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법학교 마법사로 살아가는 법-498화 (498/687)

498화

‘정말 디레트 선배신가?’

사실 이한도 커다란 확신을 갖고 던진 질문은 아니었다.

그냥 이야기하다보니 갑자기 디레트 선배 생각이 나서 물어봤을 뿐.

그런데 갑자기 상대방의 대답이 없어지자 의심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그게 누군데?

‘디레트 선배 맞으시군.’

이번에는 이한이 대답이 없자 상대방이 몇 줄 더 대답했다. 왠지 모르게 횡설수설하는 게 느껴졌다.

그게 누군지는 모르겠는데 대충 아무 이름이나 던지면서 상대를 떠보려고 하는 습관은 좋은 습관이 아닌...

-선배님. 저 워다나즈입니다. 징벌방 사식 나눠먹은 그 워다나즈요.

다시 한 번 대답이 없어졌다.

이한은 괜히 말했나 살짝 후회했다.

‘그냥 모라디인 척할 거 그랬나?’

생각해보니 후배로서 선배의 실수를 지적하는 건 좋은 습관이 아니었다.

가끔은 모르는 척 넘어가줘야 사랑받는 후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넌 왜 1학년이 이런 아티팩트를 손에 넣고 그래...

디레트는 결국 포기하고 인정했다.

노트 위에 적힌 글씨가 유난히 힘없어 보였다.

*         *         *

디레트는 이한에게 아티팩트에 대해 추가로 설명해줬다.

마력이 꽤 필요한 만큼 주변에서 마력을 끌어오고 있을 거야. 그래서 못 움직이는 걸 테고... 졸업생이 쓰던 창고에서 발견했다고?

-예.

그런 건 우연히 찾기 힘들었을 텐데 어떻게 찾았어?

-징벌방 금지 구역에 갇혀 계신 졸업생 선배님에게 물었습니다.

...그냥 알려주기 싫으면 알려주기 싫다고 해. 후배.

디레트는 살짝 샐쭉해하며 대답했다.

‘정말인데.’

이한은 억울했다.

-사실 3층 폴리모프의 숲을 지키고 있는 숲의 생쥐를 붙잡고 협박했더니 알려줬습니다.

아. 그 생쥐를...! 영리한데?

“......”

억울한 김에 대충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던졌는데,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디레트의 모습에 이한은 당황했다.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는 건가?’

디레트가 과연 이한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방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ㄱ...

나도 좀 있으면 나가봐야 하니까 해야 할 말만 빠르게 전할게. 일단 이런 통신 아티팩트를 더 구하게 된다면 오늘처럼 섣불리 접근하지 마. 여기 에인로가드의 고학년들이 절대 후배들에게 친절하지 않거든.

-선배님은 이렇게 친절하신데 참 못된 사람들입니다.

시끄러.

디레트는 이한의 아첨을 단칼에 잘랐다.

1학년 학생들은 보통 선배들과 접할 일이 없는 만큼 환상을 품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에인로가드가 개같은 만큼 선배들은 좀 괜찮지 않을까?

-교수들이 쓰레기 같은 만큼 선배들은 좀 괜찮지 않을까?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그 환상에는 허점이 많았다.

똑같이 1학년 생활을 거치고 먼저 올라온 에인로가드 선배들이 과연 어떤 존재겠는가.

본인의 생존과 이득을 위해서라면 후배들을 아낌없이 팔아먹을 수 있는 게 이들이었다.

갓 2학년으로 올라온 순진무구한 학생들은 뼛속까지 이용당하는 경험을 몇 번 하고 나서야 ‘아 여기는 선배고 교수고 다 똑같구나’하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런 만큼 디레트는 이한이 조금 걱정됐다.

물론 이 워다나즈 가문의 소년이 여러모로 손꼽힐 만큼 비범한 재능을 갖고 있긴 했지만, 사회적인 경험만 비교해보면 닳고 닳은 에인로가드 고학년들을 따라오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이번에 통신 아티팩트를 손에 넣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이런 면에서는 재능이 뛰어난 게 오히려 독이었다.

어설프게 선배들과 접촉할 일들이 많아지지 않는가.

몇 가지 규칙을 알려줄 테니까 기억해. 먼저 강하게 접근해. 존댓말 같은 거 할 필요 없어.

-욕 좀 하면서 접근해볼까요?

나쁜 생각은 아니야. 네 출신을 속일 수 있거든.

‘어라.’

농담 삼아서 한 말이었는데 디레트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이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옆에 메모했다.

1.뒷골목 깡패 출신처럼 욕하기.

“...???”

옆에서 짐 정리하던 랫포드는 이한의 메모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돌아갔다.

아티팩트 처음 쓰는 티는 절대 내지 말고. 이런 아티팩트 자주 쓰는 놈들은 경험이 많아서 눈치도 빠르니까.

-명심하겠습니다.

이건 확실히 맞는 말이었다.

상대가 디레트여서 망정이었지 사악한 흑심을 품고 있는 사람이었다면 이한은 얼마든지 속을 수 있었으니까.

말을 적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네가 원하는 것과 상대가 원하는 것만 물어봐도 돼. 경험 많으면 상대도 무슨 소리인지 알 거야.

이한은 메모를 추가했다.

2.말 적게 하기

“???”

노골적으로 속임수를 쓰는 사람은 드물어. 하지만 속임수를 안 쓰는 사람은 없어. 그걸 명심해야 해.

이런 통신 아티팩트를 구하는 게 힘든 만큼, 대놓고 상대방과의 약속을 어기는 사람은 흔치 않았다.

도둑들 사이에도 의리가 있고 무질서한 뒷골목에도 나름의 규칙이 있는 법.

하지만 애매한 말장난은 허용되는 범위였다.

상대가 말하는 거 너무 다 믿지 말고. 이거 너무 오래 쓰지 말고. 성적 나빠지니까. 나 이제 가봐야겠다. 물어볼 거 있어?

-선배님.

왜?

-저 2학년 때도 흑마법 들을 겁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너한테 부담주려고 물어본 거 아니었어. 몬스터 웨이브도 그렇고 흑마법 안 들어도 이해하는데, 그냥 미리 알아놓으려고 그랬던 거야. 그래야 너 부담 가지지 않게 잘 가라고 인사도 해줄 수 있으니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정말 부담 주는 거 아니고 안 듣고 싶으면 안 들어도 돼. 알겠지? 듣고 있어?

‘이렇게 말이 많으신 분이었나?’

아까보다 2배 빠른 속도로 채워지는 노트의 글씨를 본 이한은 살짝 압도되는 기분이었다.

-그냥 정말 흑마법이 재밌어서 듣는 겁니다.

잉크를 종이 위에 새기자 또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한은 디레트가 떠났나 싶어서 노트를 덮으려고 했다.

그 때 한 줄이 더 추가됐다.

그렇다니 잘 됐네. 내년에도 보자.

-예.

디레트가 정말로 떠나자 이한도 노트를 덮었다.

옆에서 정리하던 랫포드가 다가와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워다나즈 님. 혹시 뒷골목 깡패처럼 연기하실 일이 필요하신 겁니까?”

*         *         *

오해를 풀고 나서 이한은 랫포드와 같이 작업을 마무리 지었다.

하루 동안 고생한 샤르칸과 고나달테스를 돌려보내고(고나달테스는 커다란 짐을 하나 치울 때마다 자신의 처지를 슬퍼하는 눈빛으로 이한을 쳐다보았다), 쓰레기들을 밀어 넣고 나자 어느 정도 공간이 생겼다.

“여기 창문도 있었나?”

“네. 위에 낙서가 너무 많아서 잊혔던 모양입니다.”

조그만 지붕창으로 올려다보니 벌써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이한은 창고 중앙에 위치한 길쭉하고 중후한 테이블 위에 필요한 책들을 올려놓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루가 그냥 갔군. 슬슬 시작해야 하는데.”

“어? 과제 있으셨습니까?”

둘이 먹을 치즈를 자르던 랫포드가 의아해했다.

이번 주 강의는 다 같이 쉬었고 저번 주는 중간고사였는데?

아무리 워다나즈가 많이 듣는다 하더라도 과제를 받을 시간이...

“저번에 나갔을 때 과제 따로 받았어. 책 두 권 써야 해.”

“아. 따로 받으셨습니까. 두 권을 읽어야 한다니. 힘드시겠습니다.”

랫포드는 고개를 끄덕이고 옆으로 걸어갔다.

이한은 테이블 앞에 앉아 책을 펼치고 집중할 준비를 했다.

“...잠깐. 쓰셔야 한다고요?”

“응? 응. 두 권 쓴다고 했잖아.”

“.......”

랫포드는 뭐라고 말을 하려다가 포기하고 화제를 바꿨다.

너무 안타까워서 화제를 바꾸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참. 워다나즈 님께서 여길 새로 얻으신 거나 마찬가진데 이름을 붙여야 하지 않을까요? 워다나즈의 비밀기지 같은?”

“모라디의 비밀기지라고 하면 안 되나?”

이한은 나중에 들켰을 때를 대비해서 자신으로 추정되지 않는 이름을 선호했다.

“왜 모라디가...?”

“알겠어. 워다나즈의 비밀기지라고 하자고. 이름이야 뭐든 좋지.”

랫포드의 눈이 너무 순진무구해서 이한은 재빨리 말을 바꿨다.

“참. 랫포드. 지금 당장 할 거 없나?”

“네? 그렇습니다.”

랫포드는 별 생각 없이 두툼한 치즈 조각을 베어 물으며 말했다.

“그럼 내 앞에 앉아서 연금술 책 펴라. 같이 공부하면 되겠네.”

“...아, 아참. 생각해보니 저기 아직 남은 잡동사니들이 많습니다. 조금만 더 찾아보게 해주십시오!”

“으음. 너무 많지 않나? 하루에 다 하려고 하는 건 욕심 같은데...”

“최선을 다해야 조금씩 나아가는 겁니다!”

랫포드는 후다닥 잡동사니 더미로 달아났다. 이한은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워다나즈의 수옥탄과 그 기초 원리에 대하여>

물 원소 전투 마법은 흔히 과소평가되기 쉽지만 그 진가는 어느 제국 마법사도 쉽게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제국 마법사 유미디후스는 고전 물 원소 전투 마법들을 정리하여...

<수옥탄 마법의 한계와 그 발전 방향성에 대하여>

수옥탄 마법이란 무엇인가?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과소평가된 물 원소 전투 마법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를 해야 한다... 제국 마법사 유미디후스는...

‘음. 아직 실력 안 죽었군.’

이한은 똑같은 내용을 서로 다른 책에 알차게 끼워 넣은 스스로의 실력에 살짝 감탄했다.

볼라디 교수나 해골 교장은 이런 쓸데없는 서문을 싫어할 수 있겠지만 원래 책에는 이런 서문이 있어야 하는 법.

읽는 사람을 위한 배려심이 있어야 했다.

...먼저 다음과 같은 전제조건들이 필요한데... 이와 같은 대량의 마력 소모가 단점이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는 혈마법 같은 마력 증폭 수단을...

‘너무 과격한가?’

<워다나즈의 수옥탄>에 대한 기초 개론서를 집필하면서 이한은 멈칫했다.

마력 소모가 심한 게 단점이고 그걸 보완해야 한다고 쓰다 보니 좀 과격해보였던 것이다.

“워다나즈 님?”

“아. 랫포드. 연금술 공부하려고?”

“...아, 아니요.”

랫포드는 이한이 조금 무서워졌다.

“여기 특이한 아티팩트가 있습니다.”

“!”

이한은 깃펜을 내려놓고 랫포드가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잡동사니가 치워지자 바닥에 단단히 고정된 거울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청동으로 된 거울은 흠이 많이 났는지 겉표면이 흐렸고 제대로 얼굴을 비추지도 못했다.

그러나 이한은 방금 전 노트를 갖고 논 덕분에 이 거울이 무슨 아티팩트인지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둘의 마력 파장이 비슷했던 것이다.

‘통신 아티팩트다!’

창고에 있던 게 하나가 아니었다니.

이한은 호기심 섞인 눈빛으로 거울에 접근했다. 그리고 아까 노트를 작동시켰던 것과 똑같이 작동시켰다.

“......”

“......”

그러나 아까와는 달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혹시 연결된 아티팩트도 주인을 잃어버린 상태인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에인로가드에는 버려진 장소들이 많았고, 그럴 경우 거기에 연결된 아티팩트들도 같이 버려졌을 테니...

아까는 운 좋게 디레트가 연결된 아티팩트를 갖고 있었고, 이한이 연결했을 때 근처에 있어서 망정이었지 아니었다면 대답 자체를 듣기 힘들었을 것이다.

“으음. 아쉽게 됐군. 또 다른 선배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나 싶었는데.”

“제가 감시하고 있겠습니다.”

“아니야. 어차피 연결된 사람만 볼 수 있는 거라서. 이제 그만 치우고 앉아서 공부하자.”

“...네...”

랫포드는 시무룩해져서 이한 앞에 앉았다. 이제 더 이상 핑계가 통하지 않는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연금술을 알면 뛰어난 도둑이 될 수 있다는 옛말이 정말일까? 거짓말 아닐까? 연금술이 과연 필요할까?’

연금술 책을 펼치자 책 안에 갇혀 있던 회의적인 생각이 지루함을 휘두르며 랫포드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우우웅-

“!”

옆에서 깃펜을 놀리고 있던 이한은 거울이 진동하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왔다!”

“보러 가시죠!”

“아냐. 넌 공부하던 거 마저 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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