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2화
“역시 그런가.”
이한은 나중에 사업할 때 가이난도를 시켜서 투자금을 따올 계획을 그렸다가 포기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역효과가 날 가능성이 더 높아보였다.
“사실 지금도 충분히 잘 추고 있어.”
“정말?”
이한은 살짝 반색했다.
다수의 무도회를 참가한 적 있는 요네르의 보장이라면 꽤 믿을만했다.
그게 정말이라면 나중에 후원자를 찾기 위해 무도회나 연회에 참가할 때 좀 더 수월하리라.
“아까 발 한 번 밟긴 했지만 그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실수잖아.”
“......”
이한은 차마 일부러 로웨나의 발을 밟았다고 할 수는 없어서 가만히 침묵했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설마 부족하다고 생각했어?”
“회선곡이나 윤무곡이 연주됐을 때 새로 바꿀 춤이 부족하고 협주곡에도 안 어울리지 않...”
“...춤으로 먹고 살려고?”
무슨 무도회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초대받는 전문 춤꾼도 아니고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어디 있단 말인가. 한두 개 정도면 충분했다.
요네르는 친구의 말도 안 되는 목표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참. 가문에서 편지 왔는데.”
“요아넨 님께서 보낸 건가?”
“...끔찍한 소리 하지 마!”
평소와 달리 요네르는 매우 질색하며 부정했다.
요아넨은 좋은 언니였지만, 좋은 편지 상대는 아니었다.
만약 요아넨이 편지를 보냈다면 요네르가 관심도 없는 새로운 물약에 대한 이야기를 수십 장 분량으로 꽉꽉 채워서 보냈으리라.
더 끔찍한 건 그걸 다 하나하나 읽고 성실하게 답변해주지 않으면 토라진다는 점이었다.
‘새로 개발하는 물약 관련 정보면 괜찮지 않나...’
이한은 속으로 요네르한테 뺨 맞을 생각을 했다.
물론 귀찮긴 하겠지만 그만큼 새로 개발하는 물약의 제작법은 귀중한 가치가 있었다.
“그럼 누가 보냈지?”
“저번에 닐리아가 제출한 거 기억해?”
“아. 그거.”
메이킨 가문에서 주기적으로 진행되는 제국의 정치 시사와 그 해결에 대한 논의에서 닐리아는 훌륭한 답변을 내놓았다.
<산고리아 꽃의 산지인 제국 남부 해안가의 정치적 불안정이 심해지고 있을 때, 연금술사들은 어떤 방식으로 대처해야 하는가?>
북부에는 할 일 없는 사냥꾼들이 많은데 이들을 남부 해안가로 보내서... 원거리 공격이 가능하니까 몬스터 대처도 잘 될듯... 몬스터가 잘 잡히면 사람들도 행복해지고 정치적 불안정도 줄어들고... 죄송합니다...
북부 그림자 순찰대가 여유 있는 계절과, 산고리아 꽃을 구할 수 있는 계절을 맞춰서 그 틈을 찌른 실로 영리한 대책이었다.
지역의 마법사들을 추가적으로 동원하지 않는다는 점도 좋았다.
마법사들은 기본적으로 비싼 인력인데다가, 특정 상황에서는 마법사들의 방문을 꺼림칙하게 여기는 제국 사람들도 많은 것이다.
다시 봐도 참 직관적이고 효율적인 대책!
‘닐리아는 너무 비관적이란 말이지.’
이한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런 대책을 세웠으면 당당해도 될 텐데 계속 앓는 소리를 내며 ‘이게 아닌데’같은 말만 하고 있다니.
‘하긴 그런 성격이 계획을 더 완벽하게 만들지도 모르지.’
“그게 왜?”
“가문에서 준비 다 끝났다고 진행한다던데? 에인로가드에 찾아온대.”
“정말?”
아무리 북부의 사냥꾼들 힘을 빌린다고 하더라도 이런 일을 완전히 맡길 수는 없었다.
같이 가서 어떤 몬스터를 잡을지 조언하고, 산고리아 꽃을 직접 채집하고, 남부 해안 길드들이 화를 내면 중재도 좀 하고...
당연히 메이킨 가문의 실무자들이 따라가야 했다.
거기에 뛰어난 마법사들 몇 명 더 참석하면 금상첨화일 터.
안 그래도 방학 때 메이킨 가문에서 ‘에인로가드의 교수님을 초빙하는 건 어떠냐’는 이야기가 나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정말 찾아온다니 좀 놀라웠다.
‘용케 학기 도중인데 허락을 받았군. 기부금을 많이 냈나?’
이한은 꽤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해골 교장 성격에 자기가 대신 교편을 잡는 한이 있더라도 이런 기회는 놓치지 않았을 테니까.
“그럼 어느 교수님이 사라지시는 거지?”
“글쎄? 그거까진 안 쓰여있었어.”
“교장 선생님이 사라지실 수도 있나?”
“그렇진 않을걸. 그보다 이한, 사라지시는 게 아니라 초빙...”
“혹시 배그렉 교수님이 사라지진 않으려나?”
“......”
요네르는 뭐라고 하려다가 친구가 안쓰러워서 그냥 참고 대답해줬다.
“아무래도 배그렉 교수님은 연금술 쪽 전문이 아니시니까 안 오실 것 같은데.”
“아니야. 그 먼 곳까지 가서 하는 만큼 호위가 필요할지도.”
“으응...”
“버두스 교수님은? 버두스 교수님도 부여 마법 전문가니까 갈 만하지 않나?”
“교수님 징벌방에 계시잖아.”
“내보내서 일시키고 다시 징벌방에 가둬도 되는데.”
요네르는 친구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이렇게 된 걸까 속으로 한탄했다.
하긴 네 개의 탑 학생들 모두 이한에게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는 게 사실이었다.
그 뒤로도 이한은 ‘어느 교수가 사라질까? 여럿이 사라져도 되나?’로 행복한 상상을 펼쳤다.
요네르는 괜히 미안해져서 입 다물고 스텝만 밟았다.
쾅!
뒤늦게 일어난 가이난도가 친구들과 함께 허겁지겁 문을 열고 들어왔다.
“죄, 죄송합니다! 잤어요! 교장 선생님의 계략으로!”
“가이난도 학생! 늦었으면 품위 있게 늦었다고 인정하고 사과해야지 그런 변명은 좋지 않아요!”
“진짜 계략인...”
“어허!”
* * *
“비가 좀 줄긴 했는데.”
“아직 너무 많이 오긴 하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탄주어 님?”
시험도 다 끝났겠다, 도서관 앞 임시 선착장에 모인 학생들은 비가 쏟아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수군거렸다.
주말도 됐겠다 좀 쉬고 싶은데 홍수가 끝날 낌새를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러다가 정말 학기 끝까지 안 멈추는 거 아니야?
날... 괴롭히지 마라...
“그냥 물어보는 건데요?”
그게... 괴롭히는 거지... 빨리... 날 풀어다오...
“홍수가 끝나야 풀어드리죠.”
날... 왜 이렇게 괴롭히는 거냐...
탄주어는 구슬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원래라면 마음 아파했을 학생들이었지만, 에인로가드에서 반 년 넘게 지낸 학생들의 공감능력은 생각보다 쇠퇴해있었다.
“그러신다고 달라지는 거 없습니다.”
“맞아요. 강의 시간에 들었어요. 계약한 존재가 눈물로 호소해도 절대 흔들리지 말라고.”
쓰레기 같은... 마법사들... 날 놓아다오...
밖에서 그런 대화가 오가는 동안, 안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빨리 비워주지 않으면 맥이 다시 습격할 수도 있겠어. 게다가 도서관에는 다른 몬스터들도 많을 텐데.”
“인정하기 싫지만 이 부분에 관해서는 모라디의 말이 맞다. 워다나즈. 어떻게 생각하나?”
“흠... 배그렉 교수가 사라지면... 아니다. 버두스 교수... 아니다. 해골 교장도 가능성이 있지 않나...”
“워다나즈? 워다나즈?”
지젤과 살코는 이한이 다른 생각에 빠져있자 당황했다.
평소 안 그러던 친구가 이러는 것만큼 당황스러운 일도 드물었다.
“아. 미안하다. 다른 생각을 하느라. 뭔 이야기였지?”
“홍수가 언제까지 갈까였다. 선배들도 시험이 끝났으니까 슬슬 해결해주지 않을까?”
살코의 질문에 이한은 즉시 대답했다.
“어. 아닐걸.”
“...아닌가? 어째서지?”
“그야 선배들은...”
에인로가드에 갓 들어온 학생이라면 이렇게 생각하기 쉬웠다.
-학교에 문제가 생기면 고학년 선배들이 많으니까 선배들이 해결해주겠지?
그러나 놀랍게도 에인로가드에서는 그 반대였다.
학교에 눈보라가 치던 홍수가 일어나던 용암이 치던 고학년 선배들은 자기가 알아서 다닐 능력이 있는 만큼 해결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아쉬운 건 저학년인 만큼 1학년 학생들이 나서야했다.
그리고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학년이 높아질수록 더 바빠지는 만큼 이런 걸 해결할 여유도 줄어들었다.
“......”
“......”
이한의 논리적인 설명을 들은 지젤과 살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한은 정신 마법을 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둘의 속마음이 들리는 기분이었다.
‘해골 교장 욕하고 있군.’
“그럼 우리가 해결해야 한다는 건가?”
“그런 뜻이 되겠지.”
살코와 지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한은 살짝 당황했다.
내용이 너무 과격했던 것이다.
‘아니 꼭 해결을 해야 하나?’
물론 해결을 하면 좋겠지만 에인로가드의 일들은 대체로 다 사람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이럴 때는 괜히 힘을 쏟느니 시간에게 맡겨놓는 게 가장 현명했다.
“워다나즈. 네가 가진 것 중에 지혜로운 투구가 있다고 들었는데. 혹시 그 투구한테 물어봐도 되나?”
살코는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상대방의 아티팩트를 쓰는 것인 만큼, 이한이 거절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귀중한 횟수를 여기에 낭비하는 것 또한 사실일 테니까.
“그런 게 있었어?”
“응? 뭘 말하는 거지?”
“......”
분위기가 갑자기 어색해졌다.
지젤은 이한이 부정하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뭐지? 투탄타가 헛소리를 한 건가? 아니면 워다나즈가 거짓말을 한 건가? 어떤 투구길래?’
살코도 마찬가지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내가 잘못 들은 건가? 분명 그런 투구가 있다고 들었는데? 설마 교장 선생님의 헛소문인가?’
“아. 뭘 말하는지 알겠다.”
이한은 당황스러워하는 친구들의 모습에 뒤늦게 깨달았다.
“이상한 투구가 하나 있다. 예전에 학교 지하 던전에서 주웠던 거 말하는 거지? 별로 쓸모가 없어서 가게에 팔려고 했었는데 거절당했었지.”
“......”
“......”
그걸 왜 팔아!
둘은 속으로 외쳤다.
“별로 쓸모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살코 네가 원한다면 한 번 해보도록 하지. 그런데 저주 받은 아티팩트니까 좀 조심하고.”
“그, 그렇군. 네가 어쩐지 안 쓰는 것 같더니 그래서였나.”
“아니. 저주가 신경 쓰여서는 아니고 그냥 별로 쓸 일이 없어서. 도움이 안 되더라고.”
“......”
이한은 배낭을 뒤적거리더니 투구를 꺼냈다. 캄캄한 주머니 속에 갇혀 있다가 빠져나온 투구는 반색하며 외쳤다.
드디어! 내 사악한 지혜를 빌릴 때가 온 것인가? 뭘 원하는지 알겠다. 학년 수석이 되고 싶지? 내 비전의 물약만 있다면...
“어? 진짜?”
가이난도가 솔깃해하며 시선을 던졌다. 이한은 뒤통수를 한 대 때리고 말했다.
“아니. 다른 걸 물어보려고 한다.”
드디어!!!
투구가 전후좌우로 진동할 정도로 기뻐했다.
그 모습에 이한은 갑자기 살짝 미안해졌다.
‘너무 내팽개쳤나?’
자기가 안 쓸 거면 새 주인을 찾아주기라도 했어야지, 너무 방치해놓은 걸지도 몰랐다.
물어봐라! 물어봐!
“이 홍수를 끝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어?
투구는 당황해하며 불빛을 점멸시켰다.
놀랍게도 학교가 정령 홍수로 난리였던 것이다.
“모르나?”
아, 아니. 안다. 아는데... 내가 물론 주인이 뒤지던 말던 내 지식을 늘리는 게 목표긴 하지만 너무 위험한 거 아닌가...
버두스 교수에게 개조된 이후로 진실을 숨기지 않게 된 투구는 나불거렸다.
이한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해보면 학생 주인을 위험에 빠뜨리는 투구도 ‘어 좀 너무 위험한 거 아닌가’싶을 정도로 위험하게 살아왔던 것이다.
저주 받은 투구를 보고 반성하게 되는 삶이라니!
가장 좋은 방법은 제물이다.
“제물?”
그래.
정령의 분노란 건 기본적으로 시간이 지나면 흩어지기 마련이지만 몇몇 방법으로 빠르게 달랠 수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제물이었다.
이 정도 홍수를 일으킬 정도면 분명 이름 있는 정령이 있을 터! 그렇다면 당연히 원하는 제물도 있을 것이다.
“무슨 제물을 바쳐야 하지?”
그걸 내가 어떻게 아나? 무슨 정령인지도 모르는데...
“지혜의 투구라면서?”
이한은 진심으로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투구는 어이가 없었다.
애초에 질문은 한 번에 하나뿐이다! 대답해줬으니 나는 힘을 충전하도록 하겠다.
“......”
다음에는 힘이 회복되는 대로 최대한 빨리 불러줬으면 좋겠군!
투구의 불빛이 꺼졌다.
이한은 그걸 보다가 친구들에게 물었다.
“혹시 살 사람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