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7화
순간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이한의 기세는 사나웠다.
그러나 필은 곧 정신을 차리고 위화감을 알아차렸다.
“아니. 저건 화가 난 게 아니잖아! 아예 다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한은 달라붙은 얼음 성성이들을 모두 끝내고 역공을 시작했다.
뒤에서 달려오던 얼음 성성이들은 방금 본 이한의 무력에 긴장했는지 재빨리 대형을 갖추며 접근을 막으려고 했다.
길다란 얼음창이 쭉 뻗어져 나오며 마치 빽빽한 덤불처럼 진로를 막았다.
창 또한 단순히 얼음으로 만들어진 창이 아니라 냉기를 뿜어내는 마창이라 주변에 감히 접근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할 거지?”
이한은 안푸르사스에게 물었다.
저렇게 고슴도치처럼 방어 태세를 굳히고 있는 상대는 섣불리 접근해서는 안 됐다.
다양한 계략으로 상대를 흐트러뜨린 다음 공략해야 했다.
안푸르사스가 시끄럽고 짜증나는 악마긴 했지만 뛰어나고 노련한 전사라는 건 사실.
솔직히 안푸르사스가 저걸 어떻게 해결할지 궁금했다.
콰직!
“......”
안푸르사스는 뛰어나고 노련한 전사답게 정면으로 돌진했다.
오러를 뽑아내서 얼음창을 몇 번이고 베어내며 틈을 만들더니 그 사이로 뛰어들어서 치열한 육박전을 펼쳤다.
처음에는 버티던 얼음 성성이들도 가까이 붙어서 오러를 휘두르며 날뛰는 안푸르사스의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와해되어 버렸다.
‘이 자식. 다시는 팔찌 안에서 부르지 말아야겠군...’
이한은 안푸르사스의 무식한 전법에 기가 막혔다.
자기 마력, 자기 몸 아니라고 저렇게 낭비를 하다니!
괜히 악마가 아니었다.
푹!
오러가 이글거리는 새벽별이 스치자 얼음 성성이의 형체가 절반이나 날아갔다.
단순히 오러의 위력뿐만이 아니라 새벽별의 마력 흡수가 얼음 성성이의 힘을 빨아들인 것이다.
그 모습을 보자 이한은 갑자기 의문이 들었다.
“잠깐. 너 어떻게 새벽별에 오러를 씌운 거냐?”
안푸르사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홀린 것처럼 중얼거릴 뿐이었다.
-내게 다음 적을, 또 그 다음 적을, 더 많은 적을 다오!
“......”
이한은 다시는 안푸르사스를 부르지 않겠다고 한 번 더 굳게 다짐하며 스스로 확인했다.
자세히 보니 새벽별 위에 이글거리는 오러는 안정적이지 않고 계속해서 점멸하며 새로 형성됐다.
진실을 깨달은 이한은 어이가 없었다.
‘아니...!’
새벽별은 마력을 흡수하는 검.
당연히 마력의 정수인 오러 또한 흡수했다.
그러나 안푸르사스는 빠르게 흡수되는 오러 위에 계속해서 마력을 불어넣었다.
사라지는 마력보다 투입하는 마력이 많으면 오러가 유지된다는 간단하고 무식한 논리였다.
그걸 본 이한은 생각했다.
‘나도 나중에 저렇게 하면 되겠군.’
안푸르사스가 미친 악마긴 했지만 뛰어난 전사긴 했다.
* * *
쾅!
벌써 얼음 성성이들의 숫자는 절반 넘게 줄어 있었다.
이한의 몸이 포탄처럼 쏘아져나가더니 벼락처럼 내달렸다. 방금까지 이한이 있던 자리에 얼음 성성이들이 날린 고드름들이 살벌하게 꽂혔다.
공기를 찢는 소리와 함께 고드름 하나가 반대로 날았다. 날아온 고드름을 하나 붙잡은 이한이 역으로 던져 얼음 성성이 셋을 날려버린 것이다.
“무슨?!”
3학년, 모라디 가문의 발파탄은 펭귄 검객과 검을 맞대고 격전을 펼치다가 옆에서 펼쳐지는 광경에 깜짝 놀랐다.
에인로가드 내에서는 물론이고, 북부에서도 저 정도 되는 검사는 쉽게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치이익-
얼음 성성이 하나가 두터운 방패를 들고 공격을 막으려고 들자 오러가 순간 타오르듯이 번쩍이더니 폭발했다. 충격파와 함께 얼음 성성이들이 쓸려나갔다.
단순히 오러의 형태를 만들어내는 것도 어마어마하게 힘든 일인데 저 검사는 완성된 오러로 온갖 기교를 보여주고 있었다.
오로지 경지에 오른 검사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콰득!
검술 또한 발파탄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오러가 만개한 꽃이라면 검술은 그 밑을 지탱하고 있는 줄기와 뿌리 같은 것.
검사라면 그 검술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할 수가 없었다.
난폭하고 패도적이었지만 사방을 압박하는 검술은 얼음 성성이들을 완전히 짓누르며 박살내고 있었다.
“저런 녀석이 있었나?”
“뭐하는 녀석이지?”
“1학년... 아니었나? 방금 1학년...”
“잘못 봤겠지. 아니면 교장 선생님의 하수인이 1학년으로 위장했거나.”
옆에서 친구들이 이야기하는 걸 들으며 발파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게 낯이 익었던 것이다.
실력이 더 늘었구나!
서리거인의 왕은 감탄했다.
필멸자들은 언제나 놀라운 존재였다.
잠깐 안 본 사이 믿기지 않을 만큼 성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걸 알고 있어도 눈앞의 필멸자는 정말 놀라웠다.
어떻게 이렇게?
지금 얼음 성성이 대군을 뚫고 돌진하는 모습을 보니 마치 백전노장의 전사 같았다.
다른 차원에서도 저런 전사는 찾기 힘들 터.
“목을... 내놔라!”
훌륭한 호승심이다!
서리거인의 왕은 이한이 자신을 노려보며 내뱉는 말에도 불쾌해하지 않았다.
저렇게 성장한 전사는 저런 말을 할 자격이 있었다.
네가 상대해주도록.
-예.
얼음 성성이들이 공격을 멈추고 물러나기 시작했다. 일렁거리며 주변을 압박하는 강렬한 존재감에 이한도 인상을 찌푸리며 검을 겨눴다.
나타난 것은 다른 펭귄 검객보다 몇 배나 거대한 펭귄이었다.
-잘 부탁하지.
“어차피 내 검 아래 쓰러질 놈이 말은 뭐하러 하나?”
-전투 끝에 누가 서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법!
펭귄 남작은 한쪽 날개를 휘둘러 돌개바람을 일으켰다. 말이 돌개바람이지 주변을 칼날처럼 찢어발기는 살벌한 공격이었다.
당연히 이한도 거기에 당하지 않았다. 순식간에 거리를 벌리더니 주변에 남은 얼음 파편들을 걷어차 쏘아 보냈다.
펭귄 남작은 그 얼음 파편을 밟고 허공으로 뛰더니 다른 쪽 날개에 오러를 불러내어 이한을 찔러 들어왔다.
이한은 새벽별을 옆면으로 세워서 공격을 방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펭귄 남작의 공세에 이한의 몸이 땅에 절반쯤 파묻혔다.
피하는 대신 불리한 곳에 들어가는 이한의 모습에 펭귄 남작은 의심을 품었다.
노련한 전사는 이런 공격을 피하지 않고 저렇게 불리하게 받아내지 않았다.
무엇을 노리는가?
-!
그 답은 곧바로 나왔다.
땅에 절반쯤 파묻혔던 이한의 몸이 갑자기 쏘아져 나왔다. 펭귄 남작의 예상을 뛰어넘은 속도였다.
마치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 끝에 매달렸던 화살처럼 이한은 달려들었다. 펭귄 남작은 깜짝 놀랐다.
‘마력을 이렇게 낭비한다고?’
마력을 육체에 부여해서 강화할 수 있다면 그 외에 다른 기술들도 가능했다.
자신의 육체에 마력을 응축시켜 이렇게 쏘아 보내는 것도.
하지만 이건 지나친 낭비였다.
자신을 방심시켜서 끌어들이려는 목적 하나만으로 이런 무모한 짓을 하다니?
훌륭하다!
서리거인의 왕은 감탄했다.
펭귄 남작에게 저렇게 가까이 접근하는 건 쉽지 않았다.
펭귄 남작은 한쪽 날개로는 강력한 마법을, 다른 한쪽 날개로는 강력한 검술을 뽑아내는 검객.
저 필멸자는 괜히 지루한 장기전을 펼치는 대신 펭귄 남작을 덤벼들게 만들어 가까이 붙은 것이다.
두려움을 이겨낼 수 없는 필멸자라면 저런 모습을 보여줄 수 없었다.
실로 용맹과 명예를 아는 전사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쾅!
둔탁한 소리가 연속으로 울려 퍼졌다. 서로 가까이 붙은 두 전사가 살벌하게 공격을 주고받은 것이다.
검뿐만이 아니라 어깨와 어깨가 부딪치고 다리와 다리가 부딪쳤다. 충격파가 터져 나오고 피가 튀었다.
곧 승자가 드러났다. 펭귄 남작은 날개를 내리며 뒤로 물러났다.
처음 일격을 당한 게 컸던데다가 상대의 공격은 단순히 오러가 아니라 마력까지 흡수하고 있었다. 길게 끌고 가봤자 이길 방법이 없었다.
-훌륭하오. 필멸자. 두려움 없는 당신의 이름을 기억해두겠소. 언젠가 다시 한 번 대결할 날이 오기를!
‘?’
듣고 있던 이한은 멈칫했다.
방금 뭐라고?
불청객이 왔군.
서리거인의 왕이 시선을 돌렸다.
저 멀리서 분노한 영주가 오고 있었다.
돌아간다! 퇴각 신호를 보내도록.
남아 있던 펭귄 군세와 얼음 성성이들이 재빨리 퇴각하기 시작했다.
해골 교장과 싸우고 싶진 않았는지 서리거인의 왕은 남아있는 차원 균열로 후퇴했다.
오늘 모습은 잊지 않겠네. 다음도 기대하지!
“......”
-나는 만족했도다!
심란한 이한의 마음도 모르고 안푸르사스는 해맑게 외치더니 팔찌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오늘 있었던 치열한 전투가 안푸르사스를 만족시킨 것이다.
“...넌 다시는 부르지 않겠다.”
-???
오늘 선배들 좀 구하겠다고 미래의 적을 몇이나 만든 건지 알 수 없었다.
이한은 앞으로 냉기 가득한 곳이나 펭귄 관련된 곳은 한동안 피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둥둥 날아온 해골 교장은 난장판이 된 주변을 아무렇지도 않게 둘러보았다.
방금까지 겁없이 치열하게 싸웠던 선배들이었지만, 해골 교장의 등장에는 살짝 긴장했다.
“교장 선생님. 저희 딱히 문제 안 일으켰습니다.”
“균열도 막았잖습니까.”
‘음. 아마추어군.’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주절주절 변명하는 선배들의 모습에 이한은 안타까웠다.
저건 아마추어나 하는 짓이었다.
프로는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다가 기회를 엿보는 법.
해골 교장은 대답 대신 주변을 다시 한 번 둘러보았다.
무엇을 찾는 건지 몰라서 발파탄은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뭔가 찾으시는 거라도 있으십니까?”
이 주변이 난장판이 됐다고 해서 해골 교장이 저럴 리는 없었다. 원래 이 정도 축제는 에인로가드에서 일상이었으니까.
뭔가 찾는 거라도 있으신가?
그래.
“그게 무엇이신지?”
어느 놈까지 징벌방에 보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
“......”
“아, 아니. 이건 축제였고, 균열도 딱히...”
“건물도 안 무너졌고...”
“성벽도 멀쩡하고...”
“교장 선생님 창고도 안 털었... 안 털었지? 혹시 턴 놈 있으면 나와라 그냥.”
“......”
이한은 선배들의 대화에 어이가 없었다.
그리고 어이가 없는 건 해골 교장도 마찬가지였다.
1학년을 싸우게 시켜놓고 뭐가 어쩌고 저째?
“예?”
“1학년이 어딨어요?”
어리둥절한 반응에 해골 교장은 끌끌대는 소리를 냈다.
처음에는 축제에 참가한 놈들을 이번 기회에 다 가둬버릴까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이건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었다.
워다나즈 놈이 저리 날뛰는데 선배들이라고 1학년인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됐다. 모르는 놈들은 계속 모르도록.
“...?”
하지만 징벌방에 갈 놈들은 여전히 있다. 1학년한테 마법 도와달라고 한 놈들, 당장 튀어나왓!
발파탄은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었다.
“그런 놈이 어딨습... 어?”
“???”
코홀티와 안파곤이 고개를 푹 숙이고 걸어 나오는 모습에 학생들은 경악했다.
“뭐냐?”
“대체...?”
뭐긴 뭐겠냐. 뻔뻔한 놈들이지.
해골 교장은 죄인들과 이한을 데리고 둥둥 떠서 돌아갔다.
남아 있는 학생들은 혼란 가득한 얼굴로 그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 * *
만마의 팔찌를 벌써 사용한 거냐? 마력을 얼마나 넣었길래?
해골 교장은 현장만 보고서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바로 알아차렸다.
“딱히 안 넣었는데요?”
해골 교장은 뼈다귀 손을 불러오더니 이한에게 뻗었다.
그 경로에 있던 코홀티가 한 대 맞고 당황했다.
“예?”
봐라. 방금 뭐가 보였지?
“교장 선생님이 코홀티 선배한테 화가 나신 게 보였습니다?”
나는 전혀 때릴 생각이 없었지만 길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치였지.
‘때릴 생각 있으셨던 것 같은데...’
“예.”
네 마력이 그런 거다. 알아서 팔찌의 변화를 확인했어야지.
“......”
코홀티는 옆에서 듣고 있다가 무심코 말했다.
“1학년이 그걸 어떻게...?”
조용히!
“읍읍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