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화
“1학년이 그걸 어떻게?”
하여간 죄 지은 놈들이 더 뻔뻔하군.
해골 교장은 안파곤도 입을 막아버렸다.
곧 징벌방 갈 놈들이 뻔뻔하게 입은 살아있었다.
원래 마법사는 기본적으로 마력을 잔향처럼 남기고 다니지. 물론 그런 마력 잔향은 아주 미약해서 크게 신경 쓸 필요 없지만... 너는 좀 신경을 써야겠다. 마력에 예민한 놈들은 다르게 반응할 수도 있으니까.
이한은 해골 교장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했다.
당장 마력에 예민한 정령들은 이한만 보면 ‘으악 괴물이다’하면서 도망가지 않았던가.
“마력을 숨기는 겁니까?”
원래라면 그래야 하는데...
해골 교장은 이한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너는 그냥 마법을 시전했을 때 잔향을 치우는 것부터 시작해보자.
“숨기는 게 그렇게 어렵습니까?”
너한테는 많이 어렵지. 이 무식하게 마력 많은 녀석아.
“......”
좌절하는 제자를 두고 해골 교장은 화제를 바꿨다.
앞으로 만마의 팔찌는 더욱 주의 깊게 관찰하도록 해라. 원래라면 훨씬 더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벌써 하나가 깨어났으니... 다른 악마들도 깨어날 확률이 높아졌겠군.
안에 있는 악마들은 흑마법 시간에 볼 수 있는 잡스러운 하급 악마들과 수준이 다른, 일종의 귀족들이었다.
만마의 팔찌 안에 봉인되어 있더라도 이한처럼 아직 어린 마법사의 몸을 잠깐 뺏는 것 정도는 충분히 가능했다.
오늘 나온 악마야 비교적 단순한 녀석이었지만, 다른 악마는 어떤 난동을 피울지 모르는 일이다.
“예. 안푸르사스 그 놈도 이 정도였는데 다른 악마들은 절대 믿지 않겠습니다. 하도 간절하게 빌어서 기껏 허락해줬더니.”
그래. 악마는 채찍과 채찍으로 다스려야 하는... 뭐?
해골 교장은 멈칫했다.
코홀티와 안파곤도 멈칫했다.
뭘 허락해?
뭔 허락을 말하는 거냐?
“악마가 한 번만 싸우게 해달라고 하도 간청을 해서...”
...악마가 몸을... 아.
해골 교장은 바로 이해했다.
악마가 대체 왜 강제로 뺏지 않고 빌었나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생각해보니 이 워다나즈 놈의 특성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무식하게 마력 많은 녀석은 악마가 몸을 뺏기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한 가지 이상한 점이 남아있었다.
보통 악마가 부탁한다고 들어주나? 혹시 내가 계속 간청하면 들어줄 거냐? 수도 가서 기부금 좀 받아와라.
“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선배님들이 위험했단 말입니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냐, 아니면 뱃속에 쓰레기가 차서 버리려고 내뱉은 거냐? 선배가 후배를 걱정해야지 후배가 선배를 왜 걱정해?
해골 교장은 더 기가 막혔다.
선배쯤 됐으면 뒤지더라도 자기가 자기 일 해야지 후배한테 목숨 구해지면 안 됐다.
안 그러냐?
해골 교장이 코홀티와 안파곤을 노려보자, 감동 받아서 이한을 쳐다보던 둘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됐다. 한동안 골골 앓다보면 선배들 챙겨주는 건 헛짓거리라는 걸 뼈저리게 알게 되겠지.
“앓는다니요?”
아. 몰랐느냐?
해골 교장은 데스 나이트를 불러서 두 선배는 징벌방으로 보내고 이한은 치유실로 데리고 갔다.
지금 네 전신의 근육이 전부 끊어진 상태다.
“......”
이한은 경악했다.
어쩐지 아까부터 해골 교장이 이한을 둥둥 띄워서 데리고 가고 있다 했는데...
‘안푸르사스 이 개자식이!’
생각해보니 아무리 뛰어난 전사라 하더라도 아직 단련이 덜 된 필멸의 육신으로 그렇게 난리를 쳤는데 반동이 없을 리 없었다.
그만한 힘을 보여준 대가로 전신에 강하게 무리가 온 것이다.
“앞으로는 절대 악마의 말을 들어주지 않겠습니다. 무조건 안에 가둬놓겠습니다.”
아니... 그러진 말고... 아깝잖느냐.
해골 교장은 살짝 당황했다.
만마의 팔찌처럼 귀한 아티팩트를 준 이유는 그 안에 있는 악마들을 다루는 법을 배우고 지혜를 얻으라는 뜻이었다.
그냥 무시하면 너무 아까운 일 아니겠는가.
전신 근육 파열 정도야 큰 문제도 아닌데.
“......”
이한은 그게 작은 문제면 큰 문제는 대체 뭐냐고 물어보려다가 말았다.
* * *
“으으으으으윽.”
이한은 고통에 찬 소리를 냈다.
치유 마법은 만능이 아니었다.
특히 이한처럼 심한 중상의 경우, 더더욱 치유 마법으로 한 방에 낫게 하지 않았다. 그럴 경우 몸에 무리가 심하게 왔던 것이다.
꼭 지금 치료해야 하는 부분들만 낫게 하고, 나머지는 자연적으로 회복되도록 촉진 물약과 함께 버티는 것.
그게 정석적인 치료 방식이었다.
물론 걸어 다녀야 하는 이한 입장에서는 안푸르사스, 해골 교장, 치유실의 악마 모두를 욕할 정도의 고통이었다.
한 걸음 내딛거나 몸에 힘을 줄 때마다, 마치 두들겨 맞은 것처럼 통증이 올라왔다.
니기소르 사제와 샤루칼 사제가 이한의 양쪽 팔을 부축하며 말했다.
“대체 축제에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좀 더 쉬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이미 하루 쉬었어.”
이한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저번 의뢰 때문에 밖에 나갔을 때 이미 몸으로 경험한 것이다.
쉬면 쉴수록 그 뒷감당은 본인이 해야 한다는 것을!
“다들 데려다줘서 고맙다. 여기서부터는 혼자 갈 수 있어.”
“무슨 일 있으면 부르세요.”
“고맙다. 참.”
이한이 목소리를 낮추자 두 사제는 의아해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흰 호랑이 탑 놈들한테는 내가 다쳤다는 거 비밀이다.”
“......”
“...예...”
두 사제는 당황했지만 이한의 뜻을 존중하기로 마음먹었다.
둘이 돌아가고 나자 이한은 한숨을 내쉬며 지팡이를 목발 삼아 발걸음을 내딛었다.
온몸에 근육통이 심했지만 해야 할 일들이 많았던 것이다.
‘일단 급한 것부터.’
새끼 바실리스크가 걱정에 가득 찬 낑낑 소리를 냈다. 이한은 괜찮다는 듯이 두드려주고 비밀기지 안으로 들어왔다.
원래 기숙사 개인실에서 작업을 했던 이한이었지만, 기지가 생긴 다음부터는 하나씩 물건들을 옮기고 있었다.
일단...
‘이걸 개인실에서 하는 건 좀 무리지.’
거대한 솥에서 부글부글 끓는 물약을 보며 이한은 새삼 선배들이 왜 그렇게 학교를 뒤지며 창고를 만들고 비밀기지를 확보하려고 했는지 이해가 갔다.
아무리 기숙사가 편하고 가깝더라도 할 수 있는 데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게다가 이한처럼 온갖 다양한 학파의 마법을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더더욱 기숙사가 불편했다.
잘못해서 사고라도 나면 이제 다른 친구들까지 난리가 났으니...
‘예지력 물약은 잘 진행되고 있군.’
이한은 물약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렇게 시행착오를 겪은 덕분에 이제 안정적으로 초반 단계를 넘어 중반 단계로 끓고 있었다.
‘시약은...’
확인을 끝낸 이한은 다음으로 이동했다.
모아놓은 시약을 보관해놓은 서랍 옆에서 추가로 제작도 하고 있었다.
당장 흑마법만 하더라도 시약 소모가 좀 있었고, 흑마법사들은 시약을 직접 제작하는 법을 배워야했다.
탁-
이한은 천칭 저울 위에 뼛가루가 든 쌈지를 올리고 무게를 확인했다.
무게가 늘어난 걸 보니 제대로 작업이 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떤 뼈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뼈 원소 마법의 위력이 달라지듯이, 이미 존재하는 뼈의 품질을 올리는 방법도 존재했다.
각종 시약을 추가로 넣어 그 품질을 올리는 것이다.
“흠. 독을 좀 더 구해야겠는데.”
이한은 우레걸음 교수님의 오두막에 있는 물건들을 좀 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저번에 독버섯을 좀 모아놓으셨던데...
-끼잉.
바실리스크가 미안하다는 듯이 소리를 냈다. 이한은 의아해했다.
“왜...”
우우우웅-
“!”
물어보려던 이한은 거울에서 온 연락에 시선을 돌렸다.
잊고 있었는데, 얼굴 모르는 선배가 연결된 아티팩트가 기지에 있었던 것이다.
이한은 지팡이를 목발 삼아서 다시 한 번 천천히 걸어갔다.
가는 길에 볼라디 교수 때문에 쓰고 있던 수옥탄 관련 책들이 보였다. 이한은 못 본 척 책을 덮어버렸다.
‘나중에 해야지.’
거울 앞에 도착한 이한은 그 위를 확인했다.
워다나즈 가문의 1학년을 알고 있나?
“......”
왜 들켰지?!
* * *
침착하게 생각해보니 아직 들킨 게 아니었다.
이한은 상대가 왜 저런 질문을 던졌는지 깨달았다.
‘돌 던지기 축제 때문이군.’
이름도 잘 기억 안 나는 성 뭐시기 축제에서 보여준 모습 때문에 궁금해 하는 게 분명했다.
이한은 다시 한 번 안푸르사스를 저주했다.
‘이 자식 때문에 괜히 이상한 인상이라도 박히는 건 아니겠지.’
지금이야 선배들하고 만날 일이 없다지만 당장 2학년만 되어도 선배들과 만날 일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게다가 이한은 여러 학파를 듣고 있는 만큼 더더욱 그랬다.
그런 만큼 선배들한테 첫인상이 중요했는데...
‘어떻게 보였을지 상상이 가지 않아서 무섭다.’
검 뽑아들고 미친듯이 날뛰던 후배가 과연 선배들 눈에는 어떻게 보였을지 의문이었다.
일단 별로 호감이 가진 않았을 것 같은데...
알고 있다면 내가 갖고 온 정보와 교환하도록 하지.
이한은 다시 집중했다.
지금 직면한 문제는 이 정체를 모르는 선배였다.
어떻게 해야 상황을 넘길 수 있는가?
‘내가 너무 잘 아는 척을 해도 수상해 보일 거다. 지금 날 아는 선배들이...’
다행히 이한을 아는 선배들이 몇 명 있었다.
이들을 기준으로 생각해서 이야기한다면 의심을 피하는 게 가능했다.
최대한 정체를 숨기면서, 동시에...
‘멀쩡하고 성실한 후배임을 알려야 한다.’
생각이 정리되자 이한은 바로 사리사욕을 챙기려고 했다.
상대가 누구든 간에 친구가 있을 것이고 주변 사람이 있을 것 아닌가.
이한에 대해 좋은 소문이 퍼진다면 그 또한 좋은 일이었다.
-알고 있다. 몇몇 친구들이 말해줬지.
어떤 학생이지?
-선배를 존중하고, 예의 바르며, 어떤 일을 부탁해도 밝은 얼굴로 성실하게 하는 후배라더군.
그걸 물은 게 아니다. 마법에 대해 물은 거다.
상대의 반응에 이한은 속으로 투덜댔다.
‘인성이 훨씬 더 중요한 것 아닌가?’
마법을 잘해도 인성이 개판이라면 그냥 마법범죄자 되는 것 아닌가.
에인로가드의 사람들은 인성에 대해 지나치게 무감각했다.
-마법이야 적당히 잘 한다.
여러 학파를 듣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진위를 알고 있나?
‘이 정도는 말해도 되겠지?’
흑마법 선배들이나 치유 마법 선배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선배들과 친분이 있는 선배들도 아마 알고 있으리라.
-그래. 여러 학파 듣는다더군.
소문이 사실이었군. 놀라운데. 부여 마법은 왜 안 듣는지 알고 있나?
‘?’
상대의 질문에 이한은 멈칫했다.
질문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듣고 있는데? 무슨 소리지?’
혹시 무슨 함정 질문인가 싶어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한이 부여 마법을 듣고 있지 않다고 생각할 이유가 있나?
‘침착하게 생각해보자. 왜 저런 질문을 했을까?’
괜히 복잡하게 고민하는 대신 이한은 생각을 원점으로 돌렸다.
상대는 왜 저런 질문을 했을까?
상대가 이한의 정체를 의심한다는 건 지나친 억측이었다.
의심되는 건...
‘상대는 부여 마법을 듣는 사람이다!’
부여 마법을 듣는 사람인데, 이번 축제에서 이한이 보여준 모습을 보고 ‘쟤는 여러 학파를 듣는다는데 부여 마법은 왜 안 듣지?’하고 의문이 든 게 분명했다.
이거 말고는 다른 가능성이 생각나질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아있었다.
왜 이한이 부여 마법을 안 듣는다고 생각한 걸까?
‘듣고 있는데 말이지.’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것도 짐작 가는 게 있었다.
부여 마법 학생들은 기본적으로 버두스 교수처럼 타인에게 별 관심이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한이 같은 학파 학생인데도 듣는지 모를 수 있었다.
부여 마법 선배인 안파곤까지 만났는데도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건 좀 많이 이상하긴 했지만...
‘아마 선배가 말하는 걸 잊었거나, 물어보는 걸 잊었겠지.’