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9화
왠지 디레트와의 거리가 멀어진 것 같았다. 이한은 다시 한 번 선배를 불렀다.
“선배님?”
“뼈 폭발 마법을 연습할 줄은 몰랐는데...”
뼈 원소를 전문적으로 수련한 흑마법사들은 다대다(多對多) 전투에서 끈질긴 위력을 발휘했다.
각종 언데드를 강화하는 것은 물론이고 직접적인 공격과 수비까지.
특히 뼈 폭발까지 가면 이제 적들이 가장 우선적으로 제압하려고 드는 흑마법사가 됐다.
한 번 제대로 터지면 그 파괴력이 실로 어마어마했던 것이다.
하지만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는 법.
막대한 마력 소모량을 제외하더라도 뼈 폭발 마법은 쉽게 쓰기 힘든 마법이었다.
당장 근거리에서 잘못 시전할 경우 흑마법사가 쓰러질 수 있었고, 그렇다고 최대한 원거리에서 시전하려고 하면 난이도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갔다.
거리가 멀어질수록 마법사의 간섭능력은 떨어지는 것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언데드 계에서 소환된 소환수들 상대로 뼈 폭발을 일으키는 것이었지만, 소환수들도 이런 자폭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후배는 그런 제약을 고대 사령술과 막대한 마력량으로 해결했다.
본인은 물 방패로 몸을 보호하고 가차 없이 언데드를 폭발시키는 모습은 어지간히 노련한 흑마법사들도 따라 하기 힘든 모습이었다.
...그런데 1학년 때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아. 모르툼 교수님이 뼈 폭발 연습하라고 하셨습니다.”
“음... 그러니까 뼈 폭발 연습하라고 한 게... 아니다.”
디레트는 ‘보통 뼈 폭발 연습을 하라는 건 공방에서 조심스럽게 하라는 걸 의미하지 던전에서 실전으로 연습하라는 게 아니야’라고 말하려다가 후배를 위해서 꾹 참았다.
“뼈 폭발은 가장 사고가 많이 일어나는 마법이고, 너는 거기에 암흑 원소까지 조합해서 쓰니까 더욱 주의해야 해.”
“예. 방패는 무조건 하나 이상 두고, 최대한 거리를 벌려서 소환수만 자폭시키는 식으로 사용하겠습니다.”
디레트의 언데드 소환수가 두려움에 떠는 게 연결로 느껴졌다. 디레트는 언데드 소환수를 달랬다.
-나는 저렇게 자폭시킬 생각이 없으니 안심해.
“그래서, 독 원소와 조합해보고 싶다고?”
“네.”
사실 희귀하고 다루기 까다로운 암흑 원소와 조합하는 게 특이한 경우였지, 원래 뼈 원소는 다른 원소들과 조합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 중 대표적인 원소가 바로 독 원소.
다양한 독과 결합된 뼈 원소의 위력은 살벌한 위력을 자랑했다.
“정석적인 방법이지. 지금 네가 쓸 수 있는 독의 가짓수가 얼마 되지 않겠지만 미리 연습해둬서 나쁠 건 없어.”
디레트는 방금 했던 생각은 잊어버리고 또다시 자연스럽게 마법 이야기를 시작했다.
“대신 독 원소를 활용하려면 몇 가지 유의점이 있는데, 뼈 폭발 마법의 위력도 훨씬 줄여야 하고... 한 번 줄여봐. 아냐. 더 줄여야 해. 다시! 아니, 왜 위력을 줄이는 건 못하는 거야? 그게 제일 쉬운 건데!”
* * *
후배와 함께 버두스 교수의 목인 던전을 싹 쓸어버린 디레트는 흑암관으로 돌아왔다.
먼저 강의를 끝낸 모르툼 교수는 살덩이 골렘의 파츠를 짜맞추다가 디레트가 돌아오자 질문을 던졌다.
“콜록. 생각보다 늦게 돌아왔구나. 흡혈족제비 던전에서 무슨 문제라도 있었던 거냐?”
“아. 아니요. 목인 던전에 가서 암흑 원소와 조합된 사령술을 연습했습니다.”
“...?”
모르툼 교수는 한참 동안 가만히 생각하다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물었다.
“콜록, 그냥 저주 인형 만들라고 했는데 그렇게 혹독하게 가르칠 필요가 있었던 거냐? 워다나즈가 네 심기라도 거슬렀나?”
“네? 아뇨! 무슨... 어?”
디레트는 깜짝 놀라서 부정하려고 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확실히 이상했다.
어...
어라??
‘내가 왜 그랬지??’
* * *
가이난도는 오랜만에 이한의 기분이 좋아보이자 괜히 같이 신이 났다.
평소에는 피곤에 찌든 얼굴로 ‘에인로가드와 교수들이 같이 껴안고 저 호수로 사라져줬으면 좋겠군’하고 중얼거려서 가이난도를 놀라게 만들었는데, 오늘은 밝은 얼굴로 솥의 국자를 휘젓고 있었다.
“오늘 무슨 일이라도 있어?”
“아. 가이난도. 언데드를 여럿 조종하는 데에 성공했거든.”
“......”
가이난도는 인상을 찡그리며 이한을 쳐다보았다.
그런 이유 때문에 저렇게까지 좋아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언데드 조종이 그렇게 기쁠 건 아니지 않나...”
“가이난도. 흑마법사가 언데드를 여럿 조종할 수 있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거냐?”
언제나 자신을 보호할 전위를 데리고 다녀야 하는 다른 마법사들과 달리, 언데드 소환에 능숙한 흑마법사들은 혼자서 다녀도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그 말은 즉 의뢰를 받아도 다른 모험가들과 보상을 나눌 필요 없이 혼자 다닐 수 있다는 뜻이었다.
“엥... 하지만 쓸쓸하잖아.”
“가이난도. 마법은 원래 쓸쓸한 거야.”
“그리고 교수님이 흑마법사 혼자서 언데드 여럿 데리고 다니면 신고 당한다던데.”
“......”
가이난도가 아픈 곳을 찌르자 이한은 멈칫했다.
은근히 그럴듯한 지적이었던 것이다.
‘밖에서는 던전 들어가서 소환해야겠군.’
에인로가드 내에서야 언데드 소환해서 데리고 다녀도 ‘흑마법 학파 학생인가보군’같은 반응이 나왔지만 밖에서 그러고 다니면 ‘꺄아악! 경비! 경비!!’같은 반응이 나올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면 나 초콜렛 하나만 줄래?”
“아니. 식사하기 전에 간식으로 배 채우지 마라.”
이한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가이난도는 투덜거리며 식탁에 가서 앉았다.
불사조 탑 앞에 놓인 길쭉한 나무 테이블 근처로 학생들이 벌써 모여 있었다.
불사조 탑 사제들은 물론이고 푸른 용의 탑 친구들, 그리고 검은 거북이 탑과 흰 호랑이 탑 학생들 몇 명도...?
“너희는 왜 있냐?”
이한은 당황해서 물었다.
홍수 때야 같이 식사를 했다지만 홍수도 끝났는데 왜?
“후. 워다나즈.”
“?”
흰 호랑이 탑 학생 한 명이 인상을 쓰며 다가왔다.
그리고 이한의 손에 희귀한 광령묵(光靈墨) 조각을 뇌물로 쥐어주었다.
“잘 부탁한다.”
“...그, 그래.”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눈을 찡긋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이한은 받은 뇌물을 주머니에 넣으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뭐하는 놈들이지 저거?’
“워다나즈. 우리도 잘 부탁한다.”
“아니. 너희 탑에서 식사하면 되잖아. 오늘 식사는 딱히 특식도 아닌데.”
“맛이 없어...”
“......”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절절하게 담겨있었다.
냉정한 이한도 압도될 정도로.
“그... 그래. 앉아라.”
아까 한 말이 빈말은 아니었다. 오늘 저녁 식사는 꽤 간단하게 준비했던 것이다.
남은 야채와 닭고기를 대충 잘라 넣고 푹 끓인 스튜와 버터 토스트, 사제들이 잡아 온 새고기 꼬치구이와 주먹밥 정도가 다였는데...
후루룩 짭짭!
“야. 누가 흰 호랑이 탑 가서 신고 좀 하고 와라.”
“내가 하고 올게.”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걸신들린 것처럼 처먹는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의 모습에 경악했다.
이한은 그러거나 말거나 식사에 집중했다. 오늘 식사 이후에도 할 일이 많았다.
“워다나즈. 워다나즈.”
“어. 닐리아.”
이한은 닐리아의 부름에 시선을 돌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새고기 꼬치구이를 손에 들고 먹던 닐리아가 고기를 따로 빼서 나이프와 포크로 먹고 있었다.
“왜 손으로 안 먹고?”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 난 원래 이렇게 먹었는데?”
옆을 보니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전부 다 나이프와 포크를 쓰고 있었다.
“그냥 손으로...”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소문 들었어?”
“무슨 소문?”
“교수님이 차원문을 준비하고 계신데. 저번보다 더 강한 소환수와 계약할 수 있도록.”
“!”
반가운 소문이었다.
제국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들만 모았다고 하더라도 아직 1학년인 학생들은 부족함이 많았다.
그런 학생들의 부족함을 채우기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소환수였다.
“잘 됐군. 더 강한 언데드와 계약할 수 있으면...”
“어? 아니... 정령 이야기였는데...”
닐리아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소환 마법을 듣는 1학년 학생들을 위해 밀레이 교수가 새로운 정령계를 찾아 연결을 준비한다는 소문이었지, 언데드 계는 들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언데드 계는 안 열어주신대?”
“정령만 이야기 들은 것 같은데.”
닐리아는 살짝 이한의 눈치를 봤다.
“언데드 계도 열어주시겠지. 저번에는 열어주셨잖아.”
“그... 그렇지! 물론!”
닐리아는 이한의 말에 동의하며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제발 밀레이 교수님이 언데드 계도 준비해주셨기를!
* * *
“최근 접촉 가능한 괜찮은 정령계를 찾았습니다. 확인해보니 학생들도 안전하게 돌아다닐 수 있을 정도더군요.”
밀레이 교수는 흔들림 하나 없는 꼿꼿한 자세로 학생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한은 손을 들고 물었다.
“교수님. 질문 있습니다.”
“무슨 질문입니까?”
“혹시 언데드 계도...?”
“언데드 계는 이번에 없습니다.”
“......”
이한의 표정에 낙담이 서렸다. 옆에 있던 닐리아는 안절부절못하며 속삭였다.
“꼭, 꼭 언데드하고 계약해야 할 필요는 없잖아? 정령하고 계약할 수도 있고!”
“그래 뭐... 길가다가 황금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보물창고를 발견해서 제국 최고의 갑부가 될 수도 있겠지.”
“......”
닐리아가 말문이 막힌 사이 밀레이 교수가 이한을 보며 말했다.
“이한 학생. 정령하고 계약할 수 없다고 섣불리 단정 짓는 건 편견입니다. 물론 정령의 습성은 일반적으로 마력 많은 존재를 피하게 되어 있지만, 특이한 특성을 가진 정령들도 있으니 말입니다.”
교수의 말에 살짝 기운이 돌아온 이한이 다시 물었다.
“그럼 저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정령계를 뒤지면 괜찮은 정령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때로는 포기도 중요한 법입니다. 이한 학생. 못 찾더라도 포기할 줄 알아야죠.”
“......”
“......”
밀레이 교수의 솔직한 진실에 이한은 닐리아를 다시 쳐다보았다. 닐리아는 급히 고개를 책상 위로 박고서 책을 읽는 척을 했다.
“정령계에서 발견할 수 있는 정령은 다음과 같다...”
* * *
준비를 마친 학생들이 차례대로 마법진을 통해 정령계로 넘어가고, 이한의 차례도 마침내 돌아왔다.
뒤에 있던 닐리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같이 들어갈까?”
“됐어. 괜히 같이 가면 너도 못 만날걸.”
“......”
닐리아도 사실 그걸 걱정하고 있었기에 바로 반박하지 못했다.
‘물어보면서 수락할까봐 내심 걱정하고 있었군!’
표정관리 못하는 닐리아를 보니 물어보면서 ‘수락하면 어떡하지?’하고 걱정했던 게 분명했다.
“먼저 들어간다. 나중에 보자고.”
이한은 닐리아를 그만 괴롭히고 마법진을 향해 발을 디뎠다.
강의에서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게 아쉽긴 했지만 원래 모든 강의에서 완벽한 성적을 낼 수는 없는 법 아니겠는가.
물론 오늘 강의에서 본 손해를 다른 강의에서 벌충해야 하는 만큼 더욱 더 지독하게 공부해야하겠지만, 이한은 받아들인 상태였다.
‘오늘은 그냥 마음을 비우고 돌아다녀봐야겠군.’
팟!
부유감과 함께 영혼이 다른 계로 이동하는 감각.
아무것도 없이 탁 트인 바다와 함께 짠 바닷물 냄새가 몰려왔다. 마치 외딴 섬에 홀로 떨어진 것 같았다.
‘바다나 물, 해양 계열 몬스터?’
환경은 다른 계의 존재들과 교섭하려는 마법사들에게 가장 일차적으로 주어지는 단서였다.
노련하고 박식한 소환 마법사들은 주변의 환경만을 보고서 정령의 이름까지 맞추기도 했다.
첨벙!
저 멀리 수면 위에 돌고래처럼 생긴 정령 하나가 고개를 내밀었다.
이한은 조심스럽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돌고래 선생님?”
돌고래는 대답 대신 수면 밑으로 들어가더니 다시 나오지 않았다.
“......”
이한은 씁쓸해졌다.
‘그냥 힘으로 잡아볼까?’
정령계에서 정령과 힘으로 승부하는 것만큼 위험하고 무모한 짓도 없었지만 이렇게 정처 없이 말을 거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
파아앗-
“?”
이한이 정령 홍수를 막고서 우피눔에게서 받았던 문양이 빛나기 시작했다.
동시에 눈앞의 바다가 썰물처럼 양옆으로 갈라지더니 바닷길을 드러냈다.
마치 들어오라는 신호 같았다.
‘정령이 은혜를 갚는구나!’
이한은 벅찬 감동을 느꼈다.
역시 하찮은 미물도 은혜를 갚는데 우피눔 정도 되는 대정령인 만큼...!
* * *
의자에 앉아 있던 밀레이 교수는 마법진이 출렁이는 걸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
복잡한 술식과 가호로 학생들을 보호하는 마법진인 만큼 출렁이는 게 좋은 신호일 리 없었다.
‘뭐지?’
확인해보니 학생 중 한 명이 마법진으로 보호 받고 있는 영역을 벗어나 밖의 영역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한 학생이군.’
아직 누군지 확인하지 못했지만 밀레이 교수는 바로 범인을 확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