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8화
“참. 죄송합니다. 뭐라고 하셨죠?”
탄주어가 뒤에서 부르는 소리를 뒤늦게 알아챈 이한이 말을 걸었다.
기분 탓인지 탄주어의 목소리는 평소의 불만 가득한 목소리가 아니라 공손하고 정중한 목소리였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보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홍수 기간 동안 저희를 도와주시느라.”
이한은 진심을 다해 감사함을 전했다.
폭풍과 비바람이 몰아치는데 학생들이 에인로가드를 오고 갈 수 있었던 건 탄주어의 고생이 컸다.
탄주어가 아니었다면 학생들 중 몇 명은 실종됐으리라.
그리고 이한도 사람인 만큼 탄주어를 혹사시킨 것에 대한 미안함이 조금 있었다.
“이제 계약에서 풀어드리겠습니다.”
어... 조금 더 일해도... 된다... 홍수 때 한 것도... 없고...
탄주어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예상 밖의 반응에 이한은 살짝 당황했다.
‘뭐지? 뭘 잘못 먹었나?’
맨날 ‘날 돌려보내다오’하면서 애타게 울던 탄주어가 갑자기 이러다니.
“많이 일하셨습니다.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정말... 괜찮나...?
탄주어는 머뭇거리면서 이한의 눈치를 봤다.
평범한 마법사가 아니란 건 알았지만, 이번 홍수에 관련된 정령들을 협박해서 역소환시킬 줄이야.
저건 담력도 담력이지만 정령들을 압도할 만큼 막강한 힘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특히 이번 홍수 때 정령들이 얼마나 굉장한 힘을 얻었는지 떠올려보면...
괜히 여기 영주의 제자로 손꼽히는 게 아니라는 생각만 들었다.
“당연히 괜찮습니다. 돌아가십시오.”
고맙... 고맙다.
탄주어는 마지막으로 이한의 눈치를 한 번 더 본 다음 천천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다음에 다시 만나길 빌겠습니다.”
......
이한은 나름 예의상 한 말이었지만 역소환되고 있는 탄주어에게는 기겁할 만한 소리였다.
탄주어는 흠칫 떨었다.
‘못 들으셨나?’
상대가 대답 없이 역소환되자 이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 * *
“학교가...!”
“원래대로 돌아가고 있어!”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르게, 에인로가드를 가득 채웠던 물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도서관 선착장에 앉아 에인로가드의 숲과 길, 각종 건물들과 시설들을 바라보았다.
평소에는 별 생각이 없었지만 이렇게 다시 보니 괜히 더 뭉클하고 감동적이었다.
‘그런 홍수가 있었는데도 대부분 멀쩡하군.’
이한은 각 건물들을 연결하는 포장길들이 멀쩡한 것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해골 교장 따라다니면서 보수 작업을 했던 만큼 이 학교가 강력한 마법으로 보호받고 있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이런 홍수에도 흔들림 하나 없이 멀쩡한 걸 직접 보니 괜히 감탄이 나왔다.
‘텃밭은 다시 만들어야겠지만...’
이 정도면 나름 선방했다고 할 수 있었다.
정말 중요한 물건들은 기숙사 개인실에 보관해놨고, 식료품들도 어느 정도 날리긴 했지만 밖에서 보충해온 게 있고...
‘외출권도 있지. 다음에는 외출권을 사용해서 나가야 할 테니.’
지금 해골 교장이 이한이 어떻게 외출했는지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보고 있는 상황에서 섣불리 무단 외출을 시도하는 건 아마추어나 할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에 잠겨있던 이한의 눈에, 저 멀리 파이프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들어왔다.
우레걸음 교수가 파이프를 물고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었다.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그래. 너희들도 안녕하고. 홍수 때문에 다들 고생 많았다. 그래도 이번에는 선배들이 뭐라도 했나보군.”
“어?”
“그게...”
1학년 학생들은 우레걸음 교수가 착각했다는 걸 깨닫고 당황했다.
선배가 아니라...
그러나 우레걸음 교수는 그 기색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자기 할 말을 했다.
“연금술 강의 듣는 학생들한테 할 말이 있다. 다들 모여봐라.”
“...또 뭘 하려고요!”
“......”
중간고사와 홍수를 견뎌낸 학생들은 매우 거칠고 날카로워져있었다.
학생들은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우레걸음 교수를 쳐다보았다.
“추가 시험 아니야?”
“야. 나 없다고 해. 알겠지? 난 아예 못 들은 거야.”
우레걸음 교수는 연기를 푹 내쉬더니 말했다.
“내가 그렇게 야박한 교수로 보였나?”
“교수님께서는 그냥 에인로가드의 평범한 교수님이시죠.”
“그렇지? 워다나즈 봐라.”
우레걸음 교수는 자기를 편들어주는 이한의 말에 수염을 쓰다듬으며 빙긋 웃었다.
‘어라?’
그런데 생각해보니 뭔가 좀 미묘했다.
에인로가드의 평범한 교수라는 게 칭찬 맞나?
“하여간 숨어 있는 녀석들도 다 나와라. 나도 지금 바쁜데 어쩔 수 없이 온 거니까. 홍수 때문에 오두막들이 날아가서... 저번 홍수 때는 안 그랬는데 오두막들이 어디 갔는지 모르겠군. 갈 곳은 다 찾아봤는데.”
“...정령들이 화나서 파괴한 게 아닐까요?”
“그럴지도. 하여간 다 모였냐?”
“예.”
연금술을 듣는 학생들이 모이자 우레걸음 교수는 본론을 시작했다.
“내일부터 연금술 강의를 듣는 학생들은 3박 4일 동안 외출하게 됐다. 외부의 메이킨 가문에서 요청이 들어왔는데... 산고리아 꽃이라고 아나? 공부 열심히 한 학생들이라면 알 텐데, 제국 남부 해안가에서 지금 품귀 현상이 일어나서 여러모로 문제가 되고 있다더군. 제국에 이런 문제가 생겼을 때 헌신하는 것도 마법사의 의무 중 하나다. 잘 알아두도록.”
우레걸음 교수는 말하고 나서 연기를 훅 내뿜었다. 그리고 작게 중얼거렸다.
“제기랄, 정말 더럽게 가기 싫군...”
“......”
“......”
학생들은 못 들은 척 했다.
“너희들도 같이 가게 될 거다. 이런 요청을 해결하는 걸 옆에서 보고 배울 기회도 흔치 않으니. 1학년 때나 이렇게 같이 가는 거지, 원래는 너희 혼자서도 해결할 줄 알아야 한다. 가서 많이 배우도록.”
‘너무 양심 없으신 소리 아닌가?’
“그러니까...”
“외출하는 거죠?”
“그래.”
연금술을 듣는 학생들은 환호성을 터뜨렸다.
비록 공적인 업무 때문에 외출하는 거라지만 학교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우레걸음 교수는 투덜대며 말했다.
“좋아할 거 없다. 가서 일만 해야 한다니까. 아마 가서 놀 시간도 없을 거다. 현지 길드원들 설득하고 주민들 달래고 몬스터 치우고 재료 확인하고 분류하느라... 너희 듣고 있냐?”
물론 학생들은 뒷일 따위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신나서 소리 지를 뿐이었다.
그나마 황녀 정도만 신중하게 생각에 잠겨서 고민했다. 황녀는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질문이 있습니다.”
“해봐라.”
“제가 알기론, 지금 산고리아 꽃 품귀 현상은 여기 연금술사들만으로 해결할 수준이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제국 남부 해안가의 산고리아 꽃 품귀 현상은 단순히 재료가 부족한 것만으로 끝이 아니었다.
몬스터 등장, 정령 난동, 지역 주민 불만, 길드 업무 충돌 등 다양한 요소들이 겹쳐 있는 만큼, 우레걸음 교수가 아무리 뛰어난 연금술사라 하더라도 혼자서 해결할 수는 없었다.
1학년 학생들이 같이 간다지만 학생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업무.
과연 우레걸음 교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지금 다들 미쳐 날뛰는데 혼자 좋은 지적을 했다. 메이킨 가문 사람들한테 들어보니 누가 아주 좋은 의견을 냈더군. 여러 복잡한 절차는 생략하고 북부의 그림자 순찰대들을 동원해서 몬스터들부터 일단 쓸어버리자고. 민심을 달래기 위해서 행동으로 보여주자는 거겠지.”
“그, 그런!”
황녀는 깜짝 놀랐다.
쾌도난마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과격한 방법이었다.
각종 절차와 이해관계를 무시하고 몬스터부터 처리한다니.
그러나 그 방법을 다시 되새겨보자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다들 손해 보지 않기 위해 눈치만 보고 있는 상황에서 몬스터를 사냥한다면 지역 주민들은 크게 감동을 받을 것이고, 복잡하게 얽혀 있는 그 지역의 세력들도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놀랐지? 이해한다. 과격하지만 효과적인 방법이야. 체면이나 절차를 중요시하는 대귀족 가문들이나 길드들은 떠올리기 힘들었을 텐데, 용케도 이런 방법을 떠올렸다 싶더군.”
우레걸음 교수는 말하다보니 갑자기 울화가 치솟는 모양이었다.
“칭찬할 때가 아니지. 덕분에 나까지 내려가게 생겼잖나! 그냥 평소 하던 대로 협상이나 할 것이지 왜 안 하던 짓을...”
“딸꾹.”
옆에서 듣고 있던 닐리아는 갑자기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이한과 요네르는 안쓰러워하며 닐리아에게 따뜻한 홍차를 내밀었다.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출발할 테니 다들 준비하도록.”
“듣고 있는 강의는 어떡하나요?”
“교수님들께서 보충을 해주실 거다.”
“......”
이한은 갑자기 인상을 찌푸렸다.
‘보충으로 다 들을 수 있나?’
“더 물어볼 놈 있나?”
“교수님. 여행용품은 지원해주시나요?”
“아니? 알아서 챙겨야지. 나한테 맡겨놨냐?”
우레걸음 교수의 따뜻한 말에 학생들은 감동했다.
이한은 한숨을 내쉬었다.
‘교수들이 사라지는 줄 알았는데 학생들도 같이 사라지는 거였군.’
교수들만 잠깐 사라질 줄 알았는데 학생들도 같이 가게 될 줄이야.
사실 나쁘진 않았다. 어떻게든 밖으로 나갈 기회는 귀한 기회였으니까.
‘꼭 교장 선생님이나 볼라디 교수가 밖에 나가지 않더라도 내가 밖에 나가면 그게 그거긴 하지.’
옆에 있던 학생 한 명이 손을 들고 물었다.
“같이 가시는 교수님은 우레걸음 교수님 혼자신가요?”
“번개걸음 교수님도 같이 가신다. 탈것을 타고 날아갈 거거든.”
“과연.”
“배그렉 교수님도 같이 가실 거다. 밖에 나가는 만큼 호위가 필요하지.”
“......”
이한은 들고 있던 홍차병을 떨어뜨렸다.
* * *
아침.
가이난도는 엉엉 울면서 우레걸음 교수의 발목을 붙잡았지만, 교수는 매몰차게 떼어냈다.
“넌 연금술 학생이 아니다.”
“엉엉! 앞으로 연금술 열심히 들을게요! 저도 데려가주세요!”
연금술 학생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안 데리고 가서 다행이다.’
‘밖에서도 저러면 다른 학교 학생이라고 해야지.’
와이번 무리 중 가장 크고 사납게 생긴 놈 위에 타고 있던 번개걸음 교수가 외쳤다.
“다들 천천히 와이번 위에 올라와라. 훈련받은 놈들이라 난폭하진 않지만, 너희들이 거칠게 행동하면 좋아하진 않을 거다. 잠깐! 워다나즈 너는 와이번하고 눈 맞추고 와라. 와이번이 오해할 수 있으니까 깜박이면서 적의가 없다는 걸 보여줘라.”
“아니 왜 저만...”
이한은 투덜거리면서도 와이번과 시선을 교환했다.
와이번은 매우 경계심 가득한 눈동자로 이한을 쳐다보았다. 이한이 자기를 죽이려고 다가오는 포식자가 아닌지 의심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난 적이 아니다.”
-크르르...
“난 적이 아니다.”
-크르르르...
“...난 적이 아니라니까? 야.”
-크르르르르르!
번개걸음 교수가 옆에서 말했다.
“이 녀석은 자존심이 강해서 자기가 인정한 놈만 태우지만, 너희들이 타는 놈들은 다 순한 놈들이다. 여행 동안 귀찮은 일은 없을 거다.”
“어. 교수님. 그런데 왜 이 녀석은 코피를 흘리고 있죠?”
“아까 좀 세게 때렸나보군.”
“......”
이한은 와이번을 정말 믿어도 되나 살짝 흔들렸다.
‘괜찮겠지.’
저 멀리서 걸어오는 볼라디 교수를 보니 이한은 갑자기 든든해졌다.
평소에는 그렇게 위협적이던 사람이었지만 와이번과 같이 여행을 하게 되자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교수님. 같이 와이번을 타게 되어서 기쁩니다.”
“아쉽게 됐군.”
“예?”
“와이번은 지나치게 안전한 탈것이지.”
볼라디 교수는 아쉽다는 듯이 눈썹을 한 번 까딱이고는 와이번 위로 올라왔다.
“......”
이한의 배낭 속에 있던 바실리스크 알이 경계심 가득한 소리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