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7화
<진실의 빛 부여>나 <정수 부여> 같이 더 어려운 마법은 벌써 익혀 놓고 <잠열 부여>에서 막힌 이한의 모습에 친구들은 어떻게 조언을 해야 할지 몰라서 당황스러워했다.
그러나 버두스 교수는 역시 교수라 달랐다. 보자마자 상황을 파악하고 능숙하게 조언했다.
“힘 빼! 바보야!”
“......”
살코는 이한의 주먹이 불끈 쥐어지는 걸 보고 살짝 기대했다.
‘설마 교수님을 치나?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하지만 워다나즈 놈이라면...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마력이란 게 그렇게 쉽게 넣었다 뺐다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습니까.”
“쉽게 할 수 있... 지.”
“그렇게까지 어렵진 않지... 흡.”
옆에서 무심코 대답해버린 친구들은 눈치를 보고 고개를 숙였다.
마력이 많지 않으면 마력량 조절하는 게 그렇게까지 어렵진 않은 것이다.
솔직히 마력량 늘리는 게 더 어렵지 줄이는 건...
“어휴. 어쩔 수 없지. 내가 도와줄게. 자. 다시 해봐. 힘 빼고.”
“아니... 괜찮은데요. 저 혼자 연습해도 됩니다.”
이한은 진심을 담아 그렇게 말했다.
솔직히 버두스 교수가 도와주는 것보다 이한이 혼자 연습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아냐. 고나달테스가 너 좀 챙기라고 하더라.”
“이건 챙겨주는 게 아닌데요?”
“아냐. 챙겨주는 거야.”
“챙겨준다의 뜻을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잘 알아. 자. 내가 도와줄게! 힘 빼! 자. 거기서 대략... 마력량 1/14로 줄여!”
“어떻게 말입니까?”
“그냥 감각적으로!”
“......”
* * *
이한은 결국 <잠열 부여>만 완벽히 익히지 못했다(시간을 뺏은 친구들은 자기 일처럼 미안했다).
하지만 이한이 보기에 이건 친구들이 시간을 뺏어서가 아니라 버두스 교수가 옆에서 정신 사납게 해서였다.
버두스 교수만 없었다면 정말 강의 시간 내에 다 익힐 수 있었다.
“...그래서 다 익히지 못한 거지. 정말 버두스 교수 때문이야.”
“...그, 그렇습니까?”
티질링 사제는 당혹스러운 시선으로 이한을 쳐다보았다.
그냥 평범하게 인사말로 ‘오늘 강의 어떠셨습니까’했는데 저렇게 길게 답변이 돌아올 줄이야.
“그런데 워다나즈 님. 제가 알기로 저런 마법들은 강의 한 번에 다 배우라는 게 아니라, 몇 번에 걸쳐서 배우라고 주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렇긴 하지.”
“그러면 초조해하실 필요 없지 않습니까?”
“그건 아니지. 기간이 넉넉하다고 여유 부렸다가 다른 친구들한테 추월당할 수 있잖아.”
“?”
티질링 사제는 따끈한 비프스튜를 젓고 있던 국자를 멈추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가 듣기로는, 다른 학생분들은 오늘 마법 한 개만 연습하셨다고 들었는데요?”
난이도가 난이도인 만큼 친구들은 모두 다 마법 한 개만 골라서 열심히 가다듬고 연습했다.
“그랬지.”
“그런데 어떻게 추월을 당하죠?”
“갑자기 마스터하고 다른 마법을 익히거나, 내가 다른 강의 듣는 사이 연습하거나. 그리고 그런 친구들이 여럿 나오면 까딱하다가는 A에서 B로 내려가는 거지. 의외로 자주 일어나는 일이야. 티질링 사제.”
“...?????”
티질링 사제는 이한이 농담하는데 자신이 유머 센스가 없어서 이해하지 못하는 건가 싶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재료를 칼로 다지고 있는 이한의 얼굴은 매우 진지했다.
“...그... 그렇군요.”
성적에 딱히 크게 관심이 없는 티질링 사제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일단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참. 오늘 당번 일은 못 도와줄 것 같은데.”
“원래 당번 아니신데요...”
이한의 차례는 예전에 끝났고 다른 사제들이 맡아서 하는 차례임에도 불구하고 이한은 도와주고 있었다.
사제들이 푸른 용의 탑 학생들에 비해 기특하고 예뻐서가 아니라(사실 그렇긴 했지만), 좀 더 실질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이한이 없으면 사제들이 자꾸 싸우기 때문이었다.
-백염(白焰) 변환을 그렇게 빠르게 성공할 줄은 몰랐소. 훗... 생각해보니 괜히 걱정한 것 같소. 아프하께서 워다나즈 님 같은 신도를 아끼지 않을 리가 없는데 말이오. 다시 생각해봐도 참...
-...니기소르 사제. 꼭 지금 남들 앞에서 자랑해야 되나?
이한은 불사조 탑 사제들이 성가신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가능했다.
잔뜩 신난 사제들은 의외로 푸른 용의 탑 학생들보다 까다로운 존재였다.
뭔가 자랑할 때는 상황과 장소를 잘 파악해서 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이들!
자랑해 본 적이 없어서 아직 신성 마법 각성 못한 교단 사제들 앞에서 저렇게 자랑을 해대고, 저런 자랑에 면역이 없는 사제들은 또 발끈해서 교리 토론으로 승부를 보자고 제안하고...
“그래도 사제들이 남들 앞에서 자랑할 때 좀 생각하고 말하게 된 것 같아서 기쁘군.”
이한의 말에 티질링 사제는 부끄러워했다.
나름 제국을 대표하는 교단들에서 온 사제들인데 이게 무슨 망신이란 말인가.
“그런데 티질링 사제는 프리싱가 교단 관련해서 뭔가 가르칠 생각은 없나? 모처럼 차례가 왔는데.”
“제가 받은 가르침은 그런 게 아니라서... 프리싱가 님께서 무언가 주고 싶으시다면 그분께서 때를 정하지 않으실까 싶은 게 제 생각에 가깝습니다. 혹시 저주를 더 늘리고 싶으신가요?”
“아니 그건 아니고.”
이한은 바로 부정했다.
마력 관련 저주는 더 맞아도 상관없었지만 다른 저주는 상당히 곤란했다.
티질링 사제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지 선선히 받아들였다.
“사실 지금도 너무 저주를 많이 차고 계시죠.”
‘잊고 있었는데.’
마력 관련 저주들은 솔직히 존재도 잊어버릴 만큼 별 의미가 없었다.
프리싱가 교단의 사제들은 저주를 자신의 몸으로 견디며 고행을 하는 것에 그 뜻이 있는데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오늘 당번 일을 하지 않으신다면 다른 약속이라도 있으신가요?”
“그렇지.”
티질링 사제는 맞춰보겠다는 듯이 눈을 지그시 감고 입을 열었다.
“교장 선생님께 가르침을 받으십니까?”
“...아닌데?!”
저녁 다 먹고 쉬는 시간에 교장 선생님과 일대일 대면이라니.
이한은 경악했다.
“저녁 먹고 가르침을 받진 않지! 아무리 그래도! 쉬는 시간인데!”
“네? 어, 좋아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
이한은 두 배로 경악했다.
“그러면 버두스 교수님...”
“절대로 아니고, 학교 산책하러 갈 거야.”
“아. 그렇습니까.”
티질링 사제는 완성된 스튜를 옮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라?
“그런데 저녁 이후에는 산책이 금지잖습니까?”
“응. 몰래 나가는 거지.”
“......”
숨쉬듯 자연스럽게 몰래 나간다고 선언하는 이한의 모습에 티질링 사제는 한 마디 할까 고민하다 말았다.
어차피 다른 탑 학생들도 몰래 나가는데 말린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교장 선생님이 수색 인력을 늘린 탓에 외출 수단이 막히고 있거든. 미리 찾아놔야 해.”
“방금 말씀하신 모든 문장들이 저한테는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만... 아. 참. 좋은 방법이 있네요.”
“?”
“저희 탑 사제들하고 같이 나가시는 건 어떻습니까?”
사제들은 기본적으로 기도나 제례를 위해 저녁 이후에도 외출을 허락받았다.
이한이 예전에 사제복을 빌린 것도 그래서였지 않았던가.
물론 투명 마법이 더 편해서 그걸로 갈아타긴 했었지만...
“사제들 사이에 같이 있으면 의심하지 않을 겁니다.”
“그래도 그런 식으로 신앙을 써먹어도 되나?”
“이제 와서 그러시면...”
티질링 사제는 갑자기 왜 이러냐는 듯이 이한을 쳐다보았다. 평상시에는 언제나 친절하던 티질링 사제의 시선이었기에 조금 더 아팠다.
‘앞으로 좀 더 신실한 모습을 보여야겠다.’
“그래. 같이 가준다면 나야 고맙지. 사실, 밤산책 할 때는 여럿이 가야 좋거든.”
“그렇습니까? 어째서죠?”
“일단 전위, 후위를 세우고 다니는 게 문제가 생겼을 때 대응하기 쉽고.”
이한은 만약의 경우가 터졌을 때 누군가 시선을 끄는 희생양 역할을 해야 한다는 사실까지 말하진 않았다.
티질링 사제가 경멸의 시선을 던질까 두려워서였다.
“아무래도 역할을 나누는 게 좋거든.”
“마법으로 역할을 나누나요?”
“아니. 그보다는 열쇠나 함정 전문가하고 무슨 일 생기면 몸으로 맞아내야 할 놈...”
말하던 이한은 주제가 좀 노골적인 것 같아서 화제를 돌렸다.
“하여간 여럿이 있으면 좋으니까 부탁할게. 잠깐. 그런데 차례 아닌 교단 사제들 부르면 다들 괜찮나? 이건 이해해주나?”
“아뇨. 이해 안 해줄 테니까 니기소르 사제님하고 시아나 사제님한테 부탁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티질링 사제, 혹시 친구들한테 화난 건 아니지?”
* * *
니기소르 사제와 시아나 사제가 같이 나가면 좋은 점은, 둘이 서로 자랑해도 눈총을 줄 휴게실 사제들이 없다는 점이었다.
둘은 한 걸음 한 걸음마다 그들의 신앙이 얼마나 놀랍고 훌륭하고 기적 같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한은 어두컴컴한 복도 앞을 쳐다 보는 대신 티질링 사제의 눈치를 봤다.
‘저 놈들 괜히 데려왔나.’
-들켰다, 도망쳐!!!
-너 먼저 도망가!
-크흑!! 기억할게!
멀리서 희미하게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선가 다른 탑 학생들도 돌아다니다가 걸린 모양이었다.
“안녕하십니까.”
그러나 사제들은 그러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고 인사하자 복도를 걷던 데스 나이트도 고개를 숙이고 지나갔다.
‘진짜 통하는군.’
사제 한 명이면 조금 수상하게 생각할지 몰라도 사제 여럿이 같이 걸어가자 기도 장소를 찾는 것이라고 넘어가주는 모양이었다.
이한은 사제로 위장하고 정문으로 가면 통과시켜주지 않을까 헛된 생각을 해보았다.
‘아무래도 그건 무리겠지.’
탁-
다행히 오늘은 운이 좋았다.
빙글빙글 회전하는 계단과 밟는 순간 용암 환상을 보여주는 함정을 제외하면 본관 3층으로 가는 장애물이 없었던 것이다.
“헉... 헉.”
“방금 환상 보셨어요? 방금 환상 보셨어요!??!”
니기소르 사제와 시아나 사제는 땀에 젖어서 두려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한은 안심하며 말했다.
“오늘은 아주 운이 좋은 편이군. 이것밖에 함정이 없다니!”
“......”
“......”
두 사제가 미친놈 보듯이 이한을 보고 있었지만, 가장 앞에서 집중하느라 알아차리지 못한 이한은 말을 이었다.
“밤산책 좀 하는 친구들은 여기 본관 3층을 가장 좋아하는 편이야. 아무래도 본관 2층은 좀 더 안전하지만 변화가 적어서 찾을 게 적거든. 그에 비해 본관 3층은 훨씬 더 나오는 게 많지. 저번에 살코가 친구들하고 돌아다니다가 3층 구석에서 통조림으로 가득 찬 방을 봤다고 해. 믿어지나? 통조림으로 가득 찬 방이라니!”
“전 워다나즈 님이 이렇게 신난 거 처음 봤어요.”
시아나 사제는 살짝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사제들 챙겨줄 때는 그렇게 진중하던 사람이었는데...
“다들 지팡이에 진실의 빛 걸어줄 테니까, 돌아다니면서 뭔가 발견하면 바로 말해줘.”
“앗. 워다나즈 님. 저 뭔가 찾은 것 같아요. 여기 가짜 벽 아닌가요?”
시아나 사제는 놀라워하며 벽을 가리켰다.
정교하게 만들어졌지만 숨겨진 문이 있는 벽이었다.
“아. 거기 가짜 벽 맞아. 그런데 거기 들어가면 지하 골목으로 나가니까 조심해. 저번에 흰 호랑이 탑에서 두 명이 저기 들어갔다가 길 못 찾아서 징벌방 끌려갔어.”
“......”
시아나 사제는 질겁해서 뒷걸음질쳤다.
대체 밤산책을 얼마나 많이 다니셨길래...!?
“그리고 이거 받아. 내가 간단하게 만든 지도야. 다른 탑 학생들과 정보를 교환하면서 만들었지.”
“감, 감사합니다.”
“참. 지도에 없는 장소 나오면 무조건 멈추고 가만히 서있고. 저번에 만티코어 본 사람 있었는데 환상이었으니까, 아마 중형급 이상 몬스터들은 환상일 가능성이 높아. 가만히 서있는 게 나을 거야. 어차피 그 정도 되면 저항해봤자 의미 없으니까.”
슬슬 니기소르 사제와 티질링 사제까지 질겁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