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8화
“그렇게까지 해서 얻을 게 있소?”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니기소르 사제. 당연히 많지. 아까 저녁으로 나온 스튜가 어디서 나왔겠어. 에인로가드가 준 검은 빵과 식은 주먹밥으로 그런 걸 만들 수 있겠어?”
맛있게 먹은 사제들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아무리 검소하고 소박하게 살아온 사제들이라 하더라도 따끈하고 기름진 식사를 계속 먹다보면 거기에 적응되기 마련.
처음에는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저희는 이런 식사를 먹지 않습니다’ ‘그렇게까지 말하시면 이 빵만 조금 먹겠습니다’하던 사제들도 자연스럽게 ‘잘 먹겠습니다’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같은 반응이 나오고 있었다.
“그, 그런 거였다면 미안하오. 꼭 차려주지 않아도 됐는데...”
“아니. 미안해 할 필요는 없지. 내가 차리고 싶어서 차려준 거니까.”
이미 미안하게 만들었지만 이한은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다른 점이야. 가만히 있는 것보다 행동을 해야 한다는 거지. 만약 푸른 용의 탑 가이난도가 쫄쫄 굶어서 쓰러져 있으면 어떻게 할 거지?”
“내 빵을 나눠주겠소.”
“그래. 하지만 두 명이라면? 세 명이라면? 탑 전체라면?”
옆에서 듣던 시아나 사제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푸른 용의 탑에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학생들이 다 굶어 죽어요?”
이한은 못 들은 척 무시했다.
“중요한 건 이런 상황은 사제 개인의 선량한 마음으로 극복하기 힘들다는 거지.”
검은 거북이 탑이나 흰 호랑이 탑이라면 ‘뭔 개소리야’하고 무시했겠지만 사제들은 착해서 그런지 제법 집중해서 들었다.
게다가 꽤나 와닿는 주제였던 것이다.
“과연...”
“일리가 있습니다.”
“그렇지? 이 문제의 해결 방법이 뭐겠어?”
“어... 개인이 해결하기 힘든 만큼, 사제들 전원이 힘을 합쳐서 자기 먹을 걸 서로 조금씩 나누면...”
니기소르 사제는 평소의 그 자신만만한 태도와 달리 조금 머뭇거리며 말했다.
오늘 이한이 보여준 광기들이 니기소르 사제를 약간 겁먹게 만들었던 것이다.
“아니지.”
“아, 아니오?”
“그러면 흰 호랑이 탑이나 검은 거북이 탑 놈들까지 굶어 죽기 직전이면 해결이 안 되잖아.”
“???”
듣고 있던 시아나 사제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세 탑 학생들이 다 굶어 죽...?
“그렇다면?”
“정답은 에인로가드의 창고를 미리미리 털고 밖에서 물자를 들여와서 쟁여놓는 거야. 그러면 이런 위기가 닥쳐도 극복할 수 있지.”
“......”
“......”
사제들은 당혹스러워했지만 이한은 진지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러자 강한 설득력이 담긴 목소리가 사제들을 현혹시키기 시작했다.
“꼭 너희들 본인이 사치를 하기 위해서 창고를 털고 밖에서 밀수를 해오는 게 아니라니까. 친구들을 돕기 위해서 창고를 털고 밖에서 밀수를 할 수도 있는 거지.”
“과연... 듣다 보니 일리가 있는 것 같소.”
“확실히 도와주고 싶어도 아무것도 없으면 도와주기 쉽지 않죠. 당장 물약 만들어서 돌리려고 해도 재료 때문에 곤란한데.”
과격파에 속하는 니기소르 사제나 실용주의적인 시아나 사제는 빠르게 설득됐다.
옆에 있던 티질링 사제는 매우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두 사제들을 쳐다보았다.
저래도...
저래도 되나?
“이해했소.”
“나중에 다른 사제들한테도 전해줘. 꼭 사치를 위해서 터는 게 아니라, 선행을 하기 위해서 하는 거라고. 다들 미리미리 해두면 좋겠지.”
“꼭 전할게요!”
세 마법사들은 굳게 다짐한 눈빛으로 시선을 교환했다.
‘불사조 탑 사제들이 도와준다면 에인로가드 암시장이 좀 더 풍족해질 거다.’
다른 탑 학생들보다 밤산책에 유리한 이들인 만큼, 이들이 적극적으로 나선다면 암시장에 물자가 더 잘 풀리고 물가도 잡히고 학생들은 싱글벙글하리라.
물론 사제들한테 도둑질을 시켜도 되는가 하는 윤리적인 문제가 있긴 했지만 이한은 그 부분은 괜찮다고 판단했다.
‘이건 정당방위지. 신들도 인정할 거다.’
에인로가드에서는 모든 게 정당방위다!
* * *
니기소르 사제가 이곳저곳에 불을 살짝 질러가며 확인해보고, 시아나 사제가 강산성 용액을 부어가면서 진짜 벽인지 아닌 벽인지 확인해보고(이미 진실의 빛으로 확인했는데도 찾아보겠다고 의욕적으로 매달리는 모습에 이한은 괜히 데려왔나 후회했다)...
그렇게 계속 탐색을 반복한 결과 행운을 잡은 것은 티질링 사제였다. 차고 있던 저주 받은 아티팩트로 벽 너머를 확인하던 티질링 사제는 바로 셋을 불렀다.
“여기 길이 있습니다!”
“드디어 하나 건졌군!”
니기소르 사제와 시아나 사제가 사고칠까봐 뒤에서 감시하고 있던 이한은 반색하며 달려갔다.
니기소르 사제가 아쉬워했다.
“아차... 저기 불을 질러봤어야 했는데.”
“크윽. 물약을 아끼느라 확인을 못 했어요.”
“......”
이한은 못 들은 척 무시하고 벽을 밀었다.
쿠르릉-
다행히 별다른 복잡한 기관장치 없이 벽이 열리고 뒤에 숨겨진 지하 계단이 나타났다.
“눈이여, 암흑을...”
이한이 암흑 시야 마법을 걸어주려고 하자 니기소르 사제가 알겠다는 듯이 말했다.
“이게 그 마법 맞소? 신체 능력을 전반적으로 크게 올려주지만, 하고 나면 근육통이 크게 오는 그...”
“아! 그거군요! 저도 알아요!”
니기소르 사제와 시아나 사제의 말에 이한은 당황했다.
“아닌데?”
“...아니오?”
“그건 다른 마법인데... 아니. 그보다 둘이 왜 그걸 알고 있지?”
“흰 호랑이 탑 분들이 자주 이야기하시던데요?”
“......”
이한은 나중에 다른 흰 호랑이 탑 놈들을 만나면 은혜도 모르는 입 싼 놈들이라고 멱살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고나달테스의 강화 마법이 부작용이 좀 강한 편이긴 해도 다 흰 호랑이 탑 놈들 잘 되라고 걸어준 건데 그걸 또 저렇게 뒤에서 욕하고 다니다니!
‘배은망덕한 놈들. 용서할 수 없다.’
“그건 육체 쪽 강화 마법이라 지금 걸 필요도 없고, 무엇보다 근육통이 좀 심하게 와서 좀 그렇군.”
“저런...”
“각오했는데.”
“......”
두 사제가 눈에 띄게 아쉬워하자 이한과 티질링 사제는 시선을 교환했다.
‘혹시 두 사제 신났나?’
‘...그런 것 같습니다.’
자기합리화가 제대로 됐는지, 두 사제는 평생 해본 적 없는 물건 영구 위치 이동에 잔뜩 신이 난 상태였다.
이한은 이해가 갔다.
‘확실히 의적질이 좀 즐겁긴 하다.’
따지고 보면 먹고 살려고 하는 일에 가까웠지만, 그 일이 즐겁지 않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이었다.
교장의 창고를 찾아서 쓸만한 물자들을 다 털어내는 그 즐거움.
사악한 대마법사에 저항하고 있다는 생각까지 하면 즐거움이 두 배가 됐다.
‘이래서 의적들이 생겨났나?’
이한은 그런 생각을 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어둠을 꿰뚫는 녹색 시야 너머로 습한 공기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물 냄새였다.
“...물이 있군. 다들 조심해라.”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오. 빠지지 않소.”
“아니. 몬스터 나올까봐.”
“!!”
니기소르 사제는 바로 긴장해서 자세를 굳혔다.
학교 안이라 무심코 방심하고 있었던 마음을 이한이 다잡아준 것이다.
티질링 사제가 작게 속삭였다.
“정말 나옵니까? 거짓말이죠?”
“아니... 진짜 나와.”
“......”
티질링 사제가 밤산책을 싫어하게 될까봐 걱정이 됐지만 진실을 숨길 수는 없었다.
저 정도 규모의 물이면 몬스터가 숨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호수가...!”
“세상에!”
계단을 내려온 사제들은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끝나자 어둠 속에 검푸른 호수가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호수 너머가 어디로 연결되어 있는지도 짐작가지 않을 만큼 커다란 규모였다.
“대체 이게 왜 학교 안에...?”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정말 새삼스럽긴 했다.
여기가 에인로가드 밖인지 안인지 외부 공간인지 확장 공간인지 그건 알 수 없었지만, 하여간 놀랄 일은 아니었다.
중요한 건 이 호수에 뭐가 있고, 너머는 어디로 연결되어 있는가뿐.
밖으로 연결되어 있으면 정말 눈물 나올 만큼 기쁘겠지만 이한도 나름 1학년을 절반 넘게 다닌 만큼 그런 터무니없는 기대는 잘 하지 않았다.
‘누가 숨겨놓은 창고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시아나 사제는 신중한 태도로 호수의 물을 조금 퍼올려서 물약병에 담은 다음 수질을 확인했다.
독성이나 잔존 마력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물은 멀쩡... 뭐하세요!??!”
“어?”
첨벙첨벙 들어가는 이한의 모습에 시아나 사제는 기겁해서 뾰족한 비명을 질렀다.
“물에 들어가는데...”
“독 확인!! 독 확인은 해야죠!! 뭐하세요!!”
“아. 손 넣어서 확인했는데.”
“......”
“......”
무식한 대답에 세 사제의 눈빛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걸 파악한 이한은 재빨리 변명했다.
“...흰 호랑이 탑 놈들하고 같이 다니다보니 이런 조악한 수법에 익숙해져버렸군. 앞으로는 주의하도록 해야겠어.”
“그, 그래요.”
사실 흰 호랑이 탑은 아무 상관도 없고, 이한이 자기 마력만 믿고 ‘독 있어도 뭐 괜찮겠지’하고 들어간 거였지만 이 자리에는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없었다.
이한은 수중 호흡 주문을 외운 후 물 속으로 몸을 담갔다.
부글부글-
“빛이여!”
마력을 잔뜩 담은 빛의 구체가 지팡이 위에 매달리자, 어두운 호수의 물을 뚫고 빛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아무리 암흑 시야 마법이 있다 하더라도 어두컴컴한 물 속을 꿰뚫어보려면 제약이 많았다.
‘잠깐, 몬스터가 없다고?’
이한은 놀랐다.
이렇게 넓은데 몬스터가 없다니.
그리고 다시 놀랐다.
‘몬스터가 없다고 놀라다니...’
없을 수도 있지!
에인로가드에 너무 적응한 모양이었다.
이한이 물 밖으로 나오자 니기소르 사제가 바로 불을 피웠다. 추운 날씨는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물 속에 몸을 담근 이상 한기가 몰려올 수밖에 없었다.
“<잠열 부여>를 시전할 수도 있소.”
“아니. 마력은 아끼자고.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내가 걸...”
“잠깐!!”
“기다리십시오!”
“그냥 내가 걸겠소!”
“......”
이한은 투덜거리며 동작을 멈췄다.
마법 관련해서 이렇게 불신을 받는 건 또 처음이었던 것이다.
“호수 밑에 몬스터가 없으니까 배를 만들어서 조금 더 나가봐도 될 것 같은데.”
“배, 배를...!”
“그런...!”
니기소르 사제와 시아나 사제의 얼굴이 환해졌다.
아닌 척해도 눈빛에는 숨길 수 없는 기대감이 엿보였다.
“나무를 구해오는 건가요?”
“아까 보니까 호숫가 가까운 곳에 갈대가 있던데 그걸 엮어서...!”
이한은 호수에 넘치는 물을 끌어올려서 형태를 붙잡았다.
물 원소는 가장 많이 다룬 원소 중 하나라 정말 눈 감고도 쉽게 형태를 변환시키고 고정시킬 수 있었다.
그런 다음 알시클에게 배운 냉기 마법을 시전했다.
“얼어붙어라!”
작은 나룻배 크기의 물을 얼리기에 1서클 냉기 생성 마법의 위력은 한계가 있었다.
실제로 나룻배는 가장자리의 조금만 얼어붙었으니까.
그러나 이한은 아랑곳하지 않고 마법을 쉬지 않고 연사했다. 순식간에 냉기가 연속으로 중첩되며 얼음으로 된 나룻배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꽝꽝꽝-
가볍게 강도를 확인해 본 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되겠군. 다들 타보겠나?”
“...알겠소.”
“힝.”
“???”
이한은 두 사제가 시무룩해지자 당황했다.
“얼음 배라서 이러는 건가? 이렇게 보여도 꽤 단단해서 안전은 걱정 안 해도 되는데?”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