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6화
불려온 버두스 교수는 멀뚱멀뚱 해골 교장을 쳐다보았다.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전혀 모르는 태도에 해골 교장은 한숨부터 쉬었다.
비블레, 비블레... 내가 몇 번 말했나?
“뭘?”
최소한의 준비만 하라고. 내가 자네의 연구를 방해하려는 게 아니야. 다만 기본만 하자는 거지. 응?
“준비 열심히 했는데?!”
버두스 교수는 억울하다는 듯이 반문했다.
해골 교장은 한 번 더 참고 말했다.
보통 내가 최소한의 준비를 하라고 했을 때는... 1학년 제자를 부려먹으라는 게 아니야.
“하지만 다른 놈들은 머저리들인데?”
버두스 교수가 말하는 ‘다른 놈들’은 이른바 버두스 교수의 제자들이었다.
부여 마법을 배우는 이한의 선배들!
원래라면 이 선배들이 버두스 교수의 일을 도와서 강의 준비나 후배들을 가르쳐줘야 했지만...
알다시피 제국 마법계에서 보통 제자는 스승을 닮기 마련이었다.
버두스 교수 같은 스승 밑에서 부여 마법을 계속 하겠다고 남는 제자들은 당연히 버두스 교수 비슷한 학생일 수밖에 없었다.
-교수님이 뭘 하시는진 모르겠고 난 내 아티팩트를 만들겠다.
-교수님이 징벌방에 가셨다고? 어쩐지 의자가 남더라. 그럼 이 의자는 내가 써야겠군.
버두스 교수도 딱히 제자들에게 애틋한 존경심을 기대하지 않는 만큼 이들의 관계는 전통적인 사제(師弟) 관계보다는 그냥 같은 공방 쓰는 마법사들 수준이라고 봐야 했다.
사실 그보다 더 심했다. 같은 공방 마법사들은 누가 한 명 사라지면 최소한 관심은 가져줄 테니까.
그런 선배들이 일을 도와줄 리가 없었다. 버두스 교수가 부르면 그냥 대답도 없이 무시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머저리가 아니라 자네가 그렇게 가르쳐서 그렇지.
“내가 어떻게 가르쳤든 머저리가 아니라면 알아서 잘 했을 거야. 워다나즈를 보라구.”
......
해골 교장은 오랜만에 두통이 올라오는 걸 느꼈다.
이한 보고 ‘역시 내 가르침은 틀리지 않았다’하고 확신하는 볼라디 교수나, 이한 보고 ‘역시 알아서 잘 하는 걸 보니 다른 머저리들 잘못이네’하고 확신하는 버두스 교수나 정말...
이런 작자들은 가만히 내버려두고 쓴맛을 보게 해야 하는데 운 좋게 미친 제자 한 명 만나서 의기양양해하는 꼴이 몹시 얄미웠다.
닥치고 2학년 이상 준비는 자네 혼자서 하게.
“워다나즈도 할 능력 되는데...”
나도 아네. 보이니까.
“근데 왜?”
자네가 제자한테 맡기고 편해지는 꼴은 도저히 못 봐주겠어서.
해골 교장은 솔직하게 말했다.
버두스 교수는 어떻게 그런 나쁜 생각을 할 수 있나 싶어서 해골 교장을 쳐다보았다.
“교수님. 자꾸 다른 곳 가지 마십시오. 제가 그런다고 혼자 준비할 것 같습니까? 빨리 시약... 어. 교장 선생님. 뭐하십니까?”
너한테 고학년 강의 밑준비 시키는 거 하지 말라고 전하고 있다.
“하하. 농담하지 마십시오.”
이한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그 태도에 해골 교장은 자신의 행동을 아주 조금 반성했다.
* * *
“어?”
“이상하다?”
부여 마법 듣는 학생들은 평소와 다른 강의실 모습에 놀랐다.
각 자리마다 책이 미리 준비되어 있고, 마법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마법진이 준비되어 있고, 마법을 테스트하기 좋은 시약들과 금속들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학생들은 논리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다른 강의실에 들어왔나?”
“교수님 저기 계시는데?”
비버 수인족이 흔한 수인족은 아니었다. 학생들은 혼란스러워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워다나즈. 혹시 무슨 상황인지 알아?”
언제나 이런 상황에서 소식이 빠른 워다나즈였다. 친구들은 혹시나 뭐라도 알까 싶어서 질문을 던졌다.
이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오늘 부여 마법 강의는 마법진 각인으로 새기는 게 아닌, 주문으로 직접 부여하는 강의야. 난이도가 뛰는 만큼 보조 마법진, 참고 서적, 그리고 연습용 재료들이 준비되어 있는 거지.”
물체에 마법진으로 직접 각인을 새기는 방식은 복잡한 마법을 준비하는 마법사들의 수고를 덜어주는 친절한 친구였다.
당연히 주문을 외워서 부여하는 마법은 난이도가 크게 올라갔다.
마법진으로 하나씩 새기는 마력 구조를 마법사가 직접 주문과 함께 짜내야 하는 만큼 더더욱.
“그렇군... 잠깐. 워다나즈. 넌 이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냐?”
“워다나즈잖아. 보면 알겠지.”
“내가 준비한 거다.”
“......”
“......”
“내가 준비한 거라고.”
“으, 으응.”
친구들은 이한의 말에 갑자기 숙연해졌다.
어쩐지 안 보인다 싶더니...
‘원래 이렇게 1학년이 준비하는 게 보통이야?’
‘보통일 리가 있겠냐? 내가 기사 가문 출신이어도 이게 보통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겠다.’
‘그런데 솔직히 버두스 교수님보다 준비 잘 됐지 않아?’
속삭이던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확실히 그렇다고 생각했다.
버두스 교수의 스타일은 나쁘게 말하면 무책임이었고 좋게 말하면... 아니, 좋게 말할 수가 없었다.
오늘 강의를 버두스 교수가 준비했다면 학생들은 처음부터 서가에 꽂힌 책들 중 필요한 책을 찾고, 재료 창고의 나무 궤짝들을 뒤지고, 쓸만한 마법진들을 꺼내고, 그러다가 잘못 꺼내서 옷 좀 불타고, 버두스 교수한테 핀잔 좀 듣고...
“워다나즈. 앞으로도 네가 준비하는 거냐?”
“...지금 무슨 뜻으로 말한 거지?”
기대감 섞인 눈빛으로 말을 꺼냈던 흰 호랑이 탑 학생은 살벌한 목소리에 움츠러들었다.
“아, 아니. 그냥... 궁금해서.”
* * *
언제나 기초는 원소부터.
어느 학파의 마법이든 간에 기초를 가르쳐 줄 때는 원소와 엮어서 가르쳐주는 경우가 많았다.
그만큼 원소 속성들은 마법사들에게 친숙하고 익숙했으니까.
불과 물과 바람과 흙에 익숙하지 않은 마법사가 어디 있겠는가.
물론 가끔 번개와 암흑을 더 많이 다룬 마법사도 있었지만 그건 정말 예외적인 경우였고...
“잘 봐. 이렇게.”
버두스 교수는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러자 무늬 없는 나무판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위에 물을 뿌리자 치직대는 소리가 났다.
이한이 물었다.
“교수님. 주문을 안 외우셨는데요.”
“어? 난 안 외워도 되잖아.”
“...학생들 듣게 해주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버두스 교수는 마법진 새길 때와 다른 방식으로 학생들을 열받게 만들었다.
교수는 무언 영창도 하지 못하는 학생들의 실력을 탓하며 다시 주문을 외웠다.
“열이여, 그 형체를 숨기고 깃들어라.”
이 <잠열 부여> 마법은 수수한 겉모습과 달리 제법 난이도가 있었다.
단순히 화염을 부여하는 게 아니라, 화염 원소에서 몇몇 특징들을 제거하고 순수한 열만을 남겨야 하는 것이다.
그 열을 물체에 깃들게 해야 하는 건 물론이었다.
이 모든 걸 마법진 없이 주문으로 해야 하는 만큼, 학생들의 인상은 찡그려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걸 다 했으면 그 다음은 이거야.”
버두스 교수는 마법진 없이 즉시 시전 가능한 부여 마법들을 추가로 설명했다.
방금 보여준 <잠열 부여>도 그랬지만 버두스 교수는 단순한 원소 기반 부여 마법이 아니라 거기서 한 단계 더 꼬아 놓은 걸 선호했다.
학생들의 실력 향상을 위한 배려는 아니었고 그냥 성격상 지루한 마법을 혐오해서였다.
<잠열 부여> 다음은 <진실의 빛 부여>였다.
보통 지팡이에 시전하는 이 마법은 빛 원소의 속성 중 탐색을 증폭시킨 부여 마법이었다.
즉 숨겨진 통로나 환상 마법들을 감지할 때 유용한 빛을 지속적으로 뿜어내는 마법이란 것.
“!”
“!!!”
슥삭슥삭슥삭-
학생들의 눈이 크게 떠지고 필기하는 깃펜의 속도가 올라갔다.
저녁 이후에 외출 좀 해봤다 싶은 학생들에게는 저 마법이 얼마나 유용한지 바로 감이 왔다.
에인로가드는 이름을 에인로던전으로 바꿔도 될 만큼 비밀통로와 함정들이 많았다.
오죽하면 강의실이 2층 이상에 있으면 학생들이 혼자서 가지 않고 여럿이 같이 갈 정도일까.
그런 만큼 저런 마법은 학생들이 탐 낼 수밖에 없었다.
‘잠열 부여 마법 준비가 훨씬 더 귀찮았는데. 괘씸한 놈들.’
이한도 마음은 이해가 갔지만 살짝 섭섭했다.
잠열 부여 마법이 아무래도 준비물이 더 많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 다음에도 버두스 교수는 <방풍 부여>(바람의 장벽을 장비 근처에 둘러, 약한 투사체는 튕겨버리고 강한 투사체도 궤도를 바꿔버리는 방어 마법이었다), <정수 부여>(액체 속에 담긴 독성을 제거하는 마법을 천에 부여하는 마법이었다) 등을 소개했다.
“워다나즈 님. 이 <진실의 빛 부여> 시전에서 여쭤볼 게 있습니다. 먼저 원소 변환을 하고 그 다음에 부여를 해야 할지 아니면...”
“...어, 저기 교수님 계시잖아.”
“아. 혹시 아직 못 익히셨습니까?”
로웨나는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이 놀라워했다.
이한이 아직 못 익혔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안 하는 표정이었다.
“익히긴 했는데 저기 교수님 계시잖아.”
‘익히긴 했군.’
‘익히긴 했냐.’
옆에서 연습하던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속으로 생각했다.
하긴 교수님 도와서 같이 준비했을 정도니 워다나즈 녀석 정도의 실력이라면 못 익히는 게 더 이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교수님은 좀.”
로웨나는 흰 호랑이 탑 (자칭) 기사들 중에서 제법 명예로운 편이었다.
그래서 더 이상 말하지 않았지만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다 알 수 있었다.
“음. 좀 그렇긴 하지.”
이한은 포기하고 그냥 설명해주기로 마음먹었다.
실제로 버두스 교수와 같이 준비하면서 연습한 덕분에 어느 정도 쓸 수 있게 된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내가 하는 방법이 무조건 정답은 아니긴 하니까 참고만 해둬. 먼저 빛 원소, 그 다음 원소 속성 변환, 그 다음에 부여. 이 순서가 가장 낫더군. 부여 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은 마법진의 힘을 빌리는 게 아닌 만큼 마력 소모가 심할지도 모른다는 거야.”
“마력 소모가 어느 정도로 심합니까?”
“난 몰라. 안 느껴져서. 책에서는 그렇다더라.”
“......”
“......”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이한을 빤히 쳐다보았지만 이한은 무시했다.
“그러니까 빛 원소나 속성 변환에 너무 많은 마력 투자를 하면 안 돼. 애초에 이런 주문으로 시전하는 마법은 효과가 약할 수밖에 없으니까. 효과를 깎는 대신 속도와 시전 시간을 늘린다고 생각하고...”
“감사합니다.”
로웨나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확실히 이한의 가르침이 효과가 있었는지 진척이 눈에 띄게 보였다. 그러자 다른 흰 호랑이 탑 학생이 물었다.
“워다나즈. 나도 물어봐도 되냐?”
“엇. 그럼 나도.”
“...다 좋은데 나도 연습 좀 하자.”
“?!”
“?!?”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깜짝 놀랐다.
심지어 버두스 교수도 깜짝 놀랐다.
“뭐?! 아직 다 못 익혔어!?”
“...못 익힐 수도 있죠...”
이한은 ‘새끼야’가 나오는 걸 참았다.
흰 호랑이 탑 학생들만 있었다면 흘러나왔을 것이다.
“왜 못 익혔어?!”
“교수님 말은 무시해.”
“네가 참아. 워다나즈.”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필사적으로 이한을 달랬다.
이한이 열받으면 그들만 손해였던 것이다.
버두스 교수한테 물어봤자 개같이 가르쳐줄 테니...
“근데 진짜 뭘 못 익힌 건데? 방풍 마법?”
“워다나즈가 바람 원소를 쓰는 건 못 보긴 했는데.”
“흙 원소인가? 워다나즈.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봐라.”
다른 탑 학생인 살코도 궁금하다는 듯이 시선을 돌렸다.
“<잠열 부여>.”
“?”
“??”
친구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버두스 교수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일 쉬운데 너 대가리 바ㅂ...”
“못, 못할 수도 있지!”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필사적으로 대화의 궤도를 돌렸다.
“의외로 어렵잖아! 나도 잘 안 깃들더라고! 원래 안 깃드는 소재에 깃들게 하는 게 은근히 어려운...”
“깃들긴 하는데.”
“어?”
친구들은 의아해했다.
<잠열 부여>에서 열을 깃들게 할 수 있다면 딱히 어려운 게 없지 않나?
“그럼 어디서 막혔는데? 말해봐. 워다나즈. 내가 도와줄 수 있...”
이한은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러자 지팡이가 안에서부터 화르륵 타오르기 시작했다.
화염을 직접 건 게 아니라, 열을 견디다 못해 안에서 불이 붙어버린 것이었다.
“...지 않은 거 같다.”
“힘, 힘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