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3화
“악, 이... 이 자식! 난 널 걱정했는데...!”
“미안하다.”
이한은 비명을 지르는 견습기사를 때려눕혔다.
원래 검술 실력으로 부딪쳐도 이기기 힘든데 기습까지 당한 만큼 견습기사는 버틸 수가 없었다.
“초이! 너까지!”
“미, 미안하다.”
더르규는 재빨리 견습기사를 쓰러뜨렸다.
“모라디, 너는... 그렇군! 네가 시킨 속임수지?!”
“......”
지젤은 인상을 찡그리더니 쓰러진 견습기사를 발로 차서 갑판 밖으로 밀어버렸다. 견습기사는 풍덩 소리를 내며 바다에 빠졌다.
“기습이다! 빨리 와서 도와!”
“노포는 내려놓고 이쪽으로 와! 워다나즈 놈이 습격해왔다!”
“뭐? 마법 쓰면 안 되잖아!”
더르규는 자신도 모르게 항변했다.
“안 썼다!”
“지금 그거 대답해 줄 때가 아니다. 더르규.”
이한은 빠르게 갑판 위를 훑었다.
기습으로 몇 명 쓰러뜨리긴 했는데 아직 남은 견습기사들이 있었다. 기사단에서 손발을 맞춰 훈련받는 이들답게 갑작스러운 상황에서도 빠르게 갑판 위로 모여 진형을 구축했다.
그에 비해 이한 쪽은 숫자도 적은데다가 오랫동안 헤엄을 친 탓에 체력도 부족했다. 길게 싸우면 위험했다.
“이한. 놈들이 우릴 포위하려고 한다!”
“알고 있어. 옆으로 빠지자!”
이한은 갑판 중앙에서 벗어나 선수부 쪽으로 달렸다. 뱃머리 쪽으로 연결된 선실 옆길은 꽤 비좁아서 포위하기 힘들었다.
뒤에서 포위하려던 견습기사들은 당황해서 외쳤다.
“야! 왜 도망가냐! 함선 점령해야 하잖아!”
“일대일로 싸워줄 거냐?!”
“그, 그건 안 되지만...”
견습기사들이 끈질기게 뒤를 쫓자 이한은 순간 멈춰서더니 돌아섰다.
그리고는 검을 겨눴다.
이제야 싸울 생각이 들었나 싶어서 견습기사들도 조심스럽게 검을 붙잡았다.
워다나즈의 가문 이름에 속았다가 몇 번이고 호된 꼴을 당했던가. 절대 방심하진 않았다.
“간다.”
“와라. 워다나즈. 쉽게 물러서진 않...”
홱!
이한은 다시 돌아서더니 또 뒤로 뛰기 시작했다.
“......”
“...아, 아니. 너 워다나즈 가문 맞냐!?”
견습기사들은 다시 뒤를 쫓아가면서 외쳤다.
이 자식이 무슨 속셈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렇게 계속 함선 위를 뛰어다녀봤자 아무 의미가 없는데...
“각개격파를 노리는 걸지도 모른다. 모라디가 저기 있어! 조심해라!”
“알겠다. 다들 방심하지 마! 길이 좁아도 멀어지지 마라!”
이한 앞에서 뛰고 있던 지젤은 견습기사들을 속으로 욕했다.
가문의 이미지 때문에 제대로 된 진실을 보지 못하는 얼간이들 같으니!
한바탕 추격전이 벌어지고 이한 일행의 발걸음이 점점 느려질 무렵, 견습기사들은 간신히 양쪽에서 따라붙었다.
“헉... 헉헉헉.”
“후욱, 후우욱.”
서로 지쳐서 거센 숨소리만 들리는 상황.
“워... 워다나즈. 이제 도망칠 곳은 없다. 겨뤄보자.”
“그래. 알겠다.”
이한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견습기사들은 믿어주질 않았다.
“넘어가지 마라 절대.”
“초이 저 녀석도 마찬가지야. 순진한 얼굴로 태연하게 속임수를 쓰는 거 봤지?”
“......”
더르규는 부끄러움으로 얼굴을 살짝 붉혔다.
그 때 갑자기 이한이 뒤를 가리키며 외쳤다.
“뒤에! 뒤를 봐라!”
“워다나즈... 우리가 그런 거에 넘어갈 것 같냐?”
견습기사들은 자부심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이한 일행을 상대하면서 온갖 속임수를 상대하는 데에 능해진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그 표정을 본 지젤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많이 속은 게 자랑이냐...”
“뭐든지 해봐라. 모라디. 이제 네 계략에도 속지 않 컥!”
견습기사 한 명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뒤에서 갈고리를 걸고 올라온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씩씩대며 견습기사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또 쏴봐라, 더러운 자식들아! 쏴보란 말이다!”
“아, 아니...! 우리도 쏘고 싶어서 쏜 게 아니라...”
“이 자식들을 바다로 던져! 바다로 던져서 직접 올라오게 해!”
“뭐 이딴 새끼들이 있어!?”
은혜라고는 조금도 모르는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의 대응에 견습기사들은 분노했다.
* * *
추잡한 다툼이 있었지만 다행히 잉걸델 교수와 기사들이 있어서 곧바로 정리됐다.
몇몇 기사들이 ‘흥미로운 훈련인데 한 번 우리 기사들도 바꿔서 시켜보면 어떨까’하고 이야기하는 동안 잉걸델 교수는 학생들의 시험을 평가했다.
“다들 고생 많았습니다. 알파. 쓰레기더미 사이에서 갈고리를 찾아내 배 위에 건 것은 훌륭했습니다.”
“운이 좋았습니다.”
앙라고는 뿌듯해하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제이. 물 창을 막아낸 것은 훌륭했습니다. 하지만 자기 몸으로 물 창을 막아내는 건 위험한 일입니다. 아무리 갑옷을 입었다 하더라도 실전에서는 크게 다칠 수 있으니 주의하십시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 튼튼합니다!”
‘아니, 저런 무식한 놈.’
이한이 혀를 내두르는 사이, 어느새 마지막으로 이한 일행 차례가 왔다.
잉걸델 교수는 셋을 보며 입을 열었다.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길을 찾아서...”
“교수님. 잠시만요.”
지젤의 갑작스러운 발언에 만점을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던 이한이 멈칫했다.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모라디. 왜 그래. 우리 같은 팀이잖나.”
불길함을 느낀 이한은 최대한 모라디를 달래려고 했다.
게다가 이번 시험은 정말로 억울했다. 다른 상황과 달리 딱히 모라디를 엿먹인 것도 없지 않은가.
“아까 쓴 속임수를 네가 썼다고 오해받은 것 때문에 그러는 건가? 그건 내가 의도한 게 아니다. 괜히 서로 점수 깎지 말자.”
이한은 모라디가 자기 점수 깎이는 한이 있어도 이한의 점수까지 깎겠다는 식으로 나오는 줄 알았다.
그러나 모라디는 그것 때문에 말을 꺼낸 게 아니었다.
“워다나즈가 아까 함선 기어오르면서 전신에서 마력광을 잠깐 보였습니다.”
“?!!”
잉걸델 교수는 깜짝 놀랐다.
옆에 있던 기사들도 ‘어떻게 할까요 지금 던질까요’이야기하던 걸 멈추고 깜짝 놀랐다.
“마력광을!? 그게 정말이냐!”
“정말입니까?! 잠깐. 그걸 왜 못 봤지?”
“워다나즈 저 자식이 그 때 함선을 다 기어올라가서요.”
“아...!”
“저런...!”
“함선의 높이를 더 높였어야 했는데...!”
잉걸델 교수와 기사들은 동시에 입을 모아 탄식했다.
그만큼 이한이 놓친 기회가 아까웠던 것이다.
물론 이한에게는 뭔 개소리인가 싶었다.
‘함선 높이를 뭘 더 높인다는 거지? 미친 건가?’
왜 해골 교장이 외부인이 들어오는 걸 싫어하는지 조금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워다나즈. 이건 정말 중요한 기회입니다. 알고 있습니까?”
잉걸델 교수는 마력광이 번뜩였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의미인지 열심히 설명했다.
친구들을 짊어지고 함선을 기어오르는 극한의 상황에서 이한은 무아지경에 빠졌던 것이다.
불필요한 힘은 전부 사라지고, 온갖 시련에서 겪은 경험들이 자연스럽게 육체에 녹아들어, 염병할 정도로 많은 마력량을 정확하게 통제할...
“방금 뭐라고 하셨?”
“그냥 넘어가십시오.”
잉걸델 교수는 흥분해서 나온 욕을 슬쩍 넘겼다. 이한은 살짝 상처받았다.
“하여간 기회였던 거군요.”
“맞습니다!”
“그렇소!”
이한보다 잉걸델 교수나 기사들이 훨씬 더 안타까워했다.
마력이 많을수록 통제는 어려워지기 마련.
워다나즈 정도의 재능으로도 힘든 게 저 마력량이었으니, 이번 기회가 유독 더 아깝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물론 이한은 별 생각이 없었다.
‘다음에도 기회가 있겠지.’
일단 기회가 너무 짧게 왔다 사라져서 체감이 잘 되지 않는데다가, 무엇보다 이한은 검의 길을 끝까지 걷겠다는 무인의 신념으로 검을 잡은 게 아니었다.
심심한데 건강한 신체도 만들고 호신도 할 겸 배운 거였지...
검의 길에 끝에 뭐가 있을지보다는 올 해 연말 성적이 더 궁금했다.
“알겠습니다. 정말 아쉽군요. 그래서 교수님. 이번 중간고사 성적은...”
“아직 끝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백양목 기사단의 기사 중 한 명이 진지하게 말을 꺼냈다.
잉걸델 교수는 신중한 얼굴로 경청하겠다는 듯이 시선을 던졌다.
“말해보십시오. 듣고 있습니다.”
“시간이 많이 지났다면 모를까, 지금은 그렇게 시간이 많이 지나지 않은 상황. 똑같은 상황을 구성해놓고 재현해보면 될지 모릅니다.”
“...!”
잉걸델 교수는 놀랐다.
“...!”
그리고 이한도 놀랐다.
‘무슨 개소리를 저렇게 진지하게?’
“교수님 저 시험 끝났...”
“워다나즈. 이건 정말 중요한 문제입니다. 시험보다 어쩌면 이게 더 중요할지도 모릅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뒤에 있던 흰 호랑이 탑 학생 한 명이 별 생각 없이 내뱉었다.
“워다나즈 정도면 솔직히 시험 공부 더 안 해도 되지 않나? 어차피 만점 받을 텐데.”
이한은 그 학생을 죽일듯이 노려보았다. 앙라고는 기겁해서 시선을 피했다.
‘내,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리고 아까와 똑같은 상황을 재현하는 건 무리지 않겠습니까. 제 친구들은 다들 지쳤고 다음 시험 준비도 해야 합니다.”
“으음.”
잉걸델 교수는 확실히 그렇다 싶어서 안타까워했다.
지금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지쳤으니...
“여기 젊은 기사들이 있잖습니까.”
백양목 기사단의 기사들이 나섰다.
그들은 견습기사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들을 짊어지고 올라오면 됩니다.”
“......”
이한이 할 말을 잃고 말문이 막힌 사이 잉걸델 교수는 감격했다.
“모두들...! 고맙습니다. 백양목 기사단의 명예는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기사로서 검의 길을 같이 걷는 전우를 내버려 둘 수야 있겠습니까?”
견습기사들의 얼굴이 검게 죽었다.
이한은 그 모습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워다나즈가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다.’
‘학년 수석도 꼭 좋은 것만은 아니구나!’
저걸 보니 행복이란 건 꼭 성적과 상관이 없는 걸지도 몰랐다.
* * *
“모라디... 저주하겠다.”
이한은 다른 학생들보다 몇 시간은 더 늦게 돌아왔다.
바닷속에서 견습기사들과 같이 헤엄치고, 밧줄로 서로를 묶어 함선 외벽 위를 기어올라야 했던 것이다.
물론 아까 느꼈던 현상은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잉걸델 교수와 기사들은 매우 안타까워했다.
-정말 안타깝습니다.
-역시 친한 학생들을 짊어지고 올라야했던 게 아닐까 싶은데...
이한은 이번 주가 중간고사 기간이라는 사실에 처음으로 감사했다.
아니었다면 기사들은 이한이 깨달을 때까지 지옥을 보여줬으리라.
‘기사들이 에인로가드를 닮아가는 것인가, 아니면 세상은 원래 에인로가드였던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이한은 발걸음을 옮겼다.
어둑해지는 물길 너머로 익숙한 흰 해골이 보였다.
“교장 선생님.”
뭐냐. 왜 그렇게 늦게 오지? 그것도 혼자서?
이한은 잉걸델 교수가 시켰던 일을 굳이 말하지 않기로 했다.
괜히 해골 교장 좋아할 일을 늘려주고 싶진 않았던 것이다.
“시험을 대비해서 공부하느라 좀 늦었습니다.”
다른 학생들이었다면 칭찬했겠지만 너는 헛짓거리다. 쓸데없는 짓 그만하고 아직 못 익힌 마법이나 빨리 익혀라.
해골 교장은 상냥하고 부드럽게 조언해줬다. 이한은 그 따뜻한 조언에 감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예. 교장 선생님은 뭐하십니까?”
나는 물에 잠긴 에인로가드의 전경을 둘러보며 학생들의 고통을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아. 예. 알겠습니다.”
이한은 인사하고서 멀어지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바로 투명 마법과 수중 호흡 마법을 있는 대로 시전하고 물속으로 뛰어들어 해골 교장이 있는 방향으로 접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