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3화
“취해라, 주정뱅이처럼!”
“미끄러져라!”
“깊게 파일지어다!”
이한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정문 쪽에서는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학생들은 바리케이드 위에 서서 정문에 들이받는 몬스터를 향해 마법을 날리는 중이었다.
‘맥(貘)!’
얼핏 보면 큰 곰처럼 보였지만, 코끼리의 코와 코뿔소의 눈, 호랑이의 발과 소의 꼬리를 가진 특이한 겉모습.
이한은 번개걸음 교수에게서 배웠던 몬스터의 특징을 떠올렸다.
다른 자의 악몽을 먹는 걸 즐기는 몬스터가 여기에는 왜?
‘하긴. 에인로가드 도서관은 악몽으로 가득찬 곳이긴 하겠군.’
생각해보니 공부하는 에인로가드 학생들만큼 악몽을 자주 꾸는 이들도 없을 것이다.
■■■■■...
맥은 느릿하지만 묵직한 동작으로 정문에 들이박았다.
학생들이 마법으로 발목을 묶었지만 요새 안으로 들어오겠다는 의지가 확실하게 느껴졌다.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마법을 부여한 투창이 튕겨나가는 모습에 황당해했다.
“저 자식 무슨 원한이 있다고 이러는 거야? 왜 여기 들어오려는 건데!?”
“음. 우리가 도서관 가구들을 싹 쓸어서 바리케이드로 쓰고 있긴 해.”
“...창 더 갖고 와! 워다나즈! 빨리 와! 워다나즈!!”
“야. 창피하니까 너무 크게 부르지 마라! 어차피 오고 있잖아!”
도착한 이한은 바로 바리케이드 위로 향했다. 그 때 지젤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잠깐. 워다나즈. 맥은 남몰래 들어와서 학생을 납치할 능력이 없을 텐데.”
“!”
맞는 말이었다.
지금 놈의 행동만 봐도 알겠지만 남몰래 은밀하게 들어와서 학생을 납치해 갈 몬스터는 아니었다.
지젤은 주변을 살짝 훑어보더니 남들이 듣지 못하게 목소리를 낮췄다.
“...사실 의심가는 곳이 있어.”
“그게 정말인가? 왜 아까는 말 안 했지?”
“말해봤자 좋을 거 하나 없으니까. 투탄타를 봤잖아?”
지젤은 빈정거리듯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의심가는 곳을 말해봤자 거기로 가자고 선동이나 했을 놈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범인은...”
이한은 지젤의 말에 집중했다.
이윽고 북부 출신 엘프의 입술이 열리더니 기다리던 말이 흘러나왔다.
“...교장 선생님 같은데.”
“......”
이한은 집중을 풀고 하찮은 음모론자를 보는 눈빛으로 지젤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지젤은 알아차리지 못하고 계속 속삭였다.
“아무리 에인로가드가 몬스터로 들끓는 곳이라고 하더라도 이 정도로 마법사가 많은 곳을 뚫고 그냥 데리고 갈 수 있을 것 같아? 상대는 마법사가 분명하다고.”
‘듣다 보니 설득되는 게 무섭군.’
음모론이 무서운 게 듣다 보면 은근히 그럴듯하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해골 교장 음모론은 생각보다 설득력이 있었다. 이한은 흔들리는 자신을 느꼈다.
‘정말 교장 선생님인가? 확실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긴 하다. 하지만...’
당장 흑마법 시약을 빌리기 위해 해골 교장을 찾아갔던 게 얼마 되지 않았다.
만약 학생을 데리고 갈 생각이었다면 즐거워서 싱글벙글했을 텐데 그런 기색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한이 속아 넘어간 것인가?
“으아악! 워다나즈! 워다나즈!”
흰 호랑이 탑 학생 한 명이 비명을 질렀다.
바리케이드 바깥에 몸을 기울였다가 맥이 채찍처럼 긴 코를 뻗어 휘감은 것이다.
“지금 간다. 번쩍여라!”
번개가 작렬하자 맥은 움찔했지만 그뿐이었다.
같은 마법 저항 전문가로서 이한은 상대가 마법 저항에 만만치 않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
‘그렇다면...’
“마비되고, 골절되고, 암전되어라. 뼈여, 적을 붙잡아라!”
흑마법 학파 선배들이 있다면 기립박수를 쳤을 정석적인 전투법이었다.
마법이 잘 통하지 않는 상대한테는 저주를 중첩시켜서 방어를 깎고, 뼈 원소 마법으로 움직임을 견제한다.
“냉기여, 화살이 되어 쏘아져라!”
그걸로 끝나지 않고 냉기 화살들이 날아갔다.
번개 마법에도 견딘 맥인 만큼 냉기 화살에 타격을 입진 않았지만, 얼음과 성에가 겹겹이 쌓이자 느려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상대가 느려지자 이한은 바로 물 구슬을 불러왔다.
‘관통은 안 되더라도 충격은...’
완벽하진 않지만 회전하는 물 구슬의 충격은 기존 마법과 차원이 달랐다.
방금까지만 해도 정문을 부수고 들어오려던 맥이 움찔대더니 방향을 돌리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놈이 도망친다!”
“쫓자!”
“안 돼!”
“......”
바로 또 의견이 나뉘자 이한은 골치가 아팠다.
게다가 아까와는 상황이 달랐다.
‘해골 교장이 사주한 거면 이야기가 달라지는데.’
이한은 기본적으로 안전한 방법을 선호했지만, 이 모든 사건의 일련이 해골 교장 때문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해골 교장의 예상과 반대로 행동해야 했다.
“워다나즈. 쫓는 순간 학생 몇 명 더 사라질 수 있다는 걸 명심해.”
“그렇다고 안 쫓아갈 수도 없어. 교장 선생님이 한 거라면 더더욱. 모라디. 여긴 네가 맡아서 지키고 있어줘라. 살코하고 같이 갔다 올 테니까.”
“......”
이한의 말에 지젤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이 멈칫했다.
이한이 자신한테 부탁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이한. 모라디하고 같이 가는 게 낫지 않나?”
더르규가 걱정된다는 듯이 말했다.
물론 살코 패거리들의 실력도 괜찮았지만, 모라디만큼 흰 호랑이 탑에서 지독하고 독랄한 사람도 없지 않은가.
그리고 이런 점은 위험한 추적에서 장점으로 돌아오기 마련이었다.
“...이렇듯 모라디처럼 독하고 모질고 사나운 사람도 없다. 같이 가는 게...”
“더르규. 혹시 모라디한테 한 대 맞았나?”
이한은 당황했다.
더르규가 저렇게 독설을 하다니...
“그리고 같이 안 가는 이유는 살코 때문에 그래. 같이 가면 둘이 싸울 거 아냐.”
“아.”
더르규는 바로 납득하고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난 네가 모라디 실력을 믿고 맡긴 줄 알았다.”
“어?”
이한은 멈칫하더니 살짝 늦게 대답했다.
“하하. 당연히 그래서지.”
“...이한...”
* * *
샤르칸은 능숙하게 맥의 흔적을 쫓았다.
맥은 공격할 때는 위협적인 몬스터였지만, 도망치는 걸 쫓을 때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애초에 덩치가 큰데다가 숨는 재주가 그리 뛰어나지도 않았던 것이다.
문제는...
“늪지대다!”
“왜 도서관에 이런 곳이...”
“뭘 새삼스럽게.”
‘하긴 정말 새삼스럽군.’
이한은 뒤에서 들리는 대화에 속으로 생각했다.
하긴 이제 와서 학교에 뭐가 나온다고 놀라는 것도 좀 웃긴 일이었다.
“이 늪지대가 놈의 근거지면 좋겠군.”
살코가 근심 어린 얼굴로 말했다.
같은 탑 학생이 사라진 탓에 걱정 가득한 상태였다.
다른 건 몰라도 친구들을 향한 저런 태도는 존중받을 만했다. 이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길 빌자고. 살코. 고생이 많군. 친구들을 돌보느라.”
“너에 비하면 별 것도 아니지.”
“그래. ...응?”
무심코 대답한 이한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내가 뭘 돌봤...”
“놈이 멈췄다!”
“난 딱히 안 돌봤...”
“워다나즈 님. 자세 낮추십시오!”
랫포드가 허겁지겁 이한의 어깨를 눌렀다. 이한은 ‘난 그렇게 친구들을 돌보지 않아’하고 항변하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늪 한가운데에서 멈춘 맥은 기지개를 펴더니 몸을 푹 담갔다. 그러자 몸에 붙었던 뼛조각과 얼음들이 떨어져나갔다.
‘데리고 간 학생은 안 보이는데.’
그 때 맥의 뒤쪽에서 늪이 첨벙이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나타났다.
놀랍게도 그건 세이렌이었다.
“...저런 비겁한 놈들!”
이한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세이렌이 범인이었다니.
둘 사이에 마찰이 있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정당한 시험과 관련된 일이었다.
원한이 있다면 번개걸음 교수한테 풀어야지 애꿎은 학생한테 풀다니.
물론 이한도 오두막 관련해서 책임을 떠넘기긴 했지만, 지금 하는 일을 보니 떠넘기길 잘한 것 같았다.
“다들 물러서라. 세이렌한테 가까이 접근하면 위험하다.”
“알, 알겠다.”
“가자. 샤르칸!”
-♪♩♩???
세이렌은 이한과 샤르칸을 알아차리고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는 맥과 이한을 번갈아 가리키며 노래를 불렀다.
-♩♩♩♩!
“물이여...”
이한은 바로 세이렌을 공격하기 위해 자세를 잡았다.
그 순간 맥이 긴 코로 늪 위에 떠있는 통나무를 잡아채더니 세이렌에게 집어던졌다.
“??”
세이렌은 황급히 피했다.
맥은 세이렌을 확실하게 쫓아내려는 듯이 연속으로 물건을 날렸다.
세이렌은 노래를 부르며 맥을 공격했지만 맥은 휘청거리고 비틀거리면서도 난동을 피워서 세이렌을 밀어냈다.
‘뭐지? 위장전술인가?’
이한은 당황했다.
세이렌이 맥을 부리고 있는 줄 알았는데, 지금 모습은 마치 둘이 서로 영역 다툼을 하는 것 같았다.
난동을 피우던 맥은 고개를 돌리더니 이한과 샤르칸을 발견했다.
아까 바리케이드 위에서 자신을 두들기던 마법사를 발견한 맥은 울음소리를 내며 이한도 공격하려고 준비했다.
“...회전하라!”
이한은 다급히 주문을 완성시키고 공격 방향을 돌렸다.
둔탁한 타격과 함께 맥이 휘청거렸다.
“샤르칸. 부탁한다!”
이한은 혹시라도 있을 맥의 돌격에 대비해 뼈 구속구를 불러냈다.
‘뼈 폭발은... 세이렌이 휘말리나? 휘말려도 이해해주지 않을까?’
이한이 그런 사악한 갈등을 하고 있는 것도 모르고 세이렌은 황급히 늪 위를 헤엄쳐서 달려오더니 이한에게 손짓했다.
“늪으로 들어오라고?”
세이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한은 해골 교장을 보는 시선으로 세이렌을 쳐다보았다.
명백한 불신의 시선이었다.
-크르르륵!
샤르칸이 날카로운 울부짖음으로 이한에게 경고를 날렸다.
맥이 다른 견제를 무시하고 이한을 가장 우선적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말해두지만 저번 일은...”
변명하기도 전에 세이렌이 다급하게 이한을 양팔로 들어 올리더니 빠르게 반대쪽으로 헤엄쳤다.
콰콰콰쾅!
그 순간 맥이 몸을 굴리더니 주변의 잔해물을 짓밟고 쭉 돌진했다. 오싹해지는 광경이었다.
“워다나즈. 합류하겠다!”
세이렌이 적이 아니라는 걸 확인한 살코는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외쳤다.
이대로 내버려뒀다가는 워다나즈가 너무 위태로워보였던 것이다.
철커덕 소리와 함께 부여 마법을 걸어놓은 석궁이 발사됐다. 맥은 또다른 마법사들의 등장에 성질을 냈다.
“뼈여...”
음산한 주문과 함께 이한의 마력이 끓어올랐다.
이한을 들고 있던 세이렌은 그 마력의 농도에 깜짝 놀랐다.
“터져라!”
굉음과 함께 맥에게 붙어있던 뼛조각들이 터져나갔다.
그리 양이 많지 않았음에도 맥을 혼비백산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
맥은 마치 더러워서 상대해주기 싫다는 듯이 반대 방향으로 돌아서서 도망쳤다.
그 모습에 이한 일행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 정도 덩치에 저런 방어력을 가진 몬스터와 계속 전투를 벌이는 건 마법사에게 악몽이었던 것이다.
“어떻게든 됐나...”
-♩♩♪
세이렌이 이한 일행을 보며 일단은 고맙다는 듯이 노래를 불렀다.
물론 이한을 제외한 다른 마법사들은 바로 홀린 표정을 지었다.
“역시 본색을 드러내는군!”
-♩♩♩!
이한이 지팡이를 겨누면서 사납게 외치자 세이렌은 기겁해서 노래를 멈추고 고개를 저었다.
무심코 던진 노래 한 마디가 마법사들을 홀릴 수 있는 만큼, 세이렌이 그걸 알고 주의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세이렌은 노래로 의사소통하는 걸 포기하고 기슭 위에 글자를 남겼다.
‘글씨 되게 못쓰네.’
‘글씨 정말 못 쓰는군.’
이한은 진지한 얼굴로 글씨를 노려보았다.
지렁이 같은 글씨라서 어렵긴 했지만, 대충 서로 좋은 기억이 없는데도 맥과 싸우는 걸 먼저 도와줘서 고맙다는 내용이었다.
“?”
이한은 순간 무슨 소린가 싶었다.
‘아. 자길 공격하려던 걸 맥을 공격하려는 걸로 이해했군.’
생각해보니 세이렌 쪽에서는 그렇게 보였을 것 같았다.
공격을 틀어서 맥에게 날렸으니.
“에인로가드의 마법사라면 당연히 그렇게 행동해야지.”
“?”
살코가 뭔 개소리를 하냐는 듯이 이한을 쳐다보았다.
심지어 세이렌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딱히 에인로가드의 마법사가 그런 이들은 아닌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