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7화
사실 소환수 두 마리도 선을 많이 넘은 일이었다.
어려 보이는 마법사 주제에 뭔 무리를 그렇게 한단 말인가.
게다가 벼락을 무지막지하게 불러낸 직후였다. 피에서 마력을 쥐어짜도 저 정도는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그리폰까지 나오자 박드굴의 인내심이 바닥났다.
“죽여버리겠다!”
살기 가득한 진홍색 오러가 이글거리며 꼬챙이 형태의 검에 맺히자 이한은 폰리그에게 외쳤다.
“물러서라, 폰리그!”
상대의 검술 실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장클리프와 비슷한 수준 같았다. 저런 상대한테 잘못 걸리면 아무리 그리폰이라도 목이 뎅겅 날아갈 수 있었다.
데미지에 아랑곳하지 않는 샤르칸과 스켈레톤 전사 고다날테스가 달려들었다.
“고나달테스. 부탁한다!”
“뭐, 누구...!”
우드득!
당황한 와중에도 박드굴은 오러로 스켈레톤 전사를 정확히 꿰뚫었다.
끝없이 고통스러운 수련 끝에 만들어 낸 검사의 오러는 인내의 결정체이자 동시에 무엇이든 꿰뚫을 수 있는 창이었다.
열 구가 넘는 스켈레톤 전사를 중첩시켜서 만든 강화 스켈레톤을, 그것도 방패째로 꿰뚫어버리다니.
예상을 뛰어넘는 파괴력에 이한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뭐 저런...!’
하지만 박드굴도 예상치 못한 게 있었다.
스켈레톤 전사가 아랑곳하지 않고 붙잡고 늘어지자 박드굴의 눈이 부릅떠졌다.
추가로 소환된 뼈 갑옷을 몇 겹을 겹쳤는지, 오러에 바로 역소환되지 않고 버틴 것이다.
“뭐 이런...!”
그 틈을 타 샤르칸이 살벌한 소리를 내며 박드굴의 발목을 물어뜯었다.
박드굴은 욕설을 내뱉으며 샤르칸을 걷어차려고 했지만 샤르칸은 욕심을 부리지 않고 바로 물러섰다.
“헉, 헉...”
뒤늦게 스켈레톤 전사가 역소환됐다. 박드굴은 조금의 틈도 주지 않고 스켈레톤 전사에서 멀어졌다.
흑마법사의 진정한 공격은 이런 소환수가 쓰러진 다음부터 시작이었던 것이다.
소환수의 시체도 조심해야 했다.
그러나 조심했음에도 불구하고 박드굴의 외투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쾅!!
박드굴은 본능적으로 마력을 근육에 집중시켜 공격을 막아냈지만 충격을 완전히 막지는 못했다.
“뭔... 빌어먹을...???”
박드굴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소환수의 시체에게서 분명히 멀어졌는데 어떻게 이 정도의 폭발이?
기껏해야 뼈 부스러기 정도밖에 묻지 않았을 텐데...
‘그나마 다행이군.’
이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상대가 차라리 붙어 있었으면 대폭발이 일어날까봐 쓰지 못했을 텐데, 뼛조각들을 다 털어내자 오히려 쓰기 쉬워졌다.
저 정도라면 터뜨려도 한계가 있었으니까!
물론 그걸 감안해도 예상을 넘는 위력이긴 했지만...
박드굴의 눈에 상대 마법사의 오만한 얼굴이 들어왔다.
마치 ‘난 아직도 숨겨놓은 게 많다’라고 선언하는 것 같았다.
‘...이대로는 안 된다.’
박드굴은 샤르칸과 그리폰에게서 신경을 껐다.
마법사의 소환수들은 확실히 위협적이었지만, 지금 저 소환수들까지 견제하면서 쓰러뜨릴 만큼 마법사가 만만하지 않았다.
상대방의 손바닥 위에서 벗어나야했다.
박드굴은 깊게 심호흡했다.
살기와 함께 진홍색 오러의 색이 더욱 짙어지며 강하게 타올랐다.
팔다리를 한짝씩 주더라도 마법사를 직접 공격할 생각이었다.
‘젠장.’
이한은 속으로 혀를 찼다.
점점 상황이 예상 밖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 정도로 막혔으면 적들도 후퇴할 줄 알았는데...
‘왜 후퇴를 안 하는 거지?’
준비했던 수단들을 대부분 막은데다가 정면 공격, 우회 공격도 막은 상태 아닌가.
보통 이 정도면 후퇴하지 않나?
‘그렇게 기사들한테 원한이 깊나? 너도밤나무 기사단 기사들이 부모 모욕이라도 하면서 가뒀나?’
이한은 자신이 적들을 너무 강하게 몰아붙였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 정도로 당한 이상 약이 오르는 걸 떠나서 후퇴도 쉽게 할 수 없었다.
이런 마법사라면 후퇴를 대비해 무슨 함정을 준비해놨을지 알 수 없었으니까.
박드굴에게 남은 길은 마법사의 목을 베어버리는 것밖에 없었다. 그게 유일하게 남은 확실한 길이었다.
“...해보시죠.”
“?”
“왜. 뭘 기다리고 계십니까?”
박드굴은 이한에게 말을 걸었다.
상대를 떠보고 정신을 흐트러뜨리기 위해서였다.
저 마법사가 어떤 함정을 남겨놨을까?
‘이제 없는데?’
이한은 살짝 당황했다.
소환수들도 다 썼고 이제 남은 건 순수한 힘의 싸움밖에 없었다.
상대가 덤비는 순간 바로 환상 마법, 투명화 마법 시전한 다음 마법 난사로 갈 생각이었다.
오러까지 쓸 줄 아는 검사인만큼 시간이 될지 걱정이었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잠깐. 아니다.’
이한은 상대가 오해하는 것 같자 거기에 장단을 맞춰주기로 했다.
어쨌든 시간은 끌 수 있을 테니까.
“그쪽이 덤벼들길 기다리고 있지.”
“과연...”
박드굴은 나지막한 콧소리를 내며 이한을 노려보았다.
“바닥에 마법진이 깔려있겠지요.”
바닥을 밟는 순간 보이지 않는 마법진이 발동되는 마법은 방어적으로 자주 사용됐다.
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천장에도.”
“그렇지.”
“벽에도.”
“그렇지.”
“......”
박드굴은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상대 마법사가 담담하게 진실을 말하는 것 같아서 더욱 혼란스러웠다.
뭐지?
‘아니, 아니, 또... 또 마법사한테 농락당할 뻔했군.’
박드굴은 자존심을 내려놓았다.
일단 상대 마법사가 무조건 자기보다 한 수 위라고 인정을 해야 했다.
저런 새파란 마법사한테 경험적으로 밀린다는 게 가슴이 타들어갈 정도로 굴욕적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까지 마법사의 손아귀 위에서 완전히 놀아나고 있었으니까.
‘죽인다!’
그 순간 박드굴의 뒤쪽에서 단검이 하나 날아들었다. 박드굴은 기척을 느끼고 재빨리 피했다.
“무슨... 이거였습니까! 하!”
박드굴은 이제야 알았다는 듯이 크게 외쳤다.
기사들 쪽에서 싸우고 있던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이한을 돕기 위해 달려온 것이다.
“아니...”
이한은 당황했다.
너희 왜 오냐??
“기사들하고 같이 싸우라고 했잖나!”
“연기에 서투르시군!”
박드굴은 노골적으로 비웃었다.
저렇게 당황한 걸 보니 오히려 확신이 섰다.
이 어린 기사들이 마법사의 숨겨놓은 수가 분명했다.
“어디 해보시죠!”
앙라고가 단궁을 겨눴다.
제법 숙련된 솜씨긴 했지만 박드굴 같은 산전수전 다 겪은 검사가 보기에는 아직 부족함이 많았다.
‘뭐지? 방심하지 않는다. 함정이...’
박드굴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지만 순간 단궁에서 강한 마력이 느껴졌다.
쐑!
“...!”
무슨 아티팩트인지 화살이 살벌한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한 대라도 잘못 맞으면 그대로 쓰러질 위력이었다.
‘역시!’
“야! 이거 위력 때문에 조절이...”
“참아라! 알아서 적응하는 수밖에 없으니까!”
‘저 마법사가 건 마법이었나!?’
박드굴은 이쯤 되자 슬슬 궁금해졌다.
대체 여기 보인 마법들 중 몇 개를 저 마법사가 시전한 걸까?
쨍그랑!
그 순간 물약병이 날아왔다. 바트렉이 던진 물약이었다. 안의 기운을 보니 독이 분명했다.
박드굴은 다시 한 번 공격을 멈추고 물약병을 쳐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까지 강한 독 같지는 않은데. 괜히 막았나? 아니다. 겉모습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저 마법사가 파놓은 함정이다!’
‘동작이 멈췄다.’
그 사이 이한은 지팡이를 붙잡고 주문을 완성시켰다.
흰 호랑이 탑 친구들의 공격은 솔직히 그렇게까지 대단하지 않았지만, 어째서인지 박드굴은 필요 이상으로 경계하며 시간을 낭비했다.
그 틈이 이한에게 다시 기회를 줬다.
파지지지지지지직!
“큭!”
아까와는 다른 훨씬 더 굵은 벼락줄기가 넓은 천막 안을 태우며 날아들자 박드굴은 본능적으로 피했다.
‘이 자식이 거리를!’
상대 마법사는 한 방에 맞출 거라는 기대도 하지 않았는지 연속으로 공격을 날렸다. 그 공격을 피하느라 점점 거리가 벌어졌다.
일반적인 마법사들에게서는 보기 힘든 방식이었다.
마력 소모도 있는 만큼 한 방에 맞추려고 하고, 피하는 순간 바로 허점이 드러나는 게 보통인데...
“괜찮냐, 너희?!”
“괜찮다! 마법사를 보호하는 건 기사의 역할이잖나!”
“막을 자신은 있고?”
“......”
흰 호랑이 탑 친구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한은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다.
‘어떻게든 막아줘야겠군.’
그러는 사이 지젤은 쌍검을 휘두르며 박드굴의 앞을 막아섰다.
오러가 타오르는 적의 검.
막강한 파괴력을 갖고 있는 기술 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러가 만능은 아니었다.
지젤은 상대가 든 검과의 접촉을 피하고 견제하듯이 거리를 벌리며 찌르기를 시도했다.
“...모라디 가문!! 잠깐, 당신들... 잠깐... 잠깐...?!”
박드굴은 그 검술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오늘 하도 혼란스러운 일들이 많아서 머릿속에 안개라도 낀 것 같았지만 저 검술을 보자 무언가 떠오른 것이다.
‘저건 알파 가문의 문양이고 저건 바크 가문의 문양인데... 잠깐... 잠깐...?’
모두 다 너도밤나무 기사단하고는 상관없는 가문이고 여기 있을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이상할 정도로 앳된 기사들.
박드굴의 머릿속에서 깨달음이 번뜩였다.
“설마 학생이었습니까?!?!”
“......”
“......”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더 당황했다.
‘학생인 걸 몰랐나? 왜 저렇게 난리지?’
“이런 미친 마법사 새끼가 속임수를...!”
“어? 아니, 쟤도 학생...”
또 한 번 속았다는 걸 깨달은 박드굴은 지옥의 악마처럼 분노했다.
학생들을 기사처럼 속여서 발목을 묶다니.
저 적은 교활할 뿐만 아니라 지독하기까지 했다.
“마법이고 뭐고...”
박드굴은 소환수가 달려들든 마법에 찢기든 단련된 검사로서의 육신을 믿고 돌진을 준비했다.
“...어디 날려봐라!”
살기 넘치는 소리와 함께 공기가 진동했다.
와장창!!
그리고 해골 교장의 데스 나이트들이 푸른 안광과 함께 천막을 박살내고 돌입했다.
* * *
데스 나이트들은 호쾌하게 밖에 있던 용병들을 짓밟고, 안에 있던 용병들을 에너지 드레인하고, 마지막으로 박드굴을 상대로 차륜전을 펼쳤다.
갑자기 달려드는 데스 나이트들의 습격에 박드굴은 분노해서 오러를 휘둘렀지만, 데스 나이트들은 데미지를 입든 말든 음산하게 비웃으며 바로 회복해냈다.
-더 찔러봐라, 산 자여! 더 찔러보란 말이다!
-산 자여, 난 네가 네 아비 알주머니에서 꿈틀거릴 때부터 오러를 다룰 줄 알았다. 그 재주면 다 될 줄 알았느냐? 으핫하하!
-가장 사악하고 끔찍한 마법이 우릴 보호하고 있도다!
“이 저주받을 언데드들이!”
박드굴은 기겁했다.
오러를 다룰 수 있게 된 다음부터 한 번도 느낀 적 없는 무력감이 닥쳐왔다.
제국의 가장 어둡고 지독한 땅에서 머무는 언데드도 오러에 맞으면 회복하지 못하고 땅바닥을 뒹굴었는데...!
촥!
데스 나이트들의 검에 스칠 때마다 피가 얼어붙고 뼈가 둔해지며 몸의 생기가 사라져갔다.
박드굴은 몸의 마력을 끌어올리려고 했지만 몸이 뻣뻣해지며 다리가 무너졌다.
쿵!
“네놈을... 기억해두겠다...!”
-???
-지금 누구한테 원한을 품는 거야?
박드굴을 온갖 아티팩트로 꽁꽁 봉인시키던 데스 나이트들은 박드굴의 말에 어이없어했다.
누구의 칼에 베인 건지도 모르는 멍청이였나?
“마법사 놈... 오늘은... 네놈의 손아귀에서... 놀아났다고... 인정하마... 하지만... 다음에는... 결코...!”
-......
-......
상황을 파악한 데스 나이트들은 좀 머쓱해졌다.
학생들 미행하러 왔다가 전투가 벌어져서 도우러 왔는데, 졸지에 전략적으로 치밀한 매복이 된 것이다.
-그렇다. 네놈은 놀아난 거지.
-이봐!
-왜. 이게 더 낫지 않나?
-하긴 그것도 그렇군. 주인님의 제자분께서도 이게 더 악명 높아지실 테니 만족하실 거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