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2화
“...혹시 설득을 다른 뜻으로 쓰고 있는 거 아닙니까?”
오골도스가 속삭였다.
원래 에인로가드는 다른 뜻으로 쓰이는 단어들이 좀 많았다.
예를 들어 ‘우리 교장 선생님의 창고에서 뭐 좀 빌리러 가자’는...
“가능성 있긴 하다.”
코홀티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오골도스의 지적은 날카로웠다.
“저, 후배야. 혹시 교수님을 습격...”
퍽!
어느새 돌아온 디레트가 시약주머니를 휘둘러 코홀티를 후려갈겼다.
코홀티는 비명을 지르며 구덩이로 떨어졌다.
“그걸 말이라고 하냐? 그걸 말이라고 해? 너 대신해서 시약 받으러 돌아다닌 후배한테?”
“저... 저 자식도 의심...”
“아닙니다!”
오골도스는 필사적으로 부정했지만 디레트는 가차없이 시약주머니를 휘둘렀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오골도스도 코홀티 옆으로 떨어졌다.
‘음. 저래서 구덩이에 들어가 계셨던 거군.’
이한은 선배들이 구덩이에 들어간 걸 보고 진상을 깨달았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디레트 선배 앞에서는 숨 쉴 때도 긴장을 풀지 말아야겠다.’
자신이 흑마법 학파에서 가장 무서운 선배로 취급받고 있다는 건 깨닫지도 못한 채, 디레트는 매우 미안한 눈빛으로 이한을 쳐다보았다.
“...헛소리 듣게 해서 미안해. 진심이야.”
“아닙니다. 선배님들의 말은 언제나 금과옥조로 여기고 있습니다.”
구덩이 안에 들어가 있던 둘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어쩌면 같은 말도 저렇게 예쁘게 한단 말인가.
“쓰레기 돌멩이 같은 말도 있으니까 너무 귀하게 여기진 말고... 그래서, 이걸 설득해서 받아온 거라고? 혹시 교수님이 무리한 요구는 안 하셨어?”
디레트는 이한이 걱정됐다.
알다시피 에인로가드의 교수들은 아무런 대가도 없이 설득만으로 학생들에게 친절을 베풀 만큼 선량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피라도 뽑아간 거 아니야?’
눈앞의 후배가 가진 마력을 생각해봤을 때 웬 미친 교수가 미친 짓을 했어도 놀랍지 않았다.
“네. 그야 저도 우레걸음 교수님 밑에서 배우고 있잖습니까.”
“아.”
디레트는 그제야 깨달았다.
흑마법 학파의 선배들과 대화하는 게 너무 자연스러워서 잊고 있었는데, 생각해보니...
‘얘 강의 여러 개 듣고 있었지.’
하긴 이 정도 제자라면 교수가 부탁을 들어주는 것도 이해가 갔다.
교수들이 제자에 크게 신경 안 쓴다지만 그것도 제자 나름.
괜히 부탁 하나 안 들어줬다가 다른 학파로 가버리면 얼마나 속이 쓰리겠는가.
“그랬구나...”
“그리고 이건 가르시아 교수님, 이건 나이튼 교수님, 이건 플뤼워크 교수님, 이건 밀레이 교수님, 이건 쿠 교수님, 이건 크라어 교수님, 이건 르지 교수님, 이건 라그린데 교수님께 부탁해서 받았습니다.”
“......”
디레트는 얼굴을 양손으로 푹 가렸다.
나름 현실을 받아들이려고 하던 찰나에 머리가 아찔해져서였다.
“그리고 이건 버두스 교수님께 빌렸고요.”
“?”
구덩이 안에 있던 코홀티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버두스 교수님 징벌방 갔다고 하지 않았나?’
“괜찮으십니까?”
이한은 디레트가 말없이 고개만 푹 숙이고 있자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무슨 실수라도...”
“아니... 아니. 실수는 무슨. 후배. 넌 진짜로, 정말로, 흑마법 학파에서 배우는 학생들의 모든 식사와 외출을 걸고 맹세컨대 끝내주게 잘해줬어. 너무 잘해줘서 미안한 거지.”
디레트는 기운을 차리고 얼굴을 들었다.
이미 선배로서 실례란 실례는 다 저질렀지만, 이제라도 선배로서 일을 해야 했다.
저런 업적을 해낸 후배를 걱정하게 만들 순 없었다.
“정말 고맙다.”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건 받을 수 없...”
“안 돼!”
“다시 생각해주십시오!”
구덩이 안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자 디레트는 구덩이 위에 흙을 부어버렸다.
이한은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디레트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디레트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 네가 이렇게 고생한 걸 어떻게 우리가 받겠어.”
“하지만 선배. 이렇게 받아온 이상 교수님한테 돌려드릴 수도 없는데다가 제가 쓸 수도 없잖습니까.”
“맞아. 이렇게까지 말하잖아. 디레트.”
“한 번만 다시 생각해주십시오.”
다른 쪽으로 땅을 파고 기어나온 코홀티와 오골도스의 말에 디레트는 한숨을 쉬고 둘을 발로 차며 말했다.
“...고맙다. 진짜. 내가 흑마법 배우면서 오늘만큼 창피한 날이 없었어. 진심이야.”
“에이. 재작년에 수도에 좀비 소동 일으켰던 게 더 창피했지.”
디레트는 둘을 처넣은 구덩이를 다시 덮고 그 위로 소환수를 불러와서 완전히 막아버린 다음 이한에게 말했다.
“흑마법 학파에도 들어와 줘서 정말 고맙다. 그리고...”
디레트는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힘들거나 아니다 싶으면 안 들어도 돼. 진심이야.”
“이해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내가 이런 말했다는 건 교수님한테 말하지 말고.”
“교수님께서 그런 것 갖고 선배에 대한 신뢰를 거두시진 않을 겁니다.”
“그건 아냐.”
디레트는 매우 단호하게 말했다.
모르툼 교수가 디레트를 신뢰하긴 했지만 이한의 거취 문제는 아무리 수제자라고 하더라도 용서할 수 없는 중대사항이었다.
“그, 그렇군요.”
이한은 칼날 같은 디레트의 대답에 살짝 당황했다.
* * *
선배들이 싸준 간식 바구니를 들고 돌아온 이한은 도서관 입구 야영지의 분위기가 어수선하단 걸 깨달았다.
앉아 있는 학생들이 보이지 않고 다들 심각한 표정으로 곳곳에 모여서 수군거리고 있었다.
“뭐지? 무슨 일이라도 있나?”
“워다나즈!”
이한을 발견한 학생들이 다급한 얼굴로 달려왔다.
“왜 이렇게 늦게 온 거냐! 지금 큰일났다!”
“흑마법 학ㅍ... 아니. 됐고, 무슨 일이냐?”
“목책 밖에 몬스터가 있는 게 분명하다. 검은 거북이 탑 학생이 납치됐어.”
“!”
이한은 깜짝 놀라서 시선을 돌렸다.
현재 도서관 입구 야영지는 깊게 판 해자와 목책, 임시 탑으로 꽤 단단하게 보호받고 있었다.
게다가 그 위로는 학생들이 만들어놓은, 아니, 주로 이한이 만들어놓은 불빛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어서 도서관의 어둠 속에서도 사방으로 빛줄기를 비췄다.
침입도, 접근도 힘든 상황인데 그걸 뚫고 학생들을 데리고 가다니.
“정말 납치된 게 맞나? 혹시 다른 곳에 있다거나...”
“그건 아니다. 보초를 서고 있었는데 사라졌거든. 다음 교대가 왔을 때 아무도 없었다고 하더군.”
살코의 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잠겨 있었다.
아직 시험도 끝나지 않았는데 이런 사건이 벌어지다니.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이 겁에 질려서 집중하지 못할 걸 생각하니 속이 쓰렸다.
지젤도 비슷했다.
안 그래도 집중력 떨어지는 흰 호랑이 탑 놈들이 ‘수색대를 보내보자’ ‘어떤 놈인지 사냥을 해보자’같은 소리를 지껄이며 은근슬쩍 책을 덮는 꼴을 보니 몬스터보다 친구들을 사냥하고 싶었다.
“수색대를 조직해서 보내야 한다. 워다나즈.”
“여기가 무슨 가문의 앞마당이야? 수색대는 무슨.”
지젤은 냉정하게 살코의 말을 잘랐다.
지금 학생들에게 행운이 따라줘서 잊고 있는 거지만, 도서관은 미궁이었다.
이 주변을 수색한답시고 들쑤셨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지금 흰 호랑이 탑 놈들이 안 사라졌다고 훼방놓는거냐, 모라디?”
살코가 으르렁댔지만 지젤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오히려 차갑게 노려보며 대꾸했다.
“흰 호랑이 탑 놈들이 사라졌어도 똑같은 소리를 했겠지. 물론 흰 호랑이 탑 놈들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모라디. 내가 널 의심하고 있다는 말을 해줘야겠군.”
“무슨 개소리를 그렇게 당당하게 지껄이지?”
“들어보면 설득력 있을 거다. 너희 흰 호랑이 탑 놈들은 머리가 아주 나쁘니까. 그런 놈들이 할 생각은 하나밖에 없지 않나? 다른 놈들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거지.”
“아. 그러니까 지금 우리 탑이 벌인 일이다?”
지젤은 기도 안 찬다는 듯이 대답했다. 살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이 사라지면 누가 이득을 보겠나?”
“그런 논리라면 푸른 용의 탑은 왜 용의선상에서 벗어나지?”
“두 가지 이유가 있지. 모라디. 하나는 푸른 용의 탑 놈들은 워다나즈가 없으면 뭐 하나 제대로 못하는 샌님들이거든.”
“......”
이한은 듣다가 어이없어서 살코를 쳐다보았다.
“아니...”
“워다나즈가 주도했다면?”
“워다나즈의 하루 일과표를 봐라.”
어지간해서는 이한을 엿먹이고 싶어하는 지젤이었지만 이건 솔직히 반박하기 힘든 강력한 근거였다.
“확실히 그렇군. 다음 이유는 뭔데?”
“푸른 용의 탑 놈들은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보다 성적이 좋다. 굳이 자기 아래를 견제하는 얼간이는 없는 법이지.”
“아하. 그러시구나. 왜? 무기 뽑고 덤비지 그래?”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다. 자꾸 수색대를 방해한다면.”
나름 각 탑을 대표하는 이들이 살기를 노골적으로 뿜어내면서 노려보자, 사제들은 안절부절못하며 걱정스러워했다.
“워, 워다나즈 님. 말려주실 수 없으십니까?”
“어, 그냥 이긴 놈이 선택하게 하면 편하지 않나?”
이한은 둘 중 누가 이길까 고민하다가 사제들의 말에 의아해했다.
솔직히 궁금하지 않은가.
그러나 사제들은 그런 결투재판에 흥미가 없는 모양이었다.
“제발!”
“내 말을 듣는 놈들도 아닌데...”
이한은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놀랍게도 둘은 이한을 불렀다.
“워다나즈. 네가 판단해봐라.”
“워다나즈. 어떻게 생각하지?”
“...너희 둘이 언제부터 내 의견을 그렇게 존중했다고 날 부르는 거냐?”
이한은 짜증 섞인 눈으로 둘을 쳐다보았다.
평소에는 맨날 틱틱대던 놈들이 이럴 때는 왜 이한에게 심판관을 부탁한단 말인가.
그냥 둘이 알아서 싸우고 둘이 서로 미워하면 될 일을...
“지금 수색대를 보내지 않으면 남은 학생들은 더 불안해 할 거다. 다음에 사라지는 학생은 푸른 용의 탑일 수도 있다.”
“경계를 올리는 게 낫겠지.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더 사람을 밀어 넣자고? 그걸 북부에서는 뭐라고 부르는지 아나?”
“용맹하고 고귀한 행동이라고 하나?”
“병신과 머저리나 할 짓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부르고 싶으면 그렇게 불러도 되겠지. 앞으론 용맹 가문의 고귀함이라고 불러줄까?”
‘이대로 내버려두면 둘이 싸우고 결정을 내주려나.’
“워다나즈. 빨리 대답해봐라.”
“뭐하고 있어? 대답하라고.”
이한은 원래 둘의 싸움에 끼고 싶지 않았다.
둘을 싸우게 한 다음 뒤처리를 하는 게 더 편했던 것이다.
이긴 쪽은 만족할 테고, 진 쪽은 따로 달래주면 원한을 이긴 쪽으로 품을 테니 이한은 착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여기서 이한이 결정을 내리면 책임도 원한도 이쪽으로 돌아왔다.
안 그래도 말 안 듣고 툴툴대는 다른 탑 놈들 상대로 그런 고생을 하고 싶진 않았다.
‘시간을 끈다. 저 둘이 알아서 결정을 내리도록 해야 해.’
“난 둘 다 틀렸다고 본다.”
“?”
“??”
둘은 놀란 눈으로 이한을 쳐다보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답이 나왔던 것이다.
“왜지, 워다나즈?”
“다른 좋은 방법이라도 있는 건가?”
“잘 생각해봐라. 이렇게 철저한 방비를 뚫고 친구를 납치한 몬스터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겠나?”
물론 이한도 딱히 의미는 몰랐다.
지금 단서만으로 무슨 몬스터인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진짜 몬스터인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살코와 지젤은 이한이 저렇게까지 무게를 잡고 말하자 하던 걸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이한이 이런 부분에서 허언을 할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으음. 어렵군. 워다나즈.”
“그냥 직설적으로 말하지그래.”
“아니. 둘 다 더 생각해봐라.”
쾅!!!!!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요새 외곽 정문이 박살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위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학생이 비명을 질렀다.
“습격이다!! 몬스터의 공격이야!!”
“...!?”
“그, 그렇군! 몬스터들은 대체로 오만하지. 그런 일을 손쉽게 성공시켰으니 우리를 얕보고 다시 공격해올 거란 거군!”
“...바로 그거지. 그걸 말한 거였다.”
“?”
지젤은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물었다.
“그런데 그걸 왜 말 안 해주고 생각해보라고 한 ㄱ...”
“다들 정문 쪽으로 집합!! 몬스터의 습격이다!!”
이한은 대답 대신 정문으로 달려가면서 학생들을 불러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