보이는 엘프 학생인 살코가 이한을 작은 목소리로 불렀다.
딱 봐도 은밀하게 할 이야기가 있는 것 같아서 이한도 주변을 확인하고 걸어갔다.
“무슨 일이지?”
“쓸만한 정보가 있다. 흰 호랑이 탑 놈들이 이번 주말에 탈출을 시도한다고 하더군.”
“그래?”
이한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원래 에인로가드 학생들은 가만히 있으면 탈출하고 싶고, 그러다가 징벌방에 들어가면 좀 가라앉고, 또 시간 지나면 다시 탈출하고 싶어하는 존재였다.
햄스터가 우리에서 본능적으로 빠져나가려고 하듯이 에인로가드 학생들도 본능적으로 탈출을 시도하는 것이다.
“솔깃하지 않나? 그 놈들이 무슨 길을 찾았는지?”
“...아. 나하고 같이 털자고?”
“당연하지. 그럼 내가 널 왜 불렀겠나?”
살코는 어이없다는 듯이 이한을 쳐다보았다.
바쁜 워다나즈를 불러서 수다를 떨기라도 하겠는가?
당연히 공적인 이유가 아니면 부르지 않았다.
‘뭘 당연해 미친놈아...’
이한은 속으로 살코를 욕했다.
누가 들으면 이한이 전문 강도라도 되는 줄 알 것 아닌가.
“난 이번에는 됐다.”
“뭐!?”
살코는 진심으로 놀랐다.
그 맹수 같던 워다나즈가 양보할 줄이야.
“어디 아픈 거냐? 혹시 부상이 심한가??”
“...그런 게 아니라, 해야 할 일도 많은데다가 흰 호랑이 탑 놈들이 가져왔던 정보들이 워낙 허술했던 게 많았잖나.”
“으음!”
물론 이한은 첨탑 마굿간을 통해 잠시 외출을 할 생각이었기에 저런 식으로 말한 거였지만, 그래도 제법 설득력이 있어서 살코는 멈칫했다.
확실히 1학기 때 흰 호랑이 탑 놈들만 믿고 따라갔다가 피를 본 경험들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런가? 확실히 그 놈들은 좀 멍청하긴 했지... 고맙다. 워다나즈. 한 번 생각해보도록 하지.”
“그래. 신중하게 판단해라.”
“알겠다. 만약 생각 바뀌어서 같이 털고 싶어지면 연락하고.”
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밤중이라도 상관없으니까 생각 바뀌면 꼭 말해라.”
“...안 턴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