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0화
“예...?”
용병들은 오늘 느꼈던 것 중 가장 큰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토벌에 참가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었다.
시 경비대와 모험가들뿐만 아니라, 인근 길드들도 자경단으로서 참가하는 만큼 항구는 혼잡스러울 터.
거기에 수상쩍은 패거리 몇 명 낀다고 눈에 띄지도 않았다.
하지만...
‘설마 또 에인로가드의 마법사들에게 접근하려는 건가?’
‘괜히 벌집을 건드렸다가는...’
이아놉 같은 마법사가 순수한 선의로, 도시를 위해 토벌에 참가할 리가 없었다.
당연히 에인로가드의 마법사들에게 접근하려는 속셈이 분명했다.
치이익!
살이 타는 듯한 섬뜩한 소리와 함께 자리에 있는 용병들의 목에 기묘한 문양으로 된 줄이 생겨났다.
갑자기 목이 졸리는 느낌에 용병들은 꺽꺽 소리를 냈다.
“마... 마법사 님...”
“마법사 님, 살려주십시오! 저, 저희는 충성을 다했습니다!”
“그래야지. 나도 당연히 너희들을 믿는다.”
이아놉은 지팡이를 휘둘러 용병들의 목에 밧줄을 걸었다.
이제 슬슬 용병들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황인 만큼 제대로 주의를 기울여야했다.
“커헉... 위대한 흑마법을 몰라뵈서 죄송합니다... 살려주십시오!”
“......”
이아놉은 이 아름다운 부여 마법을 흑마법으로 알아보는 용병 놈들에게 순간 짜증이 났지만 참았다.
지금은 오로지 에인로가드에서 온 원석에게 집중해야 할 때였으니까.
* * *
“이 깃펜 괜찮은 것 같지 않냐, 워다나즈?”
“흠... 그런데 좀 비싼 것 같은데.”
“그, 그래도 예쁘잖아. 에인로가드에서 거위 깃털 구해서 깃펜 만드는 거 질리지 않아?”
“좀 깎아달라고 해야겠다.”
“...진짜? 정말로?”
아산은 경악한 얼굴로 속삭였다. 그러나 이한은 진지했다.
“안녕하십니까. 제가 봤는데 옆 가게에서는...”
“......”
아산은 이한이 서리거인의 왕을 쓰러뜨렸을 때나 달카드 가문의 형제자매들 앞에서 능력을 보여줬을 때보다 지금이 더 존경스러웠다.
그러나 학생들의 즐거운 시장 구경은 거기까지였다.
그림자 순찰대 사냥꾼들이 다시 찾아온 것이다.
이한은 그 모습을 보고 한숨을 푹 쉬었다.
이들이 지금 다시 돌아올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던 것이다.
“씨 서펜트가 확실히 접근하고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이한은 정말 가기 싫지만 볼라디 교수한테 가서 말할 준비를 했다.
이렇게 된 이상 도시 전체 단위로 대비를 해야 했으니까.
“...미안.”
닐리아가 매우 미안한 얼굴로 사과했다.
평소에는 보기 드문 모습이었다.
“네 잘못이 아니라 그냥 씨 서펜트 잘못이지... 애들아! 다 모여라! 그만 놀고 저택으로 갈 시간이다! 살 거 있으면 빨리 사라!”
이한은 그렇게 외치고 깃펜 가게 상인에게 슬쩍 물었다.
“혹시 항구에 접근하는 씨 서펜트 잡으면 할인 같은 건 없습니까?”
“......”
“......”
닐리아는 그냥 먼저 갈까 살짝 고민했다.
그러는 사이 친구들은 각자 하나씩 짐꾸러미를 팔 사이에 끼워 넣은 채 모였다.
새로운 소형 청동 솥(에인로가드에서 쓰는 것보다 훨씬 두꺼워서 독한 재료도 들어갈 수 있었다)을 챙긴 요네르, 약간 피가 묻은 락픽 장비를 싸게 샀다고 흐뭇해하는 랫포드, 골절 치유 연고를 샀는데 이게 효과가 있는 건지 모르겠다고 투덜대는 바트렉...
아덴아르트는 살짝 당황했다.
다들 뭘 하나씩 산 것이다.
그걸 눈치 챈 이한이 친절하게 말해줬다.
“안 사도 됩니다. 황녀님. 여기 닐리아도 안 샀어요.”
“...!”
닐리아는 슬쩍 눈치를 보더니 아까 읽어보려고 구매한 <황무지 별잡이, 그들은 제국의 파수꾼이다!> 책을 품속 깊숙이 집어넣었다.
“맞, 맞아. 여기까지 와서 뭘 사려는 게 더 촌스러운 거지. 안 그래?”
“촌스럽지는 않고... 다 모였으면 가자.”
저택으로 돌아가자 마침 볼라디 교수도 반대쪽에서 돌아오는 게 보였다.
이한은 인사하며 물었다.
“교수님께서는 어딜 다녀오셨습니까?”
“쓸만한 걸 찾으러.”
볼라디 교수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교수는 짧게 대답했지만 듣는 이한은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펼쳐야했다.
‘뭐에 쓸만한 걸 말하는 거지? 설마 내가 2학기 때 상대해야 할 새로운 상대를 찾아다니신 건가? 혹시 뒷골목에서 웬 범죄자라도 하나 납치하신 건 아니겠지?’
모두 다 볼라디 교수에게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 더 무서웠다.
왠지 모르게 볼라디 교수의 외투에 피가 좀 묻어있는 거 같기도 하고...
“참. 교수님.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뭐지?”
“그... 씨 서펜트가 오고 있다고 합니다.”
이한은 그림자 순찰대 사냥꾼들이 물어온 정보를 최대한 섬세하게 설명했다.
괜히 볼라디 교수한테 ‘일부러 나한테 말하지 않은 건가?’같은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
“씨 서펜트가?”
“예.”
화강암처럼 단단하게 굳어 있던 볼라디 교수의 안면근육이 아주 살짝 풀어졌다.
이한은 볼라디 교수가 지금 흐뭇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아니. 교수님. 제가 지금 씨 서펜트를 같이 잡으러 가자고 말씀드리는 게 아니라 이게 절차상으로...”
항구에 대형 몬스터가 오면 일단 항구에 있는 사람들한테 알리고, 도시에서 참가할 수 있는 이들에게도 알리는 게 절차 아니겠는가.
당연히 볼라디 교수한테도 말하는 게 절차였다.
그런데 그걸 ‘씨 서펜트 잡으러 가자고 찾아오다니 기특한 제자 녀석 같으니’로 해석하면 이한이 매우 곤란했다.
“그렇겠지.”
‘이해 못한 것 같은데 이 사람.’
“씨 서펜트가 결국 접근하고 있다고?”
소식을 전해들은 우레걸음 교수가 인상을 찌푸리며 걸어 나왔다.
“밤에 고생 좀 하겠군.”
“교수님. 여기 지갑입니다.”
“오. 고맙다.”
우레걸음 교수는 이한이 지갑을 돌려주자 별 생각 없이 받아들었다.
지갑은 텅 비어있었다.
“......”
이런 알뜰한 자식!
“일 다 끝냈는데 몬스터 놈이 눈치가 없군.”
“그러게 말입니다.”
메이킨 가문에서 나온 사람들도 혀를 찼다.
차라리 협상이 다 해결되기 전에 나왔다면 이걸로 뭐라도 했을 텐데, 협상도 깔끔하게 끝낸 이상 씨 서펜트 사냥은 귀찮은 잔업에 가까웠다.
“좋게 생각합시다. 씨 서펜트 놈들은 언제나 쓸만한 것들을 내놨으니까... 교수님들께서 고생 좀 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우레걸음 교수의 말에 교수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씨 서펜트 같은 대형 몬스터가 나타난 이상, 교수로서 가장 전면에 나서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너희들은 후방에서 대기해라. 위험한 일은 없겠지만 긴장을 풀지는 마라. 언제 너희들의 도움이 필요할지 모르니까.”
학생들이 에인로가드 내에서나 1학년이었지, 밖에서는 제국의 적통을 제대로 잇고 있는 마법사였다.
밖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마법사들의 들쭉날쭉하고 불안정한 실력을 생각해봤을 때 에인로가드의 학생들이라면 충분히 대우를 받고도 남았다.
“예!”
학생들은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에인로가드에서 온갖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지만 이렇게 밖에서 겪는 일은 또 느낌이 달랐다.
이한은 친구들과 같이 움직이려고 했다.
그러자 우레걸음 교수가 뭐하냐는 듯이 이한을 쳐다보았다.
“어디 가냐?”
“예? 후방에서 대기하시라고...”
“아아!”
우레걸음 교수가 까먹었다는 듯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당연히 넌 아니지!”
번개걸음 교수도 같이 박장대소했다.
“네가 왜 후방으로 가냐!”
“......”
드워프 교수들의 웃음에 메이킨 가문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당황했다.
이한도 별로 웃기지 않았다.
‘드워프들 짜증나.’
* * *
“빛이여!”
이한은 지팡이를 휘둘렀다.
타오르는 듯한 빛의 구체가 떠올랐다.
교수들이 박장대소하긴 했지만 그게 완전히 이유가 없지는 않았다.
이런 대형 몬스터를 급하게 대비해야 하는 상황에서 이한 같은 무한에 가까운 마력원을 뒤로 뺄 리가 없었던 것이다.
이한이 가장 먼저 착수에 나선 건 광원 준비였다.
벌써 해가 저 멀리 수평선 너머로 넘어가고, 항구에는 어둠이 밀려오고 있었다.
어두운 상황에서 난전이 벌어지면 몬스터에게 유리한 만큼 당연히 빛을 준비해야 했다.
도시 사람들도 마법사들이 온 만큼 ‘마법으로 어떻게든 해결이 되지 않을까?’하고 기대하긴 했지만...
이건...
“...이게 대체?”
“혹시 내가 시간을 착각한 건가?”
급히 달려온 시 경비대 병사들은 휘황찬란한 항구의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불빛이 있길 원했지만 이건 밝아도 너무 밝지 않은가.
이래도...
이래도 되나??
“원, 원래 마법이 이런 것도 되는 건가?”
“에인로가드의 마법사들이니까...”
그러나 ‘에인로가드의 마법사들이니까 가능한 거 아닐까’라고 말한 병사의 목소리에도 자신감이 없었다.
솔직히 여전히 얼떨떨했던 것이다.
“빛이여, 빛이여, 빛이여, 빛이여, 빛이여...”
이한은 쉬지 않고 항구를 돌며 빛의 구체를 전부 띄워버렸다.
활을 들고 대기하고 있던 모험가들은 어안이 벙벙해져서 수군거렸다.
“학생... 학생 아닌가?”
“에인로가드는 학생이어도 저 정도 마법을 쓸 수 있는 거야? 아니, 저번에 파티에 참가했던 마법사는 랜턴만한 불빛 하나 만들면서도 더럽게 불평했는데...”
항구 사람들에게 매우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채 이한은 돌고 돌고 돌았다.
마력이야 넘쳐났지만 항구가 워낙 넓은 탓에 일일이 빛의 구체를 설치하는 게 고생이었다.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더니.’
이한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해골 교장이 왜 마법 배우라고 그렇게 사람을 닦달하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더 고위 마법만 쓸 줄 알았다면 손가락 한 번 튕겨서 이 주변을 전부 다 빛으로 채워버렸을 텐데!
“다 했습니다.”
“고생했다.”
“그럼 장비에 부여 마법 걸겠습니다.”
“...그, 그래.”
우레걸음 교수는 ‘좀 쉬어라’라고 말하려다가 당황했다.
이한은 교수의 속마음을 눈치 채지 못하고 바로 다음 일을 하러 출발했다.
그림자 순찰대 사냥꾼들이야 아까 받았다지만 지금 항구에는 마법이 걸리지 않은 활과 쇠뇌를 든 이들이 많고 많았다.
거기에 설치된 발리스타나 그런 걸 생각해보면...
“어, 좀 쉬어야 하지 않을까요?”
메이킨 가문에서 나온 사람들이 주저하며 말을 걸었다.
에인로가드의 교수가 있는 자리에서 교육방침에 말을 얹는 건 꽤 무례한 행동처럼 보일 수 있어서 조심했지만, 이번 일은 말을 참기가 쉽지 않았다.
우레걸음 교수는 외부인들의 눈치를 슬쩍 보다가 변명했다.
“워다나즈에게 이 정도 일은 그냥 산책 비슷한 일입니다.”
“...예?”
메이킨 가문 사람들은 항구 곳곳에 뜬 빛의 구체를 쳐다보며 황당해했다.
그게 뭔 개소리...
그러나 우레걸음 교수는 당당하고 뻔뻔했다. 한 번 밀어붙인 이상 끝까지 거짓말을 유지하려고 했다.
“오히려 쉬라고 하는 게 워다나즈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입니다. 절대 언급하지 말아주십시오.”
“아하...”
“과연.”
이한이 들었다면 우레걸음 교수를 등 뒤에서 발로 차 바다로 빠뜨렸을 테지만, 이한은 지금 경비대 병사들의 장비에 마법을 걸어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메이킨 가문의 사람들은 방금 들은 말에 새삼 감탄했다.
괜히 워다나즈 가문 출신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긴 저런 성격이니 요아넨 님께서 마음에 들어 하신 거겠지.’
메이킨 가문 사람들은 뛰어난 능력을 가진 요아넨을 존경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요아넨의 단점까지 눈치채지 못하지는 않았다.
요아넨은 객관적으로 보면 미친 일중독자가 맞았다.
그런 사람한테 ‘정말 마음에 들었다 졸업하면 공방에 초대하고 싶다’란 말을 듣는 건, 능력적으로면 몰라도 인격적으로는 좀 위험한 신호였다.
상대방도 좀 일에 미쳤을 가능성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