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0화
그러거나 말거나 이한은 안파곤에게 존경의 시선을 보냈다.
“언제나 가장 중요한 건 기본 아닙니까.”
“이건 기본하고 상관이 없는 것 같은데...”
안파곤이 중얼거리는 사이 이한은 다시 마법진을 고쳤다.
비효율적이어서 제거했던 부분들을 다시 추가하고 문양을 완성시키자, 얼추 망가지기 쉬운 아티팩트가 됐다.
“어떻습니까?”
“훌륭해. 계속 해도 좋다.”
두 학생은 작업을 재개했다.
안파곤은 이한의 속도를 보고 예상 작업 시간을 변경했다.
‘밤이 되기 전에 끝날지도 모르겠군.’
밤을 새지 않아도 된다면 새벽에 마법 증폭 수차 아티팩트 작업을 재개할 수 있었다. 안파곤의 얼굴이 밝아졌다.
탕탕탕탕탕-
“안 쉬냐?”
“예? 아. 마력 남아서 괜찮습니다.”
“그래.”
안파곤은 후배한테 휴식을 취하라고 하려다가 괜히 참견하기 싫어서 자기만 멈췄다.
그러나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마력 너무 과하게 소모하면 위험한데.’
땅땅땅땅땅땅땅!
“...?”
그러나 후배는 지치지 않는 체력으로 아티팩트를 찍어냈다.
안파곤은 놀라워했다. 그리고 예상 작업 시간을 한 번 더 변경했다.
‘...저녁에 끝날지도?’
만약 저녁에 끝난다면 마법 증폭 수차 아티팩트 작업을 하기 전에 검은 거북이 탑 학생식당에 들려서 간단한 식사를 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선배님.”
“이제 쉬려고?”
“아니요. 여기 있는 재료 다 썼는데 새 궤짝이 어디에 있습니까?”
“......”
다사다난한 에인로가드의 환경 때문에 녹슬었던 안파곤의 심장이 살짝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설마...
설마 저녁 전에 끝나나?
* * *
정말로 저녁 전에 끝났다.
안파곤은 기쁨을 넘어서 아직 이 현실을 믿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다 된 것 같습니다. 선배님.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 그래라.”
“그런데 선배님.”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끝나서 살짝 여유가 생긴 이한은 질문을 던졌다.
“부여 마법을 배우는 다른 분들은 안 계십니까? 왜 선배님만?”
“내가 제일 사교적인 편이라.”
“......”
이한은 순간 선배가 농담하는 줄 알고 웃어야 하나 잠깐 고민했다.
“...그... 그렇군요.”
“웃어도 상관없어. 에인로가드에서 우리 학파가 제일 사교성 없는 편이긴 하니까.”
“사교 활동이 뭐 필요하겠습니까. 마법사에게 중요한 건 마법이죠.”
“마법사에게 중요한 건 지원금을 따내올 능력 아니냐?”
“어느 멍청한 작자가 그런 말을 합니까?”
“교장 선생님이?”
“그럴 줄 알았습니다. 신경쓰지 말죠.”
이한은 당황하지 않고 바로 맞받아쳤다.
1학년인데도 해골 교장의 정체를 꿰뚫고 있는 현명함에 안파곤은 다시 한 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누가 보면 한 4학년쯤은 된 줄 알 것이다.
“하긴 무시가 가장 좋긴 하지...”
“예.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한은 인사를 마치고 다락방에 있던 궤짝 두 개를 짊어지고 떠났다. 안파곤이 안 쓰는 시약들을 모아놓은 궤짝이었다.
1학년 후배가 궤짝 두 개를 알뜰하게 챙겨간 것도 꽤 보기 드문 광경이었지만, 안파곤은 오늘 있었던 일이 너무 충격적이라 미처 그 부분은 신경 쓰지 못했다.
“...내가 꿈을 꿨나...”
안파곤이 중얼거리는 동안 다락방의 문이 다시 열렸다.
부여 마법을 전공하는 다른 학생들이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다 끝났나?”
“그래. 일찍 끝났다.”
학생들이 다락방으로 올라왔다.
2학년도, 3학년도, 4학년도 있었지만 모두 다 공통점이 있다면 서로를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번 정령 홍수가 나지 않았다면 이렇게 다른 학생의 공방을 빌리지도 않았으리라.
“왜 일찍 끝났냐면...”
“안 궁금한데.”
“죄송합니다. 안파곤 선배. 혹시 바로 작업에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
안파곤은 말하려다가 말았다.
평소 수다를 좋아하진 않았지만 이렇게 막히니 낯선 감정이 가슴속에서 살짝 치솟았다.
바로 분노였다.
“...그래.”
안파곤은 말하는 대신 자기 혼자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다른 학생들이 모르는 놀라운 사실을 자신 혼자 알고 있다고 생각하니 괜히 통쾌했다.
“...잠깐!! 불빛!!!”
자리에 앉으려던 안파곤은 아직도 꺼지지 않고 떠있는 빛의 구체를 보고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다른 학생들이 안파곤을 빤히 쳐다보았다.
“안파곤 선배. 죄송한데...”
“조용히 좀 하자.”
“...그래.”
안파곤은 이놈들한테는 절대로 말해주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 * *
“교장 선생님. 버두스 교수님 어디 가셨어요?”
갇혔다니까.
해골 교장은 귀찮다는 듯이 가이난도한테 대꾸했다.
가이난도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인 다음에 다시 돌아와서 해골 교장에게 또 물었다.
“교장 선생님. 버두스 교수님 어디 가셨어요?”
갇혔다니까! 요 무쇠대가리야. 왜 자꾸 똑같은 질문을 던지는 거냐? 날 도발하는 거냐?
“아, 아니요. 그냥 교수님이 갇혔다는 말을 자꾸 들으니까 기분이 좋아서요.”
......
해골 교장은 가이난도를 거꾸로 매달고 휙 가버렸다.
작업을 마치고 돌아온 이한은 매달린 가이난도를 보며 물었다.
“그런데 넌 부여 마법도 안 듣잖아?”
“그냥 교수님이 갇혔다는 거 듣는 게 좋아서...”
“그, 그래.”
이한은 매달린 가이난도를 떨궜다. 물 위로 철퍽 떨어진 가이난도가 앓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버두스 교수님은 자꾸 방학 때 찾아와서 사람 귀찮게 하잖아.”
가이난도가 툴툴대는 소리에 이한은 오랜만에 공감했다.
‘모처럼 맞는 말을 하는군.’
방학 때 찾아왔던 걸 생각하면 버두스 교수는 좀 더 갇혀 있어도 될 것 같았다.
“어디 갔다 왔어? 헉. 잠깐. 나 알 것 같은데.”
“오...”
이한은 가이난도가 모처럼 날카로운 모습을 보이자 살짝 기대했다.
확실히 지금 이한의 겉모습을 보면 추리할 요소들이 많았다.
각종 시약 얼룩이 묻은 장갑과, 망토 위에 붙어 있는 금속 부스러기 등등.
누가 봐도 아티팩트 관련 작업을 하고 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버두스 교수님 구하러 갔다 온 거지?! 야. 가지 마! 구해서 뭐해!”
“...안 갔는데. 그냥 부여 마법 중간고사 시험 대신 준비하고 온 거다. 교수님이 안 계시잖아.”
“아. 그래?”
가이난도는 그냥 납득했다.
다른 친구들이라면 ‘야 이 멍청아 그냥 넘기면 어떡해! 더 물어봐야지!’라고 했을 소리였지만 가이난도는 그냥 넘어갔다.
“버두스 교수님 구하지 마. 구해줘서 좋을 거 하나도 없다니까.”
“너 지금 방학 때 저택에 찾아온 거 하나 때문에 이러는 거지?”
“응.”
가이난도는 조금의 부끄러움도 없이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한은 살짝 감탄했다.
“그래. 구하러 갈 생각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라.”
“버두스 교수님이 황금 쌓아서 준다고 해도 가지 마.”
“...으음.”
“이한...!”
가이난도는 방학의 즐거움을 뺏은 교수를 황금으로 용서하려는 친구를 안타까워했다.
자존심은 황금보다 중요하지 않던가!
끼이익-
도서관으로 돌아온 둘은 각자 자기 할 일을 하기 위해 흩어졌다.
가이난도는 친구들 사이에 슬쩍 앉았다.
두꺼운 마도서를 펴놓은 공부 모임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그 밑에서 슬쩍슬쩍 카드 게임을 벌이고 있는 즐거운 모임이었다.
“어디 갔다 왔냐?”
“낚시하러 갔다가 교장 선생님한테 매달렸어.”
“저런.”
다른 탑 학생들은 가이난도가 매달렸거나 말거나 별 관심이 없었다.
그 중 한 명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어떻게 풀려났는데?”
“이한이 지나가다가 풀어줬어.”
“넌 스스로 할 줄 아는 게 없냐?”
“야. 대신 해줄 사람을 옆에 두는 게 더 대단한 거 아니야?”
“......”
“......”
옆에 있던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이 카드를 가이난도 얼굴에 집어던졌다. 가이난도가 새된 비명을 질렀다.
“대단한 거 맞잖아! 대단한 거 맞...”
“맞기 전에 그만해라.”
“워다나즈는 왜 지나갔는데?”
“부여 마법 시험 준비하고 오느라.”
가이난도는 대충 대답하고 덱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저녁 식사가 나오기 전까지 최대한 판을 많이 돌리려면 빨리 덱을 완성시켜야했다.
저주 덱은 꺼내는 순간 친구들이 상대를 안 해줄 테니, 속일 수 있는 덱 하나와 그 밑에 저주 덱을 슬쩍 넣어서...
“뭐? 부여 마법 시험을 준비하고 왔다고?”
“왜 밖에서 준비했지? 안에서 공부해도 됐잖아.”
학생들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가이난도가 짜증난다는 듯이 대답했다.
“멍청이들아. 공부 말고 시험을 직접 만들었다고. 마법사 카드 넣어야 하니까 조용히 해.”
“......”
“......”
학생들이 침묵하자 가이난도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이 친구들이 황족을 존중하는 법을 배운 모양이었다.
쾅!
“뭔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학생 중 한 명이 벌떡 일어섰다. 그 서슬에 탁자가 크게 부딪치며 흔들렸다. 가이난도가 기껏 정리해놓은 카드뭉치가 바닥에 흩어졌다.
황자의 비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학생들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게 말이 되나? 아, 아니. 워다나즈 놈이 말도 안 되는 놈이긴 한데 같은 학년인데?”
“내가 뭐라고 했냐? 워다나즈는 가문의 비전을 입학 전부터...”
“내 카드 흩어졌잖아! 이 자식들아!”
“지금 그게 중요하냐?!”
“우리가 치워줄 테니까 부여 마법 시험 이야기나 해봐! 부여 마법 시험 봐야 한다고!”
물론 가이난도한테 제대로 이야기 할 능력은 없었다. 학생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사이 이한이 가까이 도착했다.
“다들 뭐하냐?”
“워다나즈! 부여 마법 시험을 네가 출제했다는 게 사실이냐!?”
학생들은 충격으로 떨리는 눈동자로 이한을 쳐다보았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선배가 출제했지. 난 옆에서 잡일 정도 도왔고.”
“...아!”
그제야 납득한 학생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상식이 붕괴하지 않았던 것이다.
“역시 황자 놈의 호들갑이었잖아.”
“거봐. 내가 뭐라고 그랬냐?”
훈훈하게 마무리되나 싶었지만 불행히도 그러지 않았다.
이한은 바닥에 떨어진 마법사 카드 더미들을 보고 물었다.
“이건 뭐냐?”
“......”
“...어... 그게...”
“책 들어봐라.”
이한의 목소리는 평이했지만 그 안에는 섬뜩한 경고가 담겨있었다.
흰 호랑이 탑 학생은 뱀에게 노려진 새처럼 얼어붙었다.
“그... 그... 왜?”
“들어. 맞기 전에.”
책을 들자 그 안을 도려내고 숨겨놨던 마법사 카드가 나왔다. 이한은 지팡이로 머리통을 때렸다.
“악!”
“다음. 넌...”
다음 목표가 된 학생은 황급히 책을 열어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넌 외투 내려놓고 안쪽 주머니 열어.”
“......”
* * *
불법 마법사 카드 모임을 막고, 이한은 부여 마법 듣는 학생들에게 시험 내용을 공유해줬다.
고장난 아티팩트를 수리하는 시험이 될 거라는 말을 듣자 학생들은 웅성거렸다.
“정확히 어떤 부분이 고장났어, 워다나즈?”
“잘 모르겠군.”
“아티팩트 길이가 얼마나 돼?”
“잘 모르겠다.”
“너희, 워다나즈를 귀찮게 하지 마! 그런 걸 말해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닐리아가 경고하듯이 외쳤다.
이한은 친구의 도움에 살짝 감동했다.
역시 이런 상황에서 믿을 만한 건 친구밖에 없었던 것이다.
슥-
학생들이 반성하고 물러나자 닐리아는 재빨리 이한의 손에 판초콜릿을 쥐어줬다.
그리고는 속삭였다.
“무슨 아티팩트 고르는 게 유리해?”
“...닐리아...”
“그, 그냥 농담해본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