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1화
해골 교장이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 부탁한다. 에인로가드의 아름다움을 설명해다오.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외출권 때문에 일단 수락하고 봤지만, 막상 받고 나니 갑자기 걱정이 됐다.
에인로가드에 아름다움이란 게 있나?
‘있는 건 고통과 슬픔밖에 없는 것 같은데...’
해골 교장 같은 사람이 아무 이유 없이 그냥 외출권을 줄 리 없었다.
당연히 유명한 음유시인이 밖에 나갔을 때 ‘오, 에인로가드 학생들은 지옥에서 고통받고 있다네~’같은 노래를 짓지 못하게 잘 해달라는 것 아니겠는가.
하지만 이한이 아무리 노력한다 하더라도 에인로가드에 있는 게 고통과 슬픔밖에 없다면 한계가 있었다.
과연 잘 할 수 있을까?
* * *
“저기 학생들은 뭘 하고 있는 겁니까?”
“최근에 울타리가 부서졌는데 그걸 나와서 고치고 있는 겁니다.”
이파두르의 질문에 이한은 막힘없이 대답했다.
저 멀리서 검은 거북이 탑 친구들이 욕설과 함께 부서진 울타리를 고치고 있었던 것이다.
이파두르는 노련하고 경험 많은 음유시인답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왜 이 새벽에 고치고 있는 겁니까?”
“학교를 너무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옆에 있던 해골 교장이 감탄의 눈빛으로 이한을 쳐다보았다.
저런 낯부끄러운 말을 1초의 고민도 없이 내뱉다니.
‘대체 어떻게 저런 놈이 워다나즈 가문에서 나온 걸까?’
“낮에 다 고치지 못한 게 밤에도 생각이 나서 이렇게 나왔으니, 그만큼 학교를 사랑하고 있는 거겠지요.”
“마법사 분들이 에인로가드를 사랑하는 마음이 실로 놀랍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이 들었으면 망치를 던졌을 소리를, 이한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처리했다.
프로는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법.
“혹시 최근에 홍수가 일어난 적이 있습니까?”
이파두르는 숲길을 걷다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원래라면 물기가 있을 곳이 아닌데 무슨 홍수라도 있었던 것처럼 아직 흔적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예.”
“제가 알기로는... 아직 장마철이 아니었을 텐데요?”
이한은 해골 교장을 쳐다보았다. 해골 교장은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는 말해도 된다.’
‘알겠습니다.’
“에인로가드는 마력이 강한 지역이라 기현상들이 많이 벌어지곤 합니다. 이번 정령 홍수도 그런 현상 중 하나였지요.”
“실로 놀랍습니다. 이렇게 변덕스러운 자연현상은 제국에서도 흔치 않잖습니까.”
“아무래도 그런 편이죠.”
늙은 거북이 수인 음유시인은 지팡이로 몸을 지탱한 채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깃펜을 꺼내 무언가를 메모하기 시작했다. 해골 교장은 힐끔힐끔 그 메모를 쳐다보았다.
뛰어난 마법사를 키워내는 요람인 에인로가드에서는 여러 현상들이 벌어진다. 어린 마법사들은 노련한 마법사들의 도움을 받아 이런 현상들을 해결한다.
해골 교장은 흐뭇한 눈빛을 보냈다.
이 노련한 음유시인도 고정관념과 상식의 함정에 빠져 에인로가드의 진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노련한 마법사들의 도움 따위는 없는데도 말이다!
‘이대로만 계속해라. 워다나즈.’
‘걱정하지 마십시오.’
“잠깐. 홍수가 닥치면 학생들은 어떻게 이동합니까? 역시 마법을 사용하는 건가요?”
“네. 마법을 이용해서 배를 만들거나 탄주어를 소환하지요.”
“감사합니다.”
이파두르는 메모하다가 멈칫했다.
“탄주어를 소환합니까??”
......
해골 교장은 뭐하냐는 듯이 이한을 쳐다보았다.
이한도 아차 싶었다.
‘실수했다.’
생각해보니 홍수가 닥쳤을 때 일반적인 대처 방법은 탄주어 소환이 아니었다.
“누가 탄주어를 소환한 거죠?”
이파두르는 매우 흥미로웠는지 절대 넘어가지 않겠다는 태도로 깃펜을 붙잡았다.
“제가 소환했습니다.”
“아주 흥미롭군요... 아주 흥미롭습니다.”
해골 교장이 이한에게 정신 차리라는 듯이 눈빛을 보냈다.
지금 제자가 벌써 정신줄을 놓으면 안 됐던 것이다.
“고나달테스 공. 에인로가드의 학생들은 다들 탄주어를 소환할 줄 아는 겁니까?”
그건 아니오. 몇몇 뛰어난 학생들만 소환할 줄 알지.
“어떤 학생들...”
앗, 경. 저기 보시오! 거인들이 씨름을 하고 있구려!
해골 교장은 산맥을 가리키며 화제를 바꿨다.
다행히 거인 씨름이 생각보다 흥미로웠는지 이파두르도 시선을 돌렸다.
“거인들을 이렇게 볼 수 있는 곳이 드문데 참으로 신기합니다. 고나달테스 공. 그런데 한 가지, 무례한 질문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거인들이 학생들에게 피해를 끼치진 않습니까?”
거인들이 몬스터처럼 위협적인 종족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친절하고 따뜻한 이웃도 아니었다.
자칫 아직 어린 마법사들과 잘못 부딪치기라도 하면 커다란 피해가 나올 수 있었다.
해골 교장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하하. 거리를 보면 알겠지만 학생들은 거인들과 만날 일도 없소. 저들은 산맥을 지켜주는 산지기들이지.
“과연. 그런 것이로군요.”
여기 워다나즈가 거인들과 같이 어울리는 만큼 잘 알 거요. 말해봐라. 워다나즈. 거인들이 학생들과 만날 일이 있더냐?
“......”
이한은 해골 교장을 미친놈 보듯이 쳐다보았다.
그제야 해골 교장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제기랄.’
생각해보니 워다나즈도 아직 학생이었던 것이다.
“아니... 워다나즈 학생이... 거인을...?”
이파두르가 혼란에 빠진 것 같자 이한은 급히 진화 과정에 나섰다.
“실은 절 구해준 거인 분이 한 분 계시는데...”
이한은 거인 이쿠루샤가 자신을 구해준 이야기와, 체스 승부로 머리털을 내준 이야기(약간의 각색이 들어간) 등을 들려주었다.
그 덕분에 거인들과 친해지게 되어서 저번에 산맥파괴양을 기르는 것도 구경할 수 있었다고.
늙은 음유시인은 매우 감명 받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아주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아직 어린 마법사가 거인과 이리도 친해지다니.”
하하. 워다나즈가 참 사교적인 녀석이요. 녀석! 위험하니까 산맥에 가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거늘!
이한은 싸늘하게 해골 교장을 쳐다보았다.
해골 교장은 자신이 너무 선을 넘었다는 걸 깨달았는지 슬쩍 시선을 피했다.
이파두르는 그 뒤로도 숲길을 걸어 산과 호수, 그 위로 떠오른 달과 별을 감탄하며 둘러보았다.
유리처럼 맑은 호수의 수면을 노래하는 음유시인의 모습에 이한은 새삼스럽게 에인로가드의 장점을 깨달았다.
‘여기 경치가 생각보다 좋군!’
평소에는 ‘오늘 호수에서 물고기 몇 마리 확보해야 하지?’ ‘오늘 산에서 나물을 몇 바구니 채워야 하지?’같은 생각만 하고 있어서 몰랐는데 이렇게 보니 또 제법 괜찮았다.
옆을 보니 해골 교장이 하품을 하고 있었다.
다른 친구들이 봤다면 부러워서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이파두르의 노래를 옆에서 직접 듣게 되다니.
‘음. 나도 잘 모르겠다.’
노래를 잘 부른다는 건 알겠지만 별 관심이 없는 이한에게 이파두르의 노래는 그냥 잘 부르는 노래일 뿐이었다.
“그런데 워다나즈 학생에게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예. 경청하겠습니다.”
이한은 다른 생각을 한 게 들켰나 싶어서 최대한 겸손하게 말했다.
“고나달테스 공께서는 음악과 마법의 연관성을 연구하기 위해 저를 초대하셨는데... 아참. 이것부터 먼저 물어봤어야 했는데 실수했군요. 나이를 먹으니 기억력이 안 좋아져서... 어느 학파에서 배우고 계십니까?”
“......”
......
이한과 해골 교장의 눈빛이 동시에 흔들렸다.
‘말해도 되나?’
‘말해도 될 거 같다.’
“저는 에인로가드 내의 모든 학파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이 이야기 또한 흥미로웠는지 이파두르는 깜짝 놀라며 깃펜을 다시 꺼내들었다.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제게 아낌없이 관심을 기울여주시는 교수님들 덕분에, 힘들지만 어떻게든 성취를 얻고 있습니다.”
‘내가 시켰지만 진짜 미친놈이군.’
무슨 동전을 넣으면 아첨이 흘러나오는 장치마냥 튀어나오는 대답에 해골 교장은 경외심까지 들 정도였다.
혹시 이 제자를 에인로가드에 두려는 생각이 착각이었을까?
이런 혓바닥이라면 제국 정계에 보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러기에는 마법을 너무 좋아하지.’
해골 교장이 짧은 사이에 자신의 진로를 확정했다는 것도 모르고 이한은 계속해서 말했다.
“학생께서 에인로가드의 교수님들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다는 게 느껴집니다.”
“저는 정말 행운아입니다. 하하.”
“그래 보입니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음악에 대해 어느 정도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까?”
해골 교장이 ‘대충 좋아한다고 해줘라’라고 눈빛을 보냈다.
“이파두르 님께서 지은 저번 노래를 참 좋게 들었습니다. 흥겨운 리듬이...”
“흥겨운 리듬 말입니까?”
“...유행하는 요즘 세태에 역행하는 노래로 제국 사람들의 반응을 이끌어내는 건 이파두르 님만이 가능한 일일 겁니다.”
“아하.”
이한은 이파두르의 반응을 보고 즉시 말을 수정했다.
“관심이 있다니 저도 운이 좋게 됐습니다. 아시다시피 고나달테스 공께서 음악과 마법의 연관성을 연구하시는 동안 저도 열심히 도와드려야 하는데, 아무래도 학생 여러분들의 도움 또한 필요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이파두르 또한 오랫동안 음유시인으로 활동한 만큼 음악처럼 변덕스러운 게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같은 노래도 어느 날에 부르냐에 따라 그 느낌이 달랐으니 마법사들은 또 얼마나 곤란하겠는가.
필연적으로 연구를 하는 동안 여러모로 도와줄 다른 마법사들이 필요했다.
“혹시 도와주실 수 있으십니까?”
이파두르의 질문에 해골 교장은 매우 싫다는 듯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뭐지?’
이한은 의아해했다.
해골 교장 성격상 이한이 힘들건 말건 무조건 마법 배울 기회라면 등을 떠밀 줄 알았는데?
“만약 돕는다면 뭘 해야 합니까?”
“으흠. 조금 많이 귀찮으실 겁니다. 보수야 드리겠지만...”
“?”
이한은 보수를 준다는 이파두르의 말에 당황했다.
어라?
‘마법을 배우면서 보수까지 받는다고?’
그게 말이 되나?
“...아무래도 소중한 주말을 어느 정도 뺏기게 될 테니 말입니다. 고나달테스 공과 같이 밖으로 나가서 제국의 관현악단이나 합창단들을 만나보고 그들의 음악을 경청해 마법적으로...”
“도와드리겠습니다!”
“그게 정말이십니까?”
이파두르는 놀라워했다.
아무리 뛰어난 마법사라 하더라도 아직 어린 만큼, 주말에는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는 걸 더 중요시할 줄 알았던 것이다.
이를테면 외출해서 격구를 즐기거나 도시의 카페에서 체스를 두거나 등등.
“시간을 많이 뺏기게 되실 겁니다.”
“이파두르 님. 저는 인생을 마법에 바친 사람입니다.”
“하긴 그 많은 학파에 모두 소속되신 걸 보니...”
“......”
이한은 자기가 꺼낸 말에 자기가 상처받았다.
‘몇 개는 강제로 듣게 된 건데.’
“도와주신다면 정말로 기쁘겠습니다.”
...워다나즈가 가진 음악에 대한 재능 같은 것도 확인해봐야 하지 않겠소?
이한이 주말에 마법 공부하는 대신 쓸데없이 외출해야 한다는 사실이 해골 교장에게는 고통스러움 그 자체였다.
결실을 맺을지 알 수도 없는 음악 마법 때문에 소중한 시간을 낭비시켜야 한다니.
“괜찮습니다. 고나달테스 공. 재능이 있든 없든, 다 중요한 예시가 되어줄 겁니다. 게다가 이렇게 흥미로운 학생이 또 어딨겠습니까? 더 이야기를 듣고 싶군요.”
빌어먹을...
해골 교장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에인로가드에 대한 시선을 돌리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이파두르가 다른 곳에 흥미를 가져버리게 된 것이다.
하긴 저 호기심 많은 음유시인이 워다나즈 같은 녀석의 이야기를 관심가지지 않을 리 없었다.
“으음?”
“왜 그러십니까?”
“아. 문득 생각이 났습니다. 정령 홍수는 일반적인 홍수와 달리 자연적으로 사라지지 않을 텐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