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6화
드워프 마법사가 총총걸음으로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허탈하게 지켜보던 이한은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잠깐...!’
지금 소매치기, 아니 소매넣기를 당했다고 허탈해 할 때가 아니었다.
“교수님. 지금 움직이셔야 합니다!”
“?”
이한은 재빨리 볼라디 교수의 등을 떠밀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에인로가드의 혹독한 환경으로 단련된 덕분에 다른 변환 마법사들의 행동이 예상되었던 것이다.
‘이 자리를 빠져나가야 한다!’
“무슨 일이지?”
“마법 전투에 대해 여쭤볼 게 있습니다! 여기서 여쭤볼 만한 질문은 아니고, 하여간 외부인들 못 올 만한 곳에서 여쭤보겠습니다!”
마법 전투라는 말에 볼라디 교수는 꽤나 솔깃했는지 순순히 발걸음을 내딛었다.
외부인들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복도 옆의 계단 샛길로 빠져서 내려가던 이한은 뒤에서 웅성거리는 말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어? 이쪽으로 갔던 것 같은데...
-잠깐. 여긴 왜 온 겁니까? 아까는 아닌 것처럼 말하셔놓고!
-하하, 같이 와놓고 서로 비난하지 맙시다. 사해가 동도인데!
-에이... 알겠습니다! 그럼 서로 같이 이야기하도록 하죠!
‘예지 마법을 배워서 정말 다행이다.’
예지 마법을 수련한 덕분에 미친 마법사들에게 잡히지 않고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한은 크라어 교수에게 속으로 감사를 표했다.
물론 이건 예지 마법과 상관없는 일이었다.
* * *
흑마법 강의를 듣기 위해 배낭을 챙겨 갖고 나온 가이난도는 이한의 얼굴을 보고 의아해했다.
“야. 그랄. 이한이 좀 이상한 것 같은데.”
“워다나즈는 원래 이상했다. 그리고 친한 척 말 걸지 마라. 지팡이로 찌르지도 말고.”
라파드엘은 가이난도가 지팡이로 찌르자 신경질을 내며 쳐냈다.
보통 다른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야 말 걸지 마’하면 ‘뭐? 감히 건방지게?’하면서 서로 대화 할 일이 없어지는데, 이 황자 놈은 ‘야 말 걸지 마’라고 말해도 그냥 무시하고 자기 할 말을 했다.
“피곤해보이잖아?”
“당연히 피곤하겠지. 마법을 그렇게 배우는데 안 피곤하겠냐.”
“아냐. 원래 그 정도는 괜찮았어.”
“......”
‘이 새끼 친구 맞아?’
라파드엘은 가이난도를 매우 미묘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친구가 마법을 그만큼 배우려고 하면 건강 생각을 해서 말려야지 ‘원래 저 정도는 괜찮았는데’라니.
저게 입에서 나오는 말인지 주둥이에서 나오는 소음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괜, 괜찮아?”
“응? 아. 외부에서 변환 마법사들이 와서 맞이하느라.”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던 이미르그는 무언가 위화감을 느꼈다.
‘으응?’
변환 마법사들이 외부에서 온다는 말도 들은 적이 없었고, 그걸 왜 워다나즈가 맞이하는지 이상했던 것이다.
게다가 무엇보다 오늘은 변환 마법 강의가 있는 날도 아니었다!
“변환 마법사들이 찾아왔다고? 그걸 왜 네가 맞이하지?”
라파드엘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질문을 던졌다.
가이난도는 한심하다는 듯이 친구를 보며 말했다.
“그것도 모르냐? 저번에 소환 마법사들이 찾아왔을 때도, 흑마법사들이 찾아왔을 때도 이한이 맞이했다고. 변환 마법사들도 그런 거겠지.”
“...아니... 잠... 야! 야!!”
가이난도가 자기 할 헛소리만 해버리고 강의실 안으로 들어가 버리자 라파드엘은 뒷목을 잡을 뻔했다.
너무 말도 안 되는 소리라서 어디부터 반박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떠나버리다니.
저 황자 자식은 사람 열 받게 하는 데에 특별한 재주가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콜록. 그래. 고생 많았다. 밖에서 의뢰를 해결하고 왔다면서?”
의뢰 이야기를 들었는지 모르툼 교수는 기침을 해대며 이한에게 앉으라고 손짓했다.
“예. 다른 교수님들도 같이 계셔서 그렇게까지 고생은 아니었습니다.”
이한은 입술에 침도 바르지 않고 가식적으로 말했다. 거의 본능에 가까운 대답이었다.
자신이 없는 자리에서 교수들 사이의 대화가 어떻게 돌지 알 수 없는 만큼, 조심하는 게 최선이었다.
“고생이 아니었다고? 콜록. 운이 좋았구나. 앞으로는 고생일 거다.”
“......”
“......”
친구들은 질렸지만 이한은 모르툼 교수의 말에 공감했다.
‘저 정도면 따뜻하고 친절한 걱정에 속한다.’
저번에 하고 온 의뢰의 난이도를 생각해봤을 때, 2학년쯤 되면 학생 혼자 내보내서 드래곤 사냥한 다음 거스름돈을 남겨오라고 할 가능성도 있었다.
“콜록, 콜록... 아무래도 외부에서 들어오는 의뢰는 은화를 주는 고용주의 기준에 맞춰야 하는 만큼 귀찮은 편이지. 그리고 너희들은... 음. 흑마법사고.”
“......”
“......”
친구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만약 선배들이 있었다면 ‘교수님 제발 2학년 되면 어차피 알 텐데 입 좀 다물어주세요’라고 했겠지만 모르툼 교수는 그냥 솔직하게 말해줬다.
아무래도 흑마법사들이 받는 의뢰의 난이도가 다른 학파 마법사들이 받는 의뢰보다 난이도가 높았던 것이다.
부여 마법 학파 마법사들이 ‘아티팩트 고장난 거 고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는 의뢰를 받을 때 흑마법 학파 마법사들은 ‘남부에 역병 지대 터졌는데 흑마법사들 좀 불러주십시오’라는 의뢰를 받는 게 현실이었으니...
“어, 그래도 골렘이나 소환수 잘 만들면 수요가 있지 않을까요?”
배낭에서 주워 온 뼈를 꺼내던 가이난도가 못 믿겠다는 듯이 물었다.
분명 저번에 이한은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이한. 뼈 갑옷 강화 같은 마법을 왜 공부해야 하는 거야? 사람들이 뼈 갑옷 강화 같은 걸 부탁할 것 같진 않은데.
-저런. 가이난도. 넌 잘 모르는 모양인데 요즘 모험가들 사이에서는 뼈 갑옷 강화 마법이 유행이다. 다들 걸어달라고 난리더군.
-뭐?! 정말로!? 그러면 혹시 뼈 창 강화도?
-그렇지. 흑마법사가 적어서 품귀 현상까지 일어날 정도야.
-그러면 스켈레톤 계열 소환수나 골렘은?! 그것도 인기 있어?
-그거야말로 가장 인기 있지. 저번에 물어보니 귀족들에게 뼈 골렘처럼 자기 자신을 자랑할 수 있는 물건이 드물다더군.
-그런 말 들어본 적 없는데?
-그야 뼈 골렘을 못 구한 게 부끄러우니까 관심 없는 척 하는 거지.
-아하!
“콜록. 그딴 골렘이나 소환수는 흑마법사들이나 쓰는 거지 마법 모르는 일반인들이 그런 흉측한 소환수에 왜 관심을 가지겠냐.”
“...???”
가이난도는 세상이 무너진 표정으로 이한을 쳐다보았지만, 이한은 못 들은 척 무시했다.
“이상한 거 팔 생각하지 말고, 어떤 의뢰에도 대응할 수 있도록 실력을 키워라. 콜록. 다들 뼈 꺼내라.”
학생들은 뼈를 꺼냈다.
지금 언데드 계의 소환수를 불러냈을 때 그 소환수를 추가로 강화하는 마법을 연습 중이었다.
“콜록. 워다나즈는 저쪽으로 가서 암흑 원소 연습해라.”
이한은 이제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고 움직였다.
‘하긴 언데드 강화는 이미 몇 번이고 하긴 했다.’
몇 번이나 성공적으로 했던 만큼 그걸 지금 다시 연습할 필요가 없었다.
“교수님. 오늘은 선배님들이 안 계신가요?”
가이난도의 질문에 모르툼 교수가 뜨거운 찻물로 목을 달래며 대답했다.
“걔네들도 자기 공부를 해야지... 이 정도는 너희들이 알아서 할 수 있어야 한다.”
‘과연.’
이한은 이해가 갔다.
그리고 이게 장기적으로 봤을 때도 이한에게 좋았다.
흑마법 학파의 부족한 인원을 생각해봤을 때, 이한은 2학년이 되고 나서도 1학년들을 돌봐야 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스스로 할 수 있는 마법들은 스스로 할 줄 알아야 해. 맞는 말이다.’
게다가 저번에 디레트 선배가 노트 너머에서 익명으로 정보 수집하려다가 마주친 적이 있는 만큼, 한동안은 거리를 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사람에게는 수치심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해골 교장이 아닌 이상에야 조금 민망하실 거다.’
“......”
“......”
모르툼 교수의 지시에 따라 옆문을 열고 들어간 이한은 가면을 쓰고 있는 디레트의 모습에 멈칫했다.
어라?
“교수님? 선배님들 없다고 하셨잖아요?”
“콜록. 그건 뼈 마법 이야기고... 암흑 원소 마법 연습을 혼자 시키겠냐?”
모르툼 교수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이한에게 핀잔을 줬다.
가이난도도 아니고 워다나즈 정도 되는 녀석이 저런 멍청한 질문을 할 줄이야.
암흑 원소 마법을 연습한다면 당연히 옆에서 봐주는 흑마법사가 있어야 했다.
“그, 그렇군요.”
“빨리 연습이나 해라. 넌 기말고사 때 암흑 원소도 확인할 거다.”
가이난도가 깜짝 놀라서 물었다.
“저희도요?!”
“콜록. 아니. 워다나즈만 추가로.”
“휴. 다행이다.”
“......”
“......”
이미르그와 라파드엘은 가이난도를 쓰레기 보듯이 쳐다보았다.
이한은 가면을 쓴 디레트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 선배님.”
“아닌데?”
“예?”
“선배 아니라고. 난 처음 보는 사람이야.”
이한은 가면을 쓴 처음 보는 까마귀 수인 마법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예... 처음 뵙는 흑마법사 님. 암흑 원소 마법에 대해 지도 편달 부탁드리겠습니다...”
“...잘 부탁하지...”
서로 어색한 분위기에서 암흑 원소 강의가 시작되었다.
* * *
처음 보는 까마귀 수인 마법사의 실력은 매우 뛰어났다.
“암흑 원소는 다양한 원소들 중에서도 가장 특이하고 이질적인 축에 속하는 원소지.”
“맞습니다.”
“그러므로 다룰 때 더욱 더 주의를 해야 하고, 그 자체로 사용하기보다는 다른 학파의 마법과 같이 결합하는 게 유리한 편이야. 변환 마법이나 부여 마법 같은 경우가 특히 그런데, 암흑 원소를 일시적으로 깃들게 하는 것만으로도...”
디레트는 암흑 원소 마법에 대해 기초적인 부분부터 짚고 들어갔다.
이한이 다른 교수나 해골 교장한테 직접 가르침을 받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런 부분을 소홀히 하는 건 디레트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선배님.”
“응. ...잠깐. 선배 아니라니까.”
“예... 처음 뵙는 흑마법사님.”
이한은 뒤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건 뭡니까?”
처음 보는 까마귀 수인 마법사의 뒤쪽에는 커다란 짚 인형들이 서있었다.
하나면 모를까 비슷하게 생긴 짚 인형들이 음산하게 서있으니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었다.
“아. 저건 연습용 짚 인형이야.”
“암흑 원소를 저 인형에 방출하는 겁니까?”
볼라디 교수와 비슷한 방식으로 기초 원소 훈련을 했던 만큼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물론 볼라디 교수는 짚 인형 대신 살아있는 사람을 상대로 만들었지만 크게 차이는 없지 않은가.
“방출...이 아니라 부여에 가까운데... 저주 인형을 만드는 거야.”
“저주 인형... 말입니까?”
이한의 목소리에서 심상치 않은 낌새를 느꼈는지 처음 보는 까마귀 수인 마법사의 말이 갑자기 빨라지고 길어졌다.
“이게 이상한 곳에 사용하려는 게 아니라 원래 암흑 원소 활용을 배울 때 많이 쓰이는 방식이야.”
암흑 원소는 그 특성상 형태 변환이나 방출 같은 직접적인 방식보다는 부여나 변환 같은 간접적인 방식으로 주로 쓰였다.
그 중 가장 많이 쓰이는 응용 마법 중 하나가 암흑 저주 인형이었다.
짚 인형에 암흑 원소를 단단히 깃들게 하는 것만으로도, 이 인형은 갖고 있으면 사람의 생기를 빨아먹는 저주 받은 아이템이 되는 것이다.
이 마법을 능숙하게 할 줄 아는 흑마법사들은 온갖 물건으로도 저주 받은 아이템을 만들 수 있었다.
“알겠지? 절대 이상하거나 제국법에 위반되는 그런 마법이 아니야. 후배. 듣고 있어?”
“방금 후배라고 하셨...”
“잘못 들은 거야. 자. 집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