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0화
이한은 시무룩해지려는 얼굴근육에 힘을 줘서 유지했다.
“감사합니다...”
“힘든 날이 끝나고 숙소의 나무 의자에 앉게 되면, 이 술병과 조용히 마주보고 앉아 잔을 기울여보십시오. 그럼 저희들 생각이 날 겁니다.”
기사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뒤에서 듣고 있던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벌써 그 말에 취한 표정을 지었다.
이것이 기사들의 미학 아니겠는가.
검과 술을 모두 사랑하는...
‘이거 팔 수 있나? 팔면 들키겠지? 물물교환을 해야 하나?’
물론 마법사인 이한에게는 별로 통하지 않았다.
* * *
흠. 여기서부터는 배를 타고 가야겠군.
“......”
“......”
-......
이한과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물론이고 폰리그까지 황당하다는 듯이 해골 교장을 쳐다보았다.
아직 에인로가드 성벽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허리까지 잠길 정도로 물난리가 난 것이다.
너희를 위해 뼈 나룻배를 준비했단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래. 당연히 감사해야지.
“진짜 해도 해도 너무하신 것 아닌... 읍읍.”
“쉿. 조용히 해라. 앙라고.”
참다못해 폭발하려는 앙라고의 입을 막고, 이한은 배 위에 올라갔다.
해골 교장의 도발에 넘어가서 좋을 일이 없었다.
촤아아아악-
“노를 젓는다! 앙라고! 네가 키잡이 역할이다! 성문을 향해 길을 열어라!”
바닷가 출신이라 가장 항해 경험이 많은 앙라고가 키잡이가 되었다.
앙라고는 갑작스럽게 떠맡은 중책에 덜덜 떨었다.
휘이이이잉!
‘육지 위에서 뭔 풍랑이!?’
정령이 대체 어떻게 변덕을 부렸는지 육지 위에 차오른 물들이 사납게 파도쳤다.
바람 앞에서 가랑잎처럼 흔들리는 나룻배는 매우 위태롭게 느껴졌다.
“워... 워다나즈. 이, 이런 기후에서 배를 몰아본 적은 없는데...!”
“앙라고. 약한 소리 하지 마라. 네가 해내야 해!”
난 이만 가보마.
해골 교장은 얄밉게 데스 나이트들을 데리고 물 위를 내달려 교문을 통과했다.
이한은 무시하고 앙라고를 응원했다.
“앙라고. 널 믿어라!”
“하지만 이렇게 파도가 거세면...”
짝!
“믿으라고 이 자식아. 믿을래 안 믿을래?”
“믿, 믿을게!”
“......”
옆에서 노 젓고 있던 바트렉은 살짝 감동하려다가 말았다. 그리고 이한의 눈치를 보며 열심히 노를 저었다.
“안개 때문에 시야가...!”
“빛 띄울 테니까 집중해!”
“파도! 파도 몰려온다! 물이 배를...!”
“물 내가 퍼낼 테니까 집중해!”
“안 돼! 비까지...”
“위에 얼음 방어막 띄울 거다! 앞으로 가!”
“배에 구멍이 났어!”
“막았다! 다시 몰아!”
“......”
지젤과 바트렉은 조용히 입을 꾹 다물고 노를 저었다.
대화가 오갈 때마다 왠지 모르게 노를 더 열심히 젓게 됐다.
“너희들 너무 쉬지 않고 젓는 거 아니냐? 좀 쉬었다가 번갈아서 하지?”
“아, 아니다. 워다나즈. 더 저을 수 있다!”
간신히 한숨 돌린 이한은 옆에서 너무 노를 열심히 젓는 친구들의 모습에 의아해했다.
열심히 젓는 건 좋은데 괜찮나?
“성문이다!”
-신입생이 왜 이런 날씨에 돌아다니는 거냐??
성문을 지키던 데스 나이트가 당황스러워하며 이한 일행을 통과시켜줬다.
원래 방향을 알려줬던 숲과 정원, 길들이 보이지 않아 이한은 본관 건물로 방향을 잡았다.
“좌측이다. 앙라고! 좌측으로 틀어!”
나룻배가 거센 물살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저 멀리 물속에서도 우뚝 솟은 탑이 하나 보였다. 마법으로 보호 받고 있는 건물이라 홍수에도 흔들리지 않고 상승해 있는 상태였다.
입구가 보이자 지친 흰 호랑이 탑 학생들 얼굴에 희망이 돌아왔다.
“더! 더 빠르게!”
“사악한 리치 선장이 마법으로 선원들에게 외쳤다네...”
“지금 상황이 그 뱃노래를 부를 상황이냐? 진심으로??!”
“미, 미안.”
자기 고향에서 선원들이 노 저을 때 쓰던 노래를 부르려던 앙라고는 친구들의 지적에 머쓱해져서 멈췄다.
“문 열어라!!”
이한은 크게 외쳤다. 그러자 탑 안에서 친구들이 서둘러 문을 열었다.
“들어가! 빨리! 배가 오래 못 버틴다!”
해골 교장이 만들어 준 배는 아까부터 삐걱거리고 있었다. 이한이 보강하지 않았다면 금세 무너졌을 것이다.
흰 호랑이 탑 친구들은 이한의 뒤를 따라 서둘러 탑의 입구로 뛰어들었다.
“살았다...!”
단단한 땅이 발바닥에서 느껴지자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오랜 항해를 끝낸 선원처럼 가슴이 뭉클해졌다.
자신들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을 알아차리기 전까지는.
“......”
“......”
“워, 워다나즈... 우, 우리 같이 목숨을 걸고 싸웠는데 이렇게 버리는 거냐...?”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일단 가장 가까운 탑으로 온 건데.”
이한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흰 호랑이 탑 친구들을 노려보았다.
이 자식들이 기껏 살려줬더니 헛소리를...
* * *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어색한 자세로 벽난로 앞에서 쉬는 동안 이한은 상황 파악부터 했다.
“나름 준비했는데 아무 의미가 없었...”
“대자연은 위대해...!”
“밖에 놨던 짐들은 다 날아갔...”
“지금 탑 휴게실도 물이 차올라서 간신히 빼냈...”
“제발 한 명씩 말해주겠나?”
친구들이 ‘에인로가드, 이런 점은 고쳐줬으면 좋겠다’같은 느낌으로 하소연하자 이한은 당황했다.
이한은 교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휴게실에도 물이 차올랐다고? 여긴 마법으로 보호받고 있을 텐데?”
“비바람이 세게 치면 물이 좀 들어오더라구.”
“......”
이한은 왠지 모르게 해골 교장의 악의가 느껴졌다.
물론 아주 오랫동안 마법이 쌓이고 쌓이면서 구멍이 난 걸 수도 있겠지만...
‘설마 목숨에 위험하지 않은 불편한 외부 요소들은 일부러 들여보내는 건 아니겠지.’
“지금 조를 나눠서 탑에 차오른 물들을 퍼내고 있었어.”
“고생이 많군.”
마침 반대쪽에서 작업을 끝내고 돌아온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이 나타났다.
가장 앞에 있던 가이난도는 완전히 물에 빠진 생쥐 꼴이었다.
“여긴 저주 받은 학교야.”
“니가 발 헛디뎌서 넘어진 거잖아...”
“여긴 저주 받은 학교라고.”
“일은 솔직히 황녀님이 다 했는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친구들은 수건으로 가이난도를 쥐잡듯 털어줬다.
털리는 쥐처럼 비명 지르던 가이난도는 이한을 보고 외쳤다.
“이한!!”
“어. 고생했다.”
“완전히 저주받은 학교야! 내가...”
수건을 밀어낸 가이난도는 자신이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물러나지 않았는지, 그리하여 자신이 간식을 먹을 자격이 있다고 열렬히 연설했다.
황위 계승 관련 연설을 할 자리가 있어도 저렇게 열정적이지는 못할 것 같았다.
“그, 그래. 고생했다.”
“???”
뒤에서 마지막으로 지팡이를 휘둘러 퍼낸 물을 창밖으로 털어내고 도착한 아덴아르트는 당황해서 가이난도를 쳐다보았다.
작업하는 동안 넘어지고 굴러서 개헤엄만 쳤는데?
“저도 일했...”
“일단 갖고 온 짐부터 정리하자. 날아간 물자들 장부 갖고 있는 사람?”
“여기 있어.”
“고마워. 요네르.”
“......”
화제가 순식간에 넘어가자 황녀는 가이난도를 원통함 섞인 눈동자로 노려보았다.
뒤늦게 알아차린 가이난도는 당황해서 친구들에게 물었다.
“왜 아덴아르트가 날 노려보는 거지?”
“네가 얼마나 일을 못했으면 그 선량한 황녀님이 저러겠냐. 으휴.”
친구들은 가이난도를 구박했다. 가이난도는 매우 억울해했다.
“아, 아니. 난 최선을 다 했는데... 그리고 일 못 한다고 저렇게 노려보면 차기 제국의 통치자로서 부적합한 거 아니야? 국민들 중에 일 못 하는 사람도 있을 텐데?”
‘너도 황족이야 미친놈아...’
자연스럽게 자기 계승권을 포기하고 말하는 친구의 모습에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할 말을 잃었다.
“괜찮아. 가이난도. 황녀님은 착하시니까 다음에 일 잘 하면 화가 풀리실 거야.”
“다음에도 실수하면 어떡하지?”
“괜찮아. 다음에도 실수하면 우리가 창문 밖으로 던져줄게.”
“...안, 안 하면 되잖아. 안 하면.”
가이난도는 다음에는 반드시 아덴아르트 앞에서 얼쩡거리며 열심히 일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아덴아르트는 속기 쉬운 성격을 갖고 있으니 분명히 용서해주리라!
“식량은 이쪽. 마실 건 저쪽. 옷감은 뒤쪽으로. 시약은 바닥에 놓지 마. 물기 닿으면 골치 아파진다. 참.”
이한은 휴게실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가장 높은 찬장에 보관해놓은 짐꾸러미를 꺼냈다.
기름종이와 방수 마법 처리가 된 가죽으로 감싸진 짐꾸러미를 본 가이난도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먹을 건가?
“다행이군. 책은 멀쩡해.”
“......”
가이난도의 얼굴이 장마처럼 슬퍼졌다.
“책이었어...?”
“어.”
“아니... 책을... 그렇게... 보관해야 했나...?”
가이난도는 저 짐꾸러미를 보호하기 위해 물심양면 모두 최선을 다했던 과거가 생각나 허탈해했다.
밤에 잠을 자다가도 혹시 몰라서 확인하곤 했었는데...
“장마가 오면 당연히 책이 가장 빨리 망가지니까. 책 잃어버리면 다시 필사해야 하는데 그러고 싶나?”
“그건...”
“아니지만...”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평소에 가이난도와 의견이 일치하는 경우가 별로 없었지만 이번만큼은 조금 일치했다.
교과서 좀 잃어버려도 되지 않나??
잃어버리면 공부 좀 안 하면 그만이지...
촤아아아아악-
“또 아래에서 물 들어온다!!”
“!!!”
학생들의 안색이 변했다.
기껏 물을 퍼냈더니 또?
황녀가 일어서려고 하자 가이난도가 그 앞을 막고 외쳤다.
“이번에는 나 혼자 갈게!”
“......”
황녀가 너무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히는 사이 가이난도가 찡긋 눈빛을 보냈다.
황녀는 슬슬 이 이복형제가 도발하는 건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하찮은 견제와 다툼을 벌일 생각은 없었지만 상대가 이렇게 도발한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이건 너무 잦은데. 큰일이군.”
“워다나즈 네 능력으로도 무리냐?”
앙라고가 질색해서 물었다.
아까 배에서 대양(大洋)만큼 물을 퍼낸 이한이었다.
만약 선원들이 봤다면 눈물을 흘리며 스카웃하려고 했을 정도로.
그런 이한도 무리라면...
“아니. 해결할 수는 있는데 다른 탑들도 이렇게 연달아 일어나면 의미가 없지. 내가 다 막을 수가 없잖나.”
‘...미친놈인가...?’
자연스럽게 탑 네 개 모두 챙기는 걸 전제로 하는 이한의 모습에 앙라고는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밖으로 말하지는 못했다.
말했다가 괘씸죄로 흰 호랑이 탑만 제외되면 친구들이 앙라고를 물 밑으로 처박을 테니까.
“지금 개인실은 멀쩡하지?”
“어? 어.”
“다들 중요한 물건들은 개인실에 두고 나와라. 필요한 짐만 챙겨서 대피하자.”
“...어디로??”
* * *
해골 교장은 본관 3층 계단 위에서 차원문이 열리자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나 다를까 폭포수가 쏟아져 나와 불운한 3학년 학생을 미끄럼틀 타듯 아래로 날려버린 것이다.
-빌어먹■ 에인로가■ 저주받■...!
뭐라고 외치는 것 같았지만 해골 교장은 무시하고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물도 못 막다니. 아직 멀었군! 하하!
-주인님?
왜 그러느냐?
-주인님의 제자가 1학년 학생들을 데리고 움직이고 있습니다.
...응?
해골 교장은 예상 밖의 보고에 살짝 당황했다.
이 날씨에 학생들을 데리고 움직이다니.
탑 안에서 몰려오는 적들을 막듯이 물을 열심히 퍼낼 줄 알았는데...
그나마 탑 안이 가장 나을 텐데?
지금 대홍수에서 일단 멀쩡한 곳들은 마법으로 보호받고 있는 학교의 건물들이었다.
하지만 보호는 건물까지였지 학생들은 아니었다. 방금 3학년 학생이 날아간 걸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나마 탑이 학생들 기숙사라서 개인실 정도는 보호가 되어주는 건데...
데스 나이트는 해골 교장의 눈치를 보더니 조심스럽게 보고했다.
-그... 다른 탑 학생들을 데리고... 도서관으로 가는 것 같습니다. 한동안 도서관에서 지내실 것 같은...
......
해골 교장은 솔직히 분노를 넘어서 감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