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6화
지젤은 자신의 상황이 친구들보다 낫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조용히 침묵했다.
지젤이 보기에도 앙라고나 바트렉보다 본인이 더 도움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장클리프 경. 시간상 모든 사람들한테 해독제를 드리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필요한 분들을 골라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말도 안 된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옆에서 쓰러져 있던 반마법주의자가 고함을 질렀다.
도저히 믿기 힘들다는 얼굴이었다.
“마력을 어떻게 쓰는 거냐!!”
장클리프 경은 사악한 반마법주의자가 끼어든 것에 분노하려다가 순간 ‘정말 그렇지’하고 납득해버렸다.
그러게?
“그런데 정말 괜찮으십니까?”
“제가 체질적으로 마력이 많아서 독이 잘 안 걸립니다.”
“그게 무슨 개소리냐!!!”
“닥쳐라.”
퍽!
옆에 있던 기사가 반마법주의자를 걷어찼다.
감히 독으로 암습한 주제에 대화에 끼어드는 게 용서하기 힘들었다.
“마력이 많아서 독이 잘 안 걸린다는 게 대체 무슨 뜻입니까? 원래 마력이 독 같은 외부의 물질을 만나면 격하게 반응하며 저항하긴 하지만, 지금 산환버섯 같은 경우는 마력을 흩어버리는 특수한 놈이라 저항할 틈을 주지 않는...”
“장클리프 경, 지금 그럴 때가 아닙니다. 대비하셔야 합니다! 나중에 물어보셔도 되지 않습니까!”
지젤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따지고 보면 아직 견습 기사의 신분인 만큼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무례였다.
더군다나 지젤은 기사 가문들 사이에서의 평판과 영향력을 매우 중요시하는 사람.
‘아차.’
내뱉고 지젤은 바로 후회했다.
장클리프 경이 불쾌하게 여기기라도 하면 너도밤나무 기사단의 기사들 사이에서 지젤의 명성은 바로...
“맞는 말입니다. 미안합니다! 다들 움직이십시오. 마력이 회복되지 않은 기사들은 이쪽으로! 문과 창문을 보강해서 적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십시오. 마력이 회복된 기사들은 저쪽으로!”
장클리프 경은 다행히 화를 내는 대신 바로 움직였다.
지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척-
“???”
너도밤나무 기사단의 기사들이 몰래 엄지를 치켜 올리며 지젤에게 고마워했다.
지젤은 황당하다는 듯이 그들을 쳐다보았다.
“모라디. 고맙다.”
“......”
이한의 말에 지젤은 말문이 막혀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이성적이지 않은 행동 하나로 이렇게 좋은 평가를 받다니.
그냥 지금 상황 자체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말이 안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 * *
박드굴은 사납게 언덕 위를 달렸다.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반마법주의자들은 내달렸다.
“놈들은 마력을 쓰지 못한다! 하지만 방심하지 마라. 그래도 기사는 기사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곳곳에서 용병 출신 반마법주의자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경험 있는 용병들은 기사들의 무서움을 잘 아는 만큼 약점도 잘 알았다.
독을 먹은 상황에서 벌어지는 진흙탕 싸움이라면 용병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쉬쉬쉬쉬쉭-
화살이 날아오는 소리에 박드굴은 놀라지 않고 외쳤다.
“막아라!”
방패에 화살이 튕기는 소리가 났다. 반마법주의자들은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고 막는 데에 성공했다.
“눈치를 챘나봅니다.”
“독을 먹였으니 그렇겠지요. 예상하고 있던 바입니다.”
아무리 치밀하게 준비했어도 기사들이 끝까지 눈치채지 못할 거란 생각은 애초에 하지 않았다.
독을 먹은 이상 습격을 예상하는 건 당연한 일.
용병들은 조금도 방심하지 않았다.
“포위해서 들어가라. 한 놈도 살려두지 마!”
박드굴은 <안타곤달스의 꿰뚫어보는 눈> 아티팩트를 작동했다. 어둠속이지만 기사들이 세운 진영 주변이 선명하게 보였다.
예상대로 주변에는 함정이 없었다. 아무리 눈치를 챘어도 진영 주변까지 함정을 설치할 시간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어렵지 않았다.
“건물 안에서 버티려는 모양입니다.”
“가소로운 놈들.”
연회를 위해 설치된 막사는 일반적인 막사보다 훨씬 더 견고하고 튼튼했지만, 그래봤자 급하게 지은 막사였다. 철과 돌이 아닌 나무와 천으로 덧댄 건축물이니 쉽게 부술 수 있었다.
“문을 부술까요?”
“그래줄 필요 없지요. 뭐하러 기사 놈들의 수작에 놀아나야 한답니까?”
박드굴은 코웃음을 쳤다.
단단하게 막은 문과 창문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가도 되겠지만, 뭐하러 불리한 싸움을 해줘야 한단 말인가?
이쪽은 이미 다 준비를 해온 뒤였다.
“불을 지르도록.”
“예!”
커다란 막사에 불을 지르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냥 불을 던진다고 퍼지진 않았다.
그러나 준비가 되어있다면 어렵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불화살이 피어오르더니 막사를 향해 날아갔다.
“하하하하하하하!”
“기사 놈들아! 어떻게 할 거냐! 타죽기라도 할 거냐? 뛰쳐나와라!”
용병들은 안에 있는 사람들을 겁주고 혼란스럽게 만들기 위해 고함을 지르고 발을 굴렀다. 막사 곳곳에 불이 번지고 연기가 피어올랐다. 누가 봐도 금세 기사들이 뛰쳐나올 것 같았다.
철퍽!
“???”
“뭐야?!”
갑자기 막사의 불들이 꺼지기 시작했다. 안에서 철퍽거리는 소리와 함께 막사가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마치 누가 안에서 막대한 양의 물을 쏟아 붓기라도 하는 것처럼.
용병들은 경악했다.
“어, 어떻게 할까요?”
“다시 불을 날려! 한 번 막았을 뿐이다.”
다시 불화살이 날아갔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아티팩트가 아니었나?!’
처음에는 아티팩트나 스크롤을 써서 불을 끈 줄 알았다. 기껏해봤자 한두번 쓰면 끝이니 괜찮을 줄 알았는데...
박드굴은 인상을 찌푸렸다.
놀랍게도 용병들의 불화살이 먼저 바닥날 지경이었다.
“...물을 좀 많이 준비해놓은 모양이군요. 문을 부수세요.”
“알겠습니다! 이봐. 문을 부숴라!”
용병 중 한 명이 스크롤을 찢었다. 그러자 사나운 바람이 풀려나와 막사의 막힌 문을 후려갈겼다.
쾅!!!
“동시에 들어간다. 다른 곳도 부숴버려!”
“예!”
하나의 스크롤이 또 찢어지고 막사의 얇은 벽이 부서졌다.
그리고 거대한 흙더미가 드러났다.
“...????”
“뭐야?!?”
무슨 요새마냥 벽 너머 드러난 흙더미에 용병들은 경악했다.
그 짧은 사이 막사 벽 뒤에 흙벽을 쌓아 올리다니?
마법사라도 있는 게 아니라면...
“마법사가 있는 거 아닙니까?”
“있었다면 안에 있는 놈이 말했을 거다. 속지 마라. 다른 쪽을 뚫어! 기사 놈들이 발악한 거다.”
쾅!
다른 쪽 벽에 구멍이 생겼다. 그러나 그쪽에도 두터운 흙벽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쯤 되자 용병들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박드굴은 증오 섞인 눈으로 막사를 노려보았다.
용병들은 모두 다 철저한 반마법주의자들이 아니었다. 황금에 대한 욕망으로 참가한 놈들도 있었다.
이런 자들은 상황이 조금만 틀어져도 망설이지 않고 도망칠 터.
박드굴은 강하게 지시를 내릴 필요성을 느꼈다.
“기사들이 중독됐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문으로! 남은 스크롤을 문에 날린 다음에 진입하도록 하세요!”
다행히 막사의 정문으로 드러난 안쪽은 흙벽이 없었다. 기사들이 거기까지 세우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남은 스크롤이 터져 나오자 정문 주변에서 굉음이 퍼졌다. 문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이 있다면 바로 날아갔을 충격이었다.
용병들은 함성과 함께 방패를 앞세우고 달려들었다.
그 순간 바닥이 아래로 꺼졌다.
“!!!”
발목 정도 내려가는 함정이 아닌, 몸 전체가 낙하할 정도의 깊이를 가진 구덩이 함정에 모두 경악했다.
언제 이렇게 깊은 함정을?!
“쏴라!”
안에서 기사들의 화살이 날아들었다. 빠진 용병들은 구해달라고 비명을 질렀지만 동료들은 공격을 막느라 그럴 여유가 없었다.
“발판을 만들고 들어가도록!”
박드굴도 구해줄 생각이 없었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갖고 왔던 공성용 장비들이 구덩이 위로 날아들었다. 용병들이 방패로 화살을 막으며 다시 달려들려고 하자 안에서 벼락이 날아들었다.
“!!!”
숨도 쉬지 않고 날아드는 벼락에 용병들은 비명도 못 지르고 구덩이로 떨어졌다.
번개 마법은 원소 마법 중에서도 특히 악랄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방패로 막더라도 관통해서 근육을 찢어버리는 마법에 용병들은 움찔해서 물러났다.
“마법사가 있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멀쩡한 것 아닙니까?!”
“닥치고 들어가세요.”
박드굴은 살벌하게 말했다.
이렇게 되자 박드굴도 상황이 이상하단 걸 알아차렸다.
무언가 계획이 꼬인 것이다.
안에 들어간 놈이 뭘 착각했는지 몰라도 독을 먹지 않은 마법사 놈이 있다!
“이야기가 다르지 않습니... 컥!”
따지던 용병 한 명의 목에서 피가 튀었다. 박드굴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꼬챙이 검을 들고 싸늘하게 용병들을 쳐다보았다.
“또 뒤질 놈?”
“우... 우와악!!”
용병들은 다시 돌격을 시작했다. 박드굴은 그 사이 부하에게 말했다.
“용병 놈들이 시간을 끄는 사이 약한 흙벽을 뚫어야 합니다.”
“예!”
부하도 바로 이해했다.
저 뚫을 수 있을 것 같은 입구는 지금 함정이었다.
저 정도로 대비가 된 이상 쉽게 들어갈 수 있을 것처럼 보여도 그 안에 뭐가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저렇게 빨리 준비한 게 믿기지 않았지만, 더 이상 기사들에게 놀아나지 않으려면 주도권을 뺏어야 했다.
퍽, 퍽, 퍽-
박드굴의 부하들이 약한 흙벽을 부수기 시작했다.
마력을 담아서 후려치는 무식한 방식이었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두터운 흙더미가 무너지며 구멍이 드러났다.
“들어가... 컥!”
흙더미 뒤에 숨어있던 장클리프가 용병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검에서 이글거리는 오러가 타오르며 용병들의 금속 장비를 종잇장처럼 잘라냈다.
누가 봐도 경지에 오른, 지치지 않은 생생한 기사였다.
박드굴도 박드굴의 부하도 경악했다.
어떻게???
“쓰레기 같은 반마법주의자 놈들아. 어디서 죄를 저지르고 건방지게 원한을 갖는 것이냐!”
“포위해라!”
박드굴의 부하가 장클리프의 공격을 받아내며 고함을 질렀다.
확실히 대단한 기사였지만 그가 데리고 온 정예들도 백전노장의 용병들이었다. 포위만 하면 쉽게 지지 않았다.
그러나 장클리프 옆에는 다른 기사들도 대기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싸움은 집단 대 집단의 싸움으로 변경됐다.
진형을 갖추고 잘 무장한 기사들은 집단전의 달인이었다. 마치 강철로 된 벽이 세워진 것 같은 압박감에 용병들은 숨이 막혀왔다.
기껏 해봤자 스무 명 안팎의 기사들, 그것도 중독됐을 기사들인데...!
박드굴은 검을 들고 달려들었다. 장클리프를 노리는 게 아니었다.
‘기사 놈들이 저렇게 움직였다는 건, 역으로 정문이 비었다는 걸 의미한다!’
역의 역을 찌른다!
박드굴은 마력을 모아 발로 뻗었다. ‘팍’하고 바닥이 패이고 박드굴의 몸이 그대로 날아서 구덩이를 넘었다.
벼락이 날아왔다. 박드굴은 몸을 굴려서 피했다.
다시 벼락이 날아왔다. 박드굴은 일곱 마리 뱀이 엉켜 있는, 흑령목 팔찌 아티팩트로 벼락을 막아냈다.
“요 마법사 새끼! 죽여버리겠...”
외치던 박드굴은 눈을 부릅떴다.
앞에 있는 마법사가 너무 어렸던 것이다.
이 마법사가 불을 끄고 흙벽을 세우고 벼락을 불러온 마법사라고?
‘그보다 왜 낯이 익지?’
박드굴의 살기에도 상대는 흔들리지 않고 지팡이를 흔들었다.
그러자 옆에서 거대한 스켈레톤 전사가 달려와 박드굴을 그대로 날려버렸다.
박드굴은 이를 갈며 비기를 쓸 준비를 했다. 이 정도면 어린 마법사라고 무시할 수 없었다.
마법사를 상대할 때는 속도가 생명.
최대한 빠르게 죽여야 했다.
‘일격에 뛰어들어서 놈을...’
그러나 그 순간 녹색 표범 소환수가 달려들어서 박드굴을 후려갈겼다. 박드굴은 다시 한 번 자세를 바로 잡고 이를 갈았다.
“소환수를 두 마리나...”
마지막으로 그리폰이 천장에서 뛰쳐나오더니 박드굴의 등짝에 발톱을 박아 넣었다.
박드굴은 품위고 뭐고 던져버리고 울부짖었다.
“이 찢어죽일 마법사 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