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8화
‘큰일났군.’
이한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생각했던 것보다 시험 문제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사실 <볼츠만의 부름>에 대한 내용은 괜찮았다.
이한만큼 이번 축제에 대해 잘 아는 학생도 드물었으니까.
이곳저곳 뛰며 준비를 가장 많이 한 만큼 어떻게 흘러갔는지 완벽히 파악하고 있었다.
문제는 스스로 보완해야 할 점이었다.
이번 축제에서 어떤 마법의 부족함을 느꼈는가?
‘아니, 솔직히 여기서 더 나아갈 수가 있나?’
종이 새도 정말 최선을 다해서 해냈고, 골렘도 조종했고, 할 필요 없는 흑마법까지 보여줬다.
이한은 진지하게 여기서 어떻게 마법을 개량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여기서 더 개량하려면 거의 4, 5학년 수준 아닌가?
그렇다고 솔직하게 쓴다면...
‘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닌 것 같다.’
밀레이 교수가 진솔하게 쓰라고 했지만, 이한은 교수의 말을 전부 믿을 정도로 순진한 사람이 아니었다.
보고서에 ‘저는 너무 대단했기 때문에 더 이상 보완할 점이 없습니다’라고 쓰는 학생은 어느 교수도 봐주지 않았다.
‘어떻게든 짜내야 한다!’
이한은 필사적으로 생각에 잠겼다.
지금 수준에서 익히는 건 무리더라도, 어떻게든 그럴듯하게 포장이 될 목표를 찾아야했다.
‘이상하다. 워다나즈 녀석 왜 저러지?’
뒤에 앉은 살코는 이한의 모습에 의아해했다.
축제를 허술하게 준비한 학생이라면 모를까, 이한은 학생들 중에서도 가장 많은 업무를 맡은 학생이었다.
그런 이한이 이런 보고서 하나에 저렇게 쩔쩔맬 줄이야.
‘내가 무언가 놓친 것인가?’
살코는 자신의 보고서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별 문제가 없어보였지만, 다시 보니 너무 쉽게 쓴 것 같은 부분도 조금 있는 것 같았다.
‘안 되겠다. 다시 써보자.’
슥슥-
이한이 작성을 끝내지 않자 주변에 앉은 학생들은 슬며시 눈치를 보더니 다시 쓰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밀레이 교수는 눈썹을 치켜세웠다.
‘축제 보고서가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닐 텐데?’
뭐지?
* * *
시험이 끝나고 학생들이 강의실에서 나가자, 밀레이 교수는 바로 확인을 시작했다.
원래라면 다른 일들을 끝내고 했겠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학생들이 유독 끙끙대며 다시 쓰고 새로 쓰고 했던 것이다.
소환 마법에 재능을 보이는 우등생들도 그런 모습을 보였던 만큼, 엄격한 밀레이 교수라 하더라도 호기심이 안 생길 수 없었다.
“흐음...”
밀레이 교수는 단안경을 살짝 올리며 보고서에 시선을 집중했다.
이번 볼츠만의 부름 축제에서 저는 같은 소환 마법이라 하더라도 그 안에서는 수없이 많은 분파와 그게 걸맞은 가능성들이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소환 마법이란 길을 먼저 걷고 있는 선배 마법사들의 마법은 제 부족한 점을 어떻게 채워나가야 할지 이정표가 되어줬으며...
‘좋군.’
밀레이 교수의 입가에 미소가 맴돌았다.
단순히 축제를 즐기기만 한 게 아닌 깊은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워다나즈의 마법을 보고서 골렘도 저렇게 활용이 가능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저 또한 골렘을 저런 방식으로 활용해보려고 합니다...
‘...아니야...’
밀레이 교수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물론 도전하는 건 좋은 거였지만 일반론적으로 누가 봐도 답이 없어 보이는 도전도 있는 법이었다.
그리고 골렘을 활용해서 잡일을 시도하는 연구는 후자에 가까워보였다.
밀레이 교수는 이 제자가 스스로 깨닫고 물러나거나 혹은 자신만의 깨달음을 얻기를 빌었다.
...워다나즈의 마법을 보고서 저는 깨달았습니다. 부여 마법과 흑마법의 복수 전공이 소환 마법을 더욱 더 강력하게 만들어준 겁니다. 2학년 때 부여 마법과 흑마법 관련 강의를 몇 개 수강해 볼 생각입니다...
‘이것도 아니야...’
밀레이 교수는 살짝 머리가 지끈거렸다.
물론 여러 학파를 전공하는 건 겉으로 보면 화려해보일 수 있어도 잘못 건드렸다가는 마법사의 영혼이 붕괴될 수 있는 위험한 길이었다.
교수는 부디 이 제자가 적절한 선에서 조절하길 빌었다.
탁-
몇몇 예상 못한 내용을 제외한다면 그래도 보고서의 수준은 대체로 높았다.
이 정도면 밀레이 교수의 예상보다 훨씬 훌륭했다.
‘뛰어난 학생들끼리 서로 절차탁마했기 때문이겠군.’
밀레이 교수는 학생들의 성취에 눈을 감고 흐뭇해했다.
서로 다른 학년을 비교하는 건 교수로서 좋은 행동이 아니었지만, 이번 1학년이 밀레이 교수가 가르친 1학년들 중 손꼽힐 정도로 높은 성취를 내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힘들었다.
그런 이유에는 이한 워다나즈 같은 학생도 분명히 들어가 있으리라.
물론 다른 학생들은 이한이 고민하는 걸 보고 괜히 지레 겁먹어 헛짓거리를 한 거였지만, 밀레이 교수가 그런 사정까지는 알아차릴 수는 없었다.
밀레이 교수는 이한의 보고서를 펼쳤다. 빈틈없는 내용에 밀레이 교수의 눈빛이 다시 흐뭇함으로 살짝 반짝였다.
학문에 능통한 마법사라면 이런 보고서를 보는 게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지 잘 알았다.
축제 때 일어난 사건들을 정확한 시간과 장소로 기록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번 축제의 서론, 사용된 마법과 결과, 고찰까지 깔끔하게...
그리하여 저는 제가 아직 여러 부분에서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
그러므로 무엇보다 먼저, 소환해서 조종할 수 있는 언데드 숫자를 늘려보려고 합니다. 물론 양에 집중하느라 질을 도외시할 수는 없으니 각 개체의 강함 또한 유지할 생각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종이 새를 더욱 개량해서 지금 부족한 내구도를 올리고... (중략) 변환 마법을 융합해서... (중략) 골렘 또한 직접적으로 개발을...
‘????’
밀레이 교수의 침착한 얼굴이 무너졌다. 밀레이 교수는 눈을 깜박이며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그러나 그런다고 내용은 달라지지 않았다.
교수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말려야 하지... 않나?’
정말 어지간해서는 학생의 선택에는 개입하지 않고, 실패하더라도 거기서 배우는 게 있을 거라고 존중해주는 밀레이 교수였지만 지금 이 보고서는 좀 심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1학년이 잡을 목표는 아니었던 것이다.
밀레이 교수는 따로 불러서 상담을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결국 결심을 내렸다.
‘아니다.’
다른 학생이었다면 정말 불러서 상담을 해봤겠지만 워다나즈는 예외였다.
워다나즈라면 분명 자신이 할 자신이 있어서 이런 계획을 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밀레이 교수는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제자를 쓸데없이 방해하는 눈치 없는 스승이 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다른 교수들한테만 말해줘야겠군.’
엄격하고 감정 표현이 드문 밀레이 교수였지만 그렇다고 제자들을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다른 교수들이 워다나즈의 목표를 안다면 분명 암암리에 다들 도와주리라.
* * *
“후.”
이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복도에서 마주친 밀레이 교수가 만점이라고 짧게 말해준 것이다.
‘목표를 상향해서 잡은 보람이 있군.’
처음에는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이렇게 목표를 높게 잡아도 되나?’싶었지만, 한 번 작성하다보니 못할 것도 없겠다 싶었다.
어차피 보고서를 쓴다고 해서 이한이 그걸 다 해야 한다는 법도 없지 않은가.
밀레이 교수가 해골 교장도 아니고 못 지켰다고 과거로 돌아가 점수를 깎지는 않을 것이다.
“네가 워다나즈냐?”
“...?!”
이한은 깜짝 놀랐다.
상대가 물 위를 걸어와서가 아니었다. 물 위는 아까 밀레이 교수도 똑같이 걸어 다녔다.
이한이 놀란 건 상대가 이한의 선배였기 때문이었다.
‘뭐지? 3학년 같은데? 3학년이 1학년 앞에 모습 드러내도 되나? 해골 교장의 함정인가?’
“큰 키. 조각처럼 잘생긴 얼굴. 막대한 마력량...”
말과 함께 선배는 작은 단안경 하나를 꺼내서 이한을 투시했다.
쨍그랑!
그러자 단안경이 즉시 박살났다. 선배는 놀라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것 같은데. 워다나즈 아닌가?”
“맞습니다. 무슨 일로 저를 찾으시는 겁니까?”
“난 안파곤이다. 버두스 교수님 대신 이번 부여 마법 시험을 맡게 됐다. 잘 부탁하지.”
“...아하!”
이한은 그 짧은 말로도 상황파악을 해내는 묘기를 선보였다.
그러니까 지금...
‘결국 해골 교장이 버두스 교수를 가뒀구나!’
버두스 교수가 평소에 했던 일들을 생각해보면 해골 교장이 너그럽게 봐줄 리 없었다.
교수가 뭐라고 항변하든 간에 반성의 의미로 징벌방에 처박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중간고사 기간이라고 배려해 줘봤자 버두스 교수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을 테니 마찬가지로 해골 교장도 신경 쓰지 않았으리라.
덕분에 이제 버두스 교수의 제자가 이렇게 대신 시험을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 찾아온 것이다.
“...?”
파악을 끝낸 이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왜 저한테 오신 겁니까?”
“너하고 같이 준비해야 하니까.”
“...예?”
이한은 귀를 의심했다.
에인로가드에는 말이 안 되는 일들이 많긴 했다.
바실리스크를 키워서 직접 상대하라고 하거나, 혹은 2학년들과 같이 시험을 보라고 하거나...
하지만 시험을 준비하란 건 조금 더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걸 제가 왜...? 누가 결정하신 겁니까?”
“교장 선생님과 버두스 교수님.”
“저는 그럼 뭘로 시험을 봅니까?”
“넌 이미 만점이다.”
안파곤은 편지를 꺼내서 이한에게 내밀었다.
나 좀 꺼내줘!!!!!
-버두스
“...???”
“앞면 말고 뒷면 봐라.”
이한은 편지를 뒤집었다.
버두스 교수의 사정 때문에 안파곤 네가 1학년 시험을 준비하도록. 만약 귀찮다고 대충 준비했다가는 저번에 허가를 내준 실험을 취소하겠다. 대충 준비해놓고 최선을 다했다고 우기는 개짓거리를 막기 위해 1학년 학생 한 명을 붙여줄 테니 같이 준비해라. 시험을 딱히 보지 않아도 원래 만점인 녀석이니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물론 넌 버두스 교수만큼이나 신경을 쓰지 않겠지만.
-오수 고나달테스
“...아, 아니. 무리입니다.”
“무리냐?”
안파곤은 후배한테 화를 내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그냥 지금 상황을 빠르게 파악하겠다는 듯이 되물을 뿐이었다.
“예.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제가 아직 친구들의 실력을 확인할 시험을 만들 실력은 아닙니다.”
“시험은 내가 만드는데.”
안파곤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이한을 쳐다보았다.
“너는 보조 역할이고.”
“...아!”
이한은 탄성을 내뱉었다.
하긴 생각해보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1학년한테 시험 과제 만들라고 할 정도로 에인로가드가 막장이 아니었다.
‘그냥 돕고 점수 만점 받는 거면 아주 남는 장사다.’
이한의 표정이 빠르게 돌아왔다. 재능 넘치는 1학년 후배는 안파곤을 보며 말했다.
“최선을 다해 도와드리겠습니다.”
“고맙다.”
그러나 이미 안파곤은 이한이 조금 이상한 후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 * *
정신이 돌아오자 이한은 이 상황이 생각보다 괜찮은 기회라는 걸 깨달았다.
선배와 이야기 할 기회가 에인로가드에서는 그리 많지 않았으니까.
“선배님. 몇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래.”
“버두스 교수님 밑에서 배우시는 겁니까?”
“어.”
“교수님께서는 잘 가르쳐주십니까?”
“아니.”
안파곤은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즉답했다.
이한은 살짝 감탄했다.
‘역시 그 교수에 그 제자답다.’
만약 버두스 교수의 제자가 ‘잘 가르쳐준다’라고 했다면 이한은 더 놀랐을 것이다.
“그러면 선배님께서는 어떻게 부여 마법을 배우고 계십니까?”
“책과 연습과 실험으로. 교수님은 별 쓸모가 없어. 애초에 마법은 혼자 배우는 거니까.”
교수가 쓸모없다고 말한 덕분에 안파곤은 이한의 호감을 샀다.
정작 본인은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갑자기 시험 준비를 맡으셔서 곤란하시겠습니다.”
“곤란하지는 않아. 그냥 빨리 끝내고 내 실험을 준비하고 싶을 뿐이지.”
“그런데 버두스 교수님께서는 정확히 어디 갇혀 계신 거죠?”
“내가 어떻게 알아? 관심 없어.”
“......”
이한은 미소 지었다.
다른 건 몰라도 버두스 교수 밑의 제자들 분위기는 참 좋은 것 같았다.
‘서로 관심 없는 이 분위기. 최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