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1화
‘아니겠지...?’
황녀는 현실을 부정하려고 했다.
그러나 징조는 명백했다.
예전부터 이상할 정도로 워다나즈가 본인만 보면 먹을 걸 권했던 일들.
원래는 ‘워다나즈가 다른 사람들처럼 날 존중하는구나’하고 넘겼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도 좀...
대체 어디서 이런 오해가 시작되었단 말인가?
아덴아르트는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물론 우연찮게 몇몇 오해 받을 행동을 하긴 했다. 그리고 워다나즈가 차려준 아침점심저녁을 아주 맛있게 먹기도 했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식재료를 소중히 여기고 낭비를 하지 않는 황족으로서의 자기절제지 식탐이 아니었다. 실로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혹시 가이난도 때문인가?’
살면서 평생 남탓을 해본 적 없는 황녀였지만 오늘 처음으로 남탓을 하게 되었다. 그 정도로 충격이었다.
아덴아르트가 미간만 찌푸리며 말이 없자 이한은 다 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 안 해도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돌아갈 때 좀 챙겨드리겠습니다. 추종자들이 이런 부분에서는 눈치가 없으니.”
이한은 아덴아르트와 관해서는 상당히 관대한 편이었다.
당장 제국의 위에서 아래부터 황녀의 추종자가 상당히 퍼져 있는 만큼, 잘 대해줘서 나쁠 게 없었다.
나중에 제국 관료로 취직했을 때 ‘아 자네는 황녀님께서 칭찬한 그!’가 좋지 ‘힉! 황녀님께서 말한 그 워다나즈 가문의...! 대체 왜 여기에!’같은 반응은 받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인간적으로도 황녀의 추종자들은 좀 눈치가 없었다.
황녀가 쫄쫄 굶으면 ‘아 먹을 걸 좀 갖다드려야겠다’라고 생각을 해야지 멀뚱멀뚱 보면서 ‘자세에 흔들림 하나 없으시다니’는 무슨...
‘솔직히 황녀 추종자들은 황녀 관해서는 좀 가이난도 같아진다.’
“어떤 거 위주로 챙겨드릴까요? 저번에 갖고 온 버터 쿠키하고 타르트가 좀 괜찮던데.”
단호하게 자신에 대한 오해를 해명하고 품위를 되찾으려던 아덴아르트는 멈칫했다.
모든 분야에 뛰어난 황족인 만큼 호기심을 이길 수 없었던 것이다.
“무슨 타르트...”
땡-
이한은 망설임 없이 황녀의 손을 놓고 다음 친구의 손을 잡았다.
흰 호랑이 탑, 그랄 가문의 라파드엘이 이한의 손을 잡더니 머뭇거렸다.
그리고 발을 쾅쾅 굴렀다.
이한은 라파드엘이 뭔 해괴한 개짓거리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해 당황했다.
“뭐하는 거냐? 내 발을 밟고 싶어서 예비 스텝 밟는 거냐?”
“아, 아니. 저기 황녀님이... 이렇게 하는 게 아닌 건가?”
라파드엘은 주변을 다시 둘러보고 눈치를 보다가 발을 구르는 걸 멈췄다.
옆에 있던 황녀님이 마치 분노한 사람처럼 발을 구르길래 ‘뭐지? 원래 이런 스텝이 있었나?’싶으면서도 황녀님이 하는 행동이라 일단 따라했는데...
아무래도 아닌 모양이었다.
이한은 피식 웃었다.
“당했군. 라파드엘. 춤을 출 때는 자기가 아는 동작으로 해야지 남의 동작을 보면 쓰나. 황녀님은 너처럼 남의 동작을 따라하려는 놈을 속이려고 그런 거다.”
“크윽...!”
뼈를 맞은 라파드엘은 이를 갈았다.
하여간 푸른 용의 탑 출신 대귀족 가문 놈들은 행동 하나하나가 음험하고 계략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방심할 수가 없었다.
“워다나즈. 두고 봐라. 지금은 아직 실력이 부족하지만, 곧 네 흑마법을 파훼해서 널 쓰러뜨려주마.”
“어. 열심히 해서 교장 선생님도 쓰러뜨리고 해라.”
옆에 있던 닐리아가 황녀의 손을 잡고 춤추다가 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환 마법하고 환상 마법하고 부여 마법하고 예지 마법하고 변환 마법하고 치유 마법에 대한 대책은 안 세우고?”
“닥쳐!”
“뭐? 너나 닥쳐. 등에 화살 꽂히고 싶냐?”
땡-
“앗. 시아나 사제. 춤 솜씨가 보통이 아니군. 플레맹 교단한테 항의해야겠어.”
“네? 어째서?”
“제국의 춤꾼을 하나 빼앗아갔지 않나.”
시아나 사제만큼 아부 효과가 좋은 친구도 드물었다. 얼굴이 활짝 밝아지는 친구를 본 이한도 흐뭇해졌다.
물론 그 사이 시아나 사제가 이한의 발을 두 번 정도 밟긴 했지만...
‘흰 호랑이 탑 놈들이라면 용서하지 않았겠지만 불사조 탑이라면야.’
“본관 3층에 새로운 창고가 하나 발견된 거 아세요?”
“저런! 어떤 창고지?”
“물약 창고 같은데, 이게 교장 선생님 창고가 아니라 선배님들이 쓰는 창고 같아요. 그래서 고민인...”
“괜찮아. 괜찮아. 선배님들도 다 이해해주실 거야.”
“그래요?”
“저번에 몇몇 선배분들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다들 그렇게 말하시던데.”
이한은 입에 침 한 번 바르지 않고 말했다.
선배 창고고 뭐고 간에 일단 1학년부터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앞으로도 사제들 사이에서 무슨 일 있으면 꼭 말해줬으면 좋겠군. 내가 신앙심이 깊은 만큼 사제님들에게 문제가 생기면 마음이 아파서.”
시아나 사제는 조용하고 비사교적인 불사조 탑 사제들 중에서 가장 사교적인 편이었다.
언제나 든든하게 정보를 가져다주는 만큼 아부가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그래도 플레맹 교단이 조금 더 좋으시죠?”
“...물...”
땡-
“샤루칼 사제.”
상어 수인 사제, 샤루칼은 정령 홍수를 유일하게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본인의 종족도 종족이지만 바다와 폭풍의 신 아글타콰를 모시는 교단은 이런 상황에서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워다나즈 님. 이번 홍수 덕분에 신도가 다섯 명이나 늘었습니다!”
“오... 그렇군.”
“다 워다나즈 님 덕분입니다.”
“?”
이한은 의아해했다.
사람들이 정령 홍수 때문에 신앙을 가지면 가졌지 왜 이한 덕분이란 말인가?
“내가 뭘 했다고? 혹시 내가 정령 홍수를 일으켰다고 생각하는...”
“어떤 멍청이가 그런 생각을 합니까?”
샤루칼 사제는 상어 수인 특유의 이빨을 드러내며 웃음을 빵 터뜨렸다.
이한은 저기 떨어져 있는 흰 호랑이 탑 놈들을 슬쩍 쳐다보았다.
“저기 있... 아니. 그래서 왜 내 덕분이란 거지?”
“다들 신성 마법에 관심이 많으시더군요. 익힐 수 있나, 얼마나 걸리나 등등. 그래서 워다나즈 님의 사례를 말씀드렸습니다.”
“......”
사기 아냐??
땡-
“티질링 사제. 식사는 잘 하고 다니나? 아침은 뭘 먹었지? 어제 저녁은? 또 금욕적으로 살겠다고 절식하거나 하진 않았지? 나도 프리싱가 교단 신도지만 교리에 절식하란 말 없는 거 알고 있나?”
“...잘, 잘 먹었습니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무슨 엄마처럼 걱정해주는 이한의 모습에 티질링은 당황했다.
물론 사제들 중에서도 티질링이 유독 더 금욕적으로 행동하는 편이긴 했지만 왜...?
“저번에 메흐리드 사제님이 그렇게 걱정을 하시더군. 사실 나도 걱정을 하고 싶지 않은데 저번에 또 저녁을 거르고 기도에 몰두했다면서.”
“아니 그걸 어떻게? ...시아나 사제님!”
그러나 저 멀리서 해맑게 앙라고의 발을 밟고 있던 시아나 사제는 듣지 못했다.
“내가 원래 과하게 걱정하거나 귀찮게 하는 사람은 아닌데, 티질링 사제. 그냥 기본적인 것만 신경 쓰자는 거지.”
“어쩌다 한 번이었습...”
티질링은 보기 드물게 항변하려고 했지만 이한은 무시하고 자기 할 말만 했다.
“아침점심저녁 챙겨먹자는 게 그리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잖나. 사실 옛날이야기에도 이런 이야기가 있지. 오랫동안 곡류를 끊고 고행하던 사제가 쓰러지는 동안 옆에서 세 끼 잘 챙겨먹던 사제는 깨달음을 얻고...”
“......”
티질링 사제는 두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하나는 다시는 끼니를 거르지 말자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워다나즈 가문의 소년이 마음을 정했을 때는 그냥 괜히 반박하지 말고 조용히 듣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땡-
“샤일스.”
“워다나즈. 다시 한 번 고맙다.”
“리치몬드 가문은 은혜를 잊지 않겠지?”
“...어? 우리 가문에 그런 가훈 같은 건 없는데... 은혜는 보통 안 잊지 않나?”
“내가 생색내려고 하는 말은 아니고 저번에 폰리그 데리고 오려고 꽤 투자를 많이 했다. 그 저주가 보통 독한 게 아니라서...”
“고, 고맙다? 지금 워다나즈, 혹시 내가 오해하는 게 아니라면 설마 내가 잊을까봐 돌려서 말하는...”
땡-
“로웨나. 이건 가볍게 묻는 건데, 혹시 요즘 식사를 못 한 적이 있나?”
“없습니다. 기사로서 필요한 음식을 챙기는 것도 능력이니 말입니다.”
흰 호랑이 탑 출신이자 아덴아르트의 추종자인 로웨나가 당당하게 말했다.
이한은 다시 한 번 참을성 있게 돌려서 물었다.
“혹시 황녀님하고 같이 식사를 한 적 있나?”
“없습니다. 원래 황족은 다른 사람들과 같이 식사를 자주할수록 위험에 노출될 수 있는 만큼 좋지 않은 일입니다.”
“......”
이한은 로웨나의 발등을 한 번 밟아줄까 고민하다가 말았다.
‘하긴 추종자들이 해야 하는 일이 황녀님 끼니 챙겨주는 건 아니지.’
추종자들도 자기 인생이 있지 않겠는가.
물론 끼니도 안 챙겨주면 대체 뭐하러 추종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아하. 알겠습니다!”
로웨나가 깨달았다는 듯이 밝고 경쾌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한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물었다.
“뭘 안 거지?”
“황녀님하고 같이 식사를 하고 싶으신 겁니다. 맞습니까? 후후. 워다나즈 님도 역시 황녀님의 재능에 감탄하신 거로군요. 워다나즈 가문이신 만큼... 악!”
“미안. 실수했다.”
이한은 로웨나의 발등을 한 번 밟아주었다.
땡-
“니기소르 사제. 안색이 안 좋아보이는데.”
“정령 홍수가 길어져서 말이오...”
평소에는 언제나 활활 타오르던 니기소르였지만, 요 며칠간은 점점 더 사람이 시무룩해지고 있었다.
‘정령 혼혈이라 영향을 받고 있군.’
핏줄에 정령이 섞여 있다는 것은 단순히 외모가 특이해지고 무성(無性)의 존재가 되는 걸로 끝나지 않았다.
정령의 특징이 많이 희석되었어도 마력에 민감한 정령의 특성상 이런 외부 환경 영향을 안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도 워다나즈 님 덕분에 좀 위안이 됐소.”
“어? 내가 뭘 했지?”
“세이렌들을 두들겨 패고 물 속에서 불을 피웠잖소.”
니기소르 사제는 물과 관련된 존재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한은 세이렌을 팬 적이 없었다.
“안 팼는데?”
“그렇소?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그렇게 말해서...”
“음. 그렇군. 혹시 누군지도 기억하나?”
이한은 물에 거꾸로 처박을 몇 명을 기억해뒀다.
“정령 홍수가 빨리 끝나야하는데 말이오... 아. 혹시 계획이 있소?”
“?”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질문에 이한은 살짝 당황했다.
“뭔 계획? 저녁 식사 계획?”
“아니오. 정령 홍수를 끝낼 계획 말이오.”
“...그걸 내가 어떻게 끝낸다는 건가?”
니기소르 사제는 ‘알면서 또 아닌 척 하시는군’의 눈빛으로 이한을 쳐다보았다.
“그렇게 말하셔놓고 저번 눈보라 사태도 해결하셨잖소.”
“아니 그건 우연...”
“그렇군. 이번에도 우연으로?”
“......”
땡-
“누가 화나게라도 했어? 왜 그런 표정이야?”
“요네르... 니기소르 사제는 괜히 불의 정령 혼혈이 아니군.”
사람 속에 불을 지르는 솜씨도 보통이 아니었다.
요네르는 이한의 손을 잡고 빙글 돌았다. 능숙한 솜씨에 이한은 자신도 모르게 놀랐다.
“잘 추잖아?”
“...그럼 잘 추지. 날 뭘로 생각한 건데? 내가 못 출 거라고 생각한 거야?”
요네르는 어이가 없었다.
그래도 나름 메이킨 가문의 핏줄인데?
“나처럼 무도회 참석 안 하고 제국 신문에서 사업란 읽고 있었을 줄 알았지.”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닌데 그래도 나름 참석은 했어.”
정곡을 찔린 요네르는 이한의 손등을 살짝 꼬집었다.
“그리고 투자나 지원을 받으려면 이런 자리 참가하는 것도 중요하거든?”
“하긴 맞는 말이군. 음. 가이난도를 시켜서 얼굴로 쓰면 안 되나?”
“그냥 네가 연습해서 나오는 게 나을 거 같아.”
요네르는 날로 먹으려는 친구에게 단호하게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