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5화
“쓸만한 내용이 생각보다 적군.”
“?”
이한의 말에 옆에 있던 살코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방금 맥이 말한 내용들이 대충...
-키르민 쿠 교수는 환상 마법 시험을 대비해 맥이 먹은 악몽을 유리병에 담아 놨다.
-파셀레트 크라어 교수는 학생들의 예지를 혼란시키기 위해 데리고 간 학생들을 주로 키르민 쿠 교수의 공방 주변에 숨겨놓는다.
...이 정도인데 되게 알찬 것 아닌가?
“워다나즈. 이 정도면 쓸만한 것 같은데...”
살코는 평소 보여주던 거친 태도와는 다른,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자신도 모르게 이한의 광기에 주눅 든 탓이었다.
이한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살코를 타박했다.
“살코. 지금 맥이 눈물 글썽인다고 속아 넘어간 건가? 네가 정말 에인로가드 학생이 맞나?”
“......”
-......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은 물론이고 세이렌까지 이한을 쳐다봤지만 이한은 흔들리지 않았다.
“자기 악몽을 유리병에 담아놨으면 어떻게 대처하는지 말해줘야지. 그냥 담아놨다고만 하면 어떡하나? 그리고 공방 주변에 숨겨놨다는 건 누구나 다 추측할 수 있다. 어떻게 들어가는지도 말해줘야지.”
살코는 이한의 뻔뻔함에 감탄을 넘어 전율했다.
대체 제국 대귀족 가문 출신이 어떻게 이 정도 수준의 뻔뻔함을?
“저... 워다나즈 님. 맥이 숨긴 악몽에 대해 물어볼 게 있습니다.”
“오. 랫포드. 혹시 좋은 방법이 생각났나?”
이한은 반색하며 물었다.
맥이 삼킨 악몽은 쉽게 상대하기 힘든 강력한 능력이었다.
아까도 막으려고 했지만 실패한 만큼 이한은 맥을 괴롭혀서라도 대처방법을 짜낼 생각이었다.
자신이 삼킨 악몽이라면 분명 방법이 있으리라.
“그... 워다나즈 님은 어차피 악몽 안 통하시는데 대처방법이 굳이 필요합니까?”
“......”
* * *
퍼드득-
“?”
도서관 입구 요새에 대기하고 있던 학생들은 갑자기 날아온 종이 새에 의아해했다.
“뭐지? 워다나즈가 보낸 건가?”
“아냐. 반대쪽에서 왔어.”
‘워다나즈가 그 거리에서 종이 새를 보낼 수 있는지부터 생각해야 하지 않나...’
<예지 마법 수강 학생들에게 알립니다>
리치몬드 가문의 샤일스 학생은 시험을 위해 위치를 옮겼습니다. 이번 주까지 학생의 위치를 파악해서 제출하세요.
-파셀레트 크라어
“......”
“......”
편지를 읽은 학생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가 어쩌고 저째?
“...교수들이 전부 개자식이라는 걸 잊고 있었네.”
특히 지젤의 배신감은 가장 컸다.
해골 교장을 의심했는데 정작 다른 교수가 범인이었다니.
“잠깐. 아까 그럼 맥은 왜 쳐들어온 거야?”
“우리가 여기 점령해서 화난 거 아닌가?”
“에이. 설마 그런 이유 때문일까. 여기 좀 빌려서 쓰는 게 뭐 그렇게 나쁘다고.”
지젤은 흰 호랑이 탑 학생한테 ‘그 정도면 몬스터가 충분히 화날 수 있는 이유다’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먼저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거기 둘. 추격대 쪽으로 가서 빨리 돌아오라고 전해.”
“어... 모라디. 워다나즈면 알아서 알아차리지 않았을까?”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두 명이서 요새 밖을 돌파하기 꺼림칙했는지 변명을 댔다.
그러자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이 야유했다.
“그걸 말이라고 하냐! 아무리 워다나즈라고 해도 그걸 어떻게 알아차리냐!”
“같은 탑 친구였어도 네놈이 그랬을 거냐! 워다나즈가 너한테 먹인 음식이 아깝다!”
“겁쟁이 자식! 우우! 처먹은 거 뱉어내라!”
마지막 가이난도의 야유에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의 얼굴이 붉어졌다.
“가면 되잖나, 가면!”
“우우! 우우!”
“...저 자식 닥치기 전에는 절대 안 나간다. 닥치게 해!”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이 가이난도의 야유를 막았다.
그리고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투덜거리면서 출발하려고 할 그 때, 멀리서 추격대가 돌아왔다.
“!!”
“돌아왔다!”
“워다나즈! 빨리 돌아와! 몬스터가 아니라 교수님이 납치했대!!”
멀리서 친구들의 외침을 들은 이한이 대답했다.
“알고 있다! 크라어 교수님이 납치했겠지!”
“......”
“...???”
요새 안의 친구들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대체 어떻게?
“...내가 뭐라고 했냐! 워다나즈는 알아서 알아차린다고 했잖나!”
아까 변명을 꺼냈던 흰 호랑이 탑 학생은 갑자기 떠올랐는지 큰소리를 쳤다.
지젤은 친구의 어깨를 톡톡 두드린 다음 가까이 오라고 검지손가락을 까닥였다.
“왜? 모라디?”
“쪽팔리니까 주둥이 닥쳐 좀.”
“...응...”
요새 정문을 통과한 이한은 맥과 있었던 일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하여간 홍수 끝난 다음 도서관을 비워주겠다고 하니 납득하더군.”
“......”
“......”
“...잠깐만 조금 더 길게 설명해줘야 알 것 같...”
아까 그 난동 피우던 몬스터와 어떻게 협상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아 학생 한 명이 물으려고 하자 이한은 말을 막았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면...”
“지금 환상 마법 시험과 예지 마법 시험이 곧 닥치는데 그게 더 중요하지. 다들 알려줄 게 있으니 각 학파 듣는 사람들은 한쪽으로 모여라.”
환상 마법을 듣는 랫포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한의 팔을 붙잡고 환상 마법 쪽으로 자연스럽게 끌고가려고 했다.
예지 마법을 듣는 아산도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한의 팔을 붙잡고 예지 마법 쪽으로 자연스럽게 끌고 가려고 했다.
“...둘 다 놔라.”
“아차!”
“죄송합니다.”
두 친구는 민망해하면서 손을 놨다. 이한은 씁쓸해하면서 얻은 정보를 설명해줬다.
“맥의 악몽을?”
“그래. 안타깝게도 맥한테서 파훼법을 캐내진 못했다. 비열한 자식 같으니.”
“...?”
“아, 아니. 맥이 그것까지 알진 못하겠지.”
친구들은 이한의 말에 당황했다.
독을 가진 뱀이 해독제를 갖고 다니진 않듯이 맥 또한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뱀을 붙잡고 ‘해독제를 내놔라’한다고 없는 해독제가 생기진 않았다.
“그래서 파훼법은 각자 알아서 고민해야 할 것 같고... 예지 마법 시험이 문젠데. 쿠 교수님의 탑 주변에 있다는 것까지는 알아냈거든.”
“뭐?!”
“대체 어떻게!”
이한의 말에 예지 마법을 듣는 학생들은 깜짝 놀랐다.
아무리 천재적인 마법 능력을 가진 워다나즈라 하더라도 아무런 단서도 없는 상황에서 저렇게 위치를 좁히는 예지는 불가능해보였다.
설마 워다나즈가 마법에 불가능은 없다는 오래된 옛말을 스스로 증명해내기라도 한 것일까?
“어. 맥한테 물어봤는데.”
“......”
“......”
듣고 있던 학생들은 슬슬 이한이 맥한테 어떻게 물어본 건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저 정도로 털어놓으려면 무슨 맥을 거꾸로 매달아놓고 고문이라도 한 것 아닌가?
“이봐. 살코. 맥은 괜찮았나?”
“조금 울긴 했는데 전체적으로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라.”
살코는 나름 이한을 변호해주기 위해서 한 말이었지만 별로 효과적이진 않았다.
검은 거북이 탑 친구들은 경악한 얼굴로 소곤거렸다.
“정말 괜찮았습니다. 솔직히 세이렌 씨가 더 상태가 안 좋아보였...”
“뭐? 세이렌이 왜 나오는데?”
“그, 배 끌고 가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세이렌을 붙잡아서 노잡이로 썼다고???”
“야. 거기 조용히 해라.”
이한은 자꾸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친구들에게 짜증을 냈다.
지금 신성한 시험 준비 기간에 무슨 잡담이 그리 많단 말인가.
“탑 주변에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려면 아직 멀었다. 단서의 양이 부족한 만큼 모두 협력해서 찾아내자.”
옆에서 듣고 있던 가이난도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생각에는 지하실일 것 같아.”
“어째서지?”
“저번 호 잡지에서 토베리즈가 납치된 사람을 찾은 곳이 지하실이었거든.”
“......”
“잠깐. 너 예지 마법 안 듣잖아.”
“어? 어. 근데 내 도움이 다들 필요할 것 같아서...”
예지 마법 전공 학생들은 가이난도의 양 팔을 붙잡은 다음 뒤로 질질 끌고 갔다.
이한은 무시하고 말을 이어나갔다.
“지도를 갖고 와. 각자 구역을 나누자. 아산. 너는 여기 키 큰 느릅나무부터 벽돌담까지. 너는...”
-편지 왔습니다!
데스 나이트가 도서관 입구에서 나타나서 외치자 학생들은 화들짝 놀랐다.
-다들 왜 그러십니까?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친구가 사라져서요.”
학생들은 교장의 하수인 앞에서 ‘납치 사건이 벌어졌는데 해골 교장을 가장 의심하고 있다가 괜히 놀랬다’라고 대답하기 뭐해서 슬쩍 말을 돌렸다.
-주인님이 납치하신 겁니다! 전 아무것도 모릅니다!
“...아, 아니. 교장 선생님이 아니라 다른 교수님이 납치하신 겁니다.”
-아. 그래요?
데스 나이트는 민망해했다.
-전 또 주인님이 납치하신 줄 알았습니다.
“......”
“......”
-하여간 여기 편지입니다.
데스 나이트가 편지를 건네자 이한은 무심코 받았다.
그 순간 편지가 검게 타오르더니 강한 파동이 이한을 타격했다.
“?”
오늘의 교훈은 바로 수상한 편지를 쉽게 열지 말라는 것이다!
해골 교장의 즐거운 목소리가 허공에서 메아리쳤다.
웃음이 계속 나오겠지만 교훈의 대가로 생각하도록 해라. 1시간 정도면 사라질 거다.
“......”
강제 웃음 저주가 걸려 있는 편지보다 더 무서운 건 저주가 통하지 않았는데도 녹음된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어색한 상황이었다.
학생들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고, 데스 나이트는 자기가 대신 창피함을 느껴 고개를 푹 숙인 상태였다.
“음... 뭐... 제가 뽑을 확률이 낮으니 잊으셨을 수도 있잖습니까.”
-주인님한테는 부디 비밀로 해주십시오.
내일 아침 <기초 마법 인성 교육 심화> 시험은 간단하게 치르도록 하겠다. 다들 고생이 많았으니 소풍이나 가자꾸나.
“?”
“???”
“?????”
너무나도 예상 밖의 말에 학생들은 당황했다.
뭔...
“소, 소풍?”
“좋은 거 아닌가?”
“야. 밖에 날씨를 봐...”
“그, 그래도 시험보단 나은 것 같은데.”
학생들은 ‘이딴 날씨에 소풍을?’과 ‘그래도 이 정도면 다행인가?’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했다.
참. 소풍 준비도 점수에 들어간다. 도시락 잘 싸와라. 남이 싸주는 건 절대 금지다. 워다나즈. 듣고 있느냐?
학생들의 시선이 이한에게 쏠렸다. 이한은 살짝 억울함을 느꼈다.
그럼 준비 잘 하고 내일 보자꾸나!
목소리가 아득히 사라져갔다.
“소풍 장소가 어디에요?”
-저는 잘 모릅니다. 내일 안내해주지 않겠습니까?
“......”
“......”
-정말 모릅니다! 믿어주세요!
학생들의 날카로운 시선에 데스 나이트는 진심을 담아 호소했다.
* * *
“지금 뒤집어야지. 아니. 살살 뒤집으라고. 넌 살살의 뜻을 모르냐? 불 세기 줄여. 불 세기 줄이라고. 불 세기 줄이라고!”
가이난도는 앞으로는 팬케이크를 먹을 때 한 입 한 입 소중히 먹겠다고 속으로 울며 프라이팬을 흔들었다.
별 생각 없이 먹었던 음식에 이렇게 커다란 고충이 있었을 줄이야...
“예지 마법 시험 준비해야하는데 너무 시간을 많이 뺏기는군.”
이한은 임시로 세운 화덕 앞에 모여 있는 학생들을 보며 혀를 찼다.
아직 남아 있는 시험들이 있는데 이렇게 시간을 뺏겨야 하다니.
“조금 치사한 것 아닙니까?”
-어... 음... 워다나즈 학생이 너무 많이 듣는 거 아닐까요?
데스 나이트는 무심코 대답했다가 스스로 입을 막았다.
지금 미래의 대마법사한테 무슨 원한을 사려고 이런 말대꾸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