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4화
“워다나즈가 대귀족 가문 출신이라 이런 부분에는 좀 남다르긴 합니다.”
살코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세이렌은 그 말을 듣고 놀라워하며 이한을 쳐다보았다.
제국의 대귀족 가문 출신이 보통 세이렌의 뒷목을 붙잡고 질질 끌고 올라가나?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이한의 질문에 세이렌은 슬쩍 시선을 피하더니 다시 글씨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들어보니 이 늪지대는 원래 맑은 물이 흐르는 호수였다고 했다.
에인로가드의 지하 수로로 돌아다니는 세이렌들이 휴식을 취하는 장소 중 하나였는데, 이번에 정령 홍수로 인해 늪지대로 바뀐 것이다.
그것도 억울한데 도서관 안쪽 깊숙한 곳에 있어야 할 맥이 갑자기 화가 났는지 기어 나와 사방을 파괴하고 다녔다.
원래 세이렌의 호수였던 늪지대에 영역 표시를 하는 건 덤이었다.
“......”
“......”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이 뜨뜻미지근한 시선으로 이한을 쳐다보았다.
그 시선에는 ‘혹시 우리가 도서관 가구 부숴서 요새 만들고 점령해서 화가 난 거 아니야?’란 뜻이 담겨있었다.
이한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정령 홍수 때문에 화난 게 분명하군.”
“......”
‘도서관 깊숙한 곳에는 홍수가 영향을 주지 못하지 않나?’
학생들이 당황해하는 사이 이한은 바로 자기 할 말을 이어서했다.
“내가 생색내려고 구해준 건 아니지만 오늘 은혜는 잊지 않겠지? 원래 정령의 명예로운 후예들은 은원이 확실하다던데.”
‘내가 다 부끄럽군.’
살코는 갑자기 자신의 얼굴이 화끈거리는 기분이었다.
석공 길드 출신으로 ‘체면은 먹을 수 없다’고 배운 살코도 이한을 보면 자신은 아직 멀었다고 인정하게 됐다.
다음에 건축 의뢰를 맡게 되면 꼭 이한에게 배운 것들을 써볼 생각이었다.
“가자. 살코. 놈의 영역이 어디까진지 확인해봐야겠다.”
해골 교장이 의심스러운 이상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이한은 끝까지 쫓아서 맥의 영역이 어디까진지 확인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워다나즈... 맥이 요새 때문에 화가 난 거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게다가... 맥은 학생을 몰래 납치할 능력이 없지 않을까 싶은데. 저렇게 분노한 상황이라면 더더욱.”
걱정으로 머리가 가득 찬 상태였지만, 살코 또한 지젤과 비슷한 점을 생각하고 있었다.
맥은 조용하고 은밀한 납치와는 거리가 먼 존재였던 것이다.
“어쩔 수 없군. 살코. 사실 난 맥이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게 아닐까 의심하고 있다.”
“누, 누구의?”
“바로 교장 선생님이지. 근데 확실한 건 아니고...”
“내가 그럴 줄 알았다!”
살코는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외쳤다. 이한은 살짝 당황했다.
“아, 아니. 이건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이야기고 확증은 없어서 지금 맥을 끝까지 쫓아서 확인해보자는 건데...”
“워다나즈. 드워프의 직감을 아나?”
‘넌 엘프잖아...’
“그 직감이 내게 말해주고 있다. 교장 선생님이 범인이다. 그 작자밖에 없어. 데리고 갈 거면 흰 호랑이 탑 놈들이나 데리고 갈 것이지!”
“...하여간 쫓아서 확인해보자는 거엔 동의하는 거겠지?”
“그래. 미안하다. 시간을 뺏어서.”
-♪♩♩♩...
“또 또 본색을!”
이한은 함성을 지르며 몸을 빙글 돌렸다. 그리고 지팡이를 겨눴다.
그러자 세이렌이 매우 분노한 눈빛으로 땅바닥을 손으로 후려쳤다.
탁탁탁!
아까부터 글씨를 써서 부르고 있었는데 학생들이 자기들끼리 떠드느라 무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 미안하다.”
세이렌은 방금까지 감사함이 사라진 매서운 눈빛으로 이한을 노려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분노의 노래를 몇 곡 연속으로 부르고 싶은 눈빛이었다.
* * *
세이렌의 제안은 간단했다.
맥을 추적하는 걸 도와주겠다는 거였다.
최근 지형이 바뀐 늪지대는 잘못 발을 디디면 푹 내려가는 곳도 많은데다가 길이 복잡해 흔적을 쫓아서 가더라도 놓칠 가능성이 높았다.
“과연... 잠깐. 이걸로 은혜를 갚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겠지? 혹시 몰라서 묻는 거다.”
“워다나즈... 그건 그냥 나중에 말해도 되지 않나...”
“살코. 무슨 소리냐. 원래 중요한 건 미리 말해놔야 한다.”
세이렌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낡은 나룻배 하나를 끌고 와서 학생들을 위에 태웠다.
그리고 그 나룻배를 밀며 헤엄치기 시작했다. 나룻배는 순식간에 속도가 붙어 빠르게 늪을 주파했다.
‘세이렌들에게 이런 능력이 있었군.’
이한은 속으로 감탄했다.
노래만 잘 부르는 줄 알았는데, 이런 수중지대를 돌파할 때에는 든든한 탈 것 역할을 해줬다.
그러는 사이 샤르칸은 솜씨 좋게 마른 땅을 짚고 점프하며 앞장서서 달려 나갔다. 맥의 흔적을 가장 먼저 찾으면서 속도를 늦추지 않는 건 아무 소환수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세이렌은 새삼스럽게 놀라워하며 샤르칸을 쳐다보았다.
저걸 어린 학생이 부린다는 게 믿겨지지가 않았다.
곧바로 마력 탈진이 와도 이상하지 않은데...
-크르르륵!
그렇게 잘 달려가던 샤르칸이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더니 발톱을 내세우며 경계심을 드러냈다.
“...!”
학생들은 눈을 크게 떴다.
늪지대 앞쪽에 위치한 작은 섬이 무슨 커튼이라도 친 것마냥 검게 일렁이는 장막으로 뒤덮여있었던 것이다.
-♪♩♩!!
세이렌이 짤막하게 노래를 부르자 이한은 곧바로 시선을 돌렸다. 세이렌은 다급히 노래를 멈추고 글씨를 썼다.
정말 가이난도처럼 악필이었지만 이한은 인상을 찌푸리며 잡아냈다.
“...아. 맥의 능력이 발동되고 있다고?”
세이렌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맥은 악몽을 주식으로 삼는 만큼 매우 소중하게 여겼지만, 가끔 정말 필요할 때에는 삼켰던 악몽을 토해내 다른 이들을 위협하곤 했다.
지금이 섬 위에 펼쳐진 새카만 장막은 그 징조였다.
맥이 뿜어내는 악몽의 장막!
“말도 안 돼. 맥이 왜 그런 짓을 하지?”
-......
-...?
세이렌과 샤르칸이 동시에 이한을 쳐다보았다.
서로 다른 종족이었지만 둘의 눈빛은 ‘니가 쫓아왔으니까...’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한은 단호하게 대꾸했다.
“1학년 학생이 쫓아온다고 저러는 놈이 이상한 거지. 그리고 애초에 내가 나쁜 뜻으로 쫓아온 것도 아니잖나. 어떻게 된 일인지 확인하려고 온 거지.”
세이렌은 최대한 열심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맥한테 직접 말하던가’라고 쓰려고 했지만 맥의 반응이 한 발 더 빨랐다.
장막을 확장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빛이여, 진실을 드러내라! 박무여, 퍼져라!”
이한은 빠르게 <진실의 빛 부여>와 <오고닌의 박무(薄霧)>를 시전했다.
전자는 퍼져오는 악몽을 카운터치는 용도로.
후자는 퍼져오는 악몽을 저지하려는 용도로.
그러나 맥의 악몽 장막은 생각보다 더욱 강력했다. 물밀듯이 밀려오더니 빛과 안개를 삼키고 그대로 학생들을 타격했다.
“헉!”
“컥...!”
학생들 사이에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맥이 모았다가 뿜어낸 악몽에 그대로 빠져든 것이다.
“...어.”
이한은 살짝 당황했다.
악몽 때문이 아니라, 악몽이 너무 효과가 없었던 것이다.
마력 때문에 저항력이 강한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잠깐 환상 정도는 볼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못 보고 그냥 악몽 장막이 스쳐지나가니 좀 머쓱했다.
‘이럴 때가 아니다.’
최대한 빨리 맥을 제지해야했다.
이런 환상 공격에 당한 겉모습은 그렇게 위험해보이지 않아도, 속으로 쌓이는 데미지가 상당했던 것이다.
오래 붙잡힐수록 위험했다.
‘접근하려면 세이렌을 깨워야 한다. 깨울 수 있을까? 강한 충격을 주면 깨어날까?’
이한은 무슨 마법을 날려야 할지 고민하며 세이렌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세이렌이 멀뚱멀뚱한 눈으로 이한을 지켜보고 있었다.
“......”
-......
생각해보니 세이렌은 노래로 다른 존재를 홀리는 강력한 정령의 핏줄인 만큼, 이런 악몽에 대한 저항이 강한 것도 당연했다.
이한은 슬쩍 지팡이를 내렸다.
세이렌은 의심스럽다는 듯이 이한을 쳐다보았다.
“빨리! 맥이 있는 쪽으로 안내해라! 친구들을 구해야 해!”
이한의 외침에 세이렌은 허겁지겁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배를 밀기 시작했다.
악몽을 펼쳤는데도 안으로 뚫고 들어오자 맥이 울부짖었다.
■■■■■...
“놈이 뭐라는 거지?”
세이렌은 급히 뱃전 위에 글씨를 썼다.
왜자구날괴롬히냐고...
“...자기가 먼저 선량한 사람들을 괴롭혀놓고 저런 소리를 하다니 어처구니가 없군! 하지만 선량한 우리가 한 발 양보하도록 하지. 악몽을 당장 멈추고 공격을 멈춘다면 홍수가 끝나는 대로 학생들은 도서관에서 나가겠다고 전해줘라!”
-???
세이렌은 학생들이 도서관에서 나간다는 게 뭔 뜻인지 묻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일단 세이렌은 그대로 전했다.
-♩♩♩♪...
“감히!”
이한은 노랫소리를 듣자 본능적으로 반응했다.
그리고 친구들이 다 악몽에 빠져서 아무 영향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아. 미안하다. 계속 불러라.”
-......
나룻배를 붙잡고 있는 세이렌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
세이렌은 열심히 통역했다.
맥은 ‘그게 정말이냐’고 묻고 있었다.
“가문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겠다.”
이한의 진심에 세이렌은 크게 놀랐다.
가문의 이름까지 걸 줄이야.
좀 과하지 않나?
“대신 나도 확인해야겠다고 전해라. 교장 선생님의 사주를 받았을지도 모르니까.”
먼개소리냐고...
“...하여간 확인시켜달라고 전해라! 서로 싸움을 피하고 싶다면!”
* * *
악몽에서 풀려난 학생들은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맥의 둥지로 다가갔다.
놀랍게도 정말 해골 교장의 흔적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데스 나이트나 기타 마법의 흔적 등 모두.
살코는 심각한 표정으로 속삭였다.
“위장이 아닐까?”
맥이 경멸 섞인 눈동자로 살코를 내려다보았다.
이한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학생 한 명이 갑자기 사라져서 찾고 있는데, 혹시 아는 게 있나?”
■■■■■.
세이렌이 머뭇거리면서 통역했다.
“...이 시기라면 예지 마법 시험 때문에 교수가 학생을 종종 데려간다고? 무슨 터무니없는 모함을... 크라어 교수님이 교장 선생님도 아니고 그런 짓을 하실 리가...!”
말하던 이한은 머뭇거렸다.
생각해보니 딱히 크라어 교수가 그런 짓을 하지 말란 법도 없었던 것이다.
‘나는 크라어 교수에 대해 무엇을 아는가?’
교수에 대해서 지켜야 할 한 가지 원칙은 오로지 ‘과소평가를 하지 말 것’이었다.
■■■■■■■...
예전에한상마법시험준비돕면서직접밧다는데?
“...일단 그 의견을 받아들이도록 하지. 확인해보겠다.”
이한은 바로 종이와 깃펜을 꺼냈다.
“자세한 상황을 말해보도록. 언제 어디서 환상 마법 시험 준비를 도왔지? 올해도 도왔나? 그리고 예지 마법 시험 때문이라면 학생들을 어디에 가뒀지? 말해봐라.”
맥이 머뭇거렸다.
교수가 뭐라고 금지하진 않았지만, 이런 걸 말해도 되나 싶었던 것이다.
이한은 강하게 다그쳤다.
“어허! 학생들이 도서관에서 계속 사는 꼴 보고 싶나?”
맥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거렸다.
결국 맥은 포기하고 자기가 아는 정보들을 털어놓았다.
■■■...
옆에서 통역하던 세이렌의 표정이 점점 미묘해졌다.
분명 자기들의 영역에 멋대로 쳐들어와서 난동을 피운 맥이 나쁜 놈이었는데, 이상하게 점점 자신이 악당 같은 기분이 든 것이다.
객관적으로 보면 맥도 자기 영역으로 돌아가고 세이렌들도 자기 영역을 되찾는 좋은 결과일 텐데 어째서...
일렁이는 불빛 사이로 번뜩이는 마법사 소년의 조각 같은 얼굴이 유독 더 사악하게 번뜩이는 것 같았다.
‘...기분 탓일 거야!’
멕이
늠력이
발발동하고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