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9화
“역시... 맞나보군요.”
해골 교장의 시선을 다른 뜻으로 이해한 이한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다!
“예?”
제국의 마법범죄자들이 전부 다 에인로가드 출신인 줄 아느냐!
“어? 아닙니까?”
......
해골 교장은 순간 할 말을 잃어버렸다.
눈앞의 제자가 농담이 아니라 진담으로 말하는 게 느껴져서 더 기가 막혔다.
뭐 이런...!
진지하게 아니다.
“그렇습니까... 그, 혹시 밖에 기사분들이 계셔서 아닌 건 아니죠?”
내 마법을 걸고 아니라고. 됐느냐?
“아아...”
이한은 그제야 납득했다.
해골 교장은 한 대 쥐어박고 싶었지만 제자가 방금 받아낸 기부금을 생각하고 꾹 참았다.
“마법범죄자라면 그...”
그래.
제국에는 일컫는 명칭만으로 두려움과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는 적들이 있었다.
반마법주의자, 악신숭배자, 분리주의자, 흑마법ㅅ... 아니, 흑마법사는 아니다. 말실수를 했군.
“......”
흑마법사가 아니라 마법범죄자. 마법범죄자란 말을 하고 싶었다. 하여간 이 정도 수준의 수배범들인 만큼 에인로가드의 네 선배들이 아무리 사고뭉치라고 하더라도 마법범죄자로까지 낙인찍힌 놈은 아주 드물다.
‘없진 않구나.’
이한은 놀라지 않았다.
아예 없었다면 그게 더 놀라웠으리라.
하여간 해골 교장의 논리는 타당했다.
의외로 마법범죄자도 아무나 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마법 실험에 실패해 계곡을 범람시켜 마을의 농작물을 전부 박살낸 마법사?
신기하지만 마법범죄자가 아니었다. 그건 그냥 미친 마법사에 속했다.
다른 기사단 묘지에 잠입해 시체를 훔치려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마법사?
정말 신기하지만 마법범죄자가 아니었다. 그것도 그냥 미친 마법사, 아니 조금 많이 미친 마법사에 속했다.
제국에서 마법범죄자로 낙인찍히려면 위에서 말한 사건들과 비교도 되지 않는 사건들을 악의적으로 터뜨리고 제국 현상금 사냥꾼들과 기사단의 추적을 수십 차례 정도는 물리쳐야 했다.
그 정도는 되어야 ‘제국 황제의 이름으로 이 마법사는 더 이상 마법사라고 부를 수도 없다 생사를 불문하고 처리해라’가 나오는 것이다.
나름 제국 마법사가 받을 수 있는 악명 중 최고에 속하는 악명.
아무리 에인로가드가 미친 마법사 학교라지만 저런 최고 중의 최고를 쉽게 배출하지는 못했다.
게다가 선배들이 졸업하고 나서도 징벌방에 끌려오는 걸 보면, 해골 교장은 나름 제국에서의 체면과 위상을 신경 쓰고 사후관리도 하는 모양이었다.
“저는 뛰어난 마법사 같아서 그냥 에인로가드 출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많이들 하는 착각이지.
해골 교장은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에서 뛰어난 마법사들이 사고를 치면 무조건 에인로가드란 말인가?
더 짜증나는 것은 이 착각의 95%는 틀리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안타곤달스 이야기로 돌아와서, 놈은 에인로가드 출신도 아니고 아직 오백 년도 살지 못한 파릇파릇한 마법사지만...
‘백 살 넘은 마법사한테 파릇파릇하다는 표현은 좀 이상한 것 같은데.’
예전부터 거슬릴 정도로 꾸준히 악명을 떨치고 있지.
해골 교장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안타곤달스의 꿰뚫어보는 눈> 아티팩트와 일곱 마리 뱀이 엉켜 있는 흑령목 팔찌 아티팩트를 들어올렸다.
제국의 적들이 잡스러운 아티팩트를 들고 나타나면 꼭 열 번 중 세 번 정도는 놈이 만든 물건일 정도로...
“반마법주의자한테 마법사가 아티팩트를 파는 겁니까?”
적의 적은 언제나 손잡기 쉬운 상대니까. 그리고 애초에 타락한 놈들이 상대를 가리겠나. 이익만 맞으면 자기 몸뚱아리도 덥썩 삼킬 놈들인데.
해골 교장의 목소리에는 경멸이 가득했다.
이한은 해골 교장이 저런 감정을 보이는 게 이해가 갔다.
아티팩트는 마법을 모르는 사람도 비교적 쉽게 이변(異變)을 일으키게 도와주는 아이템.
반마법주의자나 여러 제국의 적들에게 저런 아티팩트를 만들어서 팔아넘기는 마법범죄자를 좋게 볼 수가 없었다.
가장 건방진 점은 옛 왕국의 가문을 따와서 날 능멸하고 있다는 점이지! 감히!
“...어... 그... 그렇군요.”
중요한 이유들이 나오다가 갑자기 하찮은 이유가 나오자 이한은 살짝 당황했다.
넌 어려서 이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는 거다.
해골 교장은 투덜거렸다.
지금은 사라진 옛 왕국의 적통을 이은 해골 교장에게 있어서 왕국의 다른 귀족 가문들은 제각각 별개의 의미를 가진 영예로운 칭호였다.
그런 칭호를 웬 에인로가드 출신도 아닌 새파랗게 어린 잡놈이 건방지게 훔쳐가서 자처하고 있었으니...
“알겠습니다. 다음에 안타곤달스를 만날 일이 있다면 방금 말해주신 오만함을 꼭 지적해주겠습니다.”
그래. 꼭 기억해라.
농담 삼아서 한 말을 진지하게 받는 해골 교장의 모습에, 이한은 어이없어하다가 갑자기 생각이 나서 물었다.
“그런데 안타곤달스 이야기는 왜 해주신 겁니까? 아. 이 아티팩트 관련해서 내려주실 가르침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아. 이 아티팩트 관해서 배우고 싶었나? 알겠다. 참고하마.
이한은 자신의 가벼운 혀를 욕했다. 스스로가 미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아니었습니까?”
안타곤달스 이야기를 해준 건 네가 방금 말한 대로 앞으로 만날 일이 있을 것 같아서 해준 거다.
“......”
놈이 나는 두려워서 피해 다니지만 너에 대해서는 아직 잘 모르는 만큼 접근할 수도 있겠지. 무엇보다 반마법주의자들을 그렇게 썰어버렸는데.
“썰진 않았...”
수상한 마법사 보면 망설이지 말고 저번에 줬던 반지로 호출해라. 알겠느냐?
이한은 지금 바로 호출하려다가 참았다.
* * *
해골 교장과 데스 나이트들이 돕자 전투로 엉망이 되었던 진영이 금세 복구되었다.
중상을 입고 누워있던 기사들도 회복을 끝내고 일어서서 교장에게 감사를 표했다.
해골 교장은 너그러운 목소리로 학생들에게 말했다.
원한다면 조금 더 머물다 와도 된다.
“어? 정말입니까!?”
앙라고는 깜짝 놀랐다.
해골 교장이 이런 친절을 베풀 줄은 몰랐던 것이다.
바트렉도 믿기지 않아서 친구만 쳐다보며 눈을 깜박였다.
그럼! 너희들이 여기서 세운 공이 얼마더냐. 당연히 머물러도 좋지!
해골 교장의 말에 기사들도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환영하듯이 양팔을 벌렸다.
에인로가드에서 맛볼 수 없는 훈훈한 분위기에 앙라고와 바트렉은 벌써 취한 표정을 지었다.
‘교장 선생님도 사람이구나!’
‘그래. 그렇게 열심히 싸웠으니까 좀 더 머물러도...’
빨리 돌아간다고 좋은 일은 없었다.
친구들하고 식량감을 사냥하기 위해 산과 숲을 누비고 다녀야 할 뿐.
그에 비해 여기는 먹을 것과 마실 것이 풍족하게 흘러넘치는 곳.
“교장 선생님.”
이한이 해골 교장을 불렀다.
해골 교장은 왜 그러느냐는 듯이 이한을 따뜻하게 쳐다보았다.
“혹시 안에서 정령들이 소란을 피우고 있습니까?”
무슨 소린지 모르겠구나. 좀 더 머무르다 가지 그러니?
이한은 한숨을 푹 쉬며 친구들을 불렀다.
“...야. 돌아가자.”
학교에 홍수가 터진 게 분명했다.
* * *
흰 호랑이 탑 친구들은 순순히 탑에 돌아가는 대신 바닥에서 데굴데굴 구르며 발버둥쳤다.
“홍수가 안 났을 수도 있잖나!”
“났다니까.”
“백 번 양보해서 났다고 치자! 하지만 우리가 꼭 돌아가야 하냐! 워다나즈! 너도 솔직히 그 놈들 돌봐주기 싫잖아!”
“......”
이한의 말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에인로가드에 돌아가고 싶지 않은 현실부정 섞인 발악이었다.
안 그래도 고생인데 지금 홍수까지 났다니 가면 얼마나 힘들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이한은 한 대 팰까 고민하다가 아무리 보는 눈이 없어도 기사단 진영에서 기사 가문 출신을 패는 건 조금 그런 것 같아 꾹 참았다.
대신 지젤을 불렀다.
“모라디. 네 탑이니까 네가 설득해서 데리고 와라.”
지젤은 짜증 가득한 시선으로 두 쓰레ㄱ, 아니 친구들을 쳐다보며 설득했다.
“그냥 거기서 그러다가 뒤지지 그래.”
“......”
“......”
둘은 바닥에서 구르다가 어정쩡한 자세로 일어섰다. 지젤이 저러는데 버텼다가는 후환이 무서웠던 것이다.
하지만 완전히 일어서진 않았다. 그만큼 에인로가드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하하. 무언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구나.
이한을 도와준 건 해골 교장이었다.
워다나즈가 돌아가면 너희들도 같이 돌아가는 거란다. 그게 친구란 거지.
“예!? 저희 다른 탑인데요?!”
어쩌란 거냐? ‘탑은 다르지만 친구’ 도장이라도 이마에 찍어주랴?
이한이 에인로가드로 돌아간다는 말을 들은 해골 교장은 매우 심술 난 상태였다.
그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심술을 알아차린 두 흰 호랑이 탑 학생은 포기하고 벌떡 일어섰다.
“가자... 가야지.”
“워다나즈... 나중에 다른 친구들이 물어보면 우리도 앞장서서 돌아가자고 했다고 해주겠나?”
지젤은 참다못해 폭발해서 검집으로 친구들을 두들겨패기 시작했다. 두 학생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이한은 그러거나 말거나 돌아갈 때 짊어지고 갈 상자들을 챙겼다.
“모라디. 그만 패고 좀 도와줄래?”
“...잠깐. 너무 양이 많은데.”
거센 숨을 들이쉬며 회복한 지젤은 미간을 살짝 찡그리고 나무 상자들의 개수를 셌다.
아무리 생각해도 넷이 갖고 돌아가기에는 너무 많았다. 말을 갖고 왔다지만...
“아. 여기서부터 여기까지는 내가 들 거야.”
“뭐? 어떻게?”
“이건 짊어질 거고, 이건 폰리그한테 실을 거고, 나머지는 마법으로 띄울 거야.”
“......”
생각보다 너무나도 무식한 방법에 지젤은 할 말을 잃었다.
“흠. 이 상자도 일단 받았는데... 남부산(産) 소용돌이대합은 너무 사치품 아닌가? 게다가 빨리 상하고.”
궤짝 안에 가득 찬, 제국 남부 해안가에서 채취한 고급 조개를 본 이한은 고민에 빠졌다.
지젤도 동의하며 말했다.
“그건 두고 가는 게 나을 것 같아.”
“아까운데... 교장 선생님. 혹시 물물교환 안 하시겠습니까?”
저리 꺼져라.
지젤은 이한이 해골 교장을 부르는 모습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을 정도로 놀랐다.
어지간해서는 겁을 먹지 않는 지젤이었지만 해골 교장은 예외였다. 입학하고 나서 시간이 꽤 흘렀지만 해골 교장은 여전히 어려운 상대였다.
그런데 저렇게 부르다니...
‘미친놈인가 진짜.’
“잠시만 있어봐라. 상단에서 오신 분들. 혹시 따로 식량 챙겨 오신 것 있습니까? 있다고요? 혹시 거래 안 하시겠습니까?”
이한은 진영에 남아있던 상단 측 일꾼들에게 찾아가 갖고 온 보존식량과 상하기 쉬운 고급식재료들을 교환했다.
일하러 온 일꾼들의 숫자가 많았던 만큼 식량은 생각보다 양이 많았다. 게다가 다 옮기기 쉽게 부피가 작고 잘 상하지 않는 음식들이었다.
“이야, 이런 걸 그냥 주셔도 됩니까?”
“저희는 검소함을 미덕으로 삼아서 이런 사치스러운 음식들은 잘 먹지 않습니다.”
이한은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말했다. 일꾼들은 마침 큰 고생도 했겠다 잔치라도 벌일 생각에 흔쾌히 수락했다.
“저게 남은 식량입니까? 아직도 꽤 넉넉히 남은 것 같은데요?”
“예. 일이 길어질 때를 대비해서 저희들이 먹을 만큼 넉넉히 챙겨왔지요.”
이한은 아직도 남은 통조림 상자들을 보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저걸 가져갈 방법은?
“야. 술 갖고 와라.”
“아... 안 돼! 워다나즈!!”
“지금 너희들이 비싼 술로 사치부릴 때가 아니야.”
“20년 넘는 <기사의 환희>는 앞으로 마실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고!!”
이한은 친구들의 손아귀에서 호화롭게 장식된 술병을 뺏어서 일꾼들과 교환했다. 일꾼들은 행복해하고 친구들은 피눈물을 흘렸다.
대충 거래가 끝나자 이한은 만족스럽게 짐을 훑어보았다.
조금 산더미 같은 걸 빼면 꽤 탄탄하게 구성을 맞춘 상태였다.
‘이 정도면 홍수로 날아간 거 감안해도 한 달은 쉽게 버티겠는데.’
“참. 워다나즈 님?”
기사들이 찾아와서 이한을 불렀다.
이번 습격에서 보여준 모습 덕분에 기사들의 눈빛과 태도에는 존중이 가득했다.
“예?”
“이건 원래 모임을 가장 영예롭게 빛낸 기사에게 드리는 선물입니다.”
“!!”
이한은 눈을 크게 떴다.
설마?
‘금화인가? 황금 동상? 아니면 황금으로 만든 무구일지도 모른다.’
“이번 모임은 도중에 취소됐지만, 워다나즈 님만큼 영예롭게 빛내주신 분은 앞으로도 없을 겁니다. 만장일치로 이렇게 드리게 되어서 기쁩니다.”
“정말 영광입니다!”
이한은 감사하며 선물을 받아들었다.
그건 아까 친구들이 뺏긴 술병보다 몇 배는 호화롭게 장식된 술병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