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5화
거래를 끝내고 돌아온 이한은 일을 키우지 않고 조용히 할 일들을 하며 외출을 준비했다.
사제들 식사를 만들어서 대접하고, 이번 차례 승자의 교리 강의를 듣고(놀랍게도 사제들이 이번 차례에 고른 대결 종목은 격구였다), 남은 시간에 공부하고 과제 미리 하고...
그리하여 자정을 넘기고 새벽 두 시가 되었을 무렵.
이한은 아무르 마구간 앞에 도착해있었다.
“행운을 비오.”
“언제나 감사합니다.”
빠르게 사복으로 갈아입는 이한을 본 아무르는 새삼스럽게 생각했다.
‘1학년치고는 너무 노련한 것 같긴 하군.’
누가 저 학생을 에인로가드 신입생이라고 생각하겠는가?
* * *
객관적으로 봤을 때 이한이 외출한 횟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이한은 까다로운 에인로가드의 선배들도 ‘내가 직접 해도 저것보다 더 잘 할 수는 없겠군...’하고 인정할 정도로 노련하게 작업에 나섰다.
준비된 신입생.
그게 바로 이한이었다.
새벽이 찾아오고 마을의 가게들이 문을 여는 시간이 되자마자 이한은 빠르게 신작로를 내달리며 필요한 물자들을 닥치는 대로 구입했다.
쌀, 보리, 호밀, 렌틸콩, 양파, 감자, 완두콩, 마늘, 산양 젖, 올리브기름과 야자 기름, 복숭아, 포도, 멜론, 바나나...
‘기호품도 챙겨야지.’
몇 가지 통에 든 소스와 땅콩버터, 살짝 매콤한 토마토소스, 커피가루와 찻잎, 메이플 시럽, 납작한 쿠키와 초콜렛.
‘고기도 가져가는 게 낫겠지? 안에서 자체적으로 구하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까.’
부피가 있다 보니 많이 가져가지는 못하지만 절인 청어나 정어리, 내장을 제거한 양고기와 돼지고기 소시지, 소고기 통조림과 오리고기까지.
오전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한은 모든 물자 준비를 끝마쳤다.
머리카락 한 올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꽉꽉 채워진 상자들.
그걸 보자 이한은 갑자기 살짝 반성하게 됐다.
‘음. 너무 미친놈처럼 샀나?’
누가 보면 마법학교로 돌아가는 학생이 아니라 반란 터져서 피난 가는 사람처럼 보일 것 같았다.
“아직 쉬고 있었소? 아직 준비를 시작하지 않았으면 같이 차나 한 잔...”
늦게 일어난 아무르는 밖에 서있는 이한을 발견하고서 아직 준비를 시작하지 않았구나 싶었다.
그러나 문을 열자 산더미처럼 쌓인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다 끝났소?”
“예.”
“...그, 그러면 차나 한 잔 하러 갑시다.”
필로네 마을의 찻집, 작설(雀舌)의 문을 열고 들어간 아무르는 차를 두 잔 주문하고 앉았다.
이한은 풍경 좋은 창가에 앉는 대신 가장 안쪽으로 들어갔다.
칸막이가 있어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쉽게 얼굴을 보지 못하는 위치였다.
거기에 몸을 날리면 창문이나 뒷문으로 뛰어나갈 수 있기도 했다. 이한은 만일을 대비해 도주로를 세심히 확인했다.
“설... 설마 지금 누가 쫓아올까봐...?”
“그냥 조심하는 것뿐입니다.”
이한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지만 아무르는 수도에 투서라도 보내야 하지 않나 고민했다.
아무리 학교가 엄격해도 그렇지 주말에 몰래 나왔다고 추격자를 보내는 게 말이 되나?
‘워다나즈 학생이 오해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차와 다과가 나왔다. 이한은 쌀과 꿀을 빚어 만든 다식(茶食)을 어떻게 좀 챙겨갈 수 있을까 고민했다.
“저, 저기...”
“??”
한적한 찻집 안.
노골적으로 수상해 보이는 손님이 새로 들어오자 이한과 아무르 모두 움찔했다.
대도시인 그랑덴 시에서는 저렇게 망토로 온몸을 푹 덮어 가린 사람이 흔했지만, 여기 필로네 마을에서는 그렇게까지 흔하지 않았다.
“뭡니까? 혹시 요즘 마을에 이상한 손님들이라도 찾아왔습니까?”
“그런 일은 없었소만... 음... 아. 자기들끼리 계속 ‘우리도 골렘을 그렇게 고쳐야 한다’고 떠들어대던 이상한 사람들 한 무리가 마을에 찾아오긴 했소.”
“...죄송합니다. 그 사람들 축제 때문에 초대받은 마법사들입니다.”
“그렇소? 어, 흑마법사들도 있었는데?”
“흑마법사들도 초대받을 수 있죠...”
이한은 아무르의 편견을 고쳐줬다.
아무르는 흑마법사들도 초대를 받는다는 것에 놀라워했다.
“어쨌든 마법사들 말고는 온 손님이 없었다는 거죠?”
“내가 알기로는 그랬소.”
이한과 아무르는 경계심을 담아 새로 들어온 손님을 쳐다보았다.
복장부터 행동까지 누가 봐도 노골적으로 수상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해는 곧바로 풀렸다.
슥-
“제, 제가 여기 왔다고 절대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아주십시오. 혹시 이 목검을 맡길 테니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좀 받을 수 있습니까?”
“...너 거기서 뭐하냐 앙라고?”
이한은 흰 호랑이 탑 학생의 모습에 경악하며 물었다.
이한의 부름에 앙라고는 새된 비명을 지르며 넘어질 뻔했다.
“워... 워다나즈!”
“그래.”
“교수님의 명령을 받고 날 잡으러 온 거냐! 이 자식!”
“...아니. 난 먼저 나왔다.”
“!?!”
* * *
이한과 살코는 부정적으로 평가했지만, 놀랍게도 이번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찾아낸 탈출 경로는 진짜였다.
코끼리도 뒷걸음질 계속 치다보면 쥐를 밟는 법.
‘놀랍군!’
이한은 솔직히 놀랐다.
이 자식들이 정말 찾아낼 줄이야.
“어떤 방법을 썼지?”
“이번에 소환 마법 축제가 있었잖냐. 축제 때문에 상단 마차들이 제법 들어왔는데...”
정문이 개방되고 들어온 마차들.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그 마차를 노렸다.
사람들이 오고가는 만큼 감시가 비교적 허술할 테니까 그 마차 안에 몰래 들어가서 탈출하자!
정기적으로 쓸 수는 없지만 상황의 허점을 찌른 멋진 방법이었다.
‘난 저랬다가 반마법주의자들한테 습격당했는데 이 자식들은 운도 좋군.’
이한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잠깐. 너희는 한두명만 탈출했나? 너희 단체로 움직이잖아.”
“그래. 단체로 움직였지.”
“그런데 어떻게 마차에 숨어 탔냐?”
이한은 혼자 움직였기에 마차 하나를 잡아타는 데에도 별로 어려움이 없었다.
투명화 마법은 물론이고 사람 한 명 추가되는 건 크게 티가 나지 않은 것이다.
“...안 숨어 탔는데.”
“뭐?”
이한의 질문에 앙라고는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붉어져서 대답했다.
“안 숨어 탔다고.”
“그러면...?”
“...상단 직원들 잡아서 마차 안에 가두고 우리도 같이 탔어.”
“......”
“......”
이한과 아무르는 경악해서 앙라고를 쳐다보았다.
그건...
마차 강도잖아!
“너...”
“말하지 마! 워다나즈, 나도 알고 있다고, 젠장!”
“너 기사가 아니라 강도...”
“크흑.”
앙라고는 자기가 생각해도 부끄러워서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고! 상단 직원들을 어떻게 설득하는데! 그건 누구라도...”
말하던 앙라고는 이한을 문득 보고 말을 바꿨다.
“...적어도 우리는 방법이 없었다!”
‘이 자식 방금 나 쳐다보지 않았나?’
“그, 그래. 내가 뭐라고 할 처지는 아니지. 나였어도 그랬을 수 있으니.”
이한의 말에 앙라고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워다나즈가 저렇게 말해줄 줄은 몰랐던 것이다.
“기회는 한 번 놓치면 잡기 힘드니까... 어쨌든 너희들이 만만한 마차 하나씩 붙잡고 거기 끼어서 들어갔다는 건 알겠다. 그러면 성공한 셈인데 왜 이렇게 거지꼴이지?”
“그게... 그게 있잖아.”
“??”
“성문을 통과하고 나서 좀 나오고 나서... 그... 직원 분들을 풀어드렸거든.”
“...설마...”
이한은 다시 경악했다.
“설마 에인로가드 근처에서 그냥 풀어드렸나? 학교에서 멀어진 다음에, 오늘 있었던 일을 사죄드리고, 에인로가드의 가혹한 규칙 때문에 얼마나 괴로운지 동정심을 자극하고, 가문의 이름으로 보상하겠다고 약속한 다음에 풀어준 게 아니라?”
“...니가 같이 있지 그랬냐?”
앙라고는 입을 삐죽이며 투덜거렸다.
워다나즈가 같은 마차에 있었으면 얼마나 편했을까!
“아니, 흰 호랑이 탑 놈들 중에 이 생각을 할 놈이 한 명도 없었다고?”
“그게... 우리 마차에서만 풀어줬어.”
“......”
“......”
얌전히 듣고 있던 아무르가 이마를 탁 쳤다.
이래서 집단으로 행동하는 게 힘들었다.
언제나 한 명의 미꾸라지가 상황을 개판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건 비밀이다?? 아직 다른 친구들은 어느 마차에서 직원 먼저 풀어줬는지 모르거든...”
“자랑이다 이 자식아.”
이한은 한숨을 쉬었다.
상황을 모르는 다른 흰 호랑이 탑 학생들에게는 재난이 따로 없었을 것이다.
“풀려난 직원 분이 뭐라고 하시디?”
“풀어줘서 고맙다고 해서 괜찮은 줄 알았지. 우리도 미안하다고 했고.”
“눈빛이 혹시 분노로 타오르시지 않던?”
“응... 바로 정문으로 달려가서 우리 고발하시더라...”
“......”
그 다음 일은 듣지 않아도 짐작이 갔다.
정문에서 대기하고 있던 에인로가드 소환수들이 튀어나와서 마차를 추격하기 시작했을 테니, 흰 호랑이 탑 학생들에게는 기겁해서 사방으로 탈주하는 것밖에 방법이 남아있지 않았다.
대부분은 그냥 잡혔을 테고...
“넌 어떻게 나왔냐?”
“......”
“어떻게 나왔냐고?”
“...상, 상자 안에 숨어서.”
“상자 안에? 마차 상자 안?”
“어...”
앙라고는 얼굴을 더 붉히며 말했다.
어쩐지 앙라고한테서 강한 몰약 향기가 난다 싶던데 시약 상자 안에 들어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래. 잘 했다... 어쩌겠냐. 잠깐. 들켜서 걱정하는 건 알겠는데 왜 목검으로 물물교환을?”
“그야 은화가 없으니까 그렇지!”
앙라고는 진심으로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1학기 때 톡톡히 당한 학생들은 2학기 때를 위해 대비했다.
마법학교에 들어가면 은화고 금화고 압수당하는 만큼 외출 때 곤란을 겪기 쉬웠다.
그래서 몇몇 영리한 학생들은 필로네 마을에 있는 상단에 찾아가 증서와 함께 돈을 맡겼다.
그리고 더 영리한 해골 교장은 학기가 시작되자마자 학생들로 변장하고서 그 맡긴 돈을 싹 찾아가버렸다.
“...상단에 맡기고 안 들킬 거라고 생각한 거냐? 너하고 관계없어 보이는 곳에 맡겨놨어야지. 환금성 높은 아티팩트로 바꿔서 갖고 다니던가.”
“...큭...”
이한의 지적에 앙라고는 괴로워했다.
조금만 더 잘했으면...!
“됐다. 너도 고생이 많았다. 이건 내가 살 테니까 좀 마셔라.”
“정, 정말???”
“...그래.”
이한은 앙라고의 얼굴이 하도 딱해보여서 다식을 주문해줬다. 앙라고는 볼이 터져라 다과를 집어넣었다.
아무르는 옆에서 속삭였다.
“에인로가드 학생들이 다 똑같지는 않은 것 같소.”
“...하하. 학생들이 다 다르죠.”
이한은 앙라고가 처먹는 동안 생각에 잠겼다.
‘이 자식들 때문에 일이 괜히 찜찜해졌군.’
추적자들이 어디까지 쫓아올지 알 수가 없는 만큼 마음 편히 돌아다닐 수가 없는 것이다.
괜히 같이 잡혀갔다가는 그것만큼 억울한 일도 없었다.
그나마 오전에 필요한 준비를 다 해둬서 다행이긴 했지만...
‘은화를 더 확보해야 하는데.’
이한은 지금 어느 정도 금화와 은화를 확보해 둔 상태였지만, 에인로가드를 봤을 때 자금은 많을수록 좋았다.
오늘도 남은 시간 동안 상점들을 돌면서 이것저것 바꾸고 하려고 했는데 괜히 찜찜해진 상황.
해골 교장의 데스나이트들이 대기하고 있기라도 하면...
“혹시 마법사 님 아니십니까?”
“!?”
이한은 앙라고와의 대화로 방심했다는 걸 뒤늦게 알아차렸다.
바로 앙라고의 뒷덜미를 잡고 앞으로 밀어낸 다음 뒤쪽 탈출로로 빠져나갈 준비를 했다.
그러나 그럴 필요는 없었다. 상대는 아는 얼굴이었다.
저번 방학 때 같이 의뢰를 했던 모험가, 구본과 비지덱.
둘은 매우 반가운 얼굴로 이한을 반겼다.
“마법사 님 맞으시군요! 그런데... 앞의 분은... 왜...?”
“손이 미끄러졌습니다.”
이한은 앙라고의 뒷덜미를 놓아주고 손을 탁탁 털었다. 앙라고는 이한을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