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1화
“워다나즈 가문 분들은 다들 좀 놀라운 부분이 있긴 하지요.”
“다들 독특하시고 말입니다.”
메이킨 가문 사람들이 알아서 납득해주자 우레걸음 교수는 좀 미안해졌다.
일 좀 편하게 하려고 거짓말을 했지만, 제자가 미친 일중독자로 오해받는 걸 보는 것도 마음이 편한 일은 아니었다.
“워다나즈가 다른 가문의 사람들처럼 막 마법에 미쳐 있ㅈ...”
“1학년 때 들을 수 있는 모든 학파 마법을 동시에 수강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정말로 놀라운 일이에요.”
“...죠. 아주 마법에 미친 녀석입니다.”
우레걸음 교수는 빠르게 변명을 포기하고 말을 돌렸다.
‘이건 자업자득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걸 다 들은 건 자업자득이 맞았다.
* * *
“놈이 온다!”
대낮같이 밝은 항구 저편에서 파도가 출렁이며 거대한 촉수가 꿈틀거렸다.
쾌속선을 타고 나가있던 그림자 순찰대 사냥꾼들은 손가락을 깨물어 화살에 피를 바르더니 날카롭게 씨 서펜트를 겨냥했다.
“그림자 속에서 추적을 시작한 당신의 종복이 이제는 사냥을 개시하려 합니다. 산맥의 주인께서는 부디 저희를 어여삐 여기소서.”
그림자 순찰대 사냥꾼들은 짧게 맹세를 하며 전의를 끌어올렸다.
화살 한 방으로 쉽게 잡을 수 있는 상대에게는 이런 맹세가 필요 없었지만, 사냥꾼들의 본능이 경고하는 강적에게는 이런 맹세가 전투를 알리는 효시(嚆矢) 역할을 하곤 했다.
순찰대의 피가 묻은 화살은 절대 풀리지 않는 저주처럼 부러지지도, 꺾이지도 않았다.
사냥감의 몸에 깊숙이 꽂혀 기나긴 사냥이 끝날 때까지 상징처럼 남아있는 것이다.
퍽!
“......”
“......”
마법으로 강화된 활대와 화살.
거기에 물약과 추가 마법으로 강화된 그림자 순찰대원의 근력.
씨 서펜트의 두껍고 질긴 가죽을 뚫기 위해 온몸의 마력을 끌어올려서 집중한 각오까지.
그 모든 것들이 합쳐져서 씨 서펜트의 육중한 몸통을 그대로 관통해버렸다.
비현실적으로 터지며 잘려나가는 씨 서펜트의 촉수를 본 사냥꾼들은 오랜만에 당황했다.
“저... 저게 왜 안 꽂히고 관통을...”
“뭘 얼마나 세게 당긴 거냐?!”
“발사 개시! 발사 개시! 사냥 시작해라!”
그림자 순찰대 사냥꾼들이 전통주의자긴 했지만 이런 상황에서 전통이 날아갔다고 움직임을 멈출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순식간에 살벌한 속사가 시작되었다. 마치 노포(弩砲)로 쏘는 것처럼 수십 발의 화살이 쾌속선 위에서 씨 서펜트의 몸체로 날아들었다.
퍼퍼퍼퍼퍼퍼퍽!
“......”
“...이, 이거...?”
그림자 순찰대 사냥꾼들은 쏴놓고서도 당황했다.
씨 서펜트가 무슨 솜으로 안을 채운 봉제인형마냥 구멍이 숭숭 뚫리며 발악하기 시작한 것이다.
“맹세 누가 했냐?! 그냥 생선 수준 아니야?! 맹세 함부로 하면 산령님께서 화내시는 것도 모르냐!?”
“아니, 다들 동의해놓고 왜 이제와서 헛소리냐! 저런 대형 괴수 몬스터가 난적이 아니면 누가 난적이라는 거냐!”
“마저 숨통이나 끊어, 머저리들아!”
다행히 쾌속선 위에서 사냥꾼들이 나누는 대화는 항구 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았다.
항구 위에 있는 병사들은 그저 감탄할 뿐이었다.
“세상에, 그림자 순찰대의 이름은 많이 들어봤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어? 이 정도면 그냥 저기서 끝나는 거 아닙니까?”
병사들에게 마법 걸어주던 이한은 바다 위에서 벌어지는 광경에 놀랐다.
지금 병사들이 열심히 물약 나눠받고 이한의 마법도 받고 있었는데, 이거 그냥 저기서 잡히는 것 아닌가?
‘괜히 헛고생한 것 같은데...?’
이렇게 끝나면 감사해야할지 억울해 해야할지 고민하던 사이에, 저 멀리서 거대한 물기둥이 터져 나왔다.
지금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것보다 훨씬 먼 곳에서 터져 나온 물기둥이었다.
“한 마리 더! 한 마리 더 있습니다, 마법사 님!”
시력 강화 물약을 마신 병사가 항구 망루 위에서 비명을 질렀다.
이한도 눈에 마력을 집중시켜서 놈의 움직임을 확인했다. 마치 거대한 청새치처럼 생긴 씨 서펜트가 칼날 같은 턱을 번뜩이며 이쪽을 향해 몸을 비틀고 있었다.
“...!”
“날아온다!!”
쉬이이이익!
공기를 찢는 파공음과 함께 씨 서펜트가 화살처럼 날아들었다.
설마 바닷속에서 헤엄치며 다가오는 대신 저렇게 공중으로 쏘다닐지 몰랐던 병사들은 기겁해서 비명을 질렀다.
“이런 빌어처먹을 선조의 수염 같으니라구!”
우레걸음 교수는 고래고래 욕설을 지르며 품속에서 물약병을 꺼내더니 재빨리 바다를 향해 던졌다.
콰지지지지직!
그러자 항구에 차있던 바닷물이 갑자기 솟구치더니 두터운 얼음의 벽으로 변했다.
“계약 3조 1항에 의하여 다음과 같은 악마들을 부른다. 철완의 악마 검투사 베트르그, 쾌속의 악마 창잡이 이힐...”
번개걸음 교수도 허리춤에서 스크롤을 꺼내더니 찢어발기고 계약한 소환수들을 불러냈다.
튀어나온 악마들은 진홍색 연기를 내뿜으며 얼음벽에 충돌한 씨 서펜트에게 덤벼들었다.
촤아악!
씨 서펜트는 거대한 칼날 같은 윗턱을 마치 명검처럼 휘둘렀다.
한 번 휘두르자 그 궤도에 있던 범선 한 척과 항구의 시설이 그대로 잘려나갔다. 악마 소환수는 공격을 피했지만 깊은 중상을 입었는지 괴로워하며 소리를 냈다.
“이런 도움 안 되는 놈! 계약금은 받아놓고!”
-미... 미안하다.
번개걸음 교수의 타박에 악마는 굴욕감에 가득찬 얼굴로 대답했다.
“사격 개시.”
“사격 개시!”
얼음투성이가 된 항구 앞쪽에 씨 서펜트의 발이 묶이자 도시 경비대가 사격을 개시했다.
불화살과 함께 설치해 둔 공성병기들이 발사를 시작하자 씨 서펜트의 비늘 위에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
지금 항구에서 난장판을 피우고 있는 놈은 저 멀리서 그림자 사냥대에게 사냥당하고 있는 놈보다 훨씬 더 지능이 높았다.
후자는 덩치만 컸지 별다른 능력이나 교활함이 없어 난타당하고 있었지만, 전자는 공격당하는 순간 바로 위험함을 눈치 채고 대응했다.
콰직!
얼어붙은 수면 위를 부수고 아래로 깊게 잠수한 것이다.
“다시 뛰쳐나올 겁니다!”
“알고 있다, 알고 있어!”
우레걸음 교수는 울상이 되어서 다음 물약을 꺼냈다.
수도의 집 몇 채는 너끈히 살 만한 가격의 물약을 두 병째 써야 한다니.
씨 서펜트 놈들 중에 특이한 성질을 가진 놈들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귀찮은 놈이 있을 줄은 몰랐었다.
탁-
볼라디 교수가 하늘을 날아 얼음벽 위에 착지했다. 우레걸음 교수는 살짝 울 뻔했다.
“배그렉 교수!”
허공에 순간 광탄 수십 발이 생기더니 그대로 씨 서펜트를 난타했다.
씨 서펜트는 수면 아래에서 발사를 준비하다가 비명을 지르며 회피동작을 펼쳤다.
‘얕군.’
볼라디 교수는 마력 회복 물약을 빠르게 마신 다음 씨 서펜트의 움직임을 탐색했다.
발사를 막기 위해 가장 빠른 공격을 날렸지만 그 때문에 놈의 경계를 산 것이다.
“교수님!”
이한은 병사들에게 마법을 걸어주다가 가장 늦게 도착했다.
“주인의 명령에 맞춰서 얼어붙어라!”
불완전한 <펭에린의 냉기 원소 분신> 마법이 시전되었다.
원래라면 다른 분신 마법을 쓰고 싶었지만, 다른 분신 마법은 움직임까지 구현하기가 힘들었다.
불완전하더라도 더 고위 마법인 <펭에린의 냉기 원소 분신>만이 움직임을 구현할 수 있었다.
‘움직여라!’
원래라면 4서클 마법인 <펭에린의 냉기 원소 분신>은 겉으로 봤을 때 주인과 구분이 안 될 정도로 흡사한 외관, 분신의 시야 공유, 여차할 경우 냉기 원소를 이용한 근접 공격 등등이 가능해야 했다.
이한은 그 중 필요 없는 것들을 버리고 외관과 움직임만을 선택했다. 이한처럼 생긴 얼음 분신이 빠르게 바다 위를 내달렸다.
거기에 자극받은 씨 서펜트가 분노해서 날카로운 턱을 휘둘렀다.
“냉기여, 화살이 되어서 쏘아져라!”
씨 서펜트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 이한은 날카로운 집중력으로 얼음 화살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비늘을 관통한 건 한두개밖에 되지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그 위로 얼음이 달라붙자 씨 서펜트는 성가시다는 듯이 울부짖었다.
볼라디 교수는 바로 마법을 시전했다.
“증발하라!”
“!”
이한은 씨 서펜트에게 달라붙은 얼음들이 그대로 증발하며 막대한 타격을 입히는 모습에 경악했다.
‘저런 식으로 응용을!’
괜히 전투에 미친 볼라디 교수가 유미디후스 밑에서 배운 게 아니다 싶었다.
“미쳤냐!?”
“넌 왜 끼어들어!?”
두 드워프 교수가 황당하다는 듯이 외쳤다.
이한은 그제야 당황해서 되물었다.
“어? 저도 참가하는 거 아니었습니까?”
“야 이 미친놈아! 그걸 말이라고 하냐!?”
우레걸음 교수가 경악해서 외쳤다.
지금 후방에서 대기하지 말라고 해서 반항하는 건가 싶을 정도로 우레걸음 교수는 당황한 상태였다.
마력이 넘치는 만큼 전방에서 유연하게 대응해달라고 했지 누가 최전방 전투에 직접 참가하라고 했단 말인가!
메이킨 가문의 사람들도 어찌나 경악했는지 뒤로 넘어져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으음.’
이한은 항구 분위기를 보고 자신이 상당히 미친 짓을 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에인로가드 때문에 상식이 좀 무너진 모양이었다.
‘젠장. 학교 안에서 하던 습관 때문에.’
이한은 이 일의 가장 큰 책임자인 볼라디 교수를 원망스럽게 쳐다보았다.
볼라디 교수는 엄격하게 말했다.
“직접 참가하다니 무모하군.”
“...아니... 아니...!!”
같은 말이어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들리는 법.
이한은 순간 억울해서 심장이 멎을 뻔했다.
그러나 볼라디 교수는 매우 냉정했다.
에인로가드 안에서야 이런 무모한 짓을 마음대로 해도 되지만 밖에서는 멋대로 행동하면 목숨까지 위험할 수 있는 것이다.
‘진짜 씨 서펜트랑 같이 바다 속으로 묻어버릴까?’
쿠르르릉-
“분신을 소환해라.”
씨 서펜트가 타격을 입고서도 끈질기게 움직이려고 하자 볼라디 교수는 외쳤다.
이한은 바로 얼음 분신을 만들어냈다.
“시야 공유와 원소 공격을 추가해라.”
“그게 지금...”
이한은 ‘그게 그렇게 쉬우면 제가 예전에 이 마법을 완성했겠죠’라고 대꾸하고 싶었지만, 씨 서펜트는 상처 입은 와중에도 살벌한 눈빛으로 이한과 볼라디 교수를 노려보았다.
이한은 이를 악물고 마법을 추가했다.
원래라면 분신이 마법을 견디지 못하고 풀려야 하는 상황.
그러나...
‘됐다고?!’
씨 서펜트의 압박감이 이한의 본능을 자극했는지 놀랍게도 <펭에린의 냉기 원소 분신>이 완성되었다.
볼라디 교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무표정한 얼굴로 지시했다.
“전진시켜라.”
이한의 분신이 바로 뛰쳐나갔다. 씨 서펜트는 본능적으로 분신을 베어버리려고 덤벼들었다.
파직!
분신을 베는 순간 냉기 원소의 힘이 터져 나오며 씨 서펜트의 윗턱을 순간 얼어붙게 만들었다.
퍽!
볼라디 교수는 바로 그 얼음을 증발시켜서 날려버렸다. 씨 서펜트가 다시 한 번 옆으로 뒹굴었다.
“잠깐 시간을 끌도록.”
“예? 어... 어...”
독기가 오를 대로 오른 씨 서펜트를 두고 볼라디 교수는 무방비하게 돌아섰다.
이한은 당황했지만 지금은 따질 수도 없었다.
‘냉기 원소로? 아니, 지금 냉기 원소로 느리게 만들기에는 너무 늦다! 타격을... 타격을 주려면...’
본능적으로 이한의 주변에서 물 구슬이 솟구치더니 회전하기 시작했다.
회전은 점점 더 날카로워지고 사나워지더니 살벌한 소리를 내며 씨 서펜트에게 날아들었다.
‘...됐나!?’
마법 끝에 느껴지는 묵직한 감각이 평소에 급히 회전을 넣어서 쓰던 것과 달랐다.
이한은 설마 싶었다.
쾅!
닿는 순간 씨 서펜트의 비늘들이 박살나더니 깊게 패였다. 마치 바윗덩어리를 그대로 맞은 것 같은 위력이었다.
그 순간 볼라디 교수가 몸을 돌렸다. 붉은 마력의 선이 번뜩이더니 그대로 씨 서펜트를 두동강냈다.
“회전이 괜찮아졌군.”
“...사실 원래 전부터 괜찮았습니다.”
이한은 결코 씨 서펜트 덕분이 아니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