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7화
이한은 오랜만에 정색했다.
시아나 사제는 아직도 이상함을 깨닫지 못했는지 뱀 수인 특유의 세로로 된 동공을 깜박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협박한 게 아니에요?”
“내가 어떻게 교수님을 협박하나...”
갑자기 이한은 아까 ‘씨 서펜트 흔적에 대해서 볼라디 교수님 귀에 들어가면 의뢰고 뭐고 협상이 진흙탕 되는 겁니다’라고 말했던 게 떠올랐다.
‘그건 협박이 아니었다. 간절한 부탁에 가까웠지.’
빠르게 합리화를 끝낸 이한은 상황을 설명했다.
“다른 길드들 설득해야 하는 일이 빨리 끝났거든.”
“어떻게요?”
“...내가 도와서?”
“......”
시아나 사제는 눈빛으로 ‘그게 협박한 것보다 더 가능성 낮아 보이는데...’라고 짧게 말했다.
이한은 눈빛에서 수상한 기운을 눈치 채고 되물었다.
“왜 그렇게 쳐다보는 거지?”
“착각하신 거 아닐까요?”
“나갈 준비나 하지. 다들 하던 거 그만두고 나가자고.”
이한의 말에 구석에서 새 천칭저울을 꺼내오던 황녀가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 안 나가셨나?”
이한은 놀라워하며 요네르에게 물었다. 그 반응에 요네르는 오히려 황당했다.
“그럼 나가신 줄 알았어?”
“응? 응.”
“...왜?”
황녀도 학생들 중에서 손에 꼽히는 우등생이었다.
그런 사람이 멋대로 외출을 할 리가 없지 않은가.
“어, 밖에 간식 많이 팔길래?”
“......”
요네르는 경악했다.
“이한, 혹시 황녀님을 가이난도하고 똑같이 생각하는...”
요네르는 질문을 끝내지 못했다.
질문을 던지는 사이 다른 친구들이 모두 모였던 것이다.
“그럼 출발할까? 빠진 사람 없지?”
“잠깐. 워다나즈. 먼저 나간 놈들이 어디 있는지부터 확인한 다음 출발하는 게 낫지 않나?”
아산이 손을 들고 물었다.
그러자 이한이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되물었다.
“우리 먼저 놀고 나서 나간 놈들을 찾아야지. 시간도 없는데.”
“어?”
아산이 당황해하자 다른 학생들이 입을 열었다.
“맞는 말씀이세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저도...”
“그, 그런가?”
쟁쟁한 친구들의 단호한 대답에 아산은 살짝 상식이 흔들리는 기분을 느꼈다.
* * *
랫포드는 진지하게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지갑 위치 이동을 한 번은 해야 할 것 같습니다만...”
“안 돼, 안 돼!”
“잡히면 큰 일 나!”
친구들은 소매치기를 하려는 랫포드를 다급하게 말렸다.
물론 은화가 빠듯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친구를 시켜서 도둑질을 할 수는 없었다.
“적으면 적은 대로 놀 수 있을 거야.”
“그런데 교수님이 화내시면 어떡하지?”
“괜찮아. 화내시더라도 어떻게 하진 못하실 걸.”
“그런데 워다나즈가 화내면 어떡하지?”
“......”
“...넌 이 자식아, 노는데 왜 그렇게 불길한 소리를 해?”
친구들이 말을 꺼낸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을 일제히 구박했다.
“그럼 다들 돈 벌 방법을 찾아보자.”
“좋은 생각이십니다. 워다나즈 님도 밖에 나오시면 매번 돈을 버셨거든요.”
랫포드의 말에 학생들은 술렁거렸다.
“대체 뭘로? 혹시 지팡이 들고 협박했나?”
“의뢰 뛰었다고 들은 것 같긴 한데...”
“외출 나가서? 그 짧은 사이에?”
“우린 그건 무리고... 다른 걸 찾아보자고.”
검은 거북이 탑, 렌지드가 현실적인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가게를 돌면 마법이 필요한 곳들이 있을 거야. 내가 요리사 길드에서 일을 도울 때도 종종 마법사들을 부른 적이 있었거든. 에인로가드에서 나왔다고 하면 그쪽에서도 흔쾌히 수락할 걸.”
마법사라고 자처하면서 거들먹거리는 이들 대부분이 수상쩍고 실력 없는 이들인 만큼, 에인로가드 출신이라는 것만큼 확실한 보장도 없었다.
문제는...
“그러니까 렌지드. 지금 에인로가드에서 나온 우리가 거리 옆 상점들을 돌면서 ‘에인로가드에서 나왔습니다 일 좀 시켜주세요’라고 하라는 거냐?”
푸른 용의 탑 학생들과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묻자 렌지드는 살짝 기가 죽었다.
“좀, 좀 그런가?”
“아니. 아주 좋은 생각인데?”
“빨리 하자.”
“......”
푸른 용의 탑 학생들과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좋은 자리 뺏길까봐 서둘러 달려가는 모습에,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은 수군거렸다.
“저 자식들 귀족 가문 출신 맞아?”
이스란 시의 자랑인 물로 된 동상에서 시작해서 항구로 이어지는 대로(大路)는 오랫동안 자리 잡은 상점들과 건물들로 인해 옆의 말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시끄러웠다.
가게 앞에 연결된 좌판에는 항구에서 들여온 해산물들과 남부 특유의 설탕을 뿌리고 구운 과자들이 가득했고, 그 옆으로는 카페와 찻집의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은 손님들이 햇볕을 쬐며 사람들을 구경했다.
이런 가게들은 도시의 꼬마들도 들락날락할 만큼 밝았지만 꼭 그런 가게들만 있는 건 아니었다.
주점과 여관 쪽에 연결된 골목들에는 수상쩍은 장물들을 처리하는 골동품 가게부터 작동이 되는지 안 되는지 알 수 없는 아티팩트를 파는 가게까지 가득했다.
이런 골목으로 들어가는 여행객들은 그 많고 많은 인파 중에 소수에 불과할 정도로 풍기는 분위기가 어두침침했던 것이다.
“에인로가드에서 나왔는데 왜 이런 걸 하냐고요? 어... 그러니까... 그... 마법의 실력을 키우기 위해서입니다.”
“맞, 맞습니다. 마법의 실력이란 건 일상생활에서 겪는 사소한 행동들로...”
가게 주인의 질문에 학생들은 최선을 다해 변명을 짜냈다.
다행히 그 말에 가게 주인은 감탄했다.
“저런...! 마법사들은 정말 대단합니다! 이런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다니. 정말 이 은화로 되겠습니까? 제가 죄송해서...”
“아닙니다. 저희한테 중요한 건 수련이니까요.”
가게 주인을 설득하고 나자 렌지드는 바트렉에게 물었다.
“야, 너 순발력 좋다. 저런 건 어떻게 떠올렸어?”
“워다나즈가 했던 말 따라한 건데.”
“......”
하여간 자리를 구한 학생들은 열심히 일을 했다.
화덕 안쪽에 화염 저항 마법을 걸어주고, 스크롤 중에 고칠 수 있는 스크롤은 고쳐주고...
잘그랑!
“감사합니다. 마법사 님.”
가게 주인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은화 주머니를 내밀었다.
학생들은 품위 있게 그 주머니를 받고 뒤돌아서 외쳤다.
“돈이다!!”
“이 돈이면 에인로가드는 필요 없어! 안 돌아가도 돼! 새 학교를 차리자!”
“좋은 생각이야!!”
“...???”
은화의 매력에 취한 학생들은 미친 소리를 하며 달려 나갔다.
“헉...!”
“왜? 무슨 일이야?”
“저기 워다나즈! 빨강머리 옆에!”
“헉!”
학생들은 숨 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이한과 친구들이 저 멀리서 걸어오는 게 보였던 것이다.
‘잡으러 왔구나!’
간신히 은화를 벌었는데 여기서 그냥 끝날 수는 없었다.
학생들은 이를 악물고 자세를 낮췄다.
“어. 워다나즈 님 부르면 안 됩...”
“야! 랫포드 입 막아!”
“읍읍! 읍읍읍!”
“반대 방향으로! 반대 방향으로!”
친구들은 서둘러 도망쳤다. 워낙 사람들이 많은 덕분에 도망치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았다.
“살았다...!”
“아직 잡힐 순 없어! 더 놀아야 해!”
“그래. 우리가 탑은 다르지만, 이번 만큼은 힘을 합치는 거다.”
‘이렇게까지 비장할 일인가?’
랫포드는 서로 비장한 목소리로 결심을 다지는 친구들을 보며 의아해했다.
평소에 학교에서 시험 볼 때나 이러지...
“마법사 님들이신가 봅니다.”
“!”
골목 안쪽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학생들은 놀랐다.
얼굴까지 푹 가린 긴 로브. 안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종족이나 성별을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기묘했다.
의자에 앉은 이방인 앞에는 오동나무를 깎아 만든 탁자가 하나 있었는데, 그 위에는 처음 보는 기묘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미래를 한 번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
“원시 마법사인가?”
“돌팔이겠지. 무슨.”
제국의 변경 지대에는 아직 제국 마법 체계로 원리를 밝혀내지 못하거나 존재도 모르는 특이한 마법들이 남아 있었다.
그런 마법들을 제국 마법계에서는 원시 마법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이런 곳에서 미래를 봐주겠다고 하는 사람은 원시 예지 마법사보다는 그냥 돌팔이 사기꾼일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크후후... 저를 믿지 못하시는 것도 이해가 갑니다. 그러면 이건 어떻습니까? 저는 돈을 받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맞추지 못한다면? 은화 한 개를 거꾸로 드리겠습니다.”
“오...!”
이한이었다면 ‘세상에 공짜로 저러는 놈들이 더 수상한 놈들이다’하고 말렸겠지만, 학생들은 지금 은화에 잔뜩 목이 마른 상태였다.
바트렉은 가장 먼저 나서며 말했다.
“한 번 해봅시다. 제가 어느 가문 출신입니까?”
“성급하게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자. 여기 위에 손을 올려보십시오.”
마법사, 이아놉은 로브 속에서 눈빛을 번득였다.
지금 이 평범해 보이는 나무 탁자는 여덟 개의 마법이 걸려 있는 비범한 아티팩트였다.
물론 여덟 개의 마법이 걸려 있다고 해서 이 아티팩트가 강력하거나 비싸거나 하진 않았다.
놀랍게도 마법이 여덟 개나 걸린 이 아티팩트는 아무런 효과도 없었던 것이다.
그저 여덟 개의 마법을 서로 정교하게 중첩시켜서 아무런 마법도 걸리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 않게 했을 뿐.
어떻게 보면 ‘그런 능력을 가지고 왜 이런 장난 같은 짓을?’싶었지만, 정말 뛰어난 마법사들은 달랐다.
평범하게 우수한 마법사 수준에서는 탁자 위에 손을 올려도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제국에서 손꼽힐 정도로 비범한 재능을 가진 마법사라면 이 탁자에 마법이 걸려 있다는 사실에 일차로 놀라고,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흔적도 느껴지지 않는 정교함에 이차로 놀라게 되는 것이다.
그랬다.
이 탁자는 안타곤달스가 만든 아티팩트였다.
‘단순한 아티팩트 하나만으로 옥석을 가릴 수 있다니.’
이아놉은 새삼 대마법사의 능력에 감탄했다.
비범하고 뛰어난 마법사라면 이 아티팩트를 깨닫는 순간 호기심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 아티팩트는 누가 만들었는가?
대체 왜 이런 생각으로 만든 것인가?
이걸 만든 마법사는 또 무엇을 더 알고 있는가?
그런 호기심은 천부적인 재능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저주 같은 것이라 저항할 수가 없었다.
“올렸습니다.”
“다 올리셨습니까?”
“예. 올렸는데요?”
이아놉은 로브 속에서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눈앞의 둔한 드워프 놈은 뭐가 뭔지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이아놉은 은화 하나 주고 꺼지게 만들려고 대충 던졌다.
“당신은... 기사 가문 출신이로군요.”
“헉! 어떻게!”
“......”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맞춰보십시오! 혹시 제가 무슨 마법에 소질이 있습니까?”
“......”
이아놉은 다른 학생들을 빨리 확인해보고 싶은데 떠나질 않는 바트렉이 정말로 얄미웠다.
“지금 제가 연금술을 배우고 있는데 연금술에 워낙 뛰어난 학생들이 많아서 고민이 됩니다. 게다가 제가 또 기사 가문이잖습니까. 연금술이 제 길이 맞나 싶으면서도 제 가문이 나름 연금술에 조예가 깊은 가문이라 이걸 또 버리기는 뭐해서... 참. 어렵습니다.”
“...예... 그런데 이게 미래라는 것이 말입니다, 마법사 님. 그렇게 정확하게 맞출 수 있는 게 아니라...”
이아놉의 둘러대는 말이 바트렉에게는 더 신뢰를 준 모양이었다.
원래 사기꾼들은 맞출 수 없는 걸 맞출 수 있다고 하지 않은가!
그 반대인 이아놉은...
“징조! 징조라도 봐주십시오! 제가 뭘 해야 좋을까요?”
‘이런 재능 없는 새끼가 왜 자꾸.’
이아놉은 욕설을 참으며 다시 대충 던졌다.
“...용과 귀족, 대마법사가 보입니다. 이 징조를 따라가십시오.”
“...헉. 워다나즈 아닌가?”
“워다나즈 같은데???”
학생들은 경악해서 수군거렸다.
귀족에 대마법사면 워다나즈밖에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용처럼 마력이 많기도 하고...
“워다나즈를 따라가라고?”
“확실히 미래에 도움이 될 것 같긴 한데...”
“근데 두들겨 맞잖아.”
“너희 거기 있었냐?”
낯익은 목소리에 학생들은 새된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골목 밖에서 이한과 친구들이 솜사탕 하나씩 들고 서있었던 것이다.
“워, 워다나즈...! 제, 제발. 제발 자비를! 제발 자비를!”
‘이놈들 뭐하는 거야?’
이아놉은 어리둥절했다.
보아하니 같은 학생 같은데 무슨 탈주한 죄인이 집행관을 만난 것처럼 벌벌 떨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