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4화
“엇.”
이한은 놀란 표정으로 페르쿤트라를 쳐다보았다.
그 반응에 페르쿤트라는 더 어이가 없었다.
교수한테 무슨 일이 생겼으면 보통 선배들이 먼저 찾으러 오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왜 1학년이 와놓고 놀란단 말인가?
“하긴 선배님들도 계셨죠.”
그렇지!
“그런데 선배님들은 아마 불러도 안 오실 거라...”
......
페르쿤트라는 황당했지만 이한은 진지했다.
물론 이한이 버두스 교수의 모든 제자들을 다 알지는 못했지만, 선배들이 어떤 사람들일지는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버두스 교수의 밑에서 버틸 수 있는 사람들은 버두스 교수 같은 사람들밖에 없다.’
버두스 교수가 뭐라고 짖든 말든 자신의 부여 마법 길을 걷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버두스 교수 사라졌다고 ‘스승님이 사라지셨다니! 구하러 가겠습니다!’같은 반응을 보일 리 없었다.
그 정도로 말랑말랑한 사람이면 애초에 버두스 교수 밑에서 버틸 수가 없다!
“저밖에 없으니 어떡하겠습니까?”
...너희들을 돌보는 그 대마법사는 대체 스승들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냐?
해골 교장이 있었다면 ‘나는 최선을 다해서 거르고 거른 거다’라고 불같이 반박했겠지만 불행히 이 자리에는 해골 교장이 없었다.
페르쿤트라는 다시 한 번 제국 마법사들과 해골 교장에 대한 편견을 쌓아올렸다.
‘보통 미치광이가 아니야! 징벌방을 새로 늘릴 시간에 스승들이나 관리할 것이지!’
“어쨌든 버두스 교수님 계십니까?”
여기에는 없다.
“앗. 벌써 탈옥하셨습니까!?”
아니...
페르쿤트라는 어이없는 심정을 파직거리는 방전으로 드러내며 천천히 설명했다.
에인로가드의 징벌방은 하나만 있지 않았다.
지금 잘못을 저지른 학생들을 관리하는 페르쿤트라의 징벌방부터, 서쪽 사막에 위치한 교내의 다른 종족들 전용 징벌방, 호수 밑에 위치한 수중생물 전용 징벌방...
“징벌방이 왜 이리 많습니까?”
그야 외부 중범죄자와 학생들을 같이 둘 수는 없을 테니까...
페르쿤트라는 징벌방의 구조를 기획하고 새로 건설하는 게 사실 해골 교장의 취미 아닐까 하는 일말의 의심을 갖고 있었지만, 그것과 별개로 학생들을 다른 범죄자들과 같이 묶어놓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외부에서 갇혀 온 중범죄자들은 더 깊숙한 곳에 있지. 거긴 내가 관리하지 않는다. 대마법사의 수하들이 직접 관리하지.
“그렇습니까... 아. 그럼 교수님은요?”
방금 말한 곳에.
“......”
이한은 어이가 없었다.
‘외부 중범죄자랑 같이 두면 안 된다면서...’
학생은 안 되고 교수는 같이 가둬도 돼?
물론 에인로가드의 교수쯤 되면 외부 중범죄자들과 같이 있어도 눈빛 하나로 제압할 수 있겠지만...
“큰일이군요. 교장 선생님이 관리하시는 곳이면 더 삼엄하고 복잡할 텐데.”
이한은 골똘히 고민에 잠겼다.
원래 페르쿤트라의 힘을 빌려서 버두스 교수를 만난 다음 어떻게든 데리고 나올 생각이었는데, 더 위험한 곳에 있다고 하니 생각이 복잡해졌다.
‘내가 데리고 나올 수 있을까?’
......
페르쿤트라는 그런 이한을 미묘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부탁 안 하나?’
마법사들은 왜 위험한 걸 알면서도 자기보다 위대한 존재와 계약하는가?
그건 바로 자신이 처리할 수 없는 과업들을 해내기 위해서였다.
하여간 이런 문제가 생겼을 때에는 계약한 존재한테 힘을 빌려달라고 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이 무식하게 마력 많은 소년은 페르쿤트라의 존재를 잊었는지 혼자 생각에 잠겨서 고민하고 있었다.
페르쿤트라는 떨떠름한 목소리로 물었다.
뭔가 놓치고 있지 않나?
“예? 어... 혹시 교장 선생님이 주변에 함정 설치하셨습니까?”
아니. 그것 말고.
“?”
이한은 페르쿤트라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뭘 놓치고 있는 거지?
네가 스승을 데리고 나올 수 있는 방법 말이다! 놓치고 있는 게 있을 텐데?
우렁우렁 울리는 페르쿤트라의 목소리에서는 살짝 화가 난 것 같은 기색이 느껴졌다.
“아. 혹시 샤르칸을?”
그런 쥐새끼 같은 소환수를!
“아니 말이 너무 심하신 거 아닙니까?”
이한은 항의했다.
샤르칸이 얼마나 충성스러운 소환수인데 저런 막말을?
“샤르칸이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
시끄럽다, 다음!
“폰리그?”
그리폰 한 마리로 뭘 하겠다고!
“어, 고나달테스? 교장 선생님 말고 다른 고나달테스입니다. 제가 계약한 스켈레톤 전사인데.”
...다음!
이한은 몇 가지 마법 주문과 아이템들을 꺼냈지만 페르쿤트라는 계속해서 거절했다.
그제야 이한은 깨달았다.
“알겠습니다.”
...드디어? 말해보라!
“아직 제가 구하러 갈 실력이 안 된다는 거죠? 그런데 지금 상황이 급해서...”
네놈은 대체 나와의 계약을 뭘로 생각하는 거냐! 문양을 장식품으로 생각하는 거냐!
* * *
페르쿤트라는 단단히 화가 났는지 30분 동안 쩌렁쩌렁 천둥쳤다.
일단 상대가 억울한 것 같아서 듣고 있던 이한은 페르쿤트라가 잠시 쉬는 사이 질문했다.
“하지만 아까 홍수는 안 도와주신다고 하셨...”
쓸데없는 부분에서 기억력이 좋은 이 소년을 페르쿤트라는 한 대 때리고 싶었다.
정말로!
...그건 홍수고. 징벌방에 교수를 구하러 가는 건 이야기가 다르다.
“비슷한 것 같은데...”
다르다고 말했을 텐데!
페르쿤트라가 으르렁거리자 이한은 인정하기로 했다.
“그렇군요. 다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도와주실 생각이 있으십니까?”
그렇다!
“정말로요?”
그렇다니까!
번개로 된 수염을 부르르 떨며 성질을 내던 페르쿤트라는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왜 스스로가 도와주겠다고 먼저 애걸복걸하고 있단 말인가?
상대 마법사가 공손하게 ‘계약에 의거하여 힘을 빌려주십시오’해도 모자랄 판에?
잠깐! 왜 네가 의심을 하고...
“아. 역시 안 도와주시는...”
도와준다고 했지 않느냐!!
페르쿤트라는 버럭 소리 지르고서 곧바로 후회했다.
대체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됐단 말인가!
* * *
자신의 힘을 소모해 분신을 만든 페르쿤트라는 연신 투덜거리며 길을 안내했다.
이렇게 힘을 소모해서 도와주는 것은 결코 일반적인 상황이 아님을 명심해라!
‘혹시 조울증이 있으신가?’
물론 이한 입장에서는 페르쿤트라는 자기 멋대로 도와주겠다고 화낸 다음 투덜거리는 이상한 정령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물론 페르쿤트라는 강력한 정령이 맞았고, 도와주면 든든한 것도 사실이었지만, 왜 이렇게 변덕스럽게 도와주는지는 영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물러서라! 섣불리 닿으면 위험하다.
미로 같은 복잡한 길을 지나자 강력한 마법 결계가 느껴지는 거대한 문이 나타났다.
침입자 절대 금지!
이 문을 건드리는 외부인이 있다면, 특별히 더 지독한 운명을 맛보게 해주겠다!
여기까지 온 도둑-학생들은 명심해라. 여긴 내 창고도 아니고, 주방도 아니며, 흉악한 범죄자들을 넣어놓은 곳이다! 괜히 얼쩡대다가 후회하지 마라!
해골 교장이 써놓은 문구가 곳곳에 낙서처럼 적혀 있었다.
이한은 그걸 보고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쿠르릉!
페르쿤트라는 몸을 구름처럼 부풀렸다. 그걸로도 모자라 이한의 마력을 빌려서 힘을 보충했다.
원래 상태였다면 입김으로도 열었겠지만 지금처럼 본체가 징벌방에 묶여 있는 상황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예? 뭐가 말입니까?”
......
나름 마력을 꽤 가져갔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마법사 본인은 눈치도 채지 못하자 페르쿤트라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사람의 얼굴이 있었다면 지금쯤 붉어졌을지도 몰랐다.
열려라...!
번개가 거대한 칼날이 되더니 문 사이의 틈으로 박혀 굉음을 냈다.
‘오오.’
페르쿤트라는 몰랐지만 이한은 뒤에서 상당히 감탄했다.
볼라디 교수가 최근 이한에게 해내라고 강조한 번개 원소의 형태 고정과 변화.
그 난폭하고 어려운 과정을 페르쿤트라는 손쉽게 해내고 있었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규모로!
이러한 과정은 보는 것만으로도 마법사에게 많은 영감과 가르침이 되었다.
‘몇 번만 더 보면 느낌이 올 것 같다.’
이한은 벽에 막혀 있던 번개 원소 마법 수련에서 새로운 길을 발견했다.
이제 이 길로 걸어가기만 하면 번개 원소 마법의 벽을 넘고, 볼라디 교수가 시킨 다른 수십 가지 마법 심화 이론에 도전할 수 있었다.
...그걸 떠올리니 갑자기 오려던 깨달음도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아차. 집중하자.’
이한은 흉흉한 생각은 그만두고 즐거운 생각만 하기로 결심했다.
끼이익!
굉음과 함께 마침내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페르쿤트라가 만족스러운 듯이 거센 숨을 내쉬었다.
열었다!
“...어. 페르쿤트라 님?”
마법사와 대정령은 얼어붙었다.
열린 문 너머로 거대한 물살이 미친듯이 몰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무슨...? 이런 미친 마법사 놈이 물을 여기 모두 가둬버렸나!?
페르쿤트라는 욕설과 함께 다시 급히 힘을 끌어올렸다.
만들어낸 분신의 그릇이 한계에 도달해 비명을 질러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급히 막지 않으면 어린 마법사는 저 물살 너머로 휩쓸려갈 것이고, 그 이후에는...
-흥. 다시는 믿지 않겠습니다.
-흥. 언제나 소문은 과장된 법이라는 걸 배웠습니다. 교장 선생님과 싸우긴 뭘 싸웠습니까? 그냥 항복했겠죠.
...같은 시니컬한 반응을 보일 게 뻔했다.
안 그래도 지금도 시큰둥한 놈인데!
종루를 지키는 종지기들의 믿음을 사용함으로서 나는 나의 권속들을 부른다! 시종들은 최대한 빨리 도달하라!
힘이 부족한 페르쿤트라는 허겁지겁 다른 정령들을 불러냈다.
자신과 관련 없는 일에 소환된 정령들이 불만을 품겠지만 급해서 어쩔 수 없었다.
허공에 차원과 연결된 균열이 생겨나고 다른 정령들이 페르쿤트라의 지시에 따라 강렬한 벽을 쳤다.
조각배의 망루꾼들이 바치는 두려움을 사용함으로서 나는 나의 권능을 빌린다! 천둥이여, 벽이 되어 물을 쳐내라!
페르쿤트라는 굉음을 물리력으로 바꿔 강하게 밀어냈다.
지금 감옥 너머에서 몰려오는 물살은 그냥 평범한 자연현상이 아니었다.
분노한 정령들이 이 주변을 침수시키기 위해 계속 물을 소환해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어떻게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간신히 물을 막아내고 한숨 돌린 페르쿤트라는 물에 완전히 잠긴 지하 징벌방 통로 너머로 외쳤다.
뇌성과 벼락의 주인이자 종지기와 망루꾼의 공포가 말한다! 지금 당장 물을 멈춰라!
정령들이 세워준 벽 뒤에 있던 이한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정령들이 홍수 일으킬 정도로 화났는데 순순히 말을 듣습니까?”
마법사의 말은 듣지 않겠지. 그러나 이 페르쿤트라의 말은 들을 것이다.
페르쿤트라의 말은 오만했지만 그 안에는 흔들림 하나 없었다. 그만큼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령들이 홍수를 일으켰다 하더라도 이 정도 규모로 커졌으면 분명 지위 높은 정령을 다른 차원에서 불러왔을 텐데, 그 정도의 정령은 강함에 비례해서 지성과 교양도 갖고 있는 만큼 당연히 협상이 가능했다.
페르쿤트라의 이름을 듣고 무시하진 않으리라.
촤아아아아아악!
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고 물살이 더 거세지기 시작했다.
누가 막고 있는 걸 깨달았는지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정령들은 더욱 더 물살을 만들어내며 세차게 압력을 퍼부었다.
......
페르쿤트라는 온몸의 형태가 이지러지고 방전될 정도로 극노했다.
감히?!?!
“그, 정령 홍수 일으킬 정도면 정령들이 상당히 화난 거라 협상하기 힘들다고 들었습니다. 그냥 무시하고 교수님 찾으러 가시죠?”
이한은 마법사로서의 지식을 알려줬지만 페르쿤트라는 이미 이성을 잃은 뒤였다.
진명과 업적과 공포에 맹세코! 네놈의 가슴팍에 번개를 꽂고 이 같잖은 물장난을 끝장내주마!!!
“아니... 그... 페르쿤트라 님. 저 교수님 찾으러 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