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8화
옆에서 듣고 있던 이한은 지친 와중에도 당황해서 물었다.
“제가 악명 높아져서 좋을 게 뭐가 있습니까?”
-멋있지 않나?
-악명도 명성일세. 워다나즈 군.
데스 나이트들 중에서 상급기사 역할을 맡고 있는 데스 나이트가 인자한 목소리로 친절하게 설명해주듯이 말했다.
물론 내용은 전혀 친절하지 않았다.
-생각해보게! 적들이 워다나즈 군을 만났을 때 워다나즈 군의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떠는 게 좋겠나, 아니면 그 이름은 처음 들어본다고 놀라워하는 게 좋겠나?
“저는 후자가 좋...”
이한은 그냥 방심한 상대를 기습하고 싶었다.
-어느 마법사도 후자를 바라지는 않을 걸세. 물론 워다나즈 군은 이런 방법을 쓰지 않아도 지금 속도라면 쉽게 악명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원래 명성에는 약간의 허풍도 섞여 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맞지. 그렇지!
데스 나이트들은 대부분 생전에 명성 높은 기사들 출신이라 그런지 허풍을 살짝 섞는 것에 거부감이 없었다.
게다가 적들이 자신의 이름을 안다면 자랑스러운 일이지, 그걸 왜 두려워하겠는가?
진정한 강자는 적들이 함정을 준비하더라도 함정째로 짓밟기 마련.
“...저는 지금도 충분한...”
-방학 때 그랑덴 시에서 구울의 왕을 토벌한 걸로 만족한 건가?
-그래선 안 됩니다.
-맞아, 맞아! 쇠가 뜨겁게 달궈졌을 때 쳐야 하듯이 명성도 퍼졌을 때 더 퍼뜨려야 한다네!
데스 나이트들이 모여서 재잘대는 소리에 이한은 두통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피 말리는 전투를 겪은 탓에 피곤했는데...
“두고... 보자...!”
멀리서 박드굴이 아직도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고 이한에게 이를 갈았다.
짜증이 치솟은 이한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닥치시죠. 좀.”
데스 나이트들은 바로 그렇게 하는 거라는 듯,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비명을 지르며 급류에 휘말려가는 학생들을 껄껄 웃으며 지켜보던 해골 교장은 데스 나이트들의 보고에 깜짝 놀랐다.
뭐라고!?
-반마법주의자들이 기사단을 습격했습니다! 비의추살단 소속의 박드굴이 주모자인 모양입니다!
어... 그게 정말이냐?
해골 교장은 오랜만에 당황해서 데스 나이트에게 되물었다.
왜냐하면 정말로 반마법주의자들이 기사단을 습격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비의추살단을 이끄는 박드굴은 해골 교장도 서류에서 이름을 본 적 있을 정도로 나름 악명 높은 범죄자였다.
성격이 끈질기고 음험해서 계략에 능하고, 검술이 오러의 경지에 올랐을 정도로 강자라 제국 마법사 여럿이 놈의 칼끝에 목숨을 잃었었다.
그런 놈이 왜 한가하게 너도밤나무 기사단 같은 별볼일없는 기사단을 습격한단 말인가?
너도밤나무 기사단은 풍족한 금화 말고는 별다른 특색이 없는 기사단인데...
‘돈이 부족했나?’
해골 교장 옆에 있던 데스 나이트들이 현장에서 날아온 보고를 듣고 깜짝 놀라 외쳤다.
-바로 가셔야 합니다!
뭐? 데스 나이트들이 주변에 있잖나.
-너도밤나무 기사단이...
그 놈들이 다칠 수 있다고?
해골 교장은 ‘뭐 그런 놈들까지 내가 호들갑 떨면서 신경 써야 하나’는 듯이 데스 나이트들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데스 나이트들이 답답하다는 듯이 외쳤다.
-...학생들을 데리고 갔잖습니까! 주인님 제자도요!
아. 그건 더 괜찮다. 고작해야 저 정도 규모의 습격이면 충분히 자기 목숨 챙겼을 거다.
-????
데스 나이트들은 주인의 오만한 모습에 당황스러워했다.
현장에 있던 데스 나이트들도 곧바로 도착했을 테니 서두를 것 없다. 슬슬 출발하자꾸나.
-주인님. 주인님의 자신감은 존경합니다만 지나친 자신감은 오만과 방심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합...
쯧쯧.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머리가 있어도 생각하지 못하는 자들이여. 하긴 너희가 그러니 데스 나이트고 나는 주인인 거겠지.
해골 교장은 자신감 넘치는 뒷모습으로 둥둥 날아갔다.
데스 나이트들은 그 뒤를 쫓아 우르르 달려갔다. 그러나 눈빛에는 불안감이 가득했다.
-저러셔놓고 저번에도 실수하셨지 않았나?
-걱정되는데...
그러나 놀랍게도 이번에는 해골 교장의 예측이 맞았다.
한 명도 죽지 않고 완벽하게 제압이 끝난 진영의 모습에 데스 나이트들은 놀라워했다.
-아니...?!
-정말로?!
보아라! 내가 뭐라고 했느냐. 아둔한 하수인들아. 너희는 내가 뭘 더 해야 믿겠느냐?
데스 나이트들은 억울해졌다.
그들의 주인이 틀린 적도 꽤 많지 않았던가.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그러니까 그게...
데스 나이트들이 모여서 떠드는 동안 해골 교장은 기사들에게 둥둥 날아갔다.
원래 이렇게 전투 끝난 다음이 생색내기 좋을 때였다.
칼에 베이고 찔린 상처 몇 개 치료해주면 위대한 대마법사님 소리 듣기 좋은 것이다.
아! 위대한 너도밤나무 기사단의 기사들이여, 그대들의 헌신을 제국민들은 잊지 않을 것이오.
“고나달테스 각하!!”
앉아서 붕대를 감고 있던 너도밤나무 기사단 기사들은 격렬하게 외쳤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뜨거운 반응에 해골 교장은 살짝 당황했다.
‘뭐지?’
“만일을 대비해서 소환수들을 대기시켜놓은 그 혜안, 감탄만 나올 뿐입니다!”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아.
해골 교장은 이들이 무슨 착각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이들은 학생들 도주 감시용으로 붙여놓은 데스 나이트들을 혹시 모를 반마법주의자들의 난동에 대비해서 준비시켜놓은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제국 대마법사이자 에인로가드의 영주, 황제 폐하의 마령관이자 마도방벽의 수호자...
눈치 빠른 데스 나이트 한 명이 달려오더니 대신 해골 교장의 칭호들을 나열했다.
...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일 뿐. 게다가 너도밤나무 기사단이 에인로가드에 기부한 황금을 생각해보시오. 이 소환수들을 일으켜 세운 시약들이 어디서 나왔겠소.
해골 교장이 안광을 찡긋거리며 윙크하자 기사들이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이한은 기사들이 피를 많이 흘려서 유머감각이 마비됐나 싶었다.
“각하께서 제자분을 보내신 행동에 숨겨진 깊은 뜻도 이제야 알겠습니다. 단순히 모임에 참석시킨 것뿐만이 아니라, 반마법주의자들이 난동을 피운다는 첩보를 듣고 대비하기 위해서 보내신 거군요!”
...하하. 들켜버렸군. 바로 그 이유 말고는 생각할 수도 없지 않겠소?
“......”
이한이 빤히 쳐다봤지만 해골 교장은 가볍게 무시했다.
제자 녀석이 제법 활약했을 것이오.
“제법이 아닙니다!”
“독을 먹고도 흔들리지 않고...”
“천막을 흙으로 보강하고...”
“저 우두머리 놈을 혼자서 붙잡아...”
‘이 자식은 뭘 한 거냐?’
해골 교장은 침착함을 유지하기 위해 집중했다.
어느 정도 활약을 했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그걸 몇 배로 뛰어넘은 것이다.
아니 박드굴 같은 놈을 왜 자기가 상대한단 말인가?
명성에 미친놈인가 그냥 미친놈인가...
“예?”
아무것도 아니오. 하여간 다들 무사해서 정말 기쁘군그래.
“물론입니다.”
“저희가 보낸 기부금이 이렇게 뛰어난 제국의 동량(棟梁)을 키우는 데에 사용되다니!”
기사들은 에인로가드의 1학년 수준에 매우 감탄하고 뿌듯해하고 있었다.
이 정도 수준이라니 정말 보낸 금화가 아쉽지 않은 수준이었다.
“......”
“......”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아무 짓도 안 했는데 기사들을 속인 것 같은 죄책감을 느껴야했다.
하하하! 맞소, 맞소!
해골 교장도 뼈를 드러내며 웃었다.
보아하니 올해 연말도 기사단에서 두둑한 기부금이 들어올 것 같았다.
“이보게! 이번 연회가 사악한 자들의 습격으로 이렇게 빨리 끝나게 됐는데, 다시 연회를 여는 대신 남은 금화를 에인로가드에 기부하는 게 어떤가?”
“그거 정말 좋은 생각이군!”
“나도 찬성일세!”
아주 좋은...
해골 교장은 옆에서 슬쩍 동의하려다가 분위기를 망칠까봐 입을 다물었다.
기사들은 마법에 도움을 받은 대가로 남은 금화를 한곳에 모았다. 해골 교장은 오랜만에 너무나도 행복해보였다.
이리 와라, 내가 아끼는 제자야!
“?”
이한은 순간 당황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
‘난가?’
-워다나즈 님 맞습니다.
-워다나즈 님이군요.
-누가 또 아끼는 제자겠습니까.
“저 말입니까?”
기사들 앞에서 에인로가드 이야기를 해보려무나.
“예??”
이한은 깜짝 놀라서 해골 교장을 쳐다보았다.
‘진심인가?’
물론 해골 교장도 이한의 ‘??’에 담긴 감정을 알아차렸다.
너라면 ‘잘’ 할 수 있을 거다.
“아하.”
이한은 해골 교장을 쳐다보았다. 해골 교장도 제자를 쳐다보았다. 두 사제는 눈빛만으로 거래를 성립시켰다.
“에인로가드에 입학했을 때 놀랐던 건, 교문을 지나던 순간부터 마법을 보여주시며 우리를 마법에 익숙하게 만들어주신 교장 선생님의 배려였습니다...”
“워다나즈 저 놈 대체 뭐하는 거야?”
“내버려두고 휴식이나 취해.”
지젤은 담요 위에 쓰러지듯 드러누웠다.
* * *
이야기를 다 들은 기사들은 에인로가드의 가르침에 감탄하며 눈물을 흘렸다.
해골 교장은 기부금을 세 배 이상 늘린 제자를 애정 가득한 눈빛으로 지켜보았다.
네가 자랑스럽다!
“저도 교장 선생님이 언제나 존경스럽습니다. 반마법주의자들의 정보를 미리 파악하셨던 겁니까?”
...그렇지.
“...?”
이한은 위화감을 느꼈다.
“설마 저희 탈주하나 감시하려고 붙이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냐! 듣는 귀가 많은데 오해를 살 수 있다!
해골 교장은 아직 막사 주변에서 쉬는 기사들이 많다고 눈짓했다.
이한은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연회 준비하느라 남은 상자들이 많은데 좀 갖고 들어가도 됩니까?”
...기사들도 가문에 돌아갈 때 싸갖고 돌아가고 싶어 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
“그럼 물어보고 가져가겠습니다.”
해골 교장은 제자를 욕했다.
푸른 용의 탑 출신이 뭐 저리 탐욕스럽단 말인가.
그보다 용케 저 정도 되는 적을 상대했구나.
“운이 좋았습니다.”
준비할 시간이 많았고, 적들이 이한에 대해 몰랐고, 이쪽에 강력한 기사까지 있었다.
물론 해골 교장은 이한을 미친놈 보듯이 한심하게 쳐다봤다.
어느 놈도 그걸 운이라고 말하진 않을 거다.
“아니...”
시끄럽다. 그보다 이놈들이 왜 기사들을 습격한지 아느냐?
“아. 그게.”
이한은 이들 사이에 있었던 불운한 오해를 설명했다.
해골 교장은 그걸 듣자 중얼거렸다.
저런. 더 철저하게 가뒀어야 했는데. 내 선택이 틀리지는 않았지만, 너무 관대했군!
“그... 그렇습니까?”
걱정할 것 없다. 여기 우두머리부터 잔당까지 전부 잡혔으니, 너도밤나무 기사단도 밤길을 조심할 필요 없을 거다.
“저도 그렇겠죠?”
너는 음... 마법사기도 하고, 벌써 두 반마법주의자 단체를 반파시켰으니 좀 무리지.
“......”
이한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기사들부터 데스 나이트까지 소문내기 좋아하는 자들밖에 안 보였다.
‘모두 다 통제하려면 해골 교장 정도는 되어야겠군...’
적들 사이의 악명이 오르는 걸 두려워하지 마라. 두려워해야하는 건 적들이지 네가 아니니까. 그런 쓸데없는 것보다 흥미로운 게 있다. 봐라.
해골 교장은 이한의 복잡한 심정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박드굴에게서 뺏은 아티팩트들을 꺼냈다.
이 아티팩트를 만든 사람이 누군지 아느냐?
“잘 모르겠습니다?”
이건 <안타곤달스의 꿰뚫어보는 눈> 아티팩트다. 사악한 마법범죄자 안타곤달스가 만든 아티팩트지.
“아. 그렇군요. ...잠깐, 혹시 이분도 에인로가드 출신이십니까?!”
진심으로 묻는 이한의 모습에, 해골 교장은 제자를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