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2화
‘이대로 내버려뒀다가는 귀찮아지겠군.’
해골 교장은 이파두르가 자꾸 이한에게 흥미를 가지기 시작하자 살짝 초조해졌다.
이파두르가 이한에게 흥미를 가지는 것 자체는 문제가 없었지만 그게 에인로가드와 엮이면 상당히 귀찮아지는 것이다.
-정령 홍수는 그래서 어떻게 해결된 겁니까?
-그건 워다나즈 녀석이...
-이 복도에는 아직도 얼음이 끼어있군요. 잠깐! 고나달테스 공. 이건 서리거인의 얼음 아닙니까!? 학교에 서리거인이 소환된 적 있는 겁니까!? 누가 해결한 거지요?
-그것도 워다나즈 녀석이...
원래라면 학생을 칭찬하는 노래는 만들어서 나쁠 게 없었다.
하지만 이한의 경우는 좀...
그 정도가 심했다.
‘1학년 학생이 번개 원소 마법에 성공했다’는 노래는 제국 사람들을 미소짓게 만들었지만, ‘1학년 학생이 서리거인의 왕과 결투했다’는 노래는 제국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들 것이다.
안 그래도 황제가 ‘좀 작작하게 오수’하며 눈총을 추고 있는데 수도에서 ‘1학년 학생이 서리거인의 왕과 싸웠다네~’같은 노래가 퍼지면...
녀석. 네 얼굴에 피곤함이 가득하구나!
“교장 선생님이 마법범ㅈ... 읍읍.”
해골 교장은 허공에서 뼈다귀 손을 불러와 이한의 입을 막았다.
이파두르 앞에서 ‘마법범죄자들과 맞서 싸우기 위해 비술을 배웠습니다’라고 말하는 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고생했다! 이만 들어가서 푹 쉬도록 하거라. 새벽에 고생시켜서 미안하구나!
“저 아직 괜찮은데요?”
아니야! 들어가서 쉬도록 해라!
이한은 해골 교장의 속마음도 모르고 의아해했다.
받은 만큼은 최선을 다해주려고 했는데...
‘왜 저러시지?’
일단 해골 교장이 필사적으로 들여보내려는 것 같아 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이파두르 님. 오늘 뵙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저 또한 영광이었습니다.”
늙은 음유시인은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인사치레가 아니라 진심이었다.
음유시인으로서 저렇게 흥미진진한 이야기보따리를 갖고 있는 학생이 흔치 않았던 것이다.
‘어떻게든 돌려보냈군.’
해골 교장은 속으로 시름을 덜어냈다.
워다나즈가 돌아간 이상 이파두르도 이제 에인로가드의 다른 곳에 관심을 가지리라.
...그건 그것대로 문제긴 했는데...
아. 우레걸음 교수.
저 멀리서 드워프 교수가 한 손에 달빛을 머금은 약초를 잔뜩 쥐고 걸어오는 게 보였다.
이파두르의 얼굴을 알아본 우레걸음 교수가 매우 반가워하며 말했다.
“혹시 이파두르 님 아니십니까? 초대한다는 말은 들었는데 정말로 오실 줄이야!”
......
해골 교장이 떨떠름한 눈빛으로 우레걸음 교수를 쳐다보았다.
물론 제국의 몇몇 눈치 빠른 명사들은 에인로가드에 초대 받아도 안 오는 경우가 있었지만, 그걸 저렇게 대놓고 말하다니.
다행히 이파두르는 저 말에 담긴 뜻까지 알아차리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다들 환영해주셔서 반갑습니다.”
이파두르는 우레걸음 교수의 환영에 기뻐하며 잔잔하게 주름 잡힌 미소를 지었다.
“학생 분들도 그렇고 이렇게 환영해주시니 어떻게 은혜를 갚아야 할지 몸 둘 바를...”
“오. 학생들도 만나셨습니까?”
“예. 워다나즈 가문의 학생이 길 안내를 도와줬지요.”
“아하. 워다나즈가. 여행 가서 씨 서펜트랑 싸운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참 부지런한 녀석입니다.”
“씨 서펜트 말입니까?!”
이파두르가 깜짝 놀라서 깃펜을 꺼내들었다.
그 모습에 해골 교장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하나 같이 도움이 안 되는 놈들 뿐이구나!’
* * *
주말 오후.
“워다나즈. 여기.”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상자를 들고 와서 이한 앞에 내려놓았다.
거울 너머의 상대한테 들은 재료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다녀온 것이다.
“별 일 없었나?”
“어? 없었는데.”
‘흠.’
이한은 살짝 놀랐다.
거울 너머의 상대가 생각보다 별다른 수작을 부리지 않았던 것이다.
‘수작을 부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검은 거북이 탑이나 흰 호랑이 탑은 정말로 아닐 가능성이 높다.’
이한은 흰 호랑이 탑 학생들 앞에서 은근슬쩍 흰 호랑이 탑을 욕했다.
“알겠다. 다들 고생했고, 이거 받아가라.”
거래 조건으로 약속했던 식료품을 가리키자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그걸 냉큼 챙겨...
...가는 대신 머뭇거렸다.
“?”
“워다나즈. 그...”
‘뭐지?’
평소 저런 식으로 쭈뼛거리는 놈들이 아니라 이한은 더 의아했다.
혹시 재료를 챙겨오면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솔직하게 말해봐라. 뭐라고 안 할 테니까.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이한의 친절한 말에 흰 호랑이 탑 친구들은 용기를 얻고 물었다.
“이파두르 님을 만났다면서?”
“이파두르 님의 일을 돕는다고 들었는데...”
“......”
딱!
“악! 솔, 솔직하게 말하라고 했잖냐! 뭐라고 안 한다면서!”
딱! 딱!
이한은 지팡이로 한 대씩 더 때린 다음 손을 내저었다.
“가라. 헛소리 하지 말고.”
안 그래도 난이도 높은 예지력 물약을 만들어야 해서 긴장하고 있었는데 헛소리를 하다니.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투덜거리면서 떠나고, 이한을 도와줄 진짜 친구들이 찾아왔다.
연금술 강의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두고 있는 든든한 친구들.
요네르는 의자를 끌고 와서 옆에 앉으며 물었다.
“참. 이파두르 님 오셨다면서?”
“...어, 이파두르 님을 알아?”
이한은 설마 싶은 얼굴로 요네르를 쳐다보았다.
요네르는 모를 줄 알았는데!
“당연히 알지...? 가문에서 가끔 초대한 적도 있어. 언니도 노래 좋아하시는데.”
“......”
이한이 작게 좌절하자 요네르가 왜 그러느냐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동지인 줄 알았는데.’
같이 제국 신문의 경제란만 보는 줄 알았지만, 메이킨 가문의 기본적인 수준은 워다나즈 가문의 기본적인 수준과 차원이 달랐던 것이다.
아산은 물론이고 흰 호랑이 탑, 심지어 불사조 탑 학생들까지도 이파두르에 관한 주제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니까. 등껍질에서 피리를 꺼내셨는데...”
“노래를 평가받았다고?”
“가사를 지적받긴 했지만 그래도 꽤 칭찬을 들었어. 형님과 누님한테도 보내려고.”
이한은 시무룩한 감정을 삼키고 재료를 가다듬었다.
황녀마저 이파두르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보니 정말로 유명하긴 한 모양이었다.
“워다나즈. 워다나즈.”
“?”
닐리아가 이한을 쿡쿡 찌르며 낮게 속삭였다.
“이파두르가 누구야?”
“...너밖에 없다, 닐리아.”
“왜, 왜 그러는데? 갑자기!”
* * *
재료를 다 모았다고 하더라도 난이도 높은 물약을 만드는 일은 쉬운 게 아니었다.
토요일을 꼬박 사용하고 일요일이 됐는데도 이한은 솥 앞에 매달려있었다.
“재료량이 걱정되네요.”
“더 이상 실패하면 확실히 그렇지.”
아주 조금의 오차도 없이 정확한 양의 재료를 넣고, 세밀하게 마력을 조절해서 주문을 외우고, 물약이 끓어오르면 정해진 방향대로 휘젓고...
아무리 이한이 천재적인 재능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런 모든 일들을 한 번에 성공할 수는 없었다. 이미 몇 번의 실패가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완전히 처음부터 해야 할 수준의 실패는 한 번도 없었다는 점 정도.
하지만 자잘한 실패도 반복할수록 재료가 줄어드는 건 사실이었다. 이한은 긴장한 얼굴로 다시 한 번 푸른 메아닐 꽃을 솥 안에 던져 넣었다.
그리고는 옆에 올려놓은 바실리스크 알에게 먹이를 줬다.
“......”
옆에서 보고 있던 시아나 사제는 어이가 없었다.
입으로는 긴장했다고 해놓고 저렇게 태연하게 알 먹이까지 챙겨주는 걸 보니 전혀 긴장한 것 같지가 않았다.
‘긴장한 거 맞아?’
그 때였다.
시아나 사제는 깜짝 놀라서 외쳤다.
“어... 어어?! 워다나즈 님! 워다나즈 님!”
“알고 있다. 시아나 사제! 걱정하지 마라!”
이한은 재빨리 동하소를 넣고 차가운 담수를 끼얹어서 솥 밖으로 물약이 끓어 넘치는 걸 막았다.
그러나 그걸로도 부족했다. 스스로 열을 만들어내는 물약은 마치 솥을 녹이기라도 할 것처럼 이글거렸다.
‘이럴 줄 알았다!’
하지만 이한도 몇 번의 실패를 경험한 덕분에 준비된 상태였다.
바로 냉기 마법을 시전하며 솥의 온도를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게 막아버렸다.
“냉기여...!”
원래라면 연금술 과정 도중에 생기는 이런 발열은 재료의 조합이나 특수한 시약으로 해결해야지 별도의 마법으로 해결하는 게 아니었다.
제대로 된 원인을 알지 못하면 마법을 써서 막는다 하더라도 계속해서 문제가 재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한은 알 바 아니라는 듯이 마법을 연사했다.
‘문제가 재발하면 다시 마법으로 막으면 그만이지!’
두뇌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마력량으로 승부를 볼 생각이었다.
“워다나즈 님!”
“다 막았다, 시아나 사제! 걱정하지 말라니까!”
“그게 아니라 알 보라고요! 알!”
“??”
이한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쩌저적!
바실리스크 알의 표면에 사방으로 금이 가있었다. 지금이라도 막 깨질 것 같은 금이었다.
쩍!
순간 알이 깨지더니 안에서 목도리 크기 만한 무언가가 기어 나왔다.
새끼 바실리스크는 이한을 보며 반갑다는 듯이 쪼르르 기어갔다. 마치 부모를 향해 달려가는, 갓 태어난 병아리 같은 동작이었다.
그러나 이한은 바실리스크의 예상과 다르게 반응했다.
“시아나 사제, 엎드려서 눈 감아라!”
이한은 새끼 바실리스크의 눈을 손으로 가리며 고함쳤다. 시아나 사제가 놀라서 호다닥 엎드렸다.
-......
새끼 바실리스크는 상처받은 눈빛으로 이한을 쳐다보았다.
* * *
잠깐의 소란 뒤에(작은 솥 세 개가 옆으로 넘어지고 궤짝 하나가 부서졌다), 이한은 새끼 바실리스크가 사안(邪眼)을 무조건 난사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자기가 적으로 인식하지 않으면 사안을 쏘아 보내지도 않는 것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눈은 가려놔야지.’
이한은 비단으로 새끼 바실리스크의 눈을 칭칭 감았다. 새끼 바실리스크는 매우 불만스럽다는 듯이 꼬리로 이한의 손목을 쳤다.
“시아나 사제. 괜찮나?”
“아. 네. 괜찮아요. 그나저나 진짜 바실리스크였군요! 흰 호랑이 탑 분들이 헛소리를 하시는 줄 알았는데...”
시아나 사제도 은근히 신랄한 편이었다. 이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교수님한테 부탁을 받아서 키우고 있었지. 그런데... 예상보다 너무 빨리 나왔는데.”
이한이 바실리스크 키우기의 권위자는 아니었지만, 이제까지 배운 것만으로도 바실리스크가 너무 일찍 나왔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러게요? 먹이를 너무 많이 주신 거 아닌가요?”
“정량을 지켜서 줬는데...”
“혹시 마력이 지나치게 강한 곳에 알을 두셨거나?”
“그런 곳에 알을 둘 리가 없...”
말하던 이한은 멈칫했다.
생각해보니 요즘 유난히 알을 많이 업고 다녔던 것이다.
“...내가 많이 갖고 있긴 했는데.”
이한의 말에 시아나 사제는 피식 웃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세요, 워다나즈 님? 워다나즈 님의 마력을 바실리스크 알이 흡수한 거라면 당연히 워다나즈 님이 눈치를 챘겠죠. 워다나즈 님이 천치도 아니고 그런 걸 눈치 못 챌 리가 없잖아요.”
“......”
이한은 살짝 상처받았다. 목도리처럼 칭칭 감긴 바실리스크가 위로하려는 듯이 이한을 토닥였다.
“그래도 너무 신경 쓰실 거 없어요. 빨리 나와도 덩치만 작을 뿐이지 자기 할 일은 다 할 수 있으니까.”
시아나 사제는 날카롭게 끝이 갈린 황동 주사기를 꺼내들었다.
식물이나 동물에 꽂아 넣어서 액체를 추출할 때 쓰는 연금술사의 도구 중 하나였다.
“자. 워다나즈 님. 붙잡고 계세요.”
“...실례지만 시아나 사제, 지금 뭘 하려는 거지?”
“어? 독액 추출하려고 기르신 거 아니셨어요?”
목에 감긴 바실리스크가 불길함을 느꼈는지 벌벌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