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4화
‘잠깐.’
이한은 갑자기 드는 불길한 생각에 몸서리쳤다.
설마?
“혹시 선배들 행사입니까?”
변환 마법 배우는 학생들의 행사인데 이한 친구들 중 아무도 모르면...
...선배들 전용 행사 아닌가?
볼라디 교수는 이한의 질문에 생각해본 적도 없다는 표정을 잠깐 지었다.
“아마 그럴 것 같군.”
“그걸 가장 먼저 확인해보셔야 했을 것 같... 르지 교수님께서는 흔쾌히 수락하셨습니까?”
교수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혹시 검 겨누고 협박한 건 아니겠지?’
이한은 살짝 의심됐다.
르지 교수는 교수들 중에서 약간 심약한 편에 속했다.
볼라디 교수가 검 겨누고 협박하면 ‘참가하시죠!’라고 나왔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교수님. 지금 든 생각인데, 르지 교수님께서는 흔쾌히 수락해주셨지만 선배들은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을까요?”
에인로가드 학생들은 은근히 배타적인 면이 있었다.
당장 흰 호랑이 탑 학생들도 이한이 기숙사에 침입했을 때 쩨쩨하게 화를 내지 않았던가.
학생들이 각자 소속된 탑 별로 쓸데없는 자긍심을 드러내듯이 아마 학파 또한 그러하리라.
그리고 학파 내에서도.
‘1학년 후배가 자꾸 기웃거리면 불쾌하게 생각할 것 같은데.’
괜히 모난 돌이 정 맞는 게 아니었다.
치유 마법이나 흑마법처럼 인력 없는 특이 학파가 아니고서야 후배가 나대는 걸 좋아할 리 없는 것이다.
“그걸 걱정했나? 괜찮다.”
“아. 선배들도 괜찮다고 하셨습니까?”
“불쾌하게 생각하는 학생이 있다면 훈계하겠다는 뜻이었는데.”
“......”
이한은 볼라디 교수가 차고 있는 검을 한 번 쳐다보았다.
‘혹시 검으로 찌르면서 훈계하는 건 아니시겠지?’
“...그냥 제가 열심히 해서 선배들 눈에 들어보겠습니다.”
볼라디 교수는 기특하다는 듯이 이한의 어깨를 두드렸다.
바실리스크는 불쾌하다는 듯이 소리를 냈다.
* * *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있는 뱀인 우로보로스는 연금술이나 변환 마법에서는 사랑 받는 존재였다.
영원한 순환을 상징하는 만큼 두 학파 마법사들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변환 마법사들의 행사 또한 <우로보로스의 날>이란 이름이 붙었다.
촤라락!
학생 한 명이 든 채찍이 뱀으로 변해 다른 학생의 손목을 휘감았다.
뱀이 손목을 휘감았음에도 불구하고 당한 학생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침착하게 주문을 외우자 뱀의 이빨이 그대로 솜으로 변해버렸다.
탕!
손목이 묶인 학생이 지팡이로 바닥을 치자 갑자기 바닥이 출렁이더니 늪으로 바뀌었다.
균형을 잃은 학생은 뱀 채찍을 놓치고 비틀거렸다. 재빨리 늪을 단단한 흙으로 변환시키려고 했지만 주문을 실패해 꿀로 변해버렸다.
“졌다.”
“좋은 승부였다.”
친구의 손을 잡고 일어난 학생은 강당에 모인 다른 변환 마법사들을 둘러보았다.
<우로보로스의 날>이라고 하면 거창하게 들렸지만 사실 규칙은 간단했다.
변환 마법만을 사용해서 각자의 성취를 보여주는 날인 것이다. 이런 행사는 다른 학파에서도 흔했다.
변환 마법만을 사용한 마법 결투, 새 변환 마법 연구 발표, 제국의 희귀 몬스터가 가진 특이한 변환 능력 등등.
“다들 그만 놀고 이리 와라. 외부인들 사고치는 거 막아야지.”
“나 외부인들 상대하는 거 싫은데 데스 나이트 시키면 안 되냐...?”
“안 돼. 참아.”
에인로가드의 변환 마법 학파 학생들은 강당 안을 활발하게 누비는 외부인들을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이런 행사에 외부 마법사들을 초대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고, 그 마법사들을 주인으로서 대접하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학생들은 그 당연한 일들이 너무 하기 싫었다.
외부 마법사들이 불쾌하거나 무례해서가 아니었다.
해야 할 과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서도 아니었다.
그냥...
정말 그냥 하기 싫었다.
“가위바위보 해서 지는 사람이 하지 않을래?”
“안녕하세요!! 에인로가드 학생 분들!!”
“으헉.”
펑!
외부에서 온 변환 마법사 한 명이 종족 변환 마법을 보여주며 다가왔다.
변환 마법사들이 자주 보여주는 특기로, 자신의 종족을 바꾸는 마법이었다.
그 마법 자체로는 특별할 게 없었지만 간단한 인사나 대화의 물꼬를 트는 용도로는 또 이만한 게 없었다.
변환 마법사는 잔뜩 신이 났는지 엘프에서 인간으로, 인간에서 개 수인족으로, 개 수인족에서 오크로 변신했다.
그리고는 기대 섞인 눈으로 학생들을 쳐다보았다. 학생들도 화답하듯이 뭔가 보여줄 줄 알았던 것이다.
“......”
“......”
그러나 학생들의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다들 우물쭈물하며 시선을 피했던 것이다.
“???”
“......”
“......”
“저기, 제가 뭔가 실수라도 했나요?”
“아, 아, 아니요!”
“반... 반갑습니다! 반가워요!”
“아... 네.”
변환 마법사는 머쓱해진 표정으로 물러났다.
학생들은 자괴감 가득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네가 대답해줬어야지...! 네가 가까웠잖아!”
“아냐, 널 쳐다봤다고. 네가 대답했어야지!”
예외가 있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변환 마법을 전공하는 마법사들은 쾌활하고 사교적인 성격이 많았다.
어쩌면 변환 마법의 특성과도 상관이 있는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에인로가드에서 변환 마법을 전공하는 학생들은 좀 특이했다.
이들은 매우...
내향적이었다.
“다들 그만해라. 아. 흑마법을 배웠어야 했는데...”
“나, 나 속이 좀 울렁거리는데 물약 하나만 더 줘봐.”
“안 돼. 자신감 물약 너무 마시면 완전히 망나니 된다.”
변환 마법 학생들은 그냥 빨리 행사가 끝나고 외부인들이 떠나기를, 그리하여 그들끼리 마법에 대해 떠들 수 있기만을 간절히 빌었다.
“무제 교수다!”
“뭐? 무제 교수?”
학생들은 고개를 돌렸다.
정말로 미친 교수가 1학년 학생을 데리고 들어오고 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지?”
“제자가 생겼다고는 들었는데...”
“못 도망가게 하려고 따라다니면서 감시하는 거 아니야?”
“설마 그럴... 그럴 수 있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의문이 다 풀리는 건 아니었다.
대체 왜 1학년 학생을 이런 행사 자리에 데리고 온 걸까?
아무리 봐도 무의미한 괴롭힘처럼 보였다.
“르지 교수님께서는 왜 허락해주신 거지?”
“실력이 뛰어나긴 하다던데. 흑마법 학파 친구한테 들었는데 워다나즈 가문 출신이래.”
“너, 워다나즈 가문에 대한 헛소문 믿는 거 아니지? 워다나즈 가문도 그냥 평범한 대귀족 가문이야. 무슨 다섯 살짜리 애한테 비술을 가르치는 가문이 아니라고.”
“평범하진 않지...”
학생들이 구석에서 중얼거리는 사이 이한은 볼라디 교수와 같이 걸어 들어왔다.
외부에서 온 변환 마법사들이 이것저것 보여주고 있었고(마법사 한 명은 자신의 팔을 박쥐 떼로 변신시켜서 박수갈채를 받고 있었다), 르지 교수는 가운데에서 질문을 받고 있었으며, 선배들은...
‘안 보이는데?’
선배들이 아예 안 보이자 의아해하던 이한은 이윽고 깨달았다.
“교수님. 어... 행사 때는 교장 선생님의 금제를 풀어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해골 교장이 선배들한테 인식 방해의 저주를 걸어놓는 건 알고 있었지만, 가끔씩 필요할 때는 풀어주지 않던가.
그리고 지금이 바로 필요할 때였다.
1학년 학생이 이런 행사에 참가했는데 선배들하고 대화도 못하면...
“왜지?”
“......”
“아. 이한 군.”
르지 교수가 이한을 보고 손짓했다. 그리고는 작게 말했다.
“미안합니다.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실 수 있죠.”
이한은 이해가 갔다.
볼라디 교수가 검을 겨누면서 협박하진 않았어도 검을 차고서 협박은 했을 테니까.
“정말 미안합니다.”
“...아니, 정말 괜찮은데요.”
르지 교수가 이렇게까지 사과하자 오히려 이한이 당황스러웠다.
데리고 온 교수가 나쁜 거지 허락해 준 교수가 나쁜 게 아니지 않은가.
“그래도 지금 이 행사에 참석한 마법사 분들은 다들 뛰어난 변환 마법사인 만큼 여러모로 배울 게...”
“가자.”
둘이 떠드는 사이 어딘가 사라졌던 볼라디 교수가 갑자기 돌아왔다.
“어딜 말입니까?”
“허락을 구했다.”
볼라디 교수는 턱짓으로 뒤를 가리켰다.
간이 결투장 위에서 대결을 펼치고 있던 변환 마법사들이 이쪽을 보면서 수군거리고 있었다.
-1학년... 학생 아닌가?
-잘못 본 거겠지.
-지금 설마 1학년 학생과 겨루라고 하는 건가요? 좀 위험하지 않아요?
‘이게 수치스러움이군.’
이한은 외부 마법사들이 걱정과 당황 섞인 시선으로 자신을 쳐다보자 창피함을 느꼈다.
볼라디 교수가 찾아가서 ‘제 제자와 대결 좀 해주십시오’ ‘제 제자와 대결 좀 해주십시오’ ‘제 제자와 대결 좀 해주십시오’하고 대답 나올 때까지 붙잡고 괴롭혀서 수락했지만, 막상 수락하고 보니 상대가 너무 어려서 당황한 게 분명했다.
사십대쯤 되어 보이는 드워프 마법사는 이한을 보고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
“혹시 1학년 학생 아닌가? 내가 에인로가드의 가르침에 무슨 참견을 하겠냐만은, 이런 대결은 좀 이른 거 같은데?”
“괜찮소.”
이한이 대답하기도 전에 볼라디 교수가 대답했다.
볼라디 교수가 돌아서서 관중석으로 걸어가자 드워프 마법사가 다시 속삭였다.
“혹시 교수한테 협ㅂ... 아니다. 내가 무슨 말을. 잊어줬으면 좋겠군.”
너무 무례한 말 같아서 다시 삼키는 드워프 마법사를 보며, 이한은 쓰게 입맛을 다셨다.
여기 있는 변환 마법사들은 다 좋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 괴로웠다.
* * *
“...규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시작하겠습니다.”
‘환장하겠군.’
상대와 마주한 이한의 머릿속은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마법 결투는 몇 번 해본 적 있었지만 오늘 이 자리는 조금 특이했다.
오로지 변환 마법만을 쓸 수 있는 자리.
문제는 이한의 변환 마법이 그리 폭넓지 않다는 점이었다.
기본적으로 강철 위주에 단순한 변환에, 색깔, 암석-모래 정도.
이걸로 노련한 변환 마법사한테 덤비는 건 포크를 들고 해골 교장에게 덤비는 것과 비슷했다.
아마 볼라디 교수는 이한이 최대한 다양하게 당하길 원하는 게 분명했다.
원래 승리보다 패배에서 더 배우는 게 많은 법.
최대한 다양하게 당하고 변환 마법 중 어떤 것들을 익혀야 하는지...
촤아악!
“!”
드워프 마법사가 갑자기 날개를 달고 날아오르더니 허공을 유영했다.
동시에 망토가 갑자기 천막처럼 펼쳐지더니 시야를 가렸다. 이한은 드워프 마법사가 다른 몬스터로 변하려는 것을 직감했다.
‘내버려두면 바로 끝난다!’
이한은 적의 망토부터 처리할 생각으로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러자 옆의 변환 마법사들 사이에서 탄식이 튀어나왔다.
“아!”
“그러면 안 되는데!”
“어허...!”
“아이구, 참!”
이미 드워프 마법사가 먼저 망토에 변환 마법을 건 만큼, 이한이 그 망토에 변환 마법을 거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상대의 마법에 간섭하는 건 몇 배로 어려운 일.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는...
팍!
“!?”
망토는 강철 갈고리로 변해 드워프 마법사를 향해 날아갔다.
히포그리프로 변신하려던 드워프 마법사는 발목을 잡는 강철 갈고리에 놀라 마법이 흔들렸다. 팔과 다리만 히포그리프로 변한 특이한 모습으로 끝나버렸다.
“와우! 저걸 저렇게 성공하다니!”
“대단합니다! 훌륭해요!”
‘...은근히 성가신데?’
이한은 관중석에서 감탄하고 있는 변환 마법사들이 슬슬 성가시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한을 걱정해주는 모습에 살짝 감동했는데, 마법 하나하나에 너무 크게 반응하니 은근히 성가셨다.
드워프 마법사는 재빨리 강철 갈고리를 풀려고 지팡이를 흔들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강철 갈고리는 풀리지 않았다. 마치 마력이 지독하게 고인 광석마냥 마법이 튕겨 나왔다.
노련한 변환 마법사도 경험하지 못한 상황에 드워프 마법사는 당황하며 착지에 실패했다.
원래라면 강철 갈고리에 묶인 상태로도 마법을 시전해서 이한을 제압하면 됐지만, 드워프 마법사는 깔끔하게 패배를 인정했다.
결투에서 이 정도로 빈틈을 드러냈으면 진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졌다, 졌어! 대단하군! 이걸 어떻게 변환시킨 거지? 에인로가드의 비술인가?”
이한이 어떻게 설명해야 상대가 덜 실망할지 고민하는 사이, 볼라디 교수는 실망을 감추고 다른 변환 마법사들을 붙잡고 말을 걸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