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법학교 마법사로 살아가는 법-510화 (510/687)

510화

원래 밀레이 교수는 직감이나 감성이 아닌 계산과 이론을 선호했지만, 이번만큼은 별도의 확인 없이 확신하기로 했다.

이 정도로 확신이 들기도 드물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현실이 아닌 다른 계에서 멋대로 영역을 벗어나는 건 원래 하고 싶다고 해서 바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이계의 존재들은 침입자에 대해 관대하지 않았다.

그나마 가장 협상하기 쉬운 정령들도 침입자의 태도가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순간 난폭함을 드러냈다.

그런 만큼 다른 계에서 영역을 벗어나 움직이려면 아주 신중한 준비가 필요했다.

주변의 지도를 작성하고, 그 인근의 존재들과 협상하고, 넘어가려는 영역의 우두머리에게 연락을 보내고...

이런 일들은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금세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정령계의 강력한 존재가 초대라도 한 게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

*         *         *

“?”

아래로 드러난 바닷길을 통해 걸어가던 이한은 위화감을 느꼈다.

점점 주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드러난 심해의 바다 너머로 강력한 정령들이 난폭하게 마력을 내뿜으며 지나갔다.

단단하게 벽처럼 고정된 바닷길이 아니었다면 대번에 싸움이 일어났을 것 같았다.

‘이상한데?’

처음에 이한은 이 문양이 일종의 소개장인 줄 알았다.

우피눔이 자신의 이름으로 다른 정령들에게 ‘이 사람은 믿을 만한 사람이니, 마력이 너무 많아도 의심하지 마시오’라고 소개한 문양인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돌아가는 분위기가 이상했다.

만약 그런 소개장이 맞았다면 최소한 몇몇 정령 정도는 나와서 호의적인 반응을 보여야 하지 않나?

그런데 그런 존재는커녕 점점 더 주변의 분위기만 험악해지고 살벌한 존재들만 어슬렁거리고 있었으니...

이한은 눈을 감고 볼라디 교수의 가르침을 떠올렸다.

수상하다 싶으면...

‘먼저 쳐라!’

“일어나라, 뼈로 이루어진 전사들이여!”

바로 스켈레톤 전사들이 일어났다.

어제 배운 암흑 원소를 뿜어내는 스켈레톤 전사들이 이한을 둘러싸고 보호했다.

그러자 바다 벽 너머를 헤엄치던, 심해어를 연상시키는 정령들은 더욱 더 난폭함을 드러냈다.

쿵, 쿵!

물로 된 벽을 부딪치며 으르렁거리는 모습이, 서로 가로막는 힘만 없으면 당장이라도 달려들었을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촤아악!

“번개여!”

결국 물이 튀는 소리와 함께 벽을 뛰어넘은 놈이 나왔다.

바닷길 위로 초롱아귀를 연상시키는 겉모습을 가진 정령이 물보라를 일으키며 달려들자, 이한은 주저하지 않고 번개를 갈겼다.

속성적으로 약점일 터인데도 심해어 정령은 멈추지 않고 저돌적으로 돌진했다. 오히려 이한을 향해 물을 발사했다.

콰아악!

‘보통이 아니다!’

피부로 압력이 느껴질 정도로, 상대는 강력한 정령이었다.

애초에 이한을 보고 도망가지 않고 투지를 불태울 정도면 보통 급의 정령이 아닌 것이다.

이한은 강화된 감각과 미래 예지로 재빨리 공격을 피했다.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간 물의 기둥이 굉음을 내며 바닥을 찢어발겼다.

상대가 자신보다 몇 수 위의 존재라는 걸 확실하게 느낀 이한은 혀를 찼다.

‘다시는 정령을 믿지 않겠다.’

우피눔을 믿고 발을 디뎠다가 이 무슨 고생이란 말인가.

그러나 정령에 대한 배신감은 둘째치고 일단 눈앞의 적부터 막아야했다. 이한은 스켈레톤 전사들을 전진시켰다.

심해어 정령은 가당치도 않다는 듯이 바로 스켈레톤 전사를 집어삼켰다.

-?!

일반적인 스켈레톤 전사가 아닌, 암흑 원소의 기운을 뿜어내는 스켈레톤 전사가 안에서 타격을 줬다.

심해어 정령이 멈춘 사이를 놓치지 않고 이한은 바로 주문을 완성시켰다.

“몰아쳐라, 페르쿤트라의 벼락이여!”

아까보다 몇 배는 두꺼운 벼락줄기가 심해어 정령을 후려갈겼다.

암흑 원소로 인해 멈칫했던 심해어 정령은 벼락을 두들겨 맞고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한 번 더!’

한 번 더 틈을 번 이한은 바로 물 방패를 사이에 불러온 뒤 스켈레톤 전사 하나를 폭발시켰다.

콰아아앙!

기본적인 벼락은 가볍게 버티던 심해어 정령도 몸의 절반 정도가 날아갔을 정도로 커다란 타격이었다.

연속으로 마법의 데미지가 누적된 덕분에 생각보다 효과가 좋았다.

그러나 그 뒤의 일은 이한의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다.

심해어 정령이 순식간에 육신을 복구시킨 것이다.

“......”

정령계에서 정령과 싸우는 게 위험하다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이렇게 사기적일 줄이야.

이계의 존재들은 자신의 영역에서는 막대한 권능들을 발휘했다. 심해어 정령은 마치 흩어진 물방울이 다시 모이는 것마냥 자신의 육신을 원상복귀시켰다.

꿀렁-

한 번 쓴 맛을 본 심해어 정령은 아까보다 신중하게 공격에 나섰다.

스켈레톤 전사라고 얕보면서 삼키는 대신 물 폭탄을 난사해 언데드 소환수부터 치우려고 들었다.

유미디후스처럼 복잡한 기교나 원리 따위는 필요 없었다. 거대한 질량을 가진 물 덩어리가 직격할 때마다 스켈레톤 전사들은 그대로 박살나서 뼛조각들로 돌아왔다.

콰콰콰콰쾅!

방해물을 치운 심해어 정령은 다시 달려들었다.

“일어나라, 뼈로 이루어진 전사들이여!”

-...?!

그러나 심해어 정령은 여전히 이한을 얕보고 있었다.

언데드 계에서 소환하는 방식이었다면 한 번 역소환된 뒤 타격이 회복될 때까지 소환할 수 없었겠지만, 이 스켈레톤 전사들은 이한이 처음부터 끝까지 조립해서 만들어낸 소환수들.

마력만 있다면 얼마든지 다시 불러낼 수 있는 존재들이었다.

심해어 정령 양옆으로 스켈레톤 전사들이 달라붙자, 아무리 난폭한 정령이라 하더라도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었다.

여차하면 저 마법사가 다시 폭발을 일으킬 것 같았다.

하지만 이한은 뼈 폭발 대신 다른 방법을 선택했다.

푹!

구울 왕의 궁전에서 배운 타각독 마법이 스켈레톤 전사들의 창끝에서 묻어나왔다.

아직 완성도가 완벽하진 않았지만 강력한 부식 계열의 독이 정령에게 타격을 줬다.

심해어 정령은 암흑 원소에 이어서 독까지 들이마시자 앓는 소리를 내며 물러났다.

새파랗게 어린 마법사라고 생각했는데 보통 성가신 게 아니었던 것이다.

꽝!!!!!

“!?”

이한도, 심해어 정령도 놀랐다.

둘의 사이에 벼락처럼 거대한 마창이 꽂힌 것이다.

-뭐하는 건가?

뒤쪽에서 어인 정령이 서둘러 달려왔다.

어인 정령이 특이한 양식의 중갑을 두르고 부리부리한 눈빛을 뿜어내자 심해어 정령은 주눅이 들어서 고개를 숙였다.

-왜 우피눔 님의 초대를 받은 마법사를 공격한 건가?

-■■■ ■■ ■■ ■■■ ■■ ■...

-무슨 그런 말장난을? 이 영역에 입장을 허락하셨다는 것 자체가 초대를 하신 거지!

어인 정령은 심해어 정령에게 매우 화를 냈다.

저 마법사에게 있는 문양은 대해와 비바람의 호민관인 우피눔이 자신의 영역으로 입장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준 문양이었다.

그런 문양을 갖고 들어온 마법사면 당연히 우피눔의 손님이라고 생각해야지, 그런 걸 무시하고 공격부터 하려고 하다니.

만약 사고라도 났다면 우피눔이 얼마나 면목이 없겠는가.

“질문 있습니다.”

-말하시오. 마법사.

“그런데 초대를 하신 거면 애초에 사고가 나지 않도록 준비를 해놨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

어인 정령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         *         *

-여기는 지옥해 회랑이오. 난폭한 정령들이 머무는 곳이지.

“저쪽은 어딥니까?”

-칼날해저협곡이오. 더 난폭한 정령들이 머무는 곳이지.

“그러면 저기는요?”

-심연의 해구요. 지독할 정도로 난폭한 정령들이 머무는 곳이지.

“...안 난폭한 정령은 없습니까?”

이한의 질문에 어인 정령은 조금 민망해졌는지 거대한 삼지창을 뒤로 두르고 말했다.

-이 영역은 애초에 난폭하고 강력한 정령들이 머무는 곳이라...

“참. 우피눔 님을 뵐 수는 없습니까?”

이한은 우피눔을 만날 수 없나 싶어서 물었다.

물론 순수한 의도는 아니었다.

만나게 되면 ‘너 때문에 죽을 뻔하지 않았느냐’하며 책임을 물을 생각이었다.

에인로가드의 교수들이 봤다면 ‘녀석 참 <기초 제국 언어와 논리> 강의를 잘 들었구나’하고 감탄했을 것이다.

-으음. 우피눔 님의 거처는...

어인 정령은 이한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고민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당신 같은 마법사가 들어갔다가는 대번에 몸이 찢겨나갈 것이오.

“마력으로 안 될까요?”

-마력이 아무리 많아봤자... 아니. 진짜 많긴 하군. 하지만 안 되는 건 안 되오.

어인 정령은 놀라다가 정신을 차리고 단호하게 말렸다.

심해로 내려갈수록 수압이 강해지듯이 정령계도 비슷한 법칙이 작용했다.

강력한 존재들이 있는 영역으로 들어갈수록 외부의 침입자가 감당해야 하는 압력이 늘어나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보다 저는 물의 정령과 계약하고 싶은데요.”

-여기 정령들은 하나 같이 난폭하고 주인의 등을 노리는 놈들이라 추천할 수 없...

“...대체 그럼 왜 초대한 겁니까?”

이한의 질문에 어인 정령은 진땀을 흘렸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던 것이다.

우피눔 본인이야 기분에 취해서 ‘마법사여, 내 영역으로 향하는 열쇠를 주겠노라’하고 문양을 줬겠지만 생각해보니 어린 마법사가 여기 들어와서 좋을 게 없었다.

-우피눔 님의 행동은 얼핏 보면 이해가 가지 않을 수 있지만, 그 안에는 심오한 현기(玄機)가...

‘거짓말 같은데.’

이한은 어인 정령의 말을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구체적으로 말하지 못하는 것부터 뭔가 좀 많이 수상했다.

“그러면 이 영역이 아닌 다른 영역의 차분하고 온순한 정령들을 설득해서 저와 계약하게 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으음. 그건 조금... 다른 영역의 정령들은 함부로 간섭하기 어려운 존재들이오. 그들은 그들 영역에 속해 있는 존재들이니까. 내가 함부로 간섭할 순 없소.

“흠.”

이한은 고민하다가 어인 정령을 보고 물었다.

“그럼 그쪽에서 저와 계약해주시면...”

-...어느 영역의 정령을 원하시오?

*         *         *

닐리아는 독수리 정령을 타고 산맥 사이를 활강했다.

“으아아아아미안해!앞으로독수리는안잡아먹을게!”

닐리아는 독수리 정령이 화가 난 줄 알고 급하게 사과했지만, 독수리 정령은 화를 내는 게 아니었다.

몇 번이고 신나게 질주한 다음 닐리아를 곱게 내려놓고는 머리를 비벼댔다.

“...!”

바람을 다루는 독수리 정령이 자신을 선택해주자 닐리아는 매우 기뻤다.

이런 독수리 정령은 고고하고 까다로워서 자신과 맞지 않는 주인은 절대 고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자신을 선택해주다니.

‘그림자 순찰대로서 열심히 일하길 잘했어...!’

새 정령과 계약한 기쁨을 갖고 마법진 밖으로 나온 닐리아는 이한의 지친 얼굴을 보고 움찔했다.

“그, 꼭 정령하고 계약할 필요는 없어! 그렇지?!”

“응? 계약했는데.”

“!”

친구의 대답에 닐리아는 깜짝 놀랐다.

이한이 정령과 계약했다니?

“뭐야!? 어떻게!? 힘으로 잡은 거야!?”

“왜 그렇게 생각하지?”

“...아, 아니.”

닐리아는 귀를 양옆으로 내리고 멋쩍어했다.

생각해보니 친구한테 매우 실례였던 것이다.

“설득으로 계약했어.”

“듣고 싶은데? 말해줘.”

닐리아는 이번에는 자신이 이한의 기분을 좋게 해줄 때라고 생각했다.

평소에는 언제나 이한과 요네르가 자신을 달래주지 않았던가.

이번에는 닐리아가 이한을 달래줄 때였다.

닐리아가 경청할 준비를 마치고 이한을 쳐다보자, 이한은 어디서부터 말해야 하나 고민하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우피눔이라는 대정령이 주관하는 심해 정령들의 영역이 있는데.”

“...?”

“그 정령들의 영역으로 불려가서...”

“잠깐. 잠깐만.”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