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9화
“워, 워다나즈?”
“그래. 잘 지냈냐?”
이한은 방 안을 훑어보았다.
보아하니 징벌방과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하긴 크라어 교수님이 해골 교장도 아니고 시험 때문에 섭외한 학생을 괴롭히진 않았겠지.’
“어... 그... 그게...”
샤일스는 당황해서 눈동자를 떼굴떼굴 굴렸다.
이대로 검은 거북이 탑 친구들에게 돌아가면 한 소리를 들을 것 같았던 것이다.
-넌 이 자식아 의리도 없어? 너 혼자 살겠다고!
-너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단서 하나라도 남겼어야지!
“걱정하지 마라. 다른 친구들한테는 고생한 걸로 해줄 테니까.”
이한은 샤일스의 속마음을 읽고 말했다.
샤일스는 감격해서 울먹였다.
“워다나즈...!”
“나중 방학 때 리치몬드 가문 마차 빌릴 일 있으면 할인이나 해줘라.”
“농담도 참. 그냥 공짜로 빌려줄 수도 있는데.”
“농담 아닌데?”
“...이, 이것도 농담인가?”
폰리그가 그르륵대며 사나운 소리를 냈다.
이 눈치 없는 소년을 떨어뜨릴까 하고 묻는 질문이었다.
본인도 말 수인인데다가 운송 길드 가문 특성상 탈것들을 많이 돌봐온 샤일스는 불길함을 느꼈는지 떨었다.
“왜, 왜 이러는 거지?”
“네가 마음에 드나보군.”
“그... 그럴 것 같진 않은데.”
샤일스는 그리폰이 어떤 몬스터인지 잘 알았다.
흔히 같이 언급되는 히포그리프나 페가수스들과 비교해 봐도 그리폰은 그 사나운 성질과 교활한 지능으로 인해 길들이는 난이도가 매우 높았다.
그런 그리폰이 저러고 있으니 샤일스 입장에서는 정말 워다나즈가 그리폰을 길들였는지 아니면 그리폰이 워다나즈를 속이고 있는 건지 확신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워다나즈... 그... 그 있잖아. 내가 널 절대 무시해서가 아니라... 그리폰은 원래 사납고 속임수를 잘 쓴다는 거 아나?”
폰리그가 낮게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기껏 충성을 바친 주인이 자신을 뒤늦게 신뢰한 것도 어이없는데 웬 소년이 이간질을 하는 게 매우 괘씸했다.
“흠.”
샤일스의 말에 이한은 폰리그를 내려다보았다.
워낙 급한 만큼 저주 해제의 물약을 사용해서 잠깐 저주를 풀고 데려왔는데, 또 샤일스의 말을 들어보니 갑자기 폰리그가 유독 사나워보였다.
평소에는 말 형태의 모습을 주로 봐서 그런지도 몰랐다.
폰리그는 매우 억울함 가득한 눈빛으로 부리를 딱딱 부딪치며 큰 소리를 냈다.
자기가 비록 처음에는 좀 까칠하게 굴었다지만 그 이후로는 언제나 충성을 바쳤는데 저딴 어린 놈 말 한 마디로 의심하다니!
“아니. 폰리그는 착하다. ...아마.”
폰리그는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멈칫했다. 뭔가 찜찜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하여간 빨리 타라. 다음 시험 준비해야 하니까.”
샤일스는 폰리그의 눈치를 보다가 서둘러 올라탔다.
그리폰도 무서웠지만 사실 워다나즈도 만만찮게 무서운 사람이었다. 기껏 구하러 왔는데 계속 말대꾸를 하다가는 그리폰보다 더 무서워질 수 있었다.
“그런데 워다나즈, 내가 어디 있는지는 어떻게 알아낸 거지?”
“예지 마법으로.”
“...어? 그게 가능한가?”
샤일스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예지란 게 기본적으로 정보나 단서가 적고 목표가 마법으로 보호받고 있으면 난이도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갔다.
샤일스는 당연히 워다나즈가 몇 가지 단서로 이 주변을 찾아낸 다음 탑의 몇 층에 갇혀있는지만 예지 마법으로 알아낸 줄 알았다.
“다른 시험 때문에 시간이 없어서 그냥 될 때까지 무한반복 돌렸지. 그러니까 여기 나오던데.”
“......”
샤일스는 이한의 등 뒤에서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상상치도 못한 무식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예지 마법을 한 번 쓸 때마다 드는 부작용과 반작용이 있는데 그걸 그냥 될 때까지 연속으로 때려박았다니.
“그... 그래도 되나??”
“다른 시험들도 봐야 해서 시간이 부족해. 어쩔 수 없지. 빨리 가자고.”
“아니 시간이 없다고 이런 짓을 하는 건...”
시험 공부할 시간이 없다고 이렇게 과격하게 행동하다니.
만약 조금 더 부족했다면 무슨 짓을 했을지 상상도 가지 않아서 두려웠다.
“잠깐. 그럼 그리폰은 어디서 난 거야?”
“교수님이 빌려주신 말을 잠깐 변신시켰다.”
“...농, 농담이지? 이것도?”
달칵-
방금까지 샤일스가 갇혀 있던 방의 문이 열리더니 파셀레트 교수가 안으로 들어왔다.
간식이라도 주려고 문을 열었던 교수는 반쯤 박살난 창문 모습에 어안이 벙벙해져서 물었다.
“...왜, 왜 부쉈지?”
“......”
이한은 그 질문에 살짝 당황했다.
어라?
‘부수고 구해내는 게 시험 아니었나?’
잘 생각해보니 교수는 위치를 파악하고 제출하라고 했지 구하란 소리를 하진 않았었다.
그냥 습관적으로 창을 부수고 들어온 것이다.
‘음. 이대로 말하면 너무 미친놈 같다.’
이한은 좋은 변명이 없나 생각하다가 폰리그와 눈이 마주쳤다.
“혹시...”
폰리그가 자기를 핑계로 쓰지 말라고 호소하듯이 울었다.
* * *
“어쨌든 잘 했다... 잘 했어.”
시험 문제 풀라고 했는데 시험장을 부숴버린 민망함에 이한은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파셀레트 교수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다행이다. 친절한 교수님이시군.’
“그럼 이만 가보겠...”
“그러니까 내가 다르게 가르쳐야 한다고 했잖나!!!”
“!?”
“!”
이한과 샤일스는 갑자기 다른 목소리로 외치는 교수님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폰리그가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낮게 울었다.
“교수님?”
“아. 신경쓰지 마. 신경쓰...”
“신경을 안 쓰면 어떡하나!!!”
“......”
‘집에 가고 싶다.’
샤일스는 속으로 생각했다.
두 교수(사실 한 명이었지만)가 논쟁하는 자리에 끼는 건 생각보다 마음 불편한 일이었다.
“그냥 아직 1학년이니까 좀 내버려둬도...”
“천재는 다르게 가르쳐야지! 지금도 그렇게 가르치니까 저렇게 항의하는 거지!”
“그, 그게... 예지 마법은 위험하니까...”
소심한 인격까지 나와서 논쟁에 참여했다.
교수의 세 인격이 서로 말싸움을 하는 모습에 이한은 멈칫했다.
‘잠깐. 위험한데.’
교수가 자아분열해서 싸우는 게 위험하단 게 아니었다. 사실 에인로가드에서 이 정도면 위험한 축에도 끼지 않았다.
위험한 건 대화의 내용이었다.
교수의 과격한 인격이 지금보다 더 강한 가르침을 주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봐라! 얼마나 심심했으면 이렇게 항의하겠냐!”
“...아닙니다. 부순 제가 잘못했습니다. 문제 이해를 잘못했...”
“너무 걱정하지 마라. 부숴서 그런 게 아니니까. 저번부터 이어진 논쟁이야.”
파셀레트 교수의 말은 별로 위로가 되지 않았다.
이한이 없는 자리에서 교수의 인격들이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토론했다니.
경험적으로 학생의 교육과정에는 학생이 참가하는 게 맞았다.
아니 당사자가 없는데 왜 자기들끼리 이야기하고 결정한단 말인가?
“그, 그럼... 타협을...”
‘뭔 타협을 하자는 거야.’
이한은 파셀레트 교수의 보통 인격을 응원했다.
과격한 인격과 소심한 인격이 ‘좀 더 강하게 가르치자’고 하는 이상 믿을 건 보통 인격밖에 없었다.
“괜히 억지로 가르쳤다가 역효과 날 텐데.”
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범재들 이야기고! 쟤가 보통이라고 생각하나?”
이한은 고개를 흔들었다.
“확, 확실히 좀...”
‘저 인격은 소심한 인격이 아니라 그냥 나약한 인격이군.’
이한은 은근슬쩍 과격한 인격에 휩쓸려가는 교수의 소심한 인격을 원망했다.
무릇 인격이라면 자신의 주장을 뚜렷하게 밀고 나가야지 다른 인격한테 지면 어떡한단 말인가.
그나마 다행인 건 교수님의 보통 인격이 버티고 있다는 것...
“생각해봐라. 다른 강의들은 다 진도를 팍팍 나가서 고급 심화 과정을 배우고 있는데, 예지 마법만 돌멩이 던지고 있으면 재밌다고 듣겠나? 아니면 그만두겠나? 아무리 제자가 아쉽지 않아도 예외는 있는 법이지! 당장 나이튼 교수 같이 고집 센 양반도 다른 교수들을 보고 바꾸고 있는데!”
“??????”
이한은 귀를 의심했다.
방금 뭐라고?
“알겠어. 알겠어.”
“인정하겠습니다...”
“......”
이한은 씁쓸한 눈빛으로 교수를 쳐다보았다.
결국 이렇게 끝나버린 것이다.
지금도 예지 마법의 난이도가 그리 낮지 않았는데, 중간고사 이후 어떻게 올라갈지 생각하니 가슴이 서늘해졌다.
‘내 잘못인가? 탑의 창문을 박살낸 게 그리 큰 잘못이란 말인가?’
“워다나즈.”
옆에 있던 샤일스가 말을 걸어왔다.
“그... 힘내라.”
“...나가기나 하자.”
샤일스를 데리고 돌아가는 길은 이한의 마음처럼 어둡고 음침했다.
둘은 폰리그를 나룻배 위에 태우고(폰리그는 변신이 풀려서 돌아왔다) 천천히 물 위를 미끄러져 나아갔다.
샤일스는 갑자기 생각나서 물었다.
“워다나즈 너 환상 마법도 시험 봐야 하지 않냐?”
생각해보니 샤일스가 갇혀 있던 곳이 키르민 쿠 교수의 탑 아니었던가.
샤일스는 환상 마법을 듣지 않았지만 워다나즈는 달랐다.
“시험 보고 구하러 온 거다.”
“어?”
샤일스는 무슨 소린가 싶었다.
“지금 시험 진행 중 아니야?”
샤일스가 갇혀 있는 동안 탑 아래에서는 1학년 학생들이 환상 마법 시험에 도전하고 있었다.
키르민 교수는 맥에게서 받은 악몽을 탑 곳곳에 배치해놓고 학생들이 그걸 극복해내도록 밀어붙였다.
환상 마법사에게 중요한 건 환상 마법을 시전하는 능력뿐만이 아니었다. 환상에 잡아먹히지 않는 정신력도 중요했다.
그 악몽을 어떻게 극복해느냐가 중요한 만큼, 학생들은 아직도 비명 지르면서 견디고 있었는데...
워다나즈는 보고 구하러 왔다고??
“빨리 끝날 거라고 예상했었지. 다행히 빨리 끝나더군. 그럼 들어가라. 샤일스. 난 남은 마법 시험 들으러 가야 하니까.”
“워다나즈. 내가 참견하긴 싫은데 넌 듣는 강의를 좀 줄여야 할 것 같...”
* * *
“끝났다! 만세!!”
“드디어 끝났어!”
“야. 워다나즈가 보잖아. 책 빨리 주워 이 새끼야.”
도서관에 돌아가자 이번 주 중간고사를 모두 끝낸 학생들이 책을 던지며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이한은 책을 던진 흰 호랑이 탑 학생을 옆으로 집어던지고 혀를 쯧쯧 찼다.
‘하여간 공부 안 한 놈들이 더하다니까.’
지금 보니 푸른 용의 탑이나 불사조 탑 학생들은 시무룩해하며 어떻게 하면 더 잘 볼 수 있었을까 아쉬워하고 있었는데,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그냥 끝났다고 신이 난 상태였다.
“워다나즈... 혹, 혹시 주말에도 남은 시험이 있나?”
“없는데.”
“와!!!! 끝났다!!!! 만세!!!!”
이한도 시험이 끝났다는 걸 확인한 친구들은 마음 놓고 책을 던졌다.
몇몇 친구들은 조잡한 북을 두드리며 기쁨의 노래를 연주했다.
‘...맥이 화내는 거 아닌가?’
이한은 발광하는 친구들을 보며 갑자기 맥한테 미안해졌다.
저렇게 난리를 치니 맥이 화나서 달려오는 걸지도...
“잠깐... 남은 시험 하나 있는 것 같은데.”
이한의 말에 비축해놓은 음식을 풀고 술통의 뚜껑을 열려던 친구들이 멈칫했다.
어라?
“뭐, 뭐 남았는데?”
“흑마법인가?”
“흑마법은 저번에 끝난 걸로 아는데?”
“그럼 부여 마법?”
“부여 마법도 저번에 끝났을 거야.”
“소환 마법은?”
“소환 마법도...”
추측하려던 친구들은 포기하고 이한을 쳐다보았다.
그냥 말해달란 뜻이었다.
“기초 춤과 사교 심화 강의 시험 아직 남지 않았나?”
이한의 질문에 친구들은 가만히 있다가 빵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시험 없어!”
“맞아. 그냥 내일 가서 즐겁게 춤추다 오면 끝이야.”
“......”
이한은 인상을 찌푸리고 신난 친구들을 쳐다보았다.
“왜 그래? 이한?”
“춤과 사교 강의도 시험 난이도를 좀 올려야 하지 않나...”
“......”
잔에 레모네이드를 담아왔던 요네르는 질색하며 이한을 쳐다보았다.
얘가 지금 몇 안 되는 휴식 강의에 무슨 막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