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8화
‘으음.’
오늘 후배는 저주 인형을 만드느라 마력이나 정신력 소모가 꽤 심했을 터.
...생각해보니 마력은 아니긴 했지만, 하여간 정신력 소모도 중요한 문제였다.
마법이란 게 원래 고도의 집중을 요구하는 작업인 만큼 한 번 시전할 때마다 정신적 피로도가 안 쌓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디레트는 후배를 말리지 않았다.
시약 주머니에서 뼛조각을 꺼내서 열심히 고민하는 모습을 보니 또 말릴 생각이 들지 않아서였다.
‘괜찮...으려나?’
이한이 쌩쌩하게 뼛조각 꺼내서 이런저런 준비를 하는 걸 보니, 괜한 걱정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천재에게는 천재에 걸맞은 대우를 해줘야 하지 않는가.
천재에게 천천히 가라고 해봤자 별 의미 없는 방해일 뿐이었다.
‘그래. 내버려두자.’
“선배님. 뼛조각에 암흑 원소를 압축시키려고 하는데...”
“그거 원래 즉석에서 하기 힘들어. 내가 빌려줄...”
“이 정도면 어떻습니까?”
디레트는 고개를 들고 이한의 손바닥 위에 놓인 뼛조각을 쳐다보았다.
잠깐 고민하던 그 짧은 사이에 이 후배는 시약에 암흑 원소를 정확하게 압축해 넣은 것이다.
저주 인형도 그렇고 평소 공방이나 마탑에서 한세월 걸려서 해야 할 밑작업을 즉석에서 해결하는 모습에, 디레트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교수님들의 계속되는 개짓거리에 이 후배의 책임도 조금 있는 것 아닐까?’
아무리 에인로가드의 교수들이 대부분 미치광이라지만, 그냥 멈춰도 되는데 계속 한 걸음씩 더 진도를 나가려는 후배에게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지 않을까?
심지어 그 진도를 너무나도 잘 나간다면 더더욱 어느 정도 책임이 있지 않을까?
‘아앗. 내가 무슨 미친 생각을...’
디레트는 고개를 연신 흔들며 삿된 생각을 물리치려고 애썼다.
이 미친 마법학교에서 교수를 탓하지 않고 후배를 탓하려고 하다니.
아무리 이한이 마법에 뛰어난 모습을 보인다 하더라도 교수들의 행동이 정당화되지는 않았다.
사람의 마음이 있다면 ‘아직 괜찮은 거 보니 더 시켜야겠군’이 아니라 ‘지금도 많은데 좀 말려야겠군’이 나와야 했다.
달가닥달가닥-
“......”
방금 굳게 결심했지만, 디레트는 후배가 열 기가 넘는 암흑 스켈레톤 전사들을 가볍게 소환해내는 모습에 결심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 * *
스켈레톤 전사를 소환하는 것과, 암흑 원소로 강화된 스켈레톤 전사를 소환하는 건 그 원리 자체에서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소환 과정 중에 시약에 깃든 암흑 원소만 통제할 수 있으면 나머지는 언데드 계에서 소환된 언데드가 알아서 힘을 받아들였다.
물론 이한은 조금 더 과정이 어려웠다.
다른 네크로맨서들과 달리 언데드 계에서 소환하는 방식이 아닌, 밑바닥에서 직접 짜올리는 고대 사령술을 배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미 이한에게는 스켈레톤 전사들을 소환해서 싸웠던 경험이 많았던 데다가...
‘조금 불안정한가?’
뼈에 깃든 암흑 원소가 출렁이며 새어나오려고 하자 이한은 바로 마력을 때려 부어서 안정화시켰다.
암흑 원소 같은 불안정한 계열의 원소를 다룰 때 가장 위험한 상황이 폭주인 만큼, 이한의 이런 대응법은 아무도 따라올 수 없는 장점이었다.
‘고나달테스까지 소환할 필요는 없겠군.’
이한은 검은 기운을 음산하게 뿌려대는 스켈레톤 전사들을 보며 만족스러워했다.
암흑 원소는 접촉만으로 상대에게 데미지를 주는 특이한 원소.
일반적인 스켈레톤 전사는 노련한 적을 정면에서 이길 수 없었지만 이 스켈레톤 전사는 달랐다. 대응법을 모르면 순식간에 생명력을 뺏기고 당할 것이다.
‘소환 자체는 성공했으니, 이제는 합쳐서 하나로 만들면...’
이한은 소환한 스켈레톤 전사들을 해체하고 재조립해서 하나로 뭉칠 준비를 했다.
언데드 계에서 소환한 언데드한테 이런 난폭한 짓을 했다가는 바로 등에 칼을 맞을 수 있었지만, 고대 사령술은 이런 부분에서 훨씬 자유로웠다.
아직 스켈레톤 전사들을 다량으로 조종할 수 없는 이한에게 이런 과정은 필수적이었다.
스으윽-
“?”
해체하기 위해 지팡이를 휘두르려던 이한은 스켈레톤 전사들이 움직이는 모습에 깜짝 놀랐다.
‘뭐지?’
착각이 아니었다.
다시 한 번 지팡이를 휘두르며 마력을 움직이자, 스켈레톤 전사들이 따라서 움직였다.
“선배님! 스켈레톤 전사들이 움직입니다!!”
“...어? 응? 음... 스켈레톤 전사들이 당연히 움직이지?”
디레트는 이한이 왜 이러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살짝 당황스러워했다.
마치 제국 재무관에게 스카웃될 정도로 똑똑한 친구가 ‘헉! 1+1=2였어! 드디어 알았다!’하고 외치는 걸 본 기분이었다.
대체 왜 저런 기초적인 걸로?
“제가 원래 스켈레톤 전사들을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네가??”
‘아차. 너무 안일해보였나?’
디레트가 톤 높은 목소리로 놀라워하자 이한은 아차 싶었다.
선배 앞에서 너무 무능력하고 게으른 모습을 보이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다른 마법들과 같이 공부하다보니 일정이 뒤로 밀려났을 뿐 곧 해결할 생각이었습니다. 조금만 시간이 더 있었더라면 반드시...”
“...아, 아니. 그렇게까지 말할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냥 이한이 움직이지 못했다고 해서 놀란 거지, 다른 후배였다면 놀라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생각해보니 이한이 왜 저걸 움직이지 못했는지 알 것 같았다.
일반적인 언데드 계 소환 방식이 아닌 고대 사령술로 만들어 낸 스켈레톤 전사고, 그걸 열 기 넘게 동시에 조종하려고 했으니...
아무리 천재적인 재능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걸 유지했다는 게 더 놀라웠다.
‘마력량이 너무 많아서 이상한 걸 눈치 못 챈 것 같은데.’
보통 다른 흑마법사들이었다면 마력 고갈이나 탈진을 몇 번 겪은 다음 ‘아, 내가 무언가 잘못하고 있구나’하며 겸손을 강제로 배웠을 텐데, 이 후배는 그럴 기회가 없어서 그냥 억지로 계속 하다가 적응이 된 것이다.
“아마 암흑 원소가 깃든 탓에 통제력이 더 강해지고 세밀해진 이유도 있을 거야.”
디레트는 지팡이 끝으로 스켈레톤 전사를 살짝 밀며 설명했다.
단순히 마력으로 조종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암흑 원소까지 추가로 사용해서 조종하는 만큼, 소환수에 대한 통제력이 강해지고 세밀해지는 건 당연했다.
물론 그만큼 마력이 소모되고 마법의 난이도가 올랐지만 저 후배에게는 별 의미가 없었다.
마력 소모나 마법의 난이도 정도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으니까.
“그리고 아무래도 경험도 쌓였을 테고. 그 동안 계속 꾸준히 스켈레톤을 소환했을 거 아냐.”
“예. 저번에 조난당했을 때도 스켈레톤 전사들을 소환해서 구울의 왕과 싸웠습니다.”
“...으, 으응...”
당황하지 않으려고 했던 디레트였지만 후배가 스켈레톤 전사들을 데리고 구울의 왕과 맞붙었다는 이야기에는 표정을 관리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래도 되나?
“선배님. 움직일 수 있게 된 김에 조금 더 연습해보고 싶습니다만.”
“음. 알겠어. 여긴 좀 어려우니까 다른 곳으로 이동하자.”
디레트는 후배가 스켈레톤 전사들을 부리기 좋은 곳으로 길을 안내했다.
‘스켈레톤 전사들을 시험하기 좋으려면... 암흑 원소도 들어갔으니까 그것도 고려해야 하겠지. 잠깐. 숫자도 많으니까 그 점도 유의해야 할 텐데. 납골당 쪽 던전은 너무 난이도가 낮을 거고. 창고 쪽으로? 그것도 너무 쉬울까?’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동안에도 디레트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지금 자기 자신이 욕하던 교수들과 똑같은 함정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눈앞의 후배와 이야기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최면에 홀린 것처럼 무심코 난이도를 쭉쭉 올리게 되는 것이다.
* * *
쉭!
‘뭐지?’
머리 위로 날아오는 화살을 물 방패로 막아내며 이한은 의아해했다.
갑자기 던전의 난이도가 너무 올라간 것이다.
물론 맨 처음은 기본적인 암흑 원소 저주 인형을 테스트하기 위한 던전이었고, 지금은 그 다음 단계인 암흑 원소 스켈레톤 전사를 테스트하기 위한 던전이긴 했다.
그런 만큼 난이도가 오르는 건 당연한 일이었지만...
아까 흡혈족제비 던전과 지금 이 목인(木人) 던전의 난이도 차이는 예상을 완전히 뛰어넘었다.
던전의 문을 여는 순간,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나무로 만들어진 병사들이 딱딱 맞춰 돌아가는 톱니바퀴처럼 파상공세를 퍼붓기 시작한 것이다.
앞에 있는 목인들은 방패를 내세워 몸을 가린 채 마법사에게 접근했고, 가운데에 있는 목인들은 장창과 함께 덤벼들었으며, 뒤에 있는 목인들은 쇠뇌를 연신 발사해댔다.
일반적인 마법사라면 당황했을 테지만 이한은 던전에 들어오기 전부터 각종 강화 마법들을 걸어놓은 상태.
<고나달테스의 기민한 발걸음>과 <공간 인지>, 거기에 <배그렉의 일순 예지>까지 더해지자 경지에 오른 검사에 버금가는 반사속도가 나왔다.
전체적으로 강화된 신체 능력.
거기에 적의 공격을 감지하는 <공간 인지> 마법.
그 덕분에 더욱 정확도가 높아진 <배그렉의 일순 예지>가 미래를 경고했다. 이한은 옆으로 빠르게 달려 나가며 공격 범위에서 벗어났다.
“스켈레톤 전사들 앞으로. 방패여, 펼쳐져라!”
거대한 물 방패를 허공에 펼쳐서 좀 더 방어를 강화하며 이한은 암흑 원소로 강화된 스켈레톤 전사들을 전진시켰다.
‘제대로 움직인다!’
느리지만 묵직하게 대열을 맞춰서 전진하는 스켈레톤 전사들을 보니 솔직히 감동적이었다.
그 동안 마법이 실패하면서 쌓였던 고민이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쿵!
나무로 된 병사들은 상당히 강한 마법으로 만들어졌는지 스켈레톤 전사들과 부딪치자 힘에서 압도했다.
똑같이 방패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켈레톤 전사들이 조금씩 밀리는 게 보였다.
그러나...
“버텨라!”
이한은 믿고 있는 구석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암흑 원소와 접촉한 목인 병사들이 조금씩 느려지고 힘을 잃는 게 보이기 시작했다.
장기전으로 가면 이쪽이 유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버티고 버티면서 상대를 기어코 무너뜨린 이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디레트를 쳐다보았다.
“선배님?”
디레트는 옆에서 ‘잠깐, 내가 여기를 왜 데리고 왔지? 너무 난이도 높지 않나?’하고 생각하고 있다가 깜짝 놀라서 대답했다.
“응?”
“감사합니다. 그런데 여긴 흑마법 학파의 던전인가요?”
“눈치가 빠른걸. 여긴 부여 마법 학파가 관리하는 던전이야.”
“아. 어쩐지.”
저 정도 되는 나무 병사들을 인공적으로 유지시키는 건 상당한 난이도의 마법이었다.
부여 마법 학파가 관리하는 던전이라고 하니 납득이 갔다.
“선배님께서는 부여 마법 학파하고도 친분이 있으신 겁니까?”
“아니. 걔네는 사교 활동을 잘 안 해.”
“그러면 어떻게? 아.”
“알겠어?”
“저희 혹시 몰래 들어온 겁니까?”
이한이 알겠다는 듯이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디레트는 어이가 없어서 잠깐 멈췄다가 대답했다.
“...버두스 교수님한테 말하고 들어온 거지. 너도 부여 마법 들으니까.”
“아.”
이한은 살짝 머쓱해졌다.
“확인해본 것 같은데 돌아갈까?”
“조금만 더 확인해 봐도 되겠습니까?”
“여기서 더?”
디레트는 날개를 흔들며 의아해했다.
이미 스켈레톤 전사들을 전진시키고 후진시키며 지휘를 확인했는데 뭘 더 확인하려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마력도...
‘아니. 마력은 괜찮겠지.’
뼈 계열 무기나 활용법을 확인하려는 걸까?
“더 할 수 있겠어?”
“예.”
“그래. 그럼.”
디레트의 허락이 떨어지자 이한은 언데드들을 이끌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굉음이 터져 나왔다.
꽝!!!!!
“...?!?!!!”
디레트가 경악해서 바라보고 있는 사이, 이한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뼈 폭발로 박살난 목인 병사들의 진형을 향해 남은 스켈레톤 전사들을 전진시켰다.
‘이 정도 위력의 폭발만 일어나면 방패 꼈을 때 어떻게든 버틸 수 있겠군.’
스켈레톤 전사 하나가 소모됐지만 그럴 가치가 있었다. 암흑 원소까지 섞인 폭발에 목인들의 속도가 더욱 느려졌다.
“선배님. 독 원소도 조합해보려고 하는데 혹시 가르침을 주실... 선배님? 선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