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6화
다행히 이한은 데스 나이트의 주인처럼 말 한 마디에 분노해서 징벌방에 보내는 일은 하지 않았다.
대신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확실히 많이 듣긴 하죠.”
-!
데스 나이트는 살짝 감격했다.
하수인의 말에도 귀기울여주는 저런 모습이라니.
저 소년은 해골 교장과 달리 성군의 자질을 갖고 있었다.
물론 나이 먹으면 해골 교장처럼 될 수도 있었지만 일단 아직은...
“그런데 강의 중 몇 개는 교장 선생님이 억지로 듣게 한 거란 말입니다.”
-주인님께서 그런 일도 하셨습니까?
데스 나이트는 기겁했다.
해골 교장이 미친 대마법사인 건 알고 있었지만 학생 강의도 멋대로 추가할 정도로 미쳤을 줄이야.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무슨 강의들을 추가하셨는데요?
“기초 춤과 사교 강의요.”
-그 정도는 뭐...
춤과 사교 정도면 다른 강의들과 비교했을 때 꽤 즐겁고 유쾌한 강의였다. 공부량이 많지도 않은 만큼 더더욱.
-또 다른 강의는 뭐가 있습니까?
“...음. 생각해보니 그게 다긴 합니다.”
-...???
데스 나이트는 살짝 당황했다.
해골 교장이 강제로 듣게 한 강의가 고작 한 개라면...
그럼 그냥 나머지는 다 자기가 알아서 신청한 것 아닌가?
‘아차.’
데스 나이트는 이번에는 성공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괜히 건드렸다가 해골 교장처럼 성질이 더러워진다면 그들만 손해였다.
* * *
해가 보이지도 않는 우중충한 아침이 찾아오고, 학생들은 하품을 하며 선착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각자 배낭에는 밤새 준비한 도시락들이 들어있었다.
“가이난도. 그래서 팬케이크 말고 뭐 넣었어?”
“팬케이크만 넣었는데?”
“...어? 팬케이크만 넣었다고? 정말로?”
“아. 다른 것도 넣긴 했어.”
“뭘 넣었는데?”
“꿀하고 생크림하고 딸기잼.”
“...그러니까 결국 팬케이크만 넣은 거잖아?”
물론 각자의 도시락은 차이가 컸다.
같은 재료를 쓰더라도 무슨 요리를 어떻게 구성해서 채워 넣느냐는 개인의 실력 차이.
“황녀님. 역시 훌륭하십니다.”
“이 다양하게 균형 잡힌 고기들이라니!”
아덴아르트의 추종자들은 단단한 나무 상자에 채워 넣은 각종 고기 요리들을 칭찬했다.
그들이 보기에 다양한 종류의 고기들을 굽고, 찌고, 양념에 재어 놓고, 튀기고, 삶는 등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요리해서 채워 넣은 도시락은 완벽해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지나가다가 그걸 본 이한은 기겁했다.
‘뭔 미친 도시락이냐 저게?’
별다른 밑반찬이나 요리 없이 고기만 가득 찬 도시락이라니.
소고기, 돼지고기, 새고기, 토끼고기 등 고기를 다양하게 한다고 도시락이 균형 잡히는 게 아니었다.
“이봐. 로웨나.”
“무슨 일이십니까?”
“안쪽에 남은 빵하고 쌀, 과일들 있으니까 황녀님한테 고기 좀 빼고 채워 넣으라고 해.”
“예? 왜 그래야 합니까?”
이한은 로웨나가 멀쩡해보여도 흰 호랑이 탑 출신이라는 걸 새삼 느꼈다.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의 식단은 괴혈병에 걸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으니...
“로웨나. 날 믿나?”
“예? 예...”
“내가 교장 선생님과 접촉할 일이 많은 것도 알고 있겠지?”
“예. 친하시잖습니까.”
이한은 순간 로웨나의 멱살을 잡고 싶어졌지만 꾹 참았다.
“...그래. 뭐든 간에. 이런 내가 말하는 게 무슨 뜻이겠나?”
“...아!”
로웨나는 깨달음을 얻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이해했습니다. 교장 선생님께서는 고기를 싫어하시는군요!”
“아니 그게 아니라... 아니다. 됐다. 빨리 가서 전해.”
로웨나가 호다닥 달려갔다. 말을 들은 황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일단 하라는 대로 도시락을 바꿨다.
촤아아아악!
저 멀리서 뼈로 된 음산한 나룻배들이 마치 함대처럼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 함대 위에 둥둥 떠 있는 건 익숙한 언데드 대마법사였다.
으으으으...!
탄주어는 해골 교장의 기운을 느꼈는지 질색하며 몸을 떨었다.
해골 교장을 공격하는 대신 온갖 잡일을 도맡아하는 것도 그렇고 정말 무서워하는 게 분명했다.
다들 소풍 준비는 했겠지?
“예...”
“근데 꼭 오늘 같은 날 소풍 가야 해요?”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가리키며 가이난도가 묻자, 해골 교장이 물총을 찍 쏘아서 가이난도의 얼굴에 뿌렸다.
소풍은 원래 비 오고 태풍 치고 지옥의 문이 열렸을 때 가는 거다. 다들 배에 타라. 데려다주마.
해골 교장의 독특한 소풍론을 들으며 학생들은 발걸음을 옮겼다.
물론 해골 교장은 순순히 태워주지 않았다.
잠깐.
“???”
도시락 열어봐라.
흰 호랑이 탑 학생은 피식 웃으면서 배낭의 도시락을 꺼냈다.
“교장 선생님. 제가 설마 준비를 안 했겠습니까? 그렇게 말하셨는데? 저희, 넉넉합니다.”
해골 교장의 방해와 핍박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식재료 현황은 꽤 넉넉한 편이었다.
물론 해골 교장 입장에서는 어처구니가 없는 소리였다.
워다나즈 놈 한 명 때문에 배부르게 먹고 지내는 놈들이 건방은...
누가 들으면 네가 모은 줄 알겠다. 재수 없는 놈아. 열기나 해라.
“예...”
달칵-
흰 호랑이 탑 학생은 뚜껑을 열었다. 구운 식빵과 절인 고기들로 꽉꽉 차있었다.
“어떻습니까? 실용적이고 먹기 쉬운...”
해골 교장은 학생을 밀어서 바다로 빠뜨려버렸다.
첨벙!
소풍을 가라고 했지 전쟁 나가냐? 소풍이 뭔지 모르냐? 20점이다.
“......”
“...어? 그냥 먹을 거 준비하면 되는 게 아니었어?”
다른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살짝 당황했다.
불합리한 에인로가드 식재료 현황에도 불구하고 음식 챙겨왔으면 잘한 거 아닌가?
이래서 무쇠대가리들은... 나중에 제국 관료들과 봄소풍이라도 가게 됐는데, 혼자서 실용적이라고 <만복감 포션> 챙겨 와서 분위기 싸늘하게 만들 생각이냐?
기본적으로 마법사들은 사회성이 부족한 편이었다.
게다가 에인로가드의 마법사들은 조금 독특한 방식으로 사회성이 진화하는 경우가 많아서 더욱 위험했다.
‘그건 교장 선생님 때문 아닌가?’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한은 속으로 생각했다.
사회성 부족은 몰라도 사회성이 이상하게 진화하는 건 해골 교장 때문 같은데...
소풍 간다고 했고 도시락 준비하라고 했으면 제국의 사회 관습에 걸맞은 적당한 도시락을 준비해야지. 이건 뭐냐? 이건? 다음!
“그... 제 도시락은 다양한 고기를 절여서 만든...”
고기 못 먹어서 환장했냐? 15점이다. 다음!
“......”
황녀는 자신과 비슷한 도시락을 제출한 흰 호랑이 탑 학생이 무참하게 깨지는 걸 보자 당황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냥 자기 입에 맛있으면 되는 게 아니었단 말인가?
-야채가 좀 많긴 하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군. 잘했다.
-쌀을 사용한 요리는 동부 출신은 물론이고 다른 지방 출신도 신선해하지. 좋은 선택이다.
-넌 뭐냐, 아주 설탕으로 채워오지 그랬냐?
“헉. 그래도 되나요?”
해골 교장은 팬케이크만 꽉꽉 채워놓은 가이난도를 바다에 밀어버리고 말했다.
잘 들어라. 물론 소풍은 휴식하고 즐기는 시간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건 <기초 마법 인성 교육 심화> 강의지 않느냐. 휴식하고 즐기더라도 강의의 기본은 지켜야 하는 법이다.
“...그냥 소풍이라는 말을 빼버리면 안 되나?”
“이게 뭔 소풍이야...”
시작부터 혹독한 예절론을 펼치는 해골 교장의 모습에, 학생들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물론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이건 그 기대의 바닥을 뚫고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자. 그러면 다음...
이한은 침착하게 뚜껑을 열었다.
준비시간을 줄이고 소풍답게 구성해야 하는 만큼 양상추, 슬라이스한 햄, 다진 계란, 마요네즈, 치즈 등 다양한 재료를 잘라 넣은 샌드위치가 주 메뉴였다.
옆 물병에 채워 넣은 홍차는 아직 따끈따끈해서 진한 향을 풍겼...
...이 홍차 잎은 교수 휴게실 물건이잖아!
‘아차.’
이한은 자신의 안일함을 탓했다.
하도 이곳저곳에서 훔쳐온 물건들이 많아서 까먹었던 것이다.
* * *
휘이이이이잉!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바람이 점점 더 강하게 불기 시작했다.
작은 섬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만큼 조그만 땅 한 뙈기를 발견하자 해골 교장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람의 정령들이 잔뜩 화가 났나. 소풍하기 좋은 날씨군.
“......”
“......”
다들 배에서 내려라! 여기 짐을 풀자꾸나.
학생들은 반쯤 젖은 상태로 배에서 내렸다.
그 때 강풍이 몰려오더니 학생 몇 명을 물속에 빠뜨렸다.
“야. 다들 밧줄 꺼내서 서로 묶자.”
소풍에 무슨...
해골 교장이 투덜거렸지만 이한은 무시하고 친구들에게 밧줄을 나눠줬다.
그렇게 해서 학생들은 섬 위에 천과 담요를 깔고 앉았다. 요네르가 옆에서 중얼거렸다.
“살면서 이렇게 우울한 소풍은 처음이야.”
친구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학생들이 원하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이 소풍이 제발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일단 불이라도 피우자.”
“그래.”
학생들이 불쏘시개를 꺼내고 지팡이를 휘두르려고 하자 해골 교장이 빙긋 미소지었다.
아니나 다를까, 세찬 비바람으로 금세 불이 꺼져버렸다.
“다들 좀 비켜봐라. 내가 피울 테니까.”
이한이 지팡이를 휘두르자 불꽃이 사납게 땔감을 집어삼키며 피어올랐다. 해골 교장이 인상을 찡그렸다.
‘즐거운 소풍을 망치다니.’
다들 도시락 먹으면서 들어라. 오늘 소풍의 다음 예정은... 음. 보물찾기군.
“?”
팬케이크를 구워먹고 있던 가이난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물이 어디에 있어요?”
“......”
“...후.”
친구들은 이미 한 번 경험한 만큼 체념한 표정으로 지팡이를 들고 수중 호흡 마법을 준비하고 있었다.
참. 이것도 점수에 들어간다.
“진짜 그냥 소풍 빼면 안 됩니까?”
* * *
<절인 청어 한 상자>
<마멀레이드 잼 두 병>
<백령토 네 주머니>
<골분 세 통>
...
보물이 나쁘진 않았다.
문제는 날씨였다.
딱딱딱딱딱딱-
“언, 언데드 소환됐나?”
“아니. 가이난도가 이빨 부딪치는 소리야.”
나름 탄주어의 도움을 받으면서 돌아다녔던 학생들은 정령 홍수의 진면목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자연 앞에서 마법사의 마법은 너무나도 나약했던 것이다.
<잠열 부여>처럼 체온을 보존해줄 마법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요네르! 봤어? 봤어?! <잠열 부여>가 성공했어! 불에 안 탄다고!”
“...이, 이한. 지금 좋아할 때가 아닌 거 같은데.”
요네르는 이한의 옷을 잡아당기면서 말렸다.
다른 학생들이 황당해하며 이한을 쳐다보고 있었다.
“...으흠. 미안하다. 다들. 하도 실패를 많이 해서.”
“아, 아니야. 워다나즈. 그럴 수도 있지.”
“맞아. 마법 성공은 기쁜 게 당연하잖아.”
“그렇지? 몇 번 더 써봐야겠다.”
이한은 보기 드물게 신이 나서 <잠열 부여>를 시전하고 다녔다. 친구들은 뭐라고 형언하기 힘든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너희는 워다나즈의 마음을 모르는 거냐? 워다나즈가 고작 마법 하나 때문에 저럴 리가 없잖냐.”
아산이 친구들을 타박했다.
“그럼?”
“너희들이 하도 추위에 떨어서 저러는 거겠지. 얼마나 걱정이 됐겠냐.”
“아!”
“그런...!”
가이난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냥 신난 것 같은데?’
물론 말했다가는 친구들한테 떠밀려서 바닷속으로 들어갈 것 같았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한이 친구들에게 보온 마법을 걸어주는 동안 해골 교장은 침착하게 기다렸다.
물론 저 모습이 꼴보기 싫은 건 사실이었지만, 소풍은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었다.
슬슬 올 때가 됐군...
“...또 뭘 하신 거야?”
“설마 또 세이렌은 아니겠지.”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이 질색하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해골 교장은 깜짝 놀라 되물었다.
누가 세이렌 먼저 썼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