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7화
케틀은 참다 참다 못해 욕설을 퍼부었다.
버두스 교수는 제자의 무례한 행동에 항의했다.
“무례하긴!”
“무례한 건 당신이야! 그게 무슨 보상이냐고!”
“보상이지!”
“엄밀히 따지자면 보상은 아니죠...”
이한이 옆에서 중얼거리자 버두스 교수는 깜짝 놀라서 외쳤다.
“보상이 아니야?! 어째서!?”
“어... 음...”
이한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민했다.
일반적인 사람이었다면 쉬웠겠지만(사실 그랬다면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버두스 교수는 평범하게 말해서는 절대 이해하지 못할 사람.
“보상이란 게 원래 받는 사람이 필요하냐 안 필요하냐로 나뉘잖습니까. 아무리 좋은 물건이라도 받는 사람에게 쓸모없는 물건이라면 보상이 안 되는 거죠.”
“하지만 내 공방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는 누구나 다 좋아하는데?”
케틀이 뒷목을 잡고 쓰러지는 게 보였다.
그러나 타고난 이한의 인내심은 버두스 교수의 저런 말로 흔들리지 않았다. 이한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제가 교수님 공방에서 일한다 하더라도 당장 제 능력이 부족하다보니 그걸 활용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 그렇겠구나!”
버두스 교수는 바로 납득했다.
하긴 이한이 다른 멍청한 학생들보다야 아주 조금 뛰어났지만 버두스 교수와 비교하면 여전히 배워야 할 게 많은 안타까운 제자였다.
그런 제자한테 버두스 교수가 쓰는 작업대를 빌려줘봤자 백분의 일도 활용하기 어려울 터.
“네가 멍청한 걸 잊고 있었어.”
“괜찮습니다.”
버두스 교수의 대답에 케틀은 거품을 물었다.
저게 자기 구하러 지하 징벌방까지 온 제자 앞에서 할 소리란 말인가?
‘왜 세상은 사악한 사람들이 더 행복하게 사는가? 교장 선생님이나 버두스 교수 같은 사람은 행복하게 사는데, 왜 선인들은 저렇게 고통 받아야 하지?’
케틀은 선량한 1학년 후배가 고통 받는 모습에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다른 걸로 챙겨주시면 되잖습니까.”
“다른 거... 음, 멍청해도 일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지...”
버두스 교수가 고민에 빠지려고 하자 케틀이 황급히 외쳤다.
“성각관 지하 창고! 성각관 지하 창고 열쇠 달라고 해!”
버두스 교수는 매우 노골적으로 싫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한은 그걸 보자 갑자기 흥미가 생겼다.
“거기가 어디죠?”
“버두스 교수가 아끼는 시약하고 재료들 모아놓은 곳!! 내 친구가 그렇게 무릎 꿇고 발목 잡아도 절대 안 열어주던 곳이야!!”
“아깝잖아.”
버두스 교수는 당연하다는 듯이 투덜댔다.
케틀은 악에 받쳐서 외쳤다.
혹시라도 이한이 그냥 열어줄까봐 너무 겁이 났다.
“야! 너 저거 열쇠 못 받으면 넌 나 아는 척 하지 마라. 어디 가서 나 선배라고 하지도 마! 에인로가드 나왔다는 말도 하지 마! 너 같은 호구는 에인로가드에 필요 없어!!”
‘호구 같다는 소리는 정말 낯설군.’
이한은 친구들하고만 어울리다가 선배한테 ‘너는 왜 그렇게 사람이 착하고 호구 같냐’라는 말을 듣자 매우 어색함을 느꼈다.
만약 친구들이 있었다면 귀를 의심했을지도 몰랐다.
“죄송합니다. 교수님. 선배님께서 꼭 열쇠를 받아야 한다고 하셔서.”
“아까운데...”
“그런데 제가 후배로서 선배님 말씀을 안 들을 수가 없잖습니까. 그럼 못 여는 거죠. 교수님은 여기 계속 갇혀 있는 거고.”
“그래도 아까운데...”
버두스 교수는 끙끙대며 괴로워했지만 이한은 선배의 이름을 팔며 굳건하게 버텼다.
결국 버두스 교수는 양보했다.
“알겠어. 줄게.”
“감사합니다. 잘 쓰겠습니다.”
“잠깐!!”
케틀은 또 고함을 질렀다.
열쇠를 받았는데도 절대 내버려둘 수 없다는 절박함이 담겨있었다.
“강의 시간 외에 따로 일할 경우 그 시간은 네가 선택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맹세시켜! 그리고 따로 일할 경우 급료로 뭘 줄 건지도 정확히 명시시켜놔!”
“일이 즐거움인데 급료가 따로 필요해?”
버두스 교수의 질문에 케틀은 무시하고 자기 할 말을 했다.
“들었지!? 너 지금 잘 생각해라! 버두스 교수가 순순히 양보하고 맹세할 기회가 앞으로 있을 것 같냐!? 오늘 얼마나 뜯어내는지가 네 앞으로 에인로가드 생활을 결정하는 거야!”
케틀은 자기 친구 중 버두스 교수 밑에서 배웠던 친구들을 떠올리자 눈시울이 붉어졌다.
선량하고 배려심 있던 친구들은 모조리 떨어져나가고, 오로지 소수의 광기 넘치는 천재만이 그 밑에서 버틸 수 있었다.
이 호구 같은 신입생이 그런 꼴을 당할 거라고 생각하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무조건 맹세시켜! 목에 칼을 겨눠서라도!”
“죄송합니다. 교수님. 선배님께서 꼭 맹세시키라고 하셔서.”
“쟤는 왜 저러는 거야?”
버두스 교수는 투덜댔다.
이런 맹세와 계약이 왜 필요한지 알 수가 없었다.
마법에 대한 열정과 서로에 대한 존중만으로도 충분히 에인로가드의 부여 마법 학파는 잘 굴러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맹세하노니, 앞으로 내 제자 워다나즈 가문의 이한에게 일을 시킬 때는 먼저 선택권을 주고...”
맹세하던 버두스 교수는 이한을 보며 물었다.
“근데 별 의미 없지 않아? 넌 일하는 거 좋아하잖아.”
“그렇죠. 교수님. 사실 별 의미 없습니다. 그냥 선배님 만족시켜주려고 맹세하는 거죠. 선택권이 제게 있다 하더라도 제가 거절하겠습니까? 하하.”
이한은 속으로 케틀에게 감사해하며 말했다.
징벌방에 갇힌 저 선배 덕분에 이한은 손도 대지 않고 원했던 것들을 하나씩 해치우고 있었다.
“...혹여라도 시키게 되면 그에 대한 마땅한 급료를 지불하겠다... 급료는 시키기 전 협상을 하고, 나 본인이 아니라 제자가...”
케틀은 손수건을 꺼내서 눈가를 닦았다. 이한은 당황해서 물었다.
“우십니까?”
“정령 홍수 때문에 공기가 축축해서 네가 착각한 거다!”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맹세에 집중해! 버두스 교수가 뭔 소리를 하나 놓치지 말란 말이야! 그리고 교수를 믿지 마!”
“으음.”
이한은 안타까웠다.
버두스 교수의 귀만 없었다면 ‘선배님 제가 교수님을 미쳤다고 믿겠습니까?’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버두스 교수 앞인 만큼 이한은 선량한 제자를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교수님도 나쁜 뜻은 없으셨을...”
“컥, 커헉.”
케틀은 다시 쓰러질 뻔했다.
* * *
그래도 케틀 덕분에 이한은 몇 가지 맹세를 더 시킬 수 있었다.
방학 때 허가를 받지 않고 찾아오지 않겠다는 맹세까지 마무리하고 나자 이한은 존경심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케틀을 쳐다보았다.
‘역시 괜히 선배가 아니구나!’
에인로가드 졸업생을 만난 건 케틀이 처음이었지만 이렇게 든든할 줄이야.
이한은 왜 에인로가드가 제국 최고의 교육기관으로 꼽히는지 이제 좀 알 것 같았다.
“헉... 헉헉. 그래... 이제 가봐라. 교수는 절대 믿지 말고.”
케틀은 지친 얼굴로 손짓했다.
“선배님도 탈출시켜드리면 안 됩니까?”
“난 안 돼. 버두스 교수야 기껏해봤자 교장 선생님 물건 훔치다가 잡힌 거지만...”
“안 훔쳤다니까!”
버두스 교수가 방방 뛰며 항의했지만 케틀은 무시했다.
“...난 외부에서 사고치다가 잡혀온 거라서. 탈출해봤자 바로 쫓아오실 거야. 그랬다가 잡히면...”
케틀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뒷말을 하지 않았지만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짐작이 되는 동작이었다.
“교장 선생님께 말씀드려볼까요?”
“너 농담 좀 잘 한다.”
케틀은 피식 웃었다.
1학년 후배가 하는 농담이 생각보다 배짱 있고 재밌었던 것이다.
하늘 같은 해골 교장 상대로 저런 농담을 하다니.
“말하는 김에 안에 환경 좀 개선해달라고도 전해줘라.”
“예. 알겠습니다. 그보다 선배님. 밖에서 약속했던 사식 갖고 왔는데요.”
이한은 배낭을 열고 안에서 식료품들을 차곡차곡 꺼내기 시작했다.
감방 안에서 먹기 좋도록 소고기 통조림, 과일 통조림 등 보존식품과 설탕, 찻잎, 커피가루 등 기호품들까지 넉넉히 챙겨왔다.
“이거, 오늘 아침에 구운 빵이라서 바로 드시는 게 좋을 겁니다. 벌꿀도 좀 갖고 왔거든요.”
“...어, 어딜 턴 거야?!”
케틀은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1학년이 구할 수 있는 물건들이 아니었다.
저런 걸 구했으면 자기들이 먹기도 부족할 텐데 이걸 여기 갖고 오다니.
착해빠져도 이건 너무 심하지 않은가.
“야. 이런 걸 나한테 주면 네 친구들이 뭐라고 하겠어! 그냥 다시 가져가라.”
“예? 어차피 넉넉해서 괜찮습니다.”
“...???”
케틀은 혼란스러웠다.
넉넉하다니?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대체 뭐지?’
혹시 1학년 학생들이 단체로 주방을 털었나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랬어도 이 정도는 아닐 텐데...
“선배님. 약속하신 대로 학교에 남기신 걸 알려주십시오.”
“아. 그랬지.”
혼란스러워하던 케틀은 정신을 차렸다.
생각해보니 이 후배는 인성 교육 강의 때부터 케틀에게 접촉해온 녀석이었다.
그 때는 설마 여기 징벌방까지 뚫고 와서 거래를 성공시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넌 이렇게 철저한 녀석이 대체 왜 교수님은 그렇게 믿는 거냐? 교수님은 믿으면 안 된다니까.”
“하하. 그래도 교수님이신데요.”
뒤에서 버두스 교수가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케틀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누구나 완벽할 수는 없는 법.
이 후배는 대단한 마법적 재능을 갖고 있었지만, 에인로가드에서는 아주 치명적인 약점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저렇게 교수를 믿다니...
“이거 받아라. 나하고 내 친구들이 쓰던 방 위치야. 쓸만한 게 좀 남아있을 거다.”
케틀이 내민 지도를 이한은 고개를 숙이며 받았다.
여기까지 온 보람이 있는 보상이었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내가 해야지. 사식 고맙다. 잘 먹으마. 여기 한동안 더 있어야 하는데...”
케틀은 입맛을 다시더니 이한을 보고 말했다.
“넌 나처럼 되지 마라.”
“알겠습니다. 밖에서 마법을 쓸 때는 주의하겠습니다.”
“아니. 밖에서 마법으로 사고쳐도 되는데 들키지 말라고. 난 들켜서 잡힌 거야.”
“......”
‘반성 안 하신 것 같은데...’
이한은 속으로 생각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버두스 교수가 말했다.
“변신해야지.”
“예?”
“변신해야지. 약속했잖아. 구하러 오면 일주일 동안 염소로 있겠다고.”
“......”
케틀은 속으로 버두스 교수의 욕설을 토해내며 마법을 시전했다.
펑!
“그럼 우린 가볼게!”
메에에-!
‘교장 선생님 오시면 무조건 저 작자 탓으로 돌려주마!’
염소, 아니 케틀은 복수심을 불태우며 떠나가는 버두스 교수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만약 해골 교장이 와서 ‘왜 징벌방이 이 모양 이 꼴이 되었지?’라고 묻는다면 무조건 ‘버두스 교수 때문입니다! 메에에!’라고 외칠 생각이었다.
* * *
“다들. 홍수는 끝났다.”
앗... 그럼 날 풀어다오...
도서관에 돌아온 이한이 지친 얼굴로 선언하자 학생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설, 설마...!”
“워다나즈, 네가 해결한 거야?!”
“야. 저번에 워다나즈가 뭐라고 했는지도 기억 안 나냐? 자꾸 자기랑 엮지 말라고 했잖아.”
앙라고가 검은 거북이 탑 학생한테 핀잔을 줬다.
“이번 건 내가 해결하긴 했다.”
“......”
앙라고는 이한을 노려보았다.
이 자식이 저번에는 ‘에인로가드의 모든 일들을 내가 해결한 거 같냐? 자꾸 엮지 마라’라고 구박해놓고!
“어떻게 해결한 거야!?”
날... 풀어주고 떠들어도 되지 않나... 마법사들...
“잠깐!”
살코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알겠다는 듯이 감탄의 표정을 지었다.
“널 존경한다. 워다나즈. 황자를 제물로 바쳤군?”
“아닌데.”
“마음 아픈 선택이었겠지만 어쩔 수 없는 희생이다. 곧 괜찮아질 거다.”
“안 바쳤다고.”
풀어다오... 풀어주고 떠들어도...
“그래. 그렇게 말한다면 존중을...”
뒤에서 몰래 간식 먹고 돌아온 가이난도가 살코를 노려보았다.
누굴 제물로 바치라고?
“아니!?”
“뭘 놀라는데. 뭘?”
“그럼 누굴 제물로 바친...?”
이한은 피곤함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정공법으로 부딪쳤다. 정령들을 찾아가서 설득했지.”
풀...
풀어달라고 하소연하려던 탄주어가 이한의 말에 질색한 기색으로 입을 다물었다.
뭐 이리 미친 마법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