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6화
“그, 그래. 알겠다.”
이한의 목소리에서 절절한 진심이 느껴져서 우레걸음 교수는 자신도 모르게 압도되었다.
“교수님은 뭘 하고 계셨습니까? 설마 휴식을 취하고 계시진...”
제자는 의심 섞인 눈초리로 스승을 쳐다보았다.
일을 먼저 끝내고 돌아왔으면 다른 일을 해야지, 설마 쉬고 있었을까 의심이 됐던 것이다.
그 눈빛을 보자 우레걸음 교수는 자기가 제자들을 너무 혹독하게 부려먹었나 반성하게 됐다.
“...아니다. 나도 내 일을 하고 있었다. 봐라.”
우레걸음 교수는 손짓하더니 저택의 창문 밖을 가리켰다.
전형적인 남부 풍으로 정돈된 정원에는 과실수 몇 그루가 풍성하게 열매를 드리우고 있었고, 하인 둘이 밑에 쌓인 잎을 치우고 풀을 자르고 있었다.
그걸 본 이한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열매를 확보하고 계셨습니까?”
“......”
너무나도 에인로가드 학생다운 발상이라 우레걸음 교수는 말문이 막혔다.
“나무 말고 옆에! 반대쪽 창문!”
“아하. 저길 말하신 거군요.”
이한은 그제야 우레걸음 교수가 가리킨 창문을 목격할 수 있었다.
반대쪽에 위치한 저택의 넓은 방 안에서 메이킨 가문의 사람들과 도시 연금술사들이 악수를 나누고 있었다.
표정을 보니 서로 만족스럽게 협상이 끝난 게 분명했다.
“연금술사 길드의 사람들을 설득하고 있었다. 그나마 가장 말이 통할 놈들이니까.”
“여기 연금술사 길드 분들이 성격이 좋으십니까?”
이한의 질문에 우레걸음 교수는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즉답했다.
“아니. 길드 놈들은 다 성격이 안 좋지. 성격 좋은 길드 놈들이 어디 있나? 성격 좋은 놈들은 길드에 안 들어간다.”
“......”
길드란 게 아무래도 서로 목적이 같고 방향성이 같은 이들이 뭉친 집단인 만큼 쉽게 타협해주거나 양보하진 않았다.
연금술사 길드도 마찬가지였다.
“그럼 왜 말이 통하신다고...”
“상황 때문이지. 먼저 이 의뢰는 메이킨 가문에서 맡겼고, 나 또한 에인로가드에서 나온 연금술사니 말이야.”
우레걸음 교수는 파이프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
메이킨 가문은 제국 연금술계에서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대귀족 가문이었고 우레걸음 교수 또한 제국에서 유명한 연금술사.
이런 이들의 제안에 뻗대거나 으름장을 놓았다가는 크게 보복을 당할 수 있었다.
“물론 도시 사람들도 있는 만큼 메이킨 가문이 재료나 시약의 유통을 끊는 식으로 보복하진 않겠지만, 아무래도 눈치가 보이지 않겠느냐.”
“그렇군요. 교수님도 보복하실 수 있습니까?”
“나? 나도 가능하지.”
“!”
이한은 놀랐다.
우레걸음 교수는 굳이 따지자면 명성 높은 학자 계열 아닌가.
권력이나 부(富)와는 거리가 먼 만큼 이런 상황에서 보복을 할 만한 힘은 없어보였다.
“혹시 교장 선생님이나 배그렉 교수님한테 부탁해서 습격을?”
“...무슨 미친 소리를 하는 거냐!? 제국 연금술 학회에 초대를 막거나 하는 정도지!”
“에이...”
이한은 실망했다.
보복치고는 조금 소소했던 것이다.
물론 우레걸음 교수 입장에서는 이한이 미친놈 같았다.
‘교장 선생님하고 어울리는 시간을 좀 줄여야 하는 것 아닌가?’
아직 1학년인데 이러면 나중에는 어떡하려고...
“그렇다고 무리한 제안을 한 건 아니다. 메이킨 가문에서 몇몇 희귀한 시약을 공급해주기로 했고, 나 또한 세 종류 물약의 제작법을 개선해주기로 했으니까. 어쨌든 연금술사 길드는 우리의 중재안에 협조하겠다고 했다.”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이제 다른 길드가 문제지.”
우레걸음 교수가 연기를 푹 내뿜으며 말했다.
“어부 길드는... 어디든 그렇지만 원래 뱃사람들의 고집은 알아주잖나. 감정의 골이 깊은 탓에 이득으로 설득해도 안 될지도 모르겠다. 자존심 문제라...”
“그게 말입니다.”
“그리고 여기 모험가 길드 놈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원래 모험가 길드 놈들이 이랬다가 저랬다가 왔다 갔다 하는 정신없는 놈들이지만 여기는 특히 그래서... 아무리 규모가 작아도 그렇지 뚜렷한 의견을 내놓아야 할 것 아니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말해줘야 이쪽도...”
“그러니까 그게...”
한참을 신나게 토로하던 우레걸음 교수는 이한을 그제야 눈치채고 물었다.
“왜? 무슨 할 말이라도 있냐?”
“어부 길드에서는 협조한다고 하던데요.”
“...뭐? 왜??”
다른 학생이었다면 ‘내가 안 보는 사이 창고에서 술 꺼내 마셨냐?’라는 반응이 나왔겠지만, 이한이었기에 반응이 달랐다.
우레걸음 교수는 일단 믿은 다음에 물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어... 그러니까 아직 확실한 건 아닌데, 어부 길드에서 저희가 열심히 하는 걸 보고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혹시 그림자 순찰대 사냥꾼이 목숨 걸고 물에 빠진 어부 구해주기라도 했나?”
우레걸음 교수는 매우 당혹스러웠다.
그 정도가 아니라면 고집 센 어부들이 감동을 받을 것 같지 않았다.
“그건 아니고 제가 목숨 걸고 몬스터 잡는 것에 감동을 받았다는데요. 에인로가드 학생이 몸을 안 아끼고 몬스터 잡는 게 감동적이었다고...”
“......”
우레걸음 교수는 할 말을 잃었다.
듣고 보니 그럴듯했던 것이다.
‘하긴 에인로가드니까 저게 평범해 보이는 거지 밖에서는 다르게 보이긴 하겠군!’
“그, 그래. 확인해보마. 하여간 고맙다.”
“그리고 모험가 길드는...”
“모험가 길드도 이야기했냐!?”
우레걸음 교수는 파이프를 떨어뜨릴 뻔했다.
오늘 오전 내내 사냥하고 토벌하고 이제 막 점심 먹으려고 저택에 돌아왔는데 언제 그렇게 설득을 했단 말인가?
“예. 모험가 길드는 오해가 좀 있던 것 같더군요. 이쪽은 대립을 원하지 않고, 어느 쪽이든 간에 그냥 적절한 보수만 받고 채집 의뢰에 참가할 수 있으면 만족한다고 합니다. 별다른 욕심이 없던데요.”
“그래? 그건 놀랍군. 왜 말이 없었던 거지?”
“에인로가드나 메이킨 가문의 명성에 좀 겁을 먹었던 것 같습니다.”
“아... 그건 그럴 수 있지. 제기랄. 내가 실수했군.”
우레걸음 교수는 쯧쯧 혀를 찼다.
생각해보니 이건 본인의 실수였다.
같이 온 이들이 어떻게 보일지 좀 더 냉정하게 판단을 했어야 했는데.
“괜히 쓸데없이 겁을 줬군. 그래도 네가 오해를 잘 해결한 모양이구나?”
우레걸음 교수는 대견하다는 듯이 이한을 쳐다보았다.
에인로가드에서 저 정도 사교성을 보여주는 학생은 정말로 드물었다.
특히 워다나즈 가문 출신인데도 겁먹은 사람들의 오해를 풀고 친근감을 사다니.
“예.”
“역시 어린 학생과 직접 대화하면 오해가 풀릴 수밖에 없겠지. 에인로가드 마법사도 사람인데 말이야.”
“......”
이한은 워다나즈 가문과 볼라디 교수 때문에 모험가 길드 사람들이 벌벌 떨며 인사했다는 것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하여간 서로 의사소통은 성공적으로 잘 마무리 지었으니까.
“그럼 둘 다 지금 바로 이야기를 나눠봐야겠다. 정말 고맙다. 워다나즈! 너밖에 없구나!”
“예. 교수님. 그리고...”
“?”
제자가 아직 할 말이 남은 것 같자 우레걸음 교수는 시선을 돌렸다.
“씨 서펜트 흔적에 대해서 볼라디 교수님 귀에 들어가시면 의뢰고 뭐고 협상이 진흙탕 되는 겁니다.”
“...알, 알겠다. 진정해라.”
* * *
뒤늦게 찾아온 두 길드와의 협상을 끝내자, 우레걸음 교수는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기뻐했다.
“잘했다! 워다나즈! 잘했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넌 쉬어도 좋다! 돌아갈 때까지 푹 쉬어라. 다른 원하는 거라도 있느냐?”
“어... 친구들도 좀 쉴 시간 주시면 안 됩니까?”
우레걸음 교수는 멈칫했다.
“일이 아직 다 안 끝났는데.”
“일정 계산해보면 여유가 있잖습니까.”
“그렇긴 하지. 하지만 너도 잘 알지 않느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 여유는...”
말하려던 우레걸음 교수는 입맛을 다시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됐다. 이 정도 부탁은 들어줘야지.”
“정말이십니까?”
이한은 살짝 놀랐다.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 솔직히 설득은 내일까지 해도 안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걸 이렇게 해결해줬는데 그런 부탁 하나 못 들어줄까. 일정이 꼬이더라도 다른 교수들까지 같이 앉아서 하면 넉넉할 거다.”
설득하느라 돌아다닐 필요가 없어진 만큼 우레걸음 교수도 같이 자리에 앉아서 작업을 하면 넉넉하고도 남았다.
게다가 이 정도 공을 세운 제자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만큼 우레걸음 교수는 냉정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한에게 원한을 쌓아두면 진지하게 졸업 이후가 걱정됐다.
버두스 교수 같은 사람이야 자기가 찔릴 거라는 생각을 전혀 못 하고 있겠지만 우레걸음 교수는 아닌 것이다.
“소식 전해주러 같이 가자.”
“예.”
우레걸음 교수와 이한은 복도를 걸어 공방으로 향했다.
교수는 문을 벌컥 열더니 외쳤다.
“애들아. 좋은 소식이 있...!”
“...?”
이한과 교수는 살짝 당황했다.
공방이 거의 텅 비어있었던 것이다.
몇몇 학생들만 자리에 앉아 있었고 다른 학생들은 보이지 않았다.
“다들 어디 간 거냐? 메이킨?”
우레걸음 교수는 요네르를 보며 물었다.
요네르가 시선을 슬쩍 피하며 대답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교수님.”
“......”
“......”
이한도 우레걸음 교수도 상황을 바로 파악할 수 있었다.
학생들이 놀러나간 것이다!
요네르나 몇몇 우등생들은 ‘그래도 해야 할 일은 끝내놔야지’해서 남은 거고...
“이런 징벌방 갈 놈들을 봤나!”
우레걸음 교수는 펄펄 뛰었다.
일이 안 끝났는데 몰래 도망치다니!
그 사이 이한이 요네르에게 몰래 물었다.
“요네르. 다들 무슨 생각으로 나간 거지? 일이 안 끝났는데...”
“그... 일정 여유 있다고 이한 네가 말했잖아.”
“아.”
이한은 그제야 일정에 관해서 친구들한테 전달한 걸 떠올렸다.
그걸 알게 된 학생들이 ‘어? 그럼 나갔다와도 되겠는데?’하고 훌쩍 외출을 시도한 것이다.
‘이건 교수님한테 비밀로 해야겠군.’
“잠깐. 요네르. 한 가지 더 궁금한 게 있는데. 다들 돈은 어디서 구했지? 돈이 없을 텐데.”
우레걸음 교수가 방심한 데에는 이것도 있었다.
학생들이 갖고 있는 은화가 없는 만큼 나가봤자 즐길 게 별로 없는 것이다.
“몇 명이 빌렸어. 메이킨 가문에서 나온 사람들한테 부탁해서.”
“아.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이 빌렸나?”
이한은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실용적이고 체면을 신경 안 쓰는 만큼 ‘나중에 의뢰 보상으로 갚겠습니다’하고 빌려도...
“아니.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이.”
요네르는 약간 창피했는지 얼굴을 살며시 붉히며 대답했다.
“...어? 진짜?”
“응. 애초에 친분 있는 가문 아니면 돈 빌려달라는 이야기 꺼내기가 쉽지 않잖아...”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이 메이킨 가문하고 연관이 어떻게 있다고 그런 부탁을 쉽게 하겠는가.
푸른 용의 탑 학생들만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다른 애들은 체면 때문에 부탁 못 할 텐데?”
“응. 좀 의외지?”
요네르는 ‘아마 이한 네가 하는 걸 보고 용기를 얻은 애들이 몇 명 있는 것 같아’라는 뒷말을 삼켰다.
친구의 명예를 존중해서였다.
“그러면 나머지는?”
“나머지는 그냥 밖에 나가기만 해도 좋다고 나갔지.”
“......”
이한은 갑자기 치유 마법 선배들이 생각나서 슬퍼졌다.
우레걸음 교수가 방방 뛰는 걸 끝내고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워다나즈. 나가서 적당히 놀고 돌아오라고 전해줘라. 오늘 밤 전에만 들어오라고.”
“감사합니다.”
“!?”
남아 있던 학생들은 우레걸음이 갑자기 허락을 해주자 깜짝 놀랐다.
심지어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우레걸음 교수는 자기 지갑을 꺼내더니 이한에게 던지는 것 아닌가.
“맛있는 거 사먹고. 이상한 아티팩트나 물약은 사지 마라.”
“감사합니다.”
“...!!”
충격.
웅성거림.
학생들이 당황해하면서 일어나는 사이, 시아나 사제가 이한에게 다가오더니 귀에 대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혹, 혹시...”
“그래. 협상을 성공했...”
“교수님을 협박하셨어요?!”
“...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