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4화
‘이런. 내가 괜한 주제를 꺼냈나.’
장클리프는 기사답지 않게 눈치가 빨랐다.
온갖 사교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는 별종인 만큼 다른 기사들과 다를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눈치로 다른 사람들이 장클리프가 입을 좀 다물어줬으면 한다는 것까지 알아차리진 못했지만, 학생들이 학업 이야기를 거북해하는 건 눈치 챌 수 있었다.
‘화제를 돌려야겠군!’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산술이나 언어를 잘한다고 훌륭한 사람이 되는 건 아닙니다. 그런 강의 수석은 분명 사교성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외골수일 겁니다.”
“......”
이번에는 이한이 시무룩해졌다.
* * *
제국의 사악한 반마법주의자, 박드굴은 이를 뿌득 갈며 칼날을 점검했다.
“기사들이 모이고 있다고 합니다.”
“아주 잘 했습니다. 아주 잘 했어요.”
박드굴뿐만 아니라 주변에 앉아 있는 다른 반마법주의자들의 눈빛에는 독기가 번뜩였다.
“할 줄 아는 건 모임에서 기사랍시고 거들먹대는 게 전부인 놈들 때문에 대계가 망쳐질 줄이야...!”
박드굴의 장점 중 하나는 타고난 기품이었다.
허름한 옷을 입고 있어도 숨겨지지 않는 동작과 억양은 어딜 가든 박드굴을 존중받게 만들었고, 잠입하기 쉽게 도와줬다.
그러나 지금 박드굴은 그런 기품 따위는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가면을 벗어던진 상태였다.
당연했다.
기사들 때문에 그들의 계획이 전부 파괴된 것이다.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산환버섯.
마력을 흩어지게 만드는 성질을 가진 이 버섯이 모든 일의 근원이었다.
원래라면 흑마법사들이 저주의 시약 정도로 쓰는 버섯이었지만, 반마법주의자들 중 한 명이 이 산환버섯의 효과를 강화시키고 사용을 용이하게 만들어주는 방법을 찾아냈다.
당연히 반마법주의자들은 이 새로운 발견에 흥분하며 산환버섯을 최대한 끌어모았다.
충분한 양이 모이면 마법사들을 습격할 수 있는 비수가 생기는 셈이었으니까.
하지만 산환버섯은 물량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애초에 흑마법사들이나 조금 쓰는 시약이 그렇게 물량이 많이 풀릴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대놓고 물량을 모집하다가는 마법사들의 의심을 살 수 있었다.
박드굴이 용병들을 고용해서 언데드 계로 향한 것도 그래서였다.
충분한 양의 산환버섯을 모으기 위해서.
어느 누구도 박드굴이 이런 간단한 임무에 실패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놀랍게도 박드굴은 실패했다.
현지의 기사들 때문이었다.
전혀 생각치도 못한 규정을 들먹이며 박드굴을 포함한 용병들을 잡아 가두고, 그들이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사이에 에인로가드의 마법사들을 불러서 도망치지 못하게 막아버린 것이다.
박드굴은 어, 어 하는 사이에 체포되어 수도 감옥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천만다행으로 반마법주의자인 게 들키지 않아 간신히 탈출할 수 있었지만 휘하의 용병들까지 데리고 나오지는 못했다.
확보한 산환버섯도 전부 압수당한 건 덤이었다.
박드굴이 확보해 올 산환버섯만 기다리던 반마법주의자들은 기회를 허망하게 날려버렸고 박드굴의 체면은 엉망이 되었다.
복수심에 불타는 박드굴은 대체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확인에 들어갔다.
그리고 범인을 찾아냈다.
놀랍게도 너도밤나무 기사단이 범인이었다.
이 개잡놈들이 용병들에게 대체 무슨 원한이 있었는지 말도 안 되는 깐깐한 이유로 그들을 붙잡아놓고 에인로가드 마법사들을 부른 것이다!
“대체 이 저주 받을 머저리들이 무슨 생각으로 이딴 짓을?”
“뻔하지. 용병이라고 얕잡아 본 게 분명해. 현상금 걸렸으니 마법사들까지 불러서 그냥 넘겨버리려고 한 거겠지.”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거다. 같잖은 기사 놈들.”
반마법주의자들은 어두컴컴한 통나무집 안에서 이를 갈며 창문으로 시선을 던졌다.
저 멀리 어둠에 휩싸인 언덕 기슭에서 화려한 불빛들이 보였다. 너도밤나무 기사단의 모임이 열리는 장소였다.
같잖은 이유로 반마법주의자들의 대계를 파괴했으니 오늘 그 대가를 치르게 되리라!
“마차가 또 지나갑니다.”
“기사 새끼들이 마차나 타고...”
“아주 방심하고 있군!”
“얕잡아보지 마세요. 그래도 기사니까 말입니다.”
박드굴은 부하들을 자제시켰다.
기사들이 방심한 건 확인했지만, 그렇다고 자만해서 좋을 건 없었다.
아무리 실전과 거리가 먼 허울만 좋은 기사들이라 하더라도 기사는 기사.
기초적인 전투력에서 일반인들과 비교할 수 없었다.
“곧 신호가 올 겁니다. 그 신호를 기다리세요.”
잠입시킨 첩자가 보낼 신호를 기다리는 박드굴의 눈동자가 음험하게 타올랐다.
* * *
“...어, 너무 화려한 거 아닌가?”
이한은 지젤을 보며 물었다.
주변에 보이는 마차들은 무슨 귀족 가문 마차마냥 온갖 호화로운 장식들이 달려있고 임시로 언덕 위에 세워진 진영은 각종 깃발과 휘장들이 찬란하게 걸려 있었으며...
‘아니. 잠깐만. 저건 상단 마차잖아.’
심지어 기사들 마차 말고 상단 마차들도 많이 보였다.
둘러보니 짐꾼들이 땀방울을 흘리며 궤짝을 산더미처럼 쌓아 올리고 있었다. 안에서 병들이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나는 걸 보니 기사들이 마실 술이 분명했다.
심지어는 구리로 만든 큼지막한 수조에 살아 있는 생선까지 가져 오는 짐꾼들도 있었다.
나름 대귀족 출신인 이한이었지만 이렇게 사치스럽게 살아본 적은 없었기에 더욱 놀라웠다.
“......”
“......”
지젤과 친구들은 부끄러웠는지 시선을 돌리고 입을 다물었다.
“모라디? 모라디? 못 들었나? 너무 화려한 거 아닌가?”
“...닥쳐!”
“아니. 왜 화를 내지? 물어본 건데.”
흰 호랑이 탑 학생들도 느끼고 있었다.
너도밤나무 기사단 모임이 일반적인 기사들 모임과는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나름 북부의 유력 가문인 모라디 가문도 이렇게 사치스러운 모임은 절대 벌이지 않았다. 앙라고와 바트렉도 마찬가지였다.
“기사들 모임이 원래 이런 건가?”
“그... 워다나즈. 모라디를 그만 자극해라.”
앙라고는 무서워서 속삭였다.
처음에는 이를 갈던 지젤이 어느 순간 임계점을 넘었는지 그냥 싸늘하게 조용해진 것이다.
“앙라고. 그냥 정말 궁금해서 물어본 거다. 내가 기사 모임에 참가해 본 적이 있겠나.”
“나도 내 또래나 가문 모임이나 참가해봤지 기사단 모임은 처음이긴 한데... 어...”
“너도밤나무 기사단이 괜히 돈이 많다는 소문이 도는 게 아니군.”
이한은 감탄한 표정으로 주변을 확인했다.
보면 볼수록 호감이 갔다.
친해지면 얼마나 돈을 받을 수 있을까?
‘투자와 후원을 따내는 것도 마법사로서의 능력이라던데.’
물론 투자를 받고 갚지 못한 몇몇 버ㄷ... 선례들이 있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투자와 후원은 긍정적인 제도였다.
마법사는 자신이 하고 싶지만 비용이 없어서 포기했던 연구를 하고, 투자자와 후원자는 걸맞은 이득과 명예를 얻고.
이한 같은 경우는 연구보다 사업에 관심이 많았다.
‘연구처럼 보이는 사업이면 되지 않나?’
일행을 안내해 준 장클리프는 기사들을 만나기 위해 먼저 들어간 상황.
대충 다 둘러본 이한은 친구들을 불렀다.
“슬슬 들어갈까?”
“으, 으응.”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너무 사치스러운 모임의 모습에 살짝 주눅이 든 것 같았다.
이한은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정문 앞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는 구두의 먼지를 털었다.
옆에서 그냥 들어가려던 기사 한 명이 이한을 보고 ‘그렇구나!’하는 표정으로 재빨리 먼지를 털었다.
끼이익-
안도 밖 못지않게 화려했다. 모임 한 번에 얼마나 금화를 쏟아 부었는지 바닥에 깐 카펫부터 갖고 온 가구까지 그냥 여기서 살아도 될 것 같았다.
앙라고와 바트렉이 외투를 대충 의자 위에 던지려고 하자 이한이 말했다.
“잠깐. 거기에 두면 안 되지. 에인로가드가 아니잖아.”
“어... 그럼 어디에?”
“응접실로 쓰이는 공간이 있을 거야. 거기에 둬야지.”
앞에 앉아 있던 기사 두 명이 움찔했다. 둘이 슬쩍 일어나더니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며 바닥에 던진 외투를 집어 들고 탁탁 털었다.
“...?”
그쯤 되자 이한도 슬슬 이상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워다나즈. 그냥 앉아도 돼?”
“벽난로 쪽 상석에만 앉지 말고.”
화려하게 차려 입은 기사 한 명이 움찔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갑 벗어도 돼?”
“안 돼. 쓰고 있어.”
장신구를 주렁주렁 달고 있던 기사 한 명이 재빨리 장갑을 착용했다.
“...저, 경들. 죄송합니다. 그냥 편하게 앉아 계셔도 됩니다만.”
“아닙니다!”
“원래 이러려고 했는데, 잠깐 휴식을 취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기사들은 손을 내저으며 ‘나는 원래 이런 예의 없는 사람이 아닌데 살짝 실수한 거다’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기사 모임이고, 기사들은 좀 더 편하게 행동해도 되잖습니까.”
“야. 우리도 기사잖아...”
흰 호랑이 탑 친구들은 억울하다는 듯이 속삭였다.
왜 우리는 지적해??
“너희 나중에 귀족 모임에 참가해서도 똑같이 행동할 거냐? 미리 배워놔야지.”
“아, 아니... 그렇긴 한데...”
맞는 말로 두들겨 맞자 친구들은 반박할 수가 없었다.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괴롭힘 당하는 사이 기사들은 서둘러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확인에 들어갔다.
“내 모습 괜찮나? 잠깐. 조끼 순서가 이게 맞나?”
“자네 예의범절에 대해 잘 안다면서!”
“잘, 잘 아는데 혹시 몰라서 물어보는 걸세.”
이한이 오기 전에 나름 귀족답게 행동하고 있다고 자부하던 너도밤나무 기사단의 기사들이었지만, 진짜가 등장하자 그 믿음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검 여기에 차... 차도 됐나?”
“잠, 잠깐. 장신구 이렇게 많이 차도 됐었나? 안 됐었던 것 같은데.”
“무슨 일로 이렇게 호들갑인가? 왜 그래?”
“실은 워다나즈 가문 소년이...”
“아! 온다고 했었지! 그런데 왜?”
“내가 외투를 바닥에 던져놨었거든.”
“던져놓으면 안 되나??”
“원래 안 되네! 귀족들이 그런 짓을 얼마나 비웃는데!”
“아니, 그러면 왜 바닥에 던져놓았던 건데? 자네가 원래 던져놔도 된다고 해서 난 믿었...”
“닥치고 빨리 치우기나 하게! 말꼬리 잡지 말고!”
나름 기사들 사이에서 품위 있고 예의범절에 대해 능통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기사도 부끄러움으로 얼굴을 붉혔다.
뒤늦게 돌아온 장클리프는 평소의 느슨하고 허술한 분위기와 다른 홀 모습에 깜짝 놀랐다.
‘대체 무슨 일이?!’
* * *
“아. 그런 일이.”
장클리프는 감탄했다.
너도밤나무 기사단만큼 기사들 사이에서 예의범절에 뛰어난 이들도 없었다.
하지만 검술도 그렇듯이 언제나 하늘 위에는 하늘이 있는 법.
“진짜를 보고 배우다니 아주 좋은 경험이 됐을 겁니다. 이들도 또 한층 성장하겠군요. 하하!”
“...대체 뭘 성장하신다는...”
이를 악물고 참으려던 지젤이 참지 못하고 내뱉었다.
기사라면 검이나 휘두를 것이지 뭔 지랄을...
“쉿. 모라디. 다른 기사들의 모임이잖나.”
“......”
이한에게 맞는 말을 듣자 지젤은 굴욕감으로 부르르 떨었다.
하마터면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실수를 할 뻔하긴 했는데...
그걸 왜 워다나즈 놈한테!
“술이다!”
“저거 갖고 갈 순 없나?!”
지젤은 앙라고와 바트렉의 품위 넘치는 대화에 아찔해졌다.
‘에인로가드가 그리울 줄이야.’
“와. 정말 비싼 술인데.”
“그렇지? 워다나즈?”
“나중에 나하고 같이 몇 병 챙겨가자.”
“하하하하! 농담도... ...농담이 아니구나.”
“응.”
“......”
“워다나즈... 제발... 너랑 달리 나는 기사 가문 출신이라 소문 퍼지면...”
앙라고는 애원했다.
같이 잡혀도 이한은 괜찮을지 몰라도 앙라고는 기사들 사이에서 ‘술병절도자’같은 칭호가 붙을 것 아닌가.
“아니... 훔치는 게 아니라 말하고 가져가자는 소리였는데. 그 정도는 주겠지.”
“아. 그런 거였어?”
앙라고의 얼굴이 밝아졌다. 바트렉도 군침을 삼켰다.
지젤은 꼴보기 싫어 눈을 질끈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