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3화
“뭐라고 하셨습니까?”
탄주어 위에 앉아있던 이한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만점이라고...
“만점 아닙니다! 만점 아니니까 다들 들어와요!”
로지네 교수는 급히 악마의 입을 막고 학생들을 불렀다.
아직 시험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멋대로 만점을 주다니!
왜 그러는 건가?
“그건 제가 할 소립니다! 아직 시험 시작도 안 했잖아요!”
하지만 저 정도면 시험을 하는 의미가 없...
오리퓰라스는 진심으로 억울해했다.
나름대로 로지네 교수를 배려해서 일을 줄여주려고 한 거였는데!
“시험은 봐야 합니다.”
설마 마법사여. 자네도 불필요한 허례허식을 단지 관습이란 이유만으로 지키는 사람인가?
“...아직 확인 안 된 부분 많습니다.”
로지네 교수는 흔들리지 않았다.
물론 방금 오리퓰라스가 만점이라고 외친 건 어느 정도 이해가 가긴 했다.
저 정도 되는 탄주어를 막힘없이 조종해서 강의실 앞까지 도착한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대단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중간고사의 평가 항목은 하나만 있지 않았고 여러 가지를 종합적으로 봐야했다.
“일단 어디서, 어떤 상황에서 발견했는지...”
어디서 만났나?
“이한이 사제새... 사제님들하고 소환했어요.”
만점!! 만점!!!
오리퓰라스는 감탄해서 박수를 쳤다.
제국의 마법사들에게 묶여 백 년 넘게 일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놀라운 모습은 흔치 않았다.
“가만히 있으라고 했습니다!”
로지네 교수는 이를 빠득 갈며 오리퓰라스의 입을 막았다. 악마를 휘감은 계약이 발동되며 오리퓰라스의 혓바닥이 천장에 붙어버렸다.
으으읍! 으으읍!
“...계약은 어떻게 했나요 다들?”
로지네 교수는 넘어가려다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솔직히 너무 궁금했던 것이다.
소환하는 것까지는 정말 운이 좋아서 가능했다 치자.
물론 이것도 지금 이해가 잘 안 가긴 했지만...
그런데 정말로 계약은 어떻게 한 걸까?
‘탄주어를 저렇게 조종할 수 있는 계약이라면 무슨 계약이지?’
“이한이 교장 선생님 방 공격할래? 아니면 우리 도와줄래? 했어요. 그러니까 도와준다고 하더라구요.”
짝짝짝짝짝짝짝!
입이 막힌 오리퓰라스는 감격한 얼굴로 박수갈채를 날렸다.
한 학기 배운 학생이 저런 고급 기술을 구사하다니.
소환한 존재가 아슬아슬하게 할 수 있지만 차마 고르기 싫은 선택을 제안한 다음, 진짜 선택으로 유도하는 고급 기술.
어리숙하고 경험 부족한 타 차원의 존재들이 한 번 당하고 나면 치가 떨려서 마법사 혐오증이 생긴다는 그 기술이었다.
“...이한 학생은 그냥 중간고사 안 봐도 되니까 옆에서 참관하고 있어요.”
“예?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
물기를 닦아내고 있던 이한은 당황했다.
평소에는 언제나 활기찬 목소리로 학생을 칭찬해주던 로지네 교수가 이렇게 지친 모습이라니.
‘내가 무슨 실수라도 했나?’
* * *
다행히 아니었다.
상황 파악을 끝낸 이한은 로지네 교수의 지침에 공감했다.
“교장 선생님이 정말 너무하십니다.”
“물, 물론 교장 선생님도 생각이 있으시죠!”
지쳐 있던 로지네 교수는 이한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교수의 역할은 학생이 교장 욕할 때 말리는 거였지 부추기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생각이 있으실 겁니다. 학생들에게 고통을 주려는 생각 말입니다.”
“......”
로지네 교수는 이한이 혹시 해골 교장한테 한 대 맞고 왔나 싶었다.
-그르르르륵 마법사! 그르르르륵 죽인다!
“제... 제가 가둔 것도 아닌데 왜 저한테 그러세요! 이, 이한 부를 겁니다!”
가이난도는 사색이 되어서 우리 안에 갇힌 몬스터에게 외쳤다.
물론 몬스터는 이한의 이름을 알아듣지 못하고 사납게 울부짖었다.
흐음... 협박은 좋은 선택이지만, 상대방이 알 이름을 했어야 한다네.
오리퓰라스가 옆에서 점수를 주며 조언을 했다.
상대방이 알지 못하는 이름이라면 최소한 상대방이 짐작이라도 가게 설명을 해야지.
“내, 내 뒤에는 에인로가드의 모든 마법학파를 수강하는 미친 친구가 있어!”
-그르르르륵 죽인다! 그르르르르륵!
아쉽게도 몬스터는 알아듣지 못했다. 오리퓰라스는 아쉬워하며 점수를 끝냈다.
다음!
“보아하니 선생님께서는 보석을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 제가 보석을 조금 갖고 왔습니다. 저와 계약해주신다면 다음 주에 이와 같은 양의 보석을...”
상대의 호오를 빠르게 파악하는 것도 중요한 일일세. 많이 늘었군그래.
“감, 감사합니다.”
다만 저런 존재들은 탐욕스러워서 주기적으로 받는 약속을 좋아하지 않는다네. 물론 가끔 수락할 때도 있지만, 그럴 때는 오히려 더 위험하지. 계약자를 죽이고 거위의 배를 갈라 황금을 꺼내려고 하는 놈도 있거든.
“......”
학생들이 시험을 보는 사이 이한은 강의실 앞 복도에서 첨벙첨벙 물을 마시고 있는 탄주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
탄주어는 대답하지 않았다. 살짝 토라진 것 같은 기색이었다.
“저, 이 시험이 끝나면 다시 다음 강의 장소로 이동해야 하는데.”
...힘이... 힘을 회복해야...
탄주어는 진심으로 싫은듯 꿀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물을 옆으로 뿜어댔다.
어떻게든 쉬고 싶은데 이한이 그 마음을 알아줬으면 하는 미묘한 눈치가 느껴졌다.
“회복이라. 오리퓰라스 님. 혹시 배를 삼키는 자를 회복시킬 만한 방법이 있을까요?”
학생들을 평가하던 오리퓰라스는 이한의 부름에 빠르게 달려왔다.
제국 마법사들이 부탁하는 일들은 대부분 지루해서, 이렇게 즐거운 일이 있을 때 충분히 즐겨둬야 했다.
언제 또 어린 마법사가 탄주어를 계약으로 부려먹는 모습을 보겠는가?
악마로서 이런 희극적인 순간이야말로 달콤한 행복이었다.
회복이라! 쉽지만 어려운 일이지. 생전의 사체도 좋고, 혹시 소환할 때 썼던 시약이 남은 게 있나?
“소환하면서 다 사용했습니다.”
아쉽군.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지.
탄주어 정도 되는 거대한 몬스터를 소환하는데 시약이 남았다면 그게 더 놀라운 일일 터.
오리퓰라스는 놀라지 않았다.
‘어라?’
옆에서 듣고 있던 로지네 교수는 의문에 빠졌다.
1학년 학생들이 탄주어 소환에 쓸 시약은 어디서 구한 거지?
‘구하기 쉽지 않을 텐데?’
이런 말을 꺼내기 조심스럽긴 하네만... 마력은 어떤가? 자네의 마력이 많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오리퓰라스는 신사다운 악마답게 조심스러웠다.
마법사에게 마력은 생명 같은 것.
아무리 마력이 많다고 하더라도 탄주어 같은 거대한 몬스터의 힘을 회복시킬 정도는 쉽지 않았다.
“마력이면 됩니까?!”
이한은 깜짝 놀랐다.
아니 그런 쉬운 방법으로?
왜 놀라는 건지 모르겠네만 질과 양이 충분하다면 가능하지.
“혹시 더 회복시키는 것도 가능합니까? 지금 불완전한 영체 상태에서...”
탄주어는 갑자기 쿨럭이며 입과 등에서 물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뛰어난 영수(靈獸)인 만큼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낀 것이다.
그건 불가능하네. 소환되었을 때의 모습을 넘어선 회복은 법칙에 어긋나니까.
“아쉽군요.”
그보다 정말로 괜찮나? 지금은 한계를 넘어선 회복이 아니라 일반적인 회복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네만...
일반적인 회복도 쉽지 않아 보였는데 저런 소리를 하다니.
오리퓰라스는 걱정이 됐다.
만약 이 어린 마법사가 쓰러지기라도 해서 탄주어가 계약에서 풀려난다면 얼마나 아쉽겠는가.
“괜찮습니다. 배를 삼키는 자여. 당신의 헌신에 감사드리며, 당신을 회복하기 위해 제 마력을 바치겠습니다.”
그러지 말...
탄주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마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쳐서 늘어져있던 탄주어의 뼈가 점점 빛나더니 영체로 구성된 육신의 색도 활력을 되찾았다.
......
“회복된 거 맞습니까?”
탄주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오리퓰라스가 대답해줬다.
자네는 훌륭한 소환사가 될 걸세. 부디 오래오래 다른 존재들을 괴롭혀주게나.
* * *
시험이 끝나자 학생들은 탄주어에 올라타기 위해 줄을 섰다.
지친 탄주어는 학생들의 감사 인사에도 대꾸 하나 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다들 정말 잘했어요!!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도 이만큼 해냈으니, 분명 다른 상황에서는 더 잘 할 수 있을 거예요!!”
로지네 교수는 시험을 끝낸 학생들을 힘차게 배웅했다.
고생하고 있는 학생들은 이런 인사를 받을 자격이 있었다.
플뤼워크 교수. 혹시 47혼령창고에 있는 상자를 가져갔소?
“네. 심장포식자를 우리에 가두느라 필요해서...”
무쇠대가리들을 위해 꼭 그런 비싼 놈을 쓸 필요가 있나 싶소만...
둥둥 떠서 내려오던 해골 교장은 강의실 앞에 소환되어서 처량하게 기다리고 있는 탄주어를 보고 경악했다.
해골 맙소사! 저게 뭐냐!!
“???”
“??????”
줄 서 있던 학생들은 해골 교장의 비명에 당황했다.
“교장 선생님. 그... 탄주어잖아요. 탄주어 모르세요?”
해골 교장은 눈빛만으로 가이난도를 거꾸로 매달았다. 거꾸로 매달린 가이난도가 억울함 섞인 비명을 질렀다.
대체 누가 어디서 탄주어를 구한 거냐!
“...모릅니다!”
“저흰 모르는 일입니다!”
학생들은 용감하게 맞섰다.
에인로가드에서 배운 것 중 하나가 바로 ‘증거가 없다면 꿋꿋하게 우겨라’였다.
하지만 해골 교장은 애초에 몰라서 물은 게 아니었다.
워다나즈!
“예?”
대체 어떻게 구한 거냐?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
해골 교장은 순간 학생들한테 누누이 말해왔던 ‘잡히지 않으면 무죄다’ 원칙을 깨고 제자의 멱살을 잡을 뻔했다.
누구 제자 아니랄까봐...
화내는 게 아니니 솔직하게 털어놔라. 순수한 호기심으로 묻는 거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탄주어는 그냥 표류하다가 만났습니다.”
...비블레지? 비블레를 시켜서 손에 넣은 거겠지?
해골 교장은 유도심문하듯이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눈앞의 제자는 만만치 않았다. 역시 표정 변화 없이 대답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
해골 교장은 의심쩍은 눈빛으로 이한을 노려보았다.
지금 탄주어를 뺏긴 것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었다.
아니 물론 그것도 어이가 없긴 했지만...
‘대체 어떻게 교수 휴게실로 들어와서 훔친 거지?’
해골 교장이 알고 싶은 건 방법이었다.
그걸 알아내지 못한다면 교수 휴게실이 또 뚫릴 수 있었다.
비블레... 분명 비블레야. 비블레 말고는 없어.
해골 교장은 반쯤은 확신하듯이, 반쯤은 떠보듯이 말했다.
이한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럴 때는 가장 가만히 있는 게 좋았다.
아주 훌륭하군. 하지만 기억해둬라. 탄주어는 아주 사나운 맹수라...
분해서 뭐라도 저주하려던 해골 교장은 풀이 죽어서 기다리고 있는 탄주어를 보았다.
계약에 제대로 묶였는지 별 잡일을 다 하고 있었다.
저런 머저리 같은 놈이! 네놈이 그러고도 바다의 영수더냐?!
탄주어는 갑자기 나타난 대마법사의 모욕에 슬픈 표정으로 물을 뿜었다.
안 그래도 서러운데...
그래. 이번은 인정해주마. 하지만 언젠가는... 언젠가는 너도 함정에 빠지게 될 거다. 알겠느냐?
“명심하겠습니다.”
흥. 그 때 두고 보자. 징벌방의 가장 지루하고 따분한 자리를 네놈을 위해 준비해 둘 테니까!
해골 교장은 음산한 소리를 내며 저 멀리 사라져갔다.
뒤에 있던 학생들은 속으로 생각했다.
‘...교수 휴게실을...’
‘...털었다고??’
설마 싶어서 친구들이 경악해하는 사이, 오리퓰라스가 입을 열었다.
이만점, 이만점을...!
“쉿. 조용히 하십시오.”
로지네 교수는 날아가는 해골 교장의 눈치를 보며 오리퓰라스를 닥치게 만들었다.
잔뜩 심술이 난 해골 교장을 도발하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탄주어 소환에 필요한 재료를 어디서 구했나 했더니...’
로지네 교수는 조용히 A+ 옆에 + 하나를 더 그려 넣었다.
뛰어난 학생을 향한 존중의 표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