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법학교 마법사로 살아가는 법-497화 (497/687)

497화

“시적인 비유 같습니다.”

랫포드는 나름 에인로가드 학생답게 당황하지 않았다.

방금도 천장이 바닥이 되었듯이, 에인로가드에서 바닥 대신 천장을 걸어가는 일은 놀랍지 않았다.

“천장을 어떻게든 다시 한 번 바닥으로 만들...”

“응?”

“......”

랫포드는 이미 거꾸로 물구나무를 선 이한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허공에 물 구슬을 높게 띄운 이한은 그걸 양 손으로 붙잡은 다음 몸을 거꾸로 세워서 물구나무를 선 것이다.

그걸 본 랫포드는 감탄했다.

‘몸이 좋으면 머리를 쓸 필요가 없구나!’

이한 같은 사람이 왜 흰 호랑이 탑의 짐승 같은 새끼들과 노나 했는데, 이걸 보니 이해가 갔다.

탁-

이한이 억지로 천장에 발을 붙이고 몇 걸음 떼자 갑자기 시야가 흔들리며 중력의 방향이 뒤바뀌었다.

랫포드는 바닥에 서있는데 이한은 천장을 걸어가는 모습이 완성된 것이다.

“가자. 랫포드.”

“워다나즈 님.”

“왜?”

“여기 온 다른 학생들도 이런 식으로 걸었을까요?”

“그러지 않았을까?”

‘아닐 것 같은데...’

랫포드는 후들대는 팔을 붙잡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기본적으로 마법사는 머리가 좋지 몸이 좋은 직업은 아니었던 것이다.

*         *         *

다행히 그 뒤로 별다른 난관은 없었다. 이한은 목적지 앞까지 쉽게 도착했다.

일명 <케틀의 비밀기지>.

그러나 그 앞에는 어떤 문이나 창문도 없었다. 랫포드는 벽을 보고 당황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주문이 있다. 잠시만.”

이한은 지도 아래를 보고 목을 가다듬었다.

“명예로운 에인로가드 학생으로서 나는 맹세하노니, 절대로 교수를 믿지도, 매수되지도, 밀고하지도 않으리라.”

“......”

랫포드는 선배들이 만든 입장 수단에 할 말을 잃은 표정을 지었다.

뭔 도둑 길드보다 입단 의식이 더 심한 것 같았다.

“특히 교장 선생님은 더욱 더 의심하리라.”

‘끝이 아니었어?’

“이는 내가 졸업할 때까지 이어질 것이니, 나는 교수의 발목을 젖게 만들 숨겨진 웅덩이요, 교수의 머리 위에 떨어지는 새똥이리라...”

“......”

그 뒤로도 1분 정도 교수 욕을 하자 벽에서 쿠르릉 소리와 함께 허리 정도까지 오는 작은 문이 생겨났다.

“됐다. 랫포드. 들어가자.”

“에인로가드는 참 무서운 곳 같습니다.”

“새삼스럽게?”

높이가 낮은 통로를 기듯이 지나가자, 마침내 커다란 창고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한은 <교수금지!!!>라고 적힌 팻말을 옆으로 밀어내고 창고를 둘러보았다.

“이건...”

랫포드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숙련된 도둑으로서 성공의 직감이 든 것이다.

물론 겉으로 보기에는 특별한 보물들이 보이진 않았다.

창고 한가운데의 커다란 탁자에는 온갖 표지도 없는 마도서들이 무질서하게 뒹굴거리고 있었고, 벽에 위치한 책꽂이에는 책보다 이상한 시약들이나 망가진 아티팩트들이 더 많았다.

안쪽으로 가면 더 가관이었다.

부서진 골렘부터 시작해서 먹다 남긴 통조림 상자, 텅 빈 포도주 술병들, 격구용 스틱, 녹슨 청동 거울 등 어디서부터 청소를 해야 할 지 막막할 정도의 잡동사니들이 창고를 꽉꽉 채우고 있었다.

하지만 원래 이런 곳에서 보물이 나오는 법.

이걸 찾아 뒤질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케틀 선배만 쓴 곳이 아니었군.”

이한은 중얼거렸다.

아무리 봐도 일이년 사용한 곳이 아니었다. 수십 년 전에 쓰인 낙서도 흔히 보일 정도였으니.

아마 졸업생들 사이에서 대대로 사용되어 온 곳이리라.

“최근 몇 년 동안은 아무도 안 들어온 모양입니다. 먼지가...”

“잊혀졌던 것 같아.”

에인로가드의 구조를 생각해봤을 때 방이나 강의실이 몇 년 동안 잊혀지는 것 정도는 흔했다.

“여기를 어떻게 사용할지 모르겠군.”

“워다나즈 님은 고민하고 계십시오.”

“랫포드 너는?”

“저는 보물찾기 좀 하겠습니다.”

랫포드는 바로 소매를 걷어붙이더니 가장 가까운 잡동사니부터 하나씩 확인하기 시작했다.

‘혼자서 할 일은 절대 아닌데.’

이한은 샤르칸을 불러내고 스켈레톤 전사를 불러냈다.

“샤르칸. 뭔가 쓸만한 걸 찾아내봐. 고나달테스. 너는 커다란 짐만 우선적으로 좀 치워줘.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을 넓혀야겠다.”

자비로운 주인인 만큼 이한은 스켈레톤 전사를 돕기 위해 뼛조각을 사용해 고나달테스를 몇 배로 강화시켰다.

그런데도 스켈레톤 전사의 뒷모습이 어쩐지 떨떠름해보였다.

‘기분 탓이겠지?’

이한은 시선을 돌렸다.

소환수들이 돕는다지만 역시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일단 할 수 있는 것만 해둬야겠군.’

이한은 탁자 위에 널브러진 책들을 정리하고 먼지를 턴 다음 책꽂이에 꽂아 넣었다.

마도서 같아 보이면 마도서 칸에, 노트 같아 보이면 노트 칸에.

그리고 책꽂이 안에 꽂힌 시약이나 망가진 아티팩트 파편들은 따로 빼서 나무 궤짝에 담았다.

‘나중에 버두스 교수님한테 슬쩍 고쳐보라고 해야겠다.’

버두스 교수가 집중할 때 옆에 망가진 아티팩트를 두면 자신도 모르게 고칠지 몰랐다.

‘이건 뭐지?’

이한은 아무것도 쓰여진 게 없는 흰 노트를 보고 멈칫했다.

다른 노트들은 다 ‘교수 죽어라’ ‘해골 교장 죽어라’ ‘졸업하면 두고 보자’같은 낙서들이 하나둘씩 있었는데, 혼자 텅 비어 있으니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다.

탁자 위에서 들어 올리려고 했는데 놀랍게도 단단히 고정된 것마냥 움직이지 않았다.

순간 흰 노트를 잡고 있던 이한의 손가락 끝에서 핏방울이 맺혔다.

그리고 그 핏방울을 노트가 빨아들였다.

‘마법!’

안 그래도 얼마 전에 해골 교장한테 ‘사악한 마법범죄자들을 조심해라’라는 말을 들었던 만큼 이한은 즉시 반응했다.

“랫포드, 조심해라! 사악한 마법이 있다!”

“헉!”

랫포드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움츠렸다.

이한도 손을 떼고 지팡이로 노트를 겨눴다.

“......”

“......”

그러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살짝 머쓱해진 이한은 변명하듯이 설명했다.

“노트가 피를 빨아들였어.”

“사악하게 저주받은 아티팩트 아닙니까 그거?!”

랫포드는 기겁해서 달려왔다.

“바로 불태우시죠!”

“안 움직이는 거 보면 어지간한 불로는 안 될 것 같은데. 그리고 여기서 불 지르지는 말자.”

이한은 아직도 화염 마법에 대해서는 두려움이 많았다.

기껏 창고를 확보했는데 전부 불태워버리면 졸업한 선배 입장에서는 매우 황당할 것이다.

“일단 무슨 아티팩트인지 확인부터...”

새 주인이야?

“!”

노트 페이지 위로 올라오는 글자.

이한은 놀랐지만 랫포드는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랫포드. 이 글자가 안 보이나?”

“예? 무슨 글자 말입니까?”

‘나만 보이는 거군.’

이한은 아까 흘린 핏방울이 원인이라는 걸 짐작했다.

아마 이 노트를 작동시키는 조건인 모양이었다.

‘답장을 써도 되나?’

이한은 고민했다.

별다른 수상한 마력 패턴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원래 잘 모르는 물건을 건드리는 건 위험한 일이지 않은가.

특히 피 빨아먹는 노트는 더더욱 그랬다.

안에 사악한 악마라도 봉인되어 있다면?

-그쪽은 누구십니까?

이걸 처음 써보는 모양이지? 누군지 묻는 건 실례야.

“......”

이한의 얼굴이 굳었다.

이 노트 안에 봉인된 게 누군지는 몰라도 매우 사악하고 비열하고 뻔뻔한 존재가 분명했다.

마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이한의 수준을 뛰어넘는 강력함을 갖고 있을 것이고...

-이미 전 당신의 정체를 알았습니다.

이한은 망설이지 않고 깃펜을 놀렸다. 노트가 잉크를 빠르게 흡수했다.

...말해봐.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상대가 긴장한 게 느껴졌다.

-사악한 아티팩트에 봉인되어 있고, 뻔뻔하게 말을 돌리는 거 보니 강력한 악마 아닙니까?

...우리 얼굴 모르는 머저리 친구야, 네가 지금 쓰고 있는 아티팩트는 봉인 아티팩트가 아니라 통신 아티팩트야.

얼굴 모르는 상대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이한을 훈계했다.

이한은 살짝 당황했다.

-절 속이려는 거 아닙니까? 옛날이야기 보면 이런 노트에는 사악한 존재들이 깃들어 있던데...

그런 이야기가 있어? 그보다 너 공부 못하지? 사악한 존재를 가둘 거면 특별한 아티팩트를 사용해야지 왜 노트에 가둬? 누가 고서점에 갖다 팔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음. 맞는 말이다.’

이한은 상대의 훈계에 살짝 부끄러워졌다.

생각해보니 아무런 마력도 안 느껴지는 아티팩트라면, 그냥 별 위험 없는 아티팩트일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애초에 이런 학생들 창고에 대악마를 가둔 아티팩트(그것도 특이하게 노트 형태인)가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소설을 너무 읽었어.’

-그럼 이 노트는...

우리 학생들이 만든 수단이지.

이름 모를 상대는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2학년으로 올라가면 선배들을 만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마음을 터놓고 대화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학년끼리 뭉치고 각 탑끼리 뭉치는 분위기도 있는데다가 때때로는 교수의 첩자도 학생들 사이에는 있곤 했다.

그래서인지 어느 순간부터 에인로가드의 숨겨진 장소에는 이런 아티팩트들이 놓여 있곤 했다.

아티팩트의 뼈대가 되는 물건은 다양했다.

글씨를 쓰기 쉬운 노트가 가장 많았고, 양피지나 거울, 하여간 위에 잉크를 먹이기 좋은 물건이라면 뭐든지 가능했다.

이걸로 이제 서로 소통하는 것이다.

오히려 서로 누군지 모르는 만큼 솔직한 이야기가 가능했다.

대화 상대에 따라 다르겠지만 기본적으로 정체를 묻는 건 실례니까 명심해두는 게 좋을 거야. 교수로 오해받을 수 있어.

-충고 감사합니다.

이한은 일단 감사의 뜻을 전했다.

상대의 설명이 아니었다면 아직도 헤매고 있었을 테니까.

‘에인로가드 학생들이 익명으로 대화하는 수단이군.’

하긴 이한이나 대놓고 해골 교장을 욕하지, 대부분의 학생들은 해골 교장의 욕을 입 밖으로 내놓는 걸 조심하는 편이었다.

그런 학생들에게 이런 익명의 소통 수단은 일종의 대나무숲 같은 창구가 되어 주리라.

-제가 노트를 얻기 전에 한동안 방치되어 있었던 것 같은데, 혹시 저 이전에 글씨를 쓰던 사람이 있었습니까?

없었어. 나도 그래서 이 노트는 글렀다 싶어서 그냥 꽂아놨었고.

‘이 사람은 아티팩트를 여러 개 갖고 있군.’

이한은 상대의 말에서 몇 가지 정보를 유추했다.

이런 에인로가드 교내의 통신 아티팩트에 대해 잘 아는 걸 보니, 이 노트 하나 말고도 다른 아티팩트를 여럿 갖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나보다 훨씬 더 에인로가드의 상황에 대해 많이 알고 있을 거다.’

-궁금한 게 있다면 물어봐도 됩니까?

네 자유지. 대답도 내 자유고. 보통 등가교환이야. 무슨 소린지 알겠지?

서로 익명인 만큼 일방적인 질문이나 대답은 없었다.

누군가 하나 질문을 하려면 거기에 걸맞은 가치를 지불할 수 있어야 했다.

-알겠습니다. 제가 궁금한 건 본관 3층에 숨겨진 장소들입니다.

3층? 2학년인가?

-글쎄요.

좋아. 여기에 대답할 수 있으면 교환하도록 하지.

이한은 긴장했다.

과연 이한 본인이 상대방의 요구에 맞출 수 있을까?

속임수라도 써야 하나?

‘하지만 속임수를 쓰다 걸리면 그 뒤로 연락은 끊길 거다.’

네 학파에 워다나즈란 1학년 학생이 있을 거야.

‘어떻게?!’

이한은 깜짝 놀랐다.

이한의 이름이 나온 것도 놀라웠지만 상대방의 학파를 어떻게 알아맞힌 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노트 너머의 상대가 가진 학파를 측정할 방법이 있나??

‘아. 아니군.’

생각해보니 이한은 그냥 다 소속되어 있었다.

-네.

2학년 때 무슨 학파 마법을 들을지 알아와.

-1학년하고 접촉은 중징계감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러니까 안 들켜야겠지.

‘이 사람 진짜 누구지?’

이한은 인상을 찌푸렸다.

일단 이한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부터가 좀 의아했다.

소문으로 들었나?

몇몇 선배들은 교수의 일을 돕느라 이한의 이름을 알긴 했지만...

‘그쪽으로 퍼져나간 건가?’

그리고...

상대가 망설였다.

마치 이 말을 해도 되나 안 되나 망설이는 것 같은 기색이었다.

‘뭐지?’

흑마법 들을건지는 확실히 물어보고.

-...혹시 디레트 선배십니까?

노트는 갑자기 대답이 없어졌다.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