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5화
그러는 사이 기사들은 술병을 따고 잔에 미친듯이 술을 들이부었다.
하인들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멧돼지 통구이를 접시에 갖고 나타나자 기사들은 기다리다 못해 자리에서 일어나 접시를 뺏었다.
“???”
접시를 뺏은 기사들은 이한이 당황하기도 전에 단검을 뽑아들어 고기를 푹 잘랐다. 기름이 좔좔 흐르는 고깃덩어리를 기사는 한 입에 집어삼켰다.
‘어라?’
이한은 당황했다.
보통 모임과 순서가 달랐던 것이다.
보통 모임은 이제 모인 사람들이 인사 좀 하고, 이야기도 나누고, 놀이도 좀 즐긴 다음에 준비된 식사를 같이 나눠야 하는데...
여긴 바로 식사와 술이 들어가고 있었다.
옆을 보니 앙라고와 바트렉도 서둘러 접시를 갖고 음식을 위에 차곡차곡 쓸어담고 있었다.
“모라디. 화내지 말고 들어줬으면 좋겠군. 내가 정말 몰라서 물어보는 거니까... 기사 모임이 원래 이런가?”
“...그래. 왜.”
“아니. 그냥 놀랐을 뿐이다. 호쾌하게 먹는군.”
“......”
지젤은 내색하진 않았지만 부끄러움이 몰려오는 걸 느꼈다.
나름 품위 있는 귀족처럼 행동하는 너도밤나무 기사단이었지만, 식사할 때가 되자 기사로서의 본색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기사로서의 자신을 부끄러워 한 적은 없었지만 나름 귀족인 척 하던 너도밤나무 기사단의 행동은 지젤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이렇게 편하게 먹을 사람들이 아까는 왜 그렇게 귀찮은 짓들을 한 거지?’
이한은 속으로 생각했다.
기사들이 처음부터 이렇게 편하게 굴었으면 이한도 밖에서 그 쓸데없이 많은 예의범절들을 지킬 필요가 없지 않았던가.
“그럼 먹고 마신 다음에 이야기를 나누는 건가?”
지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훨씬 낫군. 진작 이랬으면 좋았을 텐데.”
“...?!?!?!!”
지젤이 눈을 크게 뜨고 이한을 보는 사이 장클리프가 돌아왔다.
기사들에게 인사를 마치고 돌아온 장클리프가 한 손에는 포도주 병을, 다른 한 손에는 잔을 들고 있었다.
“제가 한 잔 대접하고 싶습니다! 너도밤나무 기사단의 기사들을 도와준 분을 위해서!”
“아. 감사합니다.”
이한은 잔을 받았다. 찰랑거리는 포도주가 잔 가득 차올랐다.
장클리프의 잔도, 지젤의 잔도 차올랐다. 셋은 같이 잔을 기울였다.
그 순간 장클리프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고함이 터져 나왔다.
“독이다!!!!!”
쨍그랑!
가장 반응이 빠른 건 지젤이었다. 장클리프의 말을 듣자마자 반쯤 마시던 잔을 바닥으로 던져버렸다.
‘말도 안 돼!’
지젤의 눈동자는 충격으로 가득했다.
이 기사들이 모이는 자리에 독을 탄 것도 놀라웠지만, 지젤이 조금도 독을 느끼지 못했다는 게 더욱 놀라웠다.
여기 기사들과 달리 지젤과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마법사로 교육 받는 이들 아닌가.
이질적인 독의 성질을 생각하면 눈치를 못 챌 수가 없었다.
대체 어떻게?
‘무슨 독이지?’
지젤은 순간 빠르게 시선을 돌렸다. 앙라고와 바트렉이 벌써 취해서 빈 술병을 탈탈 털고 있다가 얼어붙은 게 보였다. 지젤은 빠르게 단념하고 이한에게 시선을 돌렸다.
‘워다나즈라면 알아차렸을지도...!’
그러나 이한의 잔은 텅 비어 있었다. 지젤은 기가 막혀서 뾰족하게 비명을 질렀다.
“그걸 다 마셨다고!!”
“예의 때문에 어쩔 수 없었지...”
“지금 장난해? 학교 밖이라고 느슨해진 거야 뭐야?!”
이한은 솔직히 억울했다.
독은 만든 쪽이 잘 만들고 잘 투여하면 먹는 쪽이 훨씬 불리했던 것이다.
“다들 움직이지 말고 술 내려놔라! 거기, 술 내려놔!”
장클리프는 테이블 위의 나이프를 던져서 술병을 깨버렸다. 통째로 들고 마시려던 기사가 깜짝 놀랐다.
“장클리프 경! 무슨 일이십니까?”
“착각한 게 아닙니까? 독이라니... 저희 몸에는 아무런 이상도 없습니다만.”
취한 기사들은 장클리프의 고함에 당혹스러워했다.
그들도 독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알았다.
하지만 이렇게 몸에 아무런 작용도 하지 않는 독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장클리프 경이 착각한 게 아닐까?
“제기랄, 수도에서 만난 연금술사한테 들은 적 있습니다.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지만, 음식에 넣은 시약과 술에 넣은 시약이 섞이고 시간이 지나면...”
발 넓은 장클리프는 수도에 갔다가 최근에 만들어진 독을 소개받은 적이 있었다.
산환버섯을 기반으로 하는 독이었는데, 연금술사는 매우 특이한 독이라고 신나서 소개해줬다.
-여러 성분의 시약들이 각자 있을 때는 아무런 효과도 없지만 서로 섞이고 시간이 지나면 독으로 변하니 이렇게 교묘한 독도 드물 겁니다.
이런 몸 안에서 섞여 만들어지는 독을 미리 알아채려면 온갖 시약들을 전부 꿰고 있거나 독의 조합에 대해 알고 있어야 했다.
장클리프는 다행히 연금술사에게 이야기를 듣고 시약들의 맛을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그걸 다 기억하고 있었다고?’
이한은 기사의 무식한 방법에 기가 막혔다.
차라리 들어가는 시약들에 대해 모두 꿰고 있어서 위화감을 느꼈다는 게 덜 놀라웠을 것이다.
“치유 마법사를 부르겠습니다!”
지금 상황이 농담이 아니란 걸 깨달은 기사들이 사색이 되어 외쳤다.
독은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대량의 사상자가 나올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한은 냉정했다.
‘저런 독은 효과가 강하지 않다.’
기사나 마법사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만든 독은 그만큼 약한 성분들로 구성될 수밖에 없었다.
목숨이 위험한 독은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장클리프 경. 독의 효과는 뭡니까?”
“마력을 일시적으로 쓸 수 없게 됩니다.”
기사들은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력이 흩어지는 정도라면 그렇게까지 위험하진 않았으니까.
“어떤 자가...?”
“하인들은 움직이지 마라! 하나씩 조사하겠다!”
“짐꾼들도 확인하겠습니다.”
“그런 독을 여기에 넣을 자가 있을까요? 실수로 섞인 거 아닐까요?”
출입이 폐쇄되고 조사가 시작되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어수선했다.
짐꾼으로 숨어든 반마법주의자는 속으로 비웃었다.
‘아무리 해도 찾을 순 없을 거다.’
그들의 준비는 그야말로 치밀하고 끈질겼다.
몇 주일 전부터 모임의 식재료와 술들을 확인하고 산환버섯을 기반으로 한 독의 성분들을 나눠서 주입한 것이다.
그들의 대계를 망친 기사 놈들에게 어울리는 복수였다.
‘이미 신호는 갔다!’
기사들이 먹고 마시기 시작했을 때 바로 신호를 보낸 짐꾼이었다.
장클리프란 기사가 알아차린 게 예상 밖이긴 했지만 어차피 마셨으니 상관없었고...
기사들 말고 초대 받은 학생들이 몇 명 있었지만 아직 새파란 애송이들이었다.
게다가 독을 같이 먹어서 마력이 흩어진 마법사 아닌가.
어떻게 보면 기사보다 더 쉬운 상대였다.
계획은 이미 팔 할 정도 성공했다고 봐야 했다.
“떠올라라, 감정이여.”
“???”
학생 중 한 명이 갑자기 지팡이를 휘두르더니 하인에게 마법을 시전했다.
반마법주의자는 어이가 없어서 코웃음을 칠 뻔했다.
‘무덤을 파는군!’
제국에서 가장 다재다능한 인재가 마법사인 만큼, 당연히 이런 심문도 가능했다.
하지만 그런 마법들도 만능은 아니었다. 반마법주의자는 저런 마법들이 어떤 부류인지 잘 알았다.
마력 소모가 극심하고 정신력을 소진시키는 만큼 한두명으로 좁혀진 용의자한테 써야 하는 마법이었다.
그걸 지금 급하다고 닥치는 대로 시전하다니.
괜히 학생이 아니었다.
“떠올라라, 감정이여.”
“떠올라라, 감정이여.”
“떠올라라, 떠올라라, 떠올라라...”
“????”
반마법주의자는 당황스러워했다.
뭐지?
‘속임수인가? 아. 알겠다! 놈은 허세를 부리는 거다! 잔머리를...’
가짜 주문을 외우는 척하면서 상대의 반응을 떠보려고 하다니.
학생치고는 제법 영리했다.
그러나 반마법주의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한 번 해보시지.’
속으로 비웃으며 반마법주의자는 표정을 관리했다.
“떠올라라, 감정이여... ??”
이한은 짐꾼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이 사람인데요?”
“잡아!!!”
분노한 기사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반마법주의자는 비명을 질렀다.
대체 어떻게!?!
* * *
기사들은 심문의 달인이었다. 너덜너덜해진 반마법주의자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패거리에 대해 탈탈 털어놓았다.
“무슨 말도 안 되는...!”
“기사로서의 의무를 다했다고 원망을 하다니! 이래서 용병 놈들은!”
자세한 정황을 모르는 너도밤나무 기사단의 기사들은 매우 분노했다.
차라리 이해가 가능한 원한이라면 적으로서 존중이라도 해줄 텐데, 이건 아무 상관없는 원한을 그들한테 푸는 것 아닌가.
“반마법주의자 놈들은 원래 그런 놈들입니다! 제국을 더럽히는 악의 종자들!”
“......”
이한은 식은땀을 흘렸다.
독 때문이 아니라 상황 파악을 했기 때문이었다.
‘...기사들한테 괜히 부탁했나?’
일을 쉽게 하려고 기사들의 도움을 받았던 게 이렇게 돌아올 줄이야.
만약 기사들이 다치기라도 한다면 이한의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것 같았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습격에 대비해야 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장클리프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위험하군요. 여기 기사들은 이런 난전에 익숙하지 않은데.”
‘알고 있었나?’
이한은 장클리프가 의외로 자기가 소속된 기사단을 냉정하게 평가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너도밤나무 기사단은 아무래도 친목과 사교가 주된 목적인만큼 이런 상황에서는 더더욱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워다나즈. 마력이...”
“모이지가 않아.”
앙라고와 바트렉의 낯빛도 어두웠다. 다른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슬슬 산환버섯의 독이 완성돼서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장클리프도 스스로의 마력을 거세게 순환시켜 버티고 있었지만 안색이 좋지 않았다.
“그렇군. 알겠다. 기다려. 해독제를 만들 테니까. 습격이 시작되기 전에 얼마나 만들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뭐?”
“뭐라고 하셨습니까?!”
어떻게 싸울 준비를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장클리프는 물론이고 친구들까지 경악했다.
해독제를 만들 줄 안다고?!
“어, 어떻게!? 이 독에 대해 알고 계셨습니까?”
“아니... 모릅니다. 그리고 완전한 해독제도 아닙니다. 신성 마법으로 만드는 거라 효과가 어느 정도일지는 봐야 압니다.”
이한은 지팡이를 들고 신성 마법을 준비했다.
시아나 사제의 반강요가 이런 상황에서 도움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이한이 각성한 아프하 교단의 신성 마법이 백염(白焰) 변환이라면, 플레맹 교단의 신성 마법은 해독제 생성이었던 것이다.
“신성 마법을... 신실한 신도셨습니까... 아니... 잠깐... 워다나즈 가문이신...? 지금 중요한 게 아니지... 잠깐, 잠깐. 마력 부족한데 억지로 쓰시면 안 됩니다!”
중얼거리던 장클리프가 당황해서 이한을 말렸다.
아무리 급하다 하더라도 마력이 없는 상황에서 신성 마법처럼 소모가 심한 마법을 쓰면 위험했다.
그러나 말리기도 전에 이한은 해독제를 만들어냈다. 포도주 병 안에 들어있던 포도주가 투명하게 변했다.
“장클리프 경부터!”
“알, 알겠습니다.”
장클리프 경이 벌컥벌컥 무색투명한 해독제를 들이켰다.
그러자 놀랍게도 흩어지려던 마력이 다시 유지되는 게 느껴졌다.
“그럼 다음 해독제 만들겠습니다.”
앙라고는 해독제가 완성되면 바로 마시기 위해 옆에 섰다.
그러자 이한은 슬쩍 앙라고를 밀어내고 지젤을 당겼다.
이런 상황에서는 독랄한 모라디가 훨씬 더 믿음직했던 것이다.
앙라고는 당황해서 외쳤다.
“모라디는 적게 마셔서 상태 아직 괜찮은데?!”
“...아니야. 앙라고. 연금술 수석인 내가 보기엔 모라디의 상태가 더 안 좋아보인다.”
“??!”
그... 그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