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화
“아산. 내 생각에 그 노래는...”
이한은 친구에게 ‘그 노래는 금지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말하려고 했다.
“그 노래라면 확실히 보여줄 만하지.”
“크윽. 분하다. 나도 괜찮은 노래를 지었다면 보여드렸을 텐데. 내 <징벌방에서의 하루>는 교수님이 혹평하시더라.”
“기운 내라. 너도 다음에는 좋은 노래를 지으면 되잖아.”
“......”
이한은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생각보다 정말 유명한 사람이 맞나 보군.’
주변을 둘러봤지만 아쉽게도 여기 나와 있는 한가한 놈들 중에 요네르는 없었다.
‘요네르가 있었으면 소외감을 같이 공유했을 텐데.’
혼자서 사회성 없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는 둘이 낫지 않겠는가.
이한은 요네르에게 매우 실례되는 생각을 했다.
끼이이익-
“!”
문이 열리는 소리에 학생들은 모두 자세를 낮췄다. 이한을 제외한 모두의 눈빛에는 기대감이 반짝이고 있었다.
‘어? 정말 왔나?’
사실 이한은 친구들의 말을 크게 믿지 않았다.
에인로가드에는 워낙 헛소문이 많았던 것이다.
-애들아! 다음 주에 황제 폐하의 군대가 교장 선생님을 쓰러뜨리고 학교를 해방시킨대!
-애들아! 다음 주에 새 교장 선생님이 오시고 학교의 규칙이 바뀐대!
-애들아! 다음 주부터 식단에 고기가 추가된대!
...이런 헛소문들은 보통 하나도 맞은 게 없었다. 그리고 물어보면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열린 문으로 들어온 건 처음 보는 낯선 외부인이었다.
살짝 낡았지만 두터운 외투로 몸을 감싼 거북이 수인족 노인은 악기 가방을 내려놓고 본관을 찬찬히 관찰하듯 쳐다보았다.
그 모습에서는 오랫동안 음유시인으로 활동해 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와 품격이 느껴졌다.
이파두르의 얼굴을 본 적은 없었는데도 이한은 상대가 이파두르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확실히 유명인은 아우라가 다르군.’
“참으로 아름다운 곳입니다. 고나달테스 공.”
하하. 천하의 이파두르 경께서 너무 관대하신 것 같군. 제국 전역의 춘화추월을 모두 봐온 사람이.
“아닙니다. 이 건물에 서린 역사가 저를 압도하는군요.”
“......”
“......”
학생들은 자세를 낮추다 못해 바닥에 넙죽 몸을 붙였다. 이한은 한심하다는 듯이 그들을 쳐다보았다.
‘이 자식들이 해골 교장 위치도 파악 안 하고 이런 짓을 하다니.’
생각해보니 외부에서 유명인이 오면 해골 교장이 나올 확률도 높지 않은가.
해골 교장의 위치를 파악하거나, 그게 힘들다면 교장실 근처에 불을 질러서 해골 교장의 동선을 그쪽으로 유도하는 게 기본이었다.
‘들켰다.’
해골 교장이 시선을 돌리자 이한은 들켰다는 걸 직감했다.
하긴 친구들의 숫자를 봤을 때 안 들키기가 힘들었다.
‘여기서 억지로 숨는 건 하수나 하는 짓. 외부인을 믿고 강하게 나가야 한다.’
“교장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
“????”
바닥에 엎드려 있던 친구들은 이한이 미친 줄 알았다.
해골 교장도 이한이 대놓고 튀어나올 줄은 몰랐는지 떨떠름한 시선을 던졌다.
그, 그래. 좋은 밤이다. 거기서 뭘 하고 있느냐?
“지나가던 도중에 명예로운 에인로가드의 바닥이 더러운 게 안타까워서 청소를 하고 있었습니다.”
“...맞, 맞습니다.”
“저희가 그랬죠.”
바닥에 엎드려 있던 친구들이 청소를 하고 있었다는 걸 드러내기 위해 온몸으로 바닥을 닦아냈다.
해골 교장은 당번을 하다가 몰래 빠져나온 1학년 학생들이 어처구니없는 핑계를 대는 걸 보고 쯧쯧 혀를 찼다.
그 마음이 믿기 힘들 정도로 기특하구나. 내일은 버두스 교수가 청소하러 나오는 거냐?
“감사합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손님께도 인사드려도 되겠습니까?”
“오히려 영광입니다. 이파두르라고 합니다.”
“헉!” “끽!” “컿!”
“?”
이한은 일어나려던 친구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자 당황했다.
‘마법인가?’
그러나 친구들은 마법에 당한 게 아니었다. 그들은 너무 좋아서 어찌할 줄을 모르고 바들바들 떨었다.
이한은 당황한 수준이었지만 해골 교장은 ‘저딴 무쇠대가리들이 에인로가드의 학생이라니’하는 경멸 섞인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하라는 마법은 안 하고 잡기(雜技)에만 관심이 많아가지고.
“죄송합니다. 고나달테스 공.”
이파두르는 자신의 추종자들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에 익숙했는지 살짝 웃으면서 사과했다.
경께서 사과할 일은 아니오. 너희들은 저기 워다나즈를 좀 본받아라. 저 놈은 너희들에게 식사를 차려주는 악습관을 제외하면 마법에만 몰두하지 않느냐.
‘그게 왜 악습관이야...’
‘워다나즈처럼 몰두하면 사람 죽지 않나?’
갑시다. 경.
“잠, 잠깐만요!”
원래 이한을 제외하면 1학년 학생들은 어지간해서는 해골 교장 앞에서 말을 걸지 못했다.
해골 교장이 가진 어마어마한 지위를 제외하더라도, 대마법사로서 뿜어내는 강렬한 아우라가 1학년 학생들을 위축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가끔 사랑이 두려움을 이기는 법.
이파두르를 향한 강한 애정으로, 1학년 학생들은 두려움을 밀어냈다.
“이, 이파두르 님! 제... 제가 지은 노래를 들어주실 수 있으십니까?”
야...
해골 교장은 오랜만에 창피함을 느꼈다.
이파두르를 부른 건 어디까지나 마법 연구를 위해서였다.
고대 마법이나 원시 마법, 혹은 신성 마법에서 음악은 상당히 중요한 위치에 속했지만 현재 제국 마법에서는 아니었다.
음악을 사용한 마법은 상당한 비주류로 꼽혔던 것이다.
마법사는 현실에 초탈한 것 같은 이미지를 풍겼지만 실제로 그럴 수는 없었다. 당연히 현실적인 요소에 영향을 받았다.
음악을 사용한 마법은 시전자에 따라, 또 그 날의 감정에 따라 달라지는 변칙성으로 인해 이론화가 힘든 대표적인 마법 분파.
하지만 최근 에인로가드의 몇몇 고학년 학생들이 이 마법에 흥미를 가지고 연구 중이었다.
게다가 2학년 학생들 중에서도 선배들의 영향을 받아 이 마법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이들이 나오자 해골 교장으로서도 더 이상 좌시할 수가 없게 되었다.
뜻이 있는 마법사들이 모이면 그 길을 만들어줘야 하는 게 에인로가드 영주의 의무.
그래서 이파두르를 초대한 것이다.
뛰어난 음유시인과 대화해보며 음악 계열 마법의 커리큘럼을 짜보기 위해.
그렇지 않다면 해골 교장이 음유시인을 에인로가드 안에 초대할 이유가 없었다.
괜한 풍자 노래라도 만들어서 제국에 퍼뜨리면 뒷감당이 귀찮아지는데...
하여간 스승이 제자들을 위해 귀찮음과 성가심을 감수하고 노력 중인데 별 같잖은 노래 평가나 해달라고 하고 있으니 아주 괘씸하기 그지없었다.
‘보는 눈만 없었으면 징벌방인데.’
노래 평가하려고 부른 줄 아느냐? 비켜라. 방해하지 말고.
“고나달테스 공. 이것도 인연인데 한 번만 듣고 갈 수는 없겠습니까?”
......
해골 교장은 속으로 이를 갈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파두르에게서 필요한 걸 뜯어내기(필요하다면 교수 계약 인장까지) 전에는 본색을 드러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 때까지는 선량하고 위대한 대마법사여야 했다.
불러라. 불러. 이 멍ㅊ...
“교장 선생님. 손님 계십니다.”
이한의 속삭임에 해골 교장은 정신을 차렸다.
무쇠대가리들의 분노 유발에 순간 평소 버릇이 나올 뻔한 것이다.
고맙다.
“아닙니다.”
넌 그런데 여기 왜 있냐? 이파두르 경이 누군지도 모를 것 같은데.
해골 교장의 폐부를 찌르는 말에 이한은 상처받았다.
물론 누군지도 모르긴 했지만 이걸 해골 교장한테 들으니 괜히 기분이 나빴던 것이다.
“아닙니다. 제국의 유명한 음유시인인 이파두르 경을 모를 리가 없잖습니까? 절 뭘로 보시는 겁니까?”
이파두르 경이 부른 노래 하나라도 말해봐라.
“...앗. 아산이 노래 부르네요.”
이한이 말을 돌리자 해골 교장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쯧쯧 혀를 찼다.
학생들이 다 이 워다나즈처럼 마법에만 미쳤다면 에인로가드 운영이 한결 더 쉬웠을 텐데.
“에인로가드. 에인로가드. 너무 좋다네.”
“......”
......
이한은 마치 펭에린이 냉기 마법을 썼을 때처럼 분위기가 싸늘해지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따뜻한 식사와 푹신한 침대가 있는 곳. 에인로가드.”
저 무쇠대가리는 외부인 앞에서 저런 추잡한 노래를 왜 부르는 거냐? 누가 보면 내가 시킨 줄 알 거 아니냐!
“아닐 겁니다.”
하지만 이파두르는 이미 당혹스러운 얼굴로 아산을 쳐다보고 해골 교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노련한 음유시인인 만큼 어느 단체의 신입이 찬양 노래를 부른다는 게 좀 이상하다는 걸 단박에 알아차린 것이다.
“설마 고나달테스 공께서...?”
아니오! 내가 왜!
“아산이 그냥 순수하게 감명 받아서 지은 겁니다.”
보다 못한 이한이 나섰다.
이대로 내버려뒀다가는 자리가 끝나고 나서 아산이 교장명예훼손죄로 징벌방에 끌려갈지도 몰랐던 것이다.
“대귀족 가문 출신께서 따뜻한 식사와 푹신한 침대에 감명을 받았단 말입니까?”
이파두르는 믿기 힘들다는 듯이 질문을 던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억지와 강압으로 만든 노래가 아닌가 의심이 들었던 것이다.
이한은 이를 악물고 이유를 급조해냈다.
“...거기에는 사실 사연이 있습니다. 사실 에인로가드에 입학하는 친구들은 온갖 소문에 잔뜩 겁을 먹고 들어오거든요. 그런 와중에 소문이 틀렸다는 걸 알고 저런 노래를 만든 겁니다.”
“아하!”
“......”
“......”
이한 옆에 있던 친구들은 매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목구멍까지 ‘아뇨 따뜻한 식사도 푹신한 침대도 없는데요’라는 말이 차올랐던 것이다.
“제가 오해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고나달테스 공.”
괜찮소. 그럴 수도 있지.
“음률은 훌륭합니다만 가사가 조금 너무... 노골적인 찬양으로 오해받을 수 있겠군요. 은근한 비유가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파두르가 아산에게 노래를 지적하는 동안 해골 교장은 이한을 보며 말했다.
내가 널 참으로 아낀다고 말한 적이 있었느냐?
“앗. 뭘 챙겨주실 겁니까?”
...그냥 물어본 거다.
이한은 해골 교장을 노려보았다.
* * *
1학년 친구들의 노래를 들어주고, 고쳐주고, 사인까지 해준 다음 이파두르는 해골 교장에게 말했다.
“고나달테스 공. 실은 부탁이 있습니다.”
무엇이든 말해보시오.
“혹시 학교의 전경을 한 번 둘러볼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만 한다면 시상(詩想)에 커다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에인로가드에 관한 노래를 지으려는 것이오?
해골 교장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이한은 그 안에 숨겨진 떨떠름함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에인로가드에 관한 노래를 지어주는 건 나쁜 일이 아니었다.
이파두르가 찬양의 노래를 만들어만 준다면 그 해 기부금과 투자금이 얼마나 넉넉해지겠는가.
하지만 기본적으로 음유시인의 주둥이는 원하는 대로 통제할 수 없다는 걸, 해골 교장은 잘 알고 있었다.
그냥 노래를 안 지으면 고민도 없어지는데...
“그렇습니다!”
알겠소. 한 번 같이 둘러봅시다.
“정말 죄송합니다만, 학생 분도 한 명 같이 동행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래도 공께서 보는 것과 다른 시야를 보여주실 것 같아서...”
이파두르의 말에 친구들은 거의 심장마비에 걸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서로 소리 없이 비명을 지르며 멱살을 잡고 발을 짓밟으며 앞으로 나서려고 했다.
워다나즈. 나와라.
“예? 교장 선생님. 돌아가서 자려고 했는데...”
해골 교장은 비범한 공간 마법으로 이한의 외투 앞주머니에 외출권을 하나 이동시켰다.
이한은 아름다운 마법에 감명 받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손님을 모시는 일은 저희 학생들에게도 영광 아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