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8화
이한은 들고 있던 솜사탕을 내밀었다.
흰 호랑이 탑 학생은 비명을 지르면서 몸을 옆으로 날렸다. 골목이라 피하기 쉽지 않다는 점이 참으로 통탄스러웠다.
‘빌어먹을! 워다나즈 놈. 교묘하구나!’
괜히 1학년 중에서 손꼽히는 전투의 달인이 아니었다.
그들이 가장 취약한 순간을 노리는 완벽한 전술!
...그러나 마법은 날아오지 않았다. 이한과 친구들은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을 미친놈 보듯이 내려다보았다.
“뭐하냐?”
“......”
골목길 진흙 위에서 구른 바트렉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외투에 묻은 흙을 탁탁 털어내고 최대한 품위 있게 말했다.
“...격구 한 판 하고 있었다.”
“여기서?”
“원래 우린 골목길에서 해.”
뒤에 있던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한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수긍했다.
“그, 그래. 알겠다. 골목길에서 격구하는 걸 좋아했군... 이거나 받아라.”
“???”
이한이 내민 솜사탕을 받아든 바트렉은 의아해했다.
“이게 뭐냐?”
“너희 주려고 산 간식?”
“돈이 어디서 나서...? 헉. 훔쳤냐?”
“대체 왜 훔쳤냐는 게 먼저 나오지? 우레걸음 교수님한테 받았는데.”
“!?”
학생들은 훔쳤다는 이야기보다 더 놀랐다.
어떻게?
“허억. 협박했...!”
“아니. 미친놈들아.”
이한은 있었던 일들을 간단하게 설명해줬다.
그 설명을 들은 학생들은 납득...
...하지 않고 속으로 경악했다.
‘뭘 어떻게 설득한 건데...’
‘대체 어떻게 설득한 거지?’
이한이 한 줄로 간단하게 설명한 탓에 학생들은 더욱 더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밖에 없었다.
“어? 잠깐. 그럼 우리는 왜 몰래 나온 거냐?”
“그러게.”
“......”
“......”
학생들은 자괴감에 빠졌다.
특히 옷에 진흙을 묻히고 있는 몇몇은 진흙만큼이나 더 짙은 자괴감에 빠졌다.
“뭐. 이제라도 놀면 되잖아. 너희 몫으로 은화 남겨 놨다.”
툭툭-
옆에서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던 아덴아르트가 바트렉이 받은 솜사탕을 가리켰다.
멍하니 있는 탓에 솜사탕이 녹고 있었던 것이다.
이한은 살짝 놀라서 작게 물었다.
“...바트렉 솜사탕을 다시 내놓으라고요?”
“여, 여기 있습니다.”
바트렉은 아직 얼떨떨한 상황이라 솜사탕을 다시 황녀에게 내밀었다.
아덴아르트는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니!”
“그런데 저 사람은 누구지?”
“아. 진짜 대단한 예지 마법사더라.”
바트렉은 설명하면서 황녀의 눈치를 봤다.
황녀가 둘을 살벌하게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워다나즈하고 탑 내에서 권력 다툼이 있다던데 그게 정말인가?’
“...이런 식으로 내 가문도 맞췄다고.”
“찍은 거 아닌가?”
이한은 의아해했다.
이한이 알기로 저런 방식의 예지 마법은 상당히 난이도가 높고 대가가 컸다.
물론 제국에는 이한이 알지 못하는 체계 밖의 원시, 고대 마법들이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 마법들을 관통하는 원칙이 있지 않은가.
한마디로 남의 가문을 앉은 자리에서 맞힐 정도의 예지 마법을 여기 뒷골목에서 쓰기에는 너무 타산이 맞지 않았다.
“정말 대단하다니까.”
“후... 후후. 못 믿겠으면 한 번 보시면 어떻습니까? 어떤 대가도 받지 않겠습니다.”
이아놉은 마침 잘 됐다 싶었다.
저 재능 없는 드워프 새끼가 자꾸 매달려서 귀찮았는데 화제를 전환할 기회였던 것이다.
게다가 방금 이아놉이 들은 게 맞다면, 저 소년은...
‘워다나즈 가문!’
그 워다나즈 가문이라면 안타곤달스가 원하던 인재가 나올 가능성이 높았다.
이아놉은 흥분되는 심장을 다스리며 불렀다.
“워다나즈. 너도 해봐. 틀리면 은화 한 개를 준대.”
“뭐? 그게 정말인가?”
이한은 깜짝 놀랐다.
혹시 은화를 헛되이 낭비하는 질병에 걸린 사람인가?
“여기 이 친구의 가문을 한 번 맞춰보십시오!”
“워다나즈 가문이잖습니까.”
“세상에...!”
바트렉은 다시 한 번 깜짝 놀랐다.
“...네가 계속 워다나즈라고 불렀잖아...”
“머저리에요?”
요네르와 시아나 사제가 정색하며 물었다. 바트렉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아. 그랬지. 미안하다. 흥분해서.”
“으음.”
그러나 이한은 다른 생각을 하느라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다.
‘모라디 가문이라고 우기고 받아가려고 했는데.’
워다나즈가 이름이고 사실 모라디 가문이라고 우기고 은화를 받아 가볼까 생각했었는데, 친구들이 너무 빠르게 반응한 탓에 기회가 날아간 것이다.
은화를 공짜로 벌 기회가 사라진 이상 이한의 흥미도 빠르게 사라졌다.
“난 됐다. 다들 상점이나 구경하러 가자. 바트렉. 너 옷 한 벌 사야겠다.”
“나 학교에서 갖고 온 옷 있는데.”
“그건 옷이 아니라 꿰맨 누더기야. 내가 살 테니까 갈아입어.”
속 시원하게 할 말 해주는 이한의 말에 흰 호랑이 탑 친구들은 살짝 감동했다.
‘고맙다. 워다나즈.’
‘바트렉의 걸레조각을 치워줘서...!’
물론 이아놉은 당황했다.
“잠시만...! 미래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제 미래야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이한은 냉정했다.
에인로가드를 남들보다 조금 힘들게 졸업하는 대신 졸업 후 인맥과 뛰어난 사업 감각으로 자산을 수십 배로 부풀린 다음 제국 신흥 사업가로 명성을 날려 평생을 놀고먹고 사는 것이다.
그러다가 심심하면 해골 교장 찾아가서 금화를 낯짝에 던져주기도 하고.
너무나도 명확한 미래였다.
“그보다 그 탁자 좀 관리 잘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귀퉁이 쪽이 떨어지면 안에 걸린 마법진도 흔들릴 겁니다.”
“어? 마법 탁자였냐?”
“응.”
“전혀 몰랐는데...!? 정말로?!”
“아무 효과도 없는 쓸데없는 아티팩트야. 심심한 사람이 만들었겠지.”
이한은 친구들을 데리고 골목길을 빠져나갔다.
이아놉은 너무나도 커다란 충격을 받아서 대답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그 뒷모습만 지켜보았다.
‘방금...?’
탁자에 손도 대지 않고 저 먼 거리에서 숨겨진 비밀을 알아차렸단 말인가?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믿기지 않았지만, 더 충격적인 건 그 뒤에 보인 반응이었다.
저 시니컬한 반응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아놉은 안타곤달스에게 이 탁자의 비밀을 듣고 마법진의 구조를 정확히 느꼈을 때, 너무나도 아름답고 완벽한 마법의 현현에 눈도 감지 못하고 뚫어져라 쳐다보기만 했었다.
그 후 반 년 넘게 식사도, 수면도 걸러가면서 이 탁자만을 껴안고 그 안을 탐구했었고.
그런데 저 소년은 멀리서 한 번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구조를 파악했는데 어째서 저런 반응을 보인단 말인가?!
‘대체 왜? 이게 궁금하지 않나? 어째서 이게 궁금하지 않지?!’
안타곤달스가 말한 인재를 찾은 것 같았지만, 동시에 그 인재가 보여주는 모습이 이해가 가지 않아 이아놉은 본능적으로 소름이 돋았다.
먼 옛날, 자신의 수준으로 감히 따라갈 수 없는 마법사들을 봤을 때 느꼈던 소름이었다.
“마법사 님. 마법사 님. 부탁드린 걸 찾아왔습니다.”
일을 맡긴 용병들이 이아놉에게 달려왔다.
“학생 중에 유명한 학생이 있다고 하더군요. 제국의 명문가 출신인데, 벌써부터 실력이 아주 대단해서...”
“워다나즈 가문 출신인가?”
“맞습니다! 과연 마법사 님께서는 모든 걸 꿰뚫어보시는군요!”
살벌하고 흉악한 분위기를 뿜어내는 용병들이었지만, 마법사 앞에서는 감히 책잡힐까 두려워 공손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들은 이아놉이 자리에 앉아서 천 리 밖의 일을 꿰뚫어보는 것 같은 신비함에 전율했다.
“이 책을... 이 책을 그 소년에게 어떻게든 전달해라.”
“......”
용병들은 침묵했다.
항구 주변에 머무르며 온갖 거친 일들을 가리지 않고 하는 용병들이었지만, 그들도 두려워하는 건 있었다.
마법사들과 엮이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하물며 그게 에인로가드 출신의 마법사라면 더더욱.
이아놉은 한 명을 비쩍 말라죽게 만들어서 위압할까 생각했지만, 곧 마음을 바꿔먹었다.
지금은 채찍을 휘두를 때가 아니었다.
‘괜히 겁을 줬다가는 도망칠 수 있겠지.’
“봐라. 이 책은 아무런 마법도 걸려있지 않다. 순수한 마도서란 말이다.”
“저희는 까막눈이라 그런 걸 봐도 모릅니다...”
“넘겼다가 마법사들한테 들키기라도 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주변에 깔린 상인에게 부탁하거나 하인에게 넘기거나 해라. 설마 제국의 마법사들이 그들을 고문하기라도 하겠느냐?”
이아놉의 목소리에 슬슬 나지막한 위협이 깔렸다.
그 위협을 느낀 용병들은 허겁지겁 고개를 끄덕이고 마도서를 거친 가죽 외투 속에 찔러 넣었다.
“알, 알겠습니다.”
“어떻게든 전달해보겠습니다.”
“해내는 놈에게는 금화를 주마.”
“...!”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용병들의 눈빛이 그제야 탐욕스럽게 번뜩였다.
그게 불만스러웠지만, 이아놉은 일단은 용병들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아직 더 쓸 구석이 있는 놈들이지.’
지금 용병들에게 건낸 마도서는 안타곤달스가 쓴 마도서였다.
두께가 얇고 내용이 많진 않았다. 마법 하나에 대해서만 기록한 책이었으니.
그러나 그 마법 하나는 안타곤달스가 직접 개발한 마법이었다. 이 마도서 또한 이아놉에게 어마어마한 충격을 주었었다.
이런 가볍고 얇은 책 하나에 담겨 있는 지혜가 이럴진데, 안타곤달스 본인의 지혜는 대체 어떨 것인가?
그 지혜의 한 방울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이아놉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다.
‘놈도 분명 읽으면... 솔깃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에인로가드의 마법과는 다른 패도적이고 살벌한 마법.
오만한 천재라면 분명히 흥미를 느끼리라.
* * *
학생들이 벽돌로 된 카페의 2층 테라스에 앉아 초콜렛 케이크와 커피를 즐기고 있는 동안, 이한은 호기심을 풀기 위해 닐리아에게 질문을 던졌다.
“닐리아. 그림자 순찰대 사냥꾼들은...”
“어?! 왜?! 뭔데?! 혹시 실수했어?! 역시 실수한 거지?!”
“...아니... 그냥 궁금해서. 사냥감들을 쫓는데 규칙 같은 게 있나? 절대 놓치면 안 된다거나.”
“그런 게 있진 않은데, 아무래도 자기 사냥감은 절대 놓치지 않는 편이긴 해.”
닐리아는 케이크를 한 입 먹고 인상을 찡그렸다.
산맥에서 거칠고 쓴 음식에 익숙한 닐리아에게 이 케이크는 지나치게 달았다.
“안 맞으면 안 먹어도 되는데?”
“아, 아닌데? 나 단 거 완전히 잘 먹는데? 품위 있는 제국 시민인데?”
“......”
이한은 바트렉이 다른 간식에 정신 팔린 사이 바트렉이 시켜놓은 티라미수를 슬쩍 뺏은 다음 닐리아 앞에 내려놓았다.
아직 눈치 못 챈 닐리아는 말을 이었다.
“놓치면 눈치가 좀 보이거든. 사냥꾼으로서 자존심이란 게...”
“그렇군.”
흔히들 흉폭한 몬스터들이 자존심이 강해서 자기 사냥감을 절대 놓치지 않고 쫓아온다는 말들이 있었지만, 그림자 순찰대는 그런 말을 들으면 코웃음을 쳤다.
그렇게 따지면 산맥에서 가장 자존심이 강하고 집요한 이들은 그들이었으니까!
한 번 잡겠다고 산맥에 선언한 이상 사냥꾼들은 절대 그 상대를 놓치지 않았다.
어떤 사냥꾼들은 이십 년이 지났는데도 초소에 돌아오지 않고 산맥에서 버티며 사냥감을 찾고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자꾸 몬스터만 보면 눈이 돌아갔나?’
이한은 다음에 그림자 순찰대 사냥꾼들을 만나면 조금 더 잘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괜히 원수로 찍히면 평생 귀찮아지지 않겠는가.
“마법사 님!”
“커헉.”
이한은 마시던 커피를 뿜을 뻔했다.
뒤쪽에 나있는 카페 계단이 아니라 테라스 아래쪽에서 그림자 순찰대 사냥꾼이 점프해서 올라온 것이다.
닐리아는 어찌나 창피했는지 테이블 밑으로 재빨리 들어가서 몸을 망토로 가렸다.
“무, 무슨 일이십니까?”
“씨 서펜트를 잡으려고 하는데 도움이 필요합니다. 도와주실 수 있으십니까?”
“...혹시 우레걸음 교수님이 말해주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