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1화
흔히 지옥으로 묘사되는 에인로가드였고, 해골 교장도 그 묘사를 좋아했지만...
지옥에도 규칙은 있었다.
해골 교장은 살다살다 자기들 필요한 재료를 후배 시켜서 구걸하는 잡놈들은 처음 봤다.
미친놈들인가??
마침 잘 됐다. 버두스가 징징대던데 친구들을 만들어줘야겠군. 안내해라!
“시킨 게 아닙니다.”
뭐라고?
“제가 자원한 건데요.”
하! 그렇겠지. 에인로가드 학생들도 다 ‘자원’해서 저렇게 지내는 거니까.
“......”
이한은 어이없다는 시선으로 해골 교장을 쳐다보았다.
당신이 그런 소리를 하면 어떡해!
...하긴. 생각해보니 이상한 점이 있군.
해골 교장은 그 영리한 두뇌로 위화감을 알아차렸다.
생각해보니 선배들이라 하더라도 이 어린놈을 협박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네가 어디 가서 협박당할 놈은 아니지.
“아니... 저도 협박당할 수 있는데...”
이한은 항의했지만 해골 교장은 무시했다.
그럼 뭐냐? 설마 선배들을 도와주려고 온 건 아닐 테고, 뭘 소환하려는 거냐? 혹시 저번에 받아간 그 뼈를 시험해보려는 거냐?
“선배들을 도와주려고...”
제법 야심찬 생각이지만 쉽지 않을 거다. 지금 네 수준으로 그 뼈의 힘을 끌어내는 건 말이야. 하지만 언제나 도전은 좋은... 뭐? 누굴 도와줘?
“선배들 도와주려고 지원해달라는 건데요.”
......
해골 교장은 충격, 공포, 경멸, 역겨움 등 다양한 감정이 섞인 눈빛으로 이한을 쏘아보았다.
대체 왜 그딴 짓을?
“그냥 좀 주십쇼.”
귀찮아진 이한은 당당하게 나가기로 했다.
애초에 이한이 구걸하러 온 것도 아니고 일한 대가로 받으러 온 것 아닌가.
해골 교장은 한동안 말없이 침묵하다가 이한을 설득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쯔쯔 혀를 차며 말했다.
...따라와라.
“감사합니다.”
데스 나이트들이 복도 옆에서 뼈 나룻배를 타고 나타났다. 짐을 들어주기 위해서였다.
동쪽 창고로 안내해줘라. 동박새 창고. 알지?
-어느 동박새 창고 말입니까? 4층 동박새 창고입니까? 아니면 7층...
딱!
해골 교장은 청아한 소리가 나도록 데스 나이트의 투구를 때렸다.
입조심해라, 머저리 같으니! 그 나이를 먹고서 말실수를!
-예...? 아, 아니. 방금 말한 걸 듣는다고 어떻게 창고를 찾습니까?
저 녀석은 그러고도 남을 녀석이다. 방심하지 말라고 몇 번을 말했거늘!
이한은 순진무구한 얼굴로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물론 속으로는 생각하고 있었다.
‘4층, 7층에 동박새 창고. 기억해놓자.’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한 번 해골 교장의 꿀단지를 털어볼 생각이었다.
가라.
“예. 감사합니다.”
후회할 거다.
“예. 감사합니다.”
선배들이 도와준다고 기억할 것 같나? 애초에 만나지도 못하는데?
“예. 감사합니다.”
내년에 만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크나큰 착각이다. 고학년들은 다들 자기 연구를 하느라 바빠서 만날 시간도...
“예. 감사합니다.”
-주인님. 더 하실수록 주인님만 구차해지는 것 같...
해골 교장은 말을 꺼낸 데스 나이트를 다른 차원으로 보내버렸다.
* * *
“교수님. 교수님.”
“어. 들어와라.”
우레걸음 교수는 각수관 1층에서 지도를 그리고 있다가 이한이 들어오자 손짓했다.
“뭘 하고 계셨습니까?”
“아. 홍수 때문에 오두막이 다 날아가서... 방어 마법을 걸어놓긴 했지만 빨리 찾아서 회수해야지. 에인로가드에는 온갖 몬스터들이 많아서 위험하거든.”
우레걸음 교수는 홍수로 인한 물난리의 흐름과 그로 인해 오두막들이 어디까지 날아갔을지 계산하고 있었다.
그걸 본 이한은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세이렌들이 오두막 하나를 둘러싸고 공격하는 걸 본 것도 같습니다. 워낙 폭우가 심해서 자세히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우레걸음 교수는 탄식을 내뱉었다.
“아이고...! 그게 얼마짜린데...!!”
“죄송합니다. 저도 막아보고 싶엇지만 아시다시피 세이렌은...”
“됐다. 세이렌은 1학년 학생들이 상대하긴 무리지.”
말하던 우레걸음 교수는 멈칫했다.
“근데 넌 상대할 수도 있을 것 같...”
“참. 교수님. 드릴 부탁이 있어서 왔습니다.”
“어? 어. 말해봐라.”
우레걸음 교수는 지도를 밀어놓고 찻잔을 든 뒤 홀짝였다.
“교내의 흑마법 학파에서 사용할 시약이 부족한데 혹시 좀 지원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커헉!”
우레걸음 교수는 찻물을 지도 위로 내뿜으며 기침을 해댔다.
한참을 쿨럭이던 교수는 지팡이를 휘둘러 찻물을 치우고 기도를 진정시킨 뒤 외쳤다.
“선배들이 시킨 거냐?!!”
“아뇨. 그냥 제가 안타까워서 도와드리려고 하는 건데요.”
“음. 네 마음은 이해한다만... 이건 아닌 것 같다.”
우레걸음 교수는 이한을 설득하려고 했다.
선배들이 시약이 부족하면 선배들의 능력으로 모으는 게 맞지, 후배가 아무리 뛰어나도 대신 돌아다니면서 해줄 게 아니었다.
아무리 워다나즈여도...
음...
음...
“맞아. 아무리 워다나즈 너라도 안 되는 거다.”
“방금 왜 뜸을 들이신 겁니까?”
“네 착각이겠지.”
“음. 교수님. 이게 사실 제 잘못도 좀 있어서 말입니다.”
“네 잘못?”
우레걸음 교수는 코웃음쳤다.
아무리 생각해도 후배의 잘못이 있을 수가 없어보였던 것이다.
1학년 후배가 잘못을 했다 쳐도 뭔 잘못을 했겠는가.
설사 했더라도 선배가 책임져야 하는 게 당연했다.
“왜, 실험하다가 시약 그릇 하나 엎지르기라도 했냐? 그건 착각이다. 그 정도 실수는 당연히 다 선배가 책임져야 하는 거야.”
“아뇨. 선배들이 언데드 웨이브를 만들었는데 제가 오해해서 전멸시켰습니다.”
“......”
“......”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돌았다.
우레걸음 교수는 묵묵히 생각에 잠기더니 옆에 있던 찻잔을 원샷 때리고 입을 열었다.
“뭐가 필요하다고?”
* * *
“버드나무 교수님?”
이한은 식물학을 맡고 있는 버드나무 교수가 머무르고 있는 온실의 문을 두드렸다.
1학년 학생이 듣는 강의가 아니긴 했지만, 저번에 우연히 만나서 안면을 익힌 만큼 이한은 부탁해볼 생각이었다.
‘에인로가드의 교수님들 인성을 봤을 때 상위권에 속한다.’
“오랜만이구나. 저번에 나를 떡갈나무라고 불렀던 트롤 꼬마는 없니?”
“가이난도는 없습니다. 다시 한 번 제가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니다.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움에 농담을 좀 해봤단다.”
버드나무 교수는 물뿌리개를 내려놓고 이한에게 천천히 걸어왔다.
“그래서, 무슨 일로 온 거지? 식물이 필요한가?”
“아. 교내의 흑마법 학파에서 사용할 시약이 부족한데 혹시 좀 지원해주실 수 있...”
“!!!”
버드나무 교수가 천천히 외치려고 하자 이한은 다급히 외쳤다.
“협박을 받은 게 아니라 제가 순수한 뜻으로 선배들을 도와주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언데드 웨이브를 궤멸시켰습니다.”
“!!!!!!”
설명이 너무 성급했다.
버드나무 교수는 나무의 피가 섞인 종족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비명을 질렀다.
10분 후.
“...그렇게 된 겁니다.”
“그렇군. 놀랐단다. 그런 일이라면 얼마든지 내주마.”
버드나무 교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궤짝을 열고 필요한 시약들을 담아주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선뜻하게 내주는 그 모습에 이한은 감동받았다.
‘가진 사람이 더하다던데, 버드나무 교수님은 역시 다르시군.’
이한이 해골 교장이나 우레걸음 교수, 버드나무 교수한테 먼저 들른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해골 교장은 원래 학교에 숨겨놓은 창고들이 수백 개가 넘는 걸로 악명 높은 사람이었고, 우레걸음 교수나 버드나무 교수는 맡은 강의 특성상 확보하고 있는 시약량이 많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레걸음 교수야 이한이 잡일을 도맡아서 하고 있으니 그렇다 쳐도 버드나무 교수는...
“정말 감사합니다.”
“뭘. 내년부터 배울 제자한테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지.”
“...?”
어라?
* * *
코홀티는 흙더미를 살며시 치워내고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주변을 확인했다.
“오골도스. 나와도 좋다.”
“선배님 때문에 이게 뭡니까.”
“너도 안 말렸으니까 공범이지.”
둘은 구덩이에서 기어나와 흙을 털어냈다. 코홀티는 입 안에 들어간 흙을 뱉었다.
“디레트가 좀 화가 풀렸을 것 같냐?”
“아뇨...”
“야. 넌 대체 왜 그렇게 부정적이냐?”
“아무리 긍정적인 사람이라도 지금 상황에서 디레트 선배님이 화 풀리셨다고 할 것 같진 않습니다.”
오골도스는 저 멀리서 벌판을 돌아다니며 시약을 긁어모으는 디레트를 보며 말했다.
날개가 위로 솟구치고 깃털도 빳빳이 서있는데 아무리 봐도 극노 상태였다.
“그럼 빨리 시약 긁어모으는 시늉이라도 해.”
“전 그냥 긁어모으겠습니다. 시늉이 아니라요.”
“......”
코홀티는 다시 구덩이로 넣어버릴까 살짝 고민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때 논란의 후배가 돌아왔다.
“저 왔습니다.”
“!”
코홀티는 이한이 돌아오자 황급히 시약주머니를 던져놓고 달려갔다.
“엉엉엉! 정말 고생이 많았겠다! 내가 미안하다! 내가 나쁜 놈이야!”
“예?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이한은 당황했다.
혹시 그 사이에 코홀티 선배도 <주정뱅이 저주>를 맞으신 건가?
“내가 더 말렸어야 했는데! 아니, 말리긴 했지만! 더 강하게 말렸어야 했다! 얼마나 고생이 많았니! 다른 학파 놈들이 다 나쁜 놈들이지! 그래!”
코홀티는 뒤쪽의 디레트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이한을 와락 안았다.
“안 됐어도 너무 슬퍼하지 마라. 원래 다른 학파 놈들이 다 그러니까.”
“아니... 선배님.”
“어?”
이한이 코홀티를 밀어내고 말했다.
“받아왔는데요.”
“...어?”
어디서 많이 본 데스 나이트들이 들어와 느긋한 동작으로 궤짝들을 내려놓았다.
-이 정도면 되겠소?
“감사합니다! 교장 선생님한테도 감사 인사 전해주십시오!”
-어... 주인님께서는 별로 좋아하시지 않을 텐데.
“그렇다면 더더욱 전해주십시오.”
데스 나이트는 빙긋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지켜본 코홀티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지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이, 이게 갖고 온 건가?”
“아. 더 있습니다.”
데스 나이트들이 밖에 나가서 차곡차곡 궤짝들을 쌓아올렸다.
받아왔어도 가죽주머니 한두개 분량 정도일 줄 알았는데, 무슨 궤짝째로 쌓아올리는 양에 코홀티는 눈만 깜박거렸다.
이 정도면 일 년 내내 넉넉히 써도 될 양이었다.
“그... 어... 후배야. 내 말 진짜 오해하지 말고... 의심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구한 거냐 이거?”
“일단 교장 선생님한테 부탁드려서 좀 받았습니다.”
“커헉. 커헉.”
코홀티와 오골도스가 동시에 기침을 터뜨렸다.
시작부터 너무 예상을 넘었던 것이다.
“괜찮으십니까?”
“아, 아니. 아까 구덩이에 들어간 탓에 입 안에 흙이 좀 남았나봐.”
“구덩이에 들어가셨습니까!? 어째서요?!”
“디레ㅌ... 아니, 그냥 구덩이가 좋아서... 우리가 가끔 그냥 구덩이에 들어갈 때가 있거든.”
오골도스는 경멸 섞인 시선으로 선배를 노려보았다.
이상한 사람 할 거면 자기 혼자 할 것이지 왜 자신을 끌고 간단 말인가.
“구덩이에 말입니까? 흑마법 수련 방법 중 하나입니까?”
“어...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교장 선생님한테 부탁드렸다고?”
“예.”
“들어주셨다고 그걸?”
“설득했죠.”
“......”
“......”
둘은 새삼스럽게 이한이 해골 교장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걸 느꼈다.
어느 학생이 이런 사랑을 받겠는가?
“대단하다. 정말. 다른 건?”
“이건 우레걸음 교수님한테 부탁했습니다.”
“그 교수님이 좀... 인색하지 않으셨니?”
우레걸음 교수는 학생들 사이에서는 구두쇠로 이름이 높았다.
그런 사람이 그냥 주다니?
“설득했죠.”
“......”
“......”
둘은 이 후배가 설득을 과연 어떤 뜻으로 쓰고 있는 건지 짐작이 가지 않아 아득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