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9화
“예?”
사냥꾼들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이한을 쳐다보았다.
이한은 재빠르게 말을 바꿨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씨 서펜트라니. 무슨 일이십니까?”
그림자 순찰대 사냥꾼들은 있었던 일들을 설명했다.
우레걸음 교수 일행이 씨 서펜트의 흔적을 찾은 다음부터, 선원들과 그림자 순찰대 사냥꾼들은 씨 서펜트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이런 대형 몬스터들은 한 번 잘못 움직이면 도시에 커다란 피해를 입혔던 것이다.
만약 항구로 가까이 다가온다면 접근하기 전에 잡아야했다. 항구 근처에서 난동이라도 피운다면 배 수십 척이...
“그런데 놈이 가까이 오는 것 같더군요.”
“젠장.”
“예?”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접근은 확실해진 겁니까?”
이한은 한숨이 나오는 걸 참아야 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볼라디 교수를 부르고 항구에 알려서 사람들을 대피시킨 다음 도시 경비대를 소집해야 했다.
다른 것들은 괜찮지만 볼라디 교수는 정말 부르고 싶지 않았다.
“아직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움직임을 조금 더 봐야 알 것 같은데...”
“그래도 대비는 해야 하니 말입니다.”
뛰어난 사냥꾼은 사냥을 시작하기 전에 모든 사냥을 끝내놓는 법이었다.
그림자 순찰대 사냥꾼들도 당연히 씨 서펜트가 올 때를 대비해 완벽한 준비를 해놓을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마법 좀 걸어주십쇼.”
“...저 말고 도시의 다른 마법사들한테 받는 게 더 좋을 텐데...”
씨 서펜트 관련 대비라면 도시에 있는 다른 마법사들도 무조건적으로 협조할 터.
물론 그림자 순찰대는 이한의 말을 듣지 않았다.
“예. 예. 다른 마법사들의 마법이 더 좋다고요?”
“알겠습니다. 마법사 님. 마법 좀 걸어주십쇼.”
“...진짠데...”
이한은 억울했지만 그림자 순찰대 사냥꾼들을 설득하지 못했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마법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잘 봐, 이 마법은 효과가 더 좋고 시전도 쉽지만 더 안 좋은 마법이야’라고 말해봤자 ‘마법사들은 모두 미친놈인가?’같은 반응밖에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그림자 순찰대 사냥꾼들은 이한이 갖고 온 장비에 마법을 걸어주자 다시 테라스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들을 배웅하고 나서 이한은 문득 생각이 들었다.
‘계단으로 내려가도 되지 않나?’
아래를 내려다보니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림자 순찰대 사냥꾼들의 기행에 별 관심이 없어보였다.
이한은 이 항구도시의 사람들에게 조금 존경심이 생겼다.
‘얼마나 이상한 일이 많이 일어나면...’
“갔어?”
“응. 나와.”
닐리아가 테이블 밑에서 기어 나왔다.
“대체 왜 계단을 안 쓰고...”
“일이 급해서 어쩔 수 없었을 거야. 닐리아. 그림자 순찰대 사냥꾼 분들도 도시의 안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니까.”
“그, 그래?”
이한도 물론 ‘왜 계단을 안 쓰고?’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원래 친구가 수치스러워 할 때에는 먼저 나서야 하는 법이었다.
닐리아는 이한의 말에 솔깃했는지 살짝 가만히 있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그거랑 계단 안 쓰는 게 무슨 상ㄱ...”
“앗. 빵 나왔다.”
이한은 점원이 갖고 온 브리오슈를 직접 받으며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워다나즈.”
“?”
황녀가 이한에게 조용히 말을 걸자 이한은 왜 이러나 싶었다.
“아. 이거 드시겠습니까?”
“...잠시 이야기 좀 하죠.”
아덴아르트는 이번 기회에 제대로 오해를 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대체 왜 워다나즈가 이런 오해를 하고 있나 생각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가이난도 때문이 분명했다.
워다나즈와 친하게 어울리는 황족이 가이난도인 만큼, 워다나즈 입장에서는 ‘황족은 다 먹을 것에 집착하나’하는 오해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덴아르트는 최선을 다해 조용히 설명했다.
가이난도는 음식을 좋아하지만 자신은 그러지 않는다.
무언가 오해가 있는 것 같다.
그러니 앞으로는 오해를 풀어줬으면 좋겠다!
“아... 이거 죄송합니다.”
‘딱히 가이난도 때문은 아니었는데.’
이한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말하진 않았다.
황녀의 권력이 두려웠던 것이다.
“죄, 죄송할 것까지는 없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먹을 거 나와도 부르지 말...”
“......”
아덴아르트는 ‘그건 싫은데’와 ‘하지만 지금 싫다고 말하면 가이난도 같지 않은가?’사이의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이한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녀님. 제 생각에 오해를 하고 계신 건 황녀님이십니다.”
“예?”
아덴아르트는 눈을 크게 떴다.
워다나즈의 말이 예상 밖이었던 것이다.
“저는 기본적으로 먹을 게 있으면 다른 친구들을 다 부릅니다. 에인로가드에서 다들 배가 고프지 않습니까. 전 황녀님이 특별히 먹을 것에 집착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하진 않았...”
먹을 걸 좋아한다고 말했지 집착까지는 안 말했는데...
“아마 가이난도 때문에 오해를 하신 것 같습니다. 가이난도는 좀 집착이 있지 않습니까.”
그...
그런가?
아덴아르트는 갑자기 혼란에 빠졌다.
워다나즈는 정말 평범하게 다른 친구 챙겨주듯 챙겨줬는데, 정작 아덴아르트는 괜히 가이난도 때문에 눈치를 본 것일까?
“...미안합니다. 워다나즈.”
“하하. 아닙니다.”
‘후후. 쉽군.’
이한은 속으로 승리감을 맛봤다.
이제까지 만난 황족들 상대로 한 번도 설득에서 패배한 적 없는 만큼 자신감이 생길 정도였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옆에서 걸어오는 점원이 든 쟁반을 보고 이한은 말을 걸었다.
올리브 오일을 뿌린 바게트 사이에 얇게 자른 살라미 소시지와 치즈, 양상추 등을 넣고 먹음직스럽게 구운 파니니 샌드위치였다.
“오. 이건 저쪽에 주도록. 여긴 이미 충분히 먹었으니.”
이한의 지시에 점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아덴아르트 앞에 쟁반을 내려놓았다.
아덴아르트는 자신 앞에 있는 빈 케이크 접시 숫자와 워다나즈 앞에 있는 빈 케이크 접시 숫자를 비교해봤다.
아무리 봐도 워다나즈가 먹은 양이 적었다.
...그러면 워다나즈가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왜 나한테?’
아덴아르트가 의혹과 의심이 섞인 눈빛으로 이한을 빤히 쳐다보는 사이,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기대 섞인 얼굴로 이한에게 말을 걸어왔다.
“워다나즈. 그. 우린 널 응원한다.”
“맞아! 핏줄보다 강한 게 능력이지!”
“워다나즈는 근데 핏줄도...”
“뭔 개소리냐?”
이한은 커피 잔을 들고서 의아해했다.
“어. 황녀님하고 싸운 거 아니야?”
“네가 뭔데 지시를 내리냐고...”
“...진짜 뭔 개소리냐?”
이한의 반응에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한층 더 확신했다.
‘저렇게 시치미를 떼는 걸 보니 싸운 게 확실하군.’
‘푸른 용의 탑 놈들 사이에서 내전 터지는 거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고민이 됐다.
원래라면 ‘하하 푸른 용의 탑 놈들 서로 죽여라!’했겠지만, 최근 워다나즈 놈한테 받은 게 워낙 많다보니 조금 마음이 끌렸던 것이다.
‘아무리 황족이어도 역시 워다나즈한테 받은 게...’
“커피 잔으로 맞을래?”
“...아, 아니. 그냥 물어본 거잖아.”
이한이 커피 잔을 들고 물어보자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속으로 욕했다.
기껏 응원해줬는데!
“저. 마법사 님.”
“?”
“혹시 이 책을 한 번 봐주실 수 있으십니까?”
점원이 이한에게 낡은 서적을 내밀었다.
표지도, 제목도 없는 기묘한 책이었다.
이한은 받자마자 확인부터 들어갔다.
‘별다른 마법은 없군. 아니. 혹시 모르니까.’
“잠깐. 움직이지 마라. 떠올라라, 감정이여!”
그것도 모자라 이한은 점원에게 <오고닌의 감정 인지>를 사용했다.
점원은 당혹스러워하며 말했다.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혹시 해골 대마법사와 관련된 적이 있나? 리치 대마법사, 해골 대마법사, 에인로가드의 주인 등등?”
“무슨 소린지...”
‘음. 아무 관계도 없군.’
이한은 혹시 점원이 해골 교장에게 의뢰를 받고 책을 내밀었나 싶었다.
해골 교장 성격에 밖에 나온 학생들을 괴롭히려고 준비했을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아닌 모양이었다.
“이 책은 왜?”
“손님이 너무 어려운 책이라 마법사 님에게 무슨 책인지 물어보고 싶다고 하십니다.”
“어떤 사람이지? 불러오도록.”
점원은 아래로 내려갔다가 다시 당황한 얼굴로 돌아왔다.
“손님이 안 보이시는데 잠깐 어디 가신 게 아닐까요? 어... 마법사 님. 폐가 된다면 봐주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저도 열어봤는데 별 거 없어서...”
‘겁이 없군.’
아무리 마법이 없는지 확인했다지만 저렇게 멋대로 열어보는 건 좋은 습관이 아니었다.
“혹시 예언이라도 적혀 있나?”
옆에서 바트렉이 신기해하며 책을 펼쳤다.
“......”
딱!
“악! 왜?!”
“넌 길가에 떨어져 있는 음식이 보이면 무조건 주워 먹냐?”
“이씨...”
바트렉이 억울해하는 사이 점원이 다시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 손님께서 마법사 님에게 부탁을 드리려고 남긴 돈이 있는데, 그냥 돌려드릴까요?”
“아니. 탐구심은 마법사가 마땅히 가져야 할 덕목이지.”
이한은 바로 책을 잡았다.
<진정한 마법의 비의란 어디에 있는가?>
재능 있는 마법사라면 제국의 마법 체계에 숨막히는 듯한 답답함을 느낀 적이 있을 것이다.
‘음. 난 재능이 없나보군. 느낀 적 없는데.’
에인로가드 교수들한테서는 많이 느끼긴 했는데, 이건 안 쳐주나?
제국의 마법 체계는 멍청한 마법사들도 비명횡사하지 않도록 도와줬지만, 그 대신 장막 너머의 온갖 위대한 마법에 접할 기회를 잃어버리게 만들었다. 더욱 강력한 마법을 찾기 위해서 우리는 체계 밖으로 나가 장막 너머의...
“쓰레기 책이잖나.”
이한은 어이없어하며 점원에게 책을 돌려주었다.
“손님 돌아오면 쓰레기 책이니까 믿지 말라고 하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아마 저 책을 쓴 마법사는 ‘안전수칙’이라는 게 뭔지도 모를 것이다.
안전수칙 때문에 마법을 못 배운다고 징징대다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개소리란 말인가?
‘차라리 볼라디 교수의 혈마법 책이 낫겠군.’
마법사의 피를 시약으로 사용해서 마력을 증폭하자는 과격한 이론서를 쓴 볼라디 교수도 안전수칙부터 시작했는데!
저 책을 쓴 마법사는 볼라디 교수 이하였다.
“예. 마법사 님의 시간을 뺏어서 죄송합니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 * *
“...이렇게 말했습니다.”
“개소리 하지 마라!”
이아놉은 평소 용병들 앞에서 보여주던 신비롭고 위험한 태도를 벗어던지고 살벌하게 으르렁댔다.
용병은 갑자기 옷깃이 자신의 목을 조르는 감각에 비명을 질렀다.
“정... 정말로... 정말입니다!”
“그걸 읽고 쓰레기 책이라고 말할 수 있는 마법사는 없다! 그게 누가 쓴 책인지는 알고서 하는 소리냐!”
용병의 얼굴이 납빛으로 변하고 나서야 이아놉은 정신이 돌아왔다.
생각해보니 용병이 거짓말을 할 리가 없었던 것이다.
“한 글자도 빼먹지 말고 똑바로 말해라! 말하란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성질을 낸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분노를 다 터뜨린 이아놉은 막막한 절망감에 빠져들었다.
원래 범재는 천재를 이해하기 쉽지 않다는 걸 잘 알았지만, 오늘은 그게 특히 뼛속 깊숙이 사무쳤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래도...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다.’
여기까지 온 이상 안타곤달스의 지혜를 떠나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대체 저 소년은 뭘 보고 있기에 이아놉이 쌓아 올린 마법을 저리 하찮게 여긴단 말인가?
‘하지만 여기서 더 접근하면 수상하게 느낄 수 있다. 호감을 사기 전에 수상함을 느끼면 에인로가드의 교수들이 막아설 거고...’
생각만 해도 등골이 서늘했다.
“이아놉 님!”
“뭐지?”
다른 용병이 찾아왔다.
“지금 항구에서 잠시 나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씨 서펜트가 접근하고 있다고 합니다. 시 경비대와 인근 모험가들이 전부 여기로 집결 중입니다.”
“귀찮게 무슨... 잠깐.”
이아놉은 문득 생각이 떠올랐다.
씨 서펜트 토벌이라면 분명히 에인로가드의 마법사들이 참여할 것 아닌가.
아직 어린 마법사라면 힘에 대한 갈증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 때 자신이 모르는 미지의 마법에 대해 목격한다면?
“나도 참가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