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7화
처음 보는 까마귀 수인 마법사는 짚 인형을 양팔로 껴안아들고서 내려놓았다.
“대충 만든 것처럼 보이지만 나름 마법 처리가 되어 있는 튼튼한 물건이야.”
암흑 원소는 강력하고 독특한 특성을 갖고 있었지만 아무 물건에나 쉽게 깃드는 원소는 아니었다.
당장 비교적 난이도가 쉬운 물 원소만 해도 방수가 되는 물건들이 있는데, 암흑 원소는 그냥 깃드는 물건을 찾는 게 더 빠를 정도였다.
생기(生氣)와 반대되는 강력하고 독특한 특성이 이런 과정에는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엉성해 보이는 짚 인형도 나름의 마법적 처리를 거쳐서 만들어져야 했다.
“물론 그걸 감안해도 꽤 오래 걸리긴 해. 수십 번씩 반복해서 암흑 원소에 절여야 하거든.”
마법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마법은 화려함이었지만 사실 마법은 지루한 반복과 밑작업의 비중이 더 컸다.
간단한 저주용 짚 인형을 만드는 것도 생각보다 훨씬 오래 걸리는 일이었다.
“자. 해봐.”
“예.”
이한은 지팡이를 휘둘러 암흑 원소를 불러왔다.
눈앞에 짚 인형이 있는 만큼 오히려 평소보다 수월했다.
힘조절을 할 필요 없이 암흑 원소를 그대로 짚 인형 쪽에 불러와 흡수시키면 그만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렇게 짚 인형이 암흑 원소를 빨아들이는데도 불구하고 이한의 뒤쪽으로는 눈에 보일 정도로 지독하게 암흑 원소가 유형화(有形化)되며 기운을 뿜어냈다.
디레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창문을 열고 바람을 불러왔다.
암흑 원소를 전문적으로 다루고 있는 만큼 거기에 대한 저항력도 강한 디레트였지만, 이 후배의 앞에서는 방심할 수가 없었다.
순간의 실수로 모르툼 교수의 흑암관이 폐쇄될 수도 있는 것이다.
“마력 줄여. 지금도 충분해.”
“어. 그렇습니까?”
“네 뒤를... 아니다. 집중해.”
뒤를 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디레트는 그냥 환기를 더 시켰다.
괜히 집중력이 끊어졌다가 사고라도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콰아앗-
암흑 원소를 흡수한 짚 인형의 크기가 빠르게 줄어들며 쪼그라들었다.
거의 손바닥 크기로 줄어든 짚 인형을 보며 이한은 신기해했다.
“암흑 원소를 압축시키고 외부에 드러내지 않으려고 이런 구조를 가진 겁니까?”
“아니. 완성되어서 줄어든 거야.”
“......”
“......”
원래 몇 주일은 걸려서 만들어져야 하는 저주용 짚 인형이 바로 완성되었지만 디레트는 침착하게 대응했다.
“교수님! 옆의 던전에 잠깐 들어갔다 오겠습니다!”
“왜?”
“짚 인형이 완성됐습니다!”
“뭐? 콜록, 그게 왜... 아. 알겠다. 갔다 와라.”
모르툼 교수도 기침 몇 번 하고 침착하게 받아들였다.
이한을 제외한 흑마법사들은 모두 다 침착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원래 이렇게 빨리 완성되어도 되는 겁니까? 문제는...”
“없어. 그냥 암흑 원소를 과하게 주입해서 빨리 된 거야. 구조가 단순해서 딱히 탈 날 것도 없으니까 안심해도 돼.”
말을 하던 디레트는 멈칫했다.
“아니야. 탈 날 수 있다. 마력 적당히 집어넣어. 짚 인형 터지면 곤란해지니까.”
“마법 처리 된 튼튼한 물건이라고 하셨...”
후배의 질문을 디레트는 못 들은 척했다.
“참, 콜록. 디레트!”
모르툼 교수가 다시 문을 열고 디레트를 불렀다.
“던전 들어가기 전에...”
“방어 아티팩트 말하시는 거죠? 준비해놓겠습니다.”
1학년 학생을 데리고 지하 던전에 들어가는 만큼 방어 아티팩트 같은 장비는 필수였다.
“콜록. 아니. 2층 창고에서 아탈랍의 뼈 좀 가져다줘라. 방어 아티팩트는 알아서 하고... 솔직히 별 필요도 없을 텐데.”
“......”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후배 들어가는데 너무하신 거 아닌가?
디레트는 이한을 보며 말했다.
“너무 신경 쓰지 마.”
“방금 교수님께서 이름을 부르셨...”
“넌 지금 던전 들어가게 된 1학년이 왜 그런 것부터 신경 쓰는 거야?”
* * *
에인로가드 곳곳에 숨은 크고 작은 던전들은 해골 교장도 다 파악하지 못할 만큼 많았다.
워낙 마력이 강한 만큼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던전도 많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몇몇 학파 학생들은 공부하는 마법의 특성상 던전을 인위적으로 확보하거나 관리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흑마법 학파였다.
흑마법의 특성상 던전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알겠지? 다른 학파도 던전 관리하는 학파 있으니까 오해하지 말라고 하는 이야기야. 거짓말하는 거 아니니까 꼭 물어보고. 만약 없다고 말하면 그건 진짜 속이는 거야. 증명할 수도 있어.”
디레트는 마법 설명할 때와 달리 매우 구구절절하게 변명했다.
같은 던전 관리라 하더라도 왠지 모르게 흑마법 학파의 던전이라고 하면 조금 눈치가 보였던 것이다.
“마법사라면 당연히 던전을 관리해야죠. 밖에서는 구하기도 힘들 텐데요.”
던전은 그 장소와 환경에 따라 천차만별이었지만 기본적인 공통점도 있었다.
바로 마력이 과할 정도로 누적되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마력이 쌓여야 특이한 현상들이 일어나고, 그 현상들이 일어나야 마법사들이 이용할 수 있는 만큼 던전은 의외로 찾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렇지?”
디레트의 목소리가 살짝 안심한 듯 높아졌다.
이한은 선배를 응원하기 위해 말을 이었다.
“예. 제가 아는 교수님은 저 데리고 나찰아귀 던전에도 들어가셨습니다.”
“...그건 아니야.”
‘어라?’
정색하고 부정하는 디레트의 모습에 이한은 살짝 당황했다.
괜찮다고 위로한 거였는데...
디레트는 뭐라고 더 말하려다가 포기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말해서 뭐하겠는가.
어차피 교수들이 달라지지도 않을 텐데.
“여기 던전은 나찰아귀 같은 건 안 나오고 흡혈족제비가 나와. 구조는 단순해. 일직선 형태고, 그리 깊지 않아.”
디레트가 데리고 온 흑암관 옆 던전은 묘지 구덩이 근처를 입구로 사용하는 점을 제외한다면 상당히 평범한 던전이었다.
볼라디 교수가 죽일 각오로 데리고 간 던전들과 비교하면 숨겨진 지형이나 기습당하기 좋은 장소도 없었고, 그야말로 자연적으로 형성된 지하 느낌이 물씬 났다.
“흡혈족제비에 대해 알아?”
“예.”
그리 강한 몬스터는 아니지만, 살아 있는 존재의 기운을 감지하는 재주는 아주 탁월한 놈이었다.
몇몇 지역의 사냥꾼들은 아예 이 몬스터를 사냥개 대신 쓸 정도였으니...
“공격이 치명적이진 않지만 물리면 꽤 아파. 이 아티팩트를 착용해. 물리 역장을 형성해서 방어해줄 테니까.”
이한은 디레트에게서 아티팩트를 받았다.
그러나 아티팩트는 작동하는 대신 기묘한 불빛과 소음을 내며 오작동을 일으켰다.
“왜 이러지? 마법에 간섭할 만한 게 주변에 있지도 않은데?”
디레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한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가 아티팩트를 좀 많이 갖고 다녀서 그런 걸 수도 있습니다.”
“몇 개나 되길래? 2개?”
“...뒤에 0 하나 더...”
이 후배에 대해서는 정말로 놀라지 않겠다고 다짐했었지만 디레트는 다시 한 번 놀랐다. 어찌나 놀랐는지 등의 날개가 거꾸로 솟을 정도였다.
“아티팩트를 왜 그렇게 많이 차고 다니는데?!”
제국 동화에 ‘반지 수십 개를 차려다가 몸이 펑 터진 마법사’같은 이야기가 괜히 나오는 게 아니었다.
아티팩트는 많이 찬다고 좋은 게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서로 같이 찬다는 계산 하에 만들어진 아이템이 아니다보니 많이 찰수록 충돌이 잦아질 수밖에 없었다.
완충 없이 수십 개의 마법이 한 사람에게 몰려 있다고 생각해보면 이해가 쉬웠다. 몸이 펑 터지는 건 좀 극단적이더라도 잦은 오작동은 각오해야 했다.
“그런데 이게 대부분 마력 흡수 계열이라서 크게 문제는 없었습니다.”
이한은 디레트가 너무 걱정하는 것 같아서 빠르게 설명했다.
마력 흡수의 팔찌나 허리띠.
화염 흡수의 반지나 팔찌, 목걸이.
마력 발산 억제의 팔찌.
이런 아티팩트들은 숫자는 많아도 마법의 원리가 단순하고 다 비슷한 계열이라 별 문제가 없었다.
게다가 이한은 상황에 따라 몇 개는 또 빼고 다니지 않던가.
“그렇... 잠깐. 아직 남은 아티팩트들이 있는데?”
디레트는 괜히 고학년이 아니라는 듯이 남은 아티팩트들을 지적했다.
“이건?”
“투명화 마법 걸린 목걸이입니다.”
“이건 일반 투명화가 아니잖...? 이걸 어디서?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하여간 이건 괜찮아.”
디레트는 투명화 마법 목걸이에서 이상하게 해골 교장이 떠올랐지만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마법이 깔끔한 걸 보니 외부에 영향을 줄 물건은 아니었다.
“이건 수중 호흡의 반지입니다.”
“이것도 괜찮아. 수중 호흡 같은 마법은 별다른 충돌 안 일으키는 편이야.”
“이건 독 탐지의 은 숟가락입니다.”
“이걸 왜... 혹시 독살 시도 당한 적이 있지는 않지?”
“무슨 농담을. 이건 신호용 구리 반지입니다.”
“이것도 충돌 일으킬 아티팩트는 아닌데. 잠깐, 이건 누가 준 거야?”
“교장 선생님이요?”
“......”
“이건 만마의 팔찌입니다.”
“그래. ...잠깐, 뭐??”
아무리 봐도 범인 같아 보이는 아티팩트에 디레트는 경악했다.
어떤 미친 작자가 저걸 1학년한테 착용시켰단 말인가?
* * *
설명을 다 들은 디레트는 단호하게 말했다.
“교장 선생님이 진짜 정신이 나가셨구나.”
“선배님.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그래. 알거든. 교장 선생님이 진짜 정신이 나가셨다고.”
‘멋있다.’
이한은 고학년 선배가 보여주는 패기에 살짝 감동했다.
이게 선배 아니겠는가.
‘내가 선배가 됐을 때 교수 욕을 당당하게 할 수 있을까?’
“이걸 1학년한테... 휴. 됐다. 어쨌든 이 아티팩트는 그럼 같이 못 쓰겠네.”
“죄송합니다.”
“네 잘못은 아니고... 그리고 솔직히 너 정도면 흡혈족제비는 쉽게 막을 수 있으니까.”
디레트는 그렇게 말하고 돌아섰다.
“?”
이한은 그게 무슨 소리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처음 보는 까마귀 수인 마법사가 걷기 시작해서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아니...’
“이 던전에서 흡혈족제비를 키우는 이유는, 암흑 원소 관련해서 흡혈족제비만큼 확인하기 좋은 몬스터도 없어서야. 잠깐 거기 멈춰서봐.”
디레트는 이한을 뒤에 세운 다음 앞으로 걸어갔다.
몇 걸음 걸어가자 어둠 속에서 무언가 번뜩이더니 디레트에게 ‘쿵’하고 부딪쳤다.
“보이지? 바로 달려드는 거?”
“예.”
“이제 이걸로 실험해보자.”
디레트는 미리 만들어놓은 저주 인형을 앞에 던졌다.
그러자 흡혈족제비들이 보이지 않는 벽이라도 있는 것마냥 저주 인형에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생기를 민감하게 파악하는 놈들이라 암흑 원소로 인한 불길함도 그만큼 느끼지. 기본적으로 저 놈들이 다가오지 못하면 나름 성공적으로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어.”
말을 마친 디레트는 자리로 돌아온 뒤 이한에게 손짓했다. 후배의 차례라는 뜻이었다.
“......”
“......”
고요한 침묵.
이한이 앞에 서자 저주 인형을 아직 던지지도 않았는데도 흡혈족제비들이 조용해졌다.
누가 보면 아무 몬스터도 없는 던전인 것처럼.
디레트는 뭐라고 말하는 대신 이한을 돌아오게 했다.
“네 인형은 내가 실험할게.”
“감사합니다.”
“이런 거 가지고 감사하지 마...”
디레트는 후배의 저주 인형을 확인했다.
흡혈족제비들이 아까보다 더 멀리 물러나는 걸 보니 효과는 아주 확실했다.
“잘했어. 시간이 짧아서 살짝 걱정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네. 이 기초적인 과정을 확장시키는 게 암흑 원소 응용의 시작이야.”
암흑 원소가 깃든 저주 인형을 조정해 저주를 특화시키거나, 혹은 다른 곳에 깃들게 하거나.
디레트는 허공에 검게 물든 뼛조각을 던지더니 스켈레톤 전사들을 소환했다.
원래 모습과 달리 암흑 원소를 뿜어내는 스켈레톤 전사들을 본 이한은 감탄했다.
이건 다른 원소 마법들을 결합한 언데드 강화 마법이었다.
단순히 뼈를 덧대거나 단단하게 만드는 부분에서 끝내지 않고 다양한 속성으로 강화시키다니.
네크로맨서라고 불리려면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마법이 정교했다.
“훌륭하십니다! 이런 조합이라니!”
“...이게 그렇게 좋아? 너 진짜 좀 특이하다...”
디레트는 후배가 언데드 소환수에 보여주는 격렬한 반응에 당황했다.
기분이 나쁘진 않았지만, 보통 일반적으로 이런 언데드 소환수에 감탄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특히 귀족 가문이라면 더더욱!
“그러면 해보겠습니다.”
이한은 뼛조각을 시약 주머니에서 꺼냈다.
“?”
그 모습에 디레트는 의아해했다.
딱히 오늘 하라고 보여준 게 아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